야설 건곤일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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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2,830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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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坤一擲

제3권 25장 괴소녀(怪少女) 사라(沙羅)



목이 탔다.


간밤에 술이 과하기는 했다. 그러나 곧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백룡이 누구인가? 술이라면 일 주야를 계속 마셔도 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간밤의 기억이 희미하기만 한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었다.


머리맡을 더듬으니 찻주전자가 손에 걸렸다. 백룡은 단숨에 한 주전자의 찻물을 마셨다. 그리고도 한 동안 머리가 맑아지지 않았다.


'강아는 ?'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백룡은 강아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밤에도 강아는 옆 방에 들었었다. 객점에 묵을 때면 그는 항상 포대강을 자신의 가까운 곳에 두곤 했었다.


그러나 육감이랄까. 강아가 없다는 느낌이 그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백룡은 급히 몸을 일으켜 옆 방으로 갔다.


옆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애당초 강아는 잠을 자지 않았다. 침대위에 누워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 !"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는 것이 있었다.


어젯밤 유난히 많은 술을 마신 것은 아니었다. 궁일영과 화안봉이 떠난 이후로 그는 이 곳 천리객점(千里客店)에 들었고 술을 대략 세 근 정도 마셨다. 그 정도로 취할 그가 아니었다.


문득 포대강이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던 것이 기억났다.


'혹시?'


그는 급히 품속을 뒤져 보았다. 순간 그의 안색은 크게 변했다.


'이럴 수가 .'


없었다. 당연히 있어야만 할 금열쇠가 없었다. 그것은 화안봉이 그에게 준 것으로 천마신경을 얻을 수 있는 열쇠였던 것이다.


백룡은 그만 가슴이 써늘해졌다. 말할 것도 없이 열쇠를 가져간 것은 바로 포대강이었다. 그가 아니면 누구라도 자신의 품에서 감쪽같이 열쇠를 빼어갈 수는 없었다.


'강아가 무엇 때문에?'


순간적으로 이 며칠 사이의 강아의 행동이 이상했던 점이 떠올랐다. 강아는 확실히 금도산장에 갔을 때부터 기이한 행동을 보이곤 하였다.


'그 아이가 천마신경에 욕심을 냈단 말인가?'


백룡은 강아의 방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무엇인가 단서를 남겼을 것만 같아서 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눈에 탁자 위에 한 장의 종이가 놓여 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는 급히 종이를 집었다.




<미안해요. 백룡형. 천마신경은 강아가 가져갑니다. 강아는 잊을 수 없어요. 할아버지와 누나를 죽인 자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어요. 내 힘으로 그자들을 제거할 거예요. 술에 몽혼약을 탄 것은 정말 미안해요.>




"이 녀석이 ."


백룡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그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강아는 포대숭이 한 말을 몰래 엿들은 것이다.


포대숭은 강호제일의 신의였다. 그는 어떤 비밀단체에 갇혀 비약을 연단하다가 탈출했다. 그 비약은 인간의 심성을 마비시키는 마약(魔藥)이었기에 그는 더이상 그런 일을 할 수 없어 10년 전 극적으로 탈출한 것이다.


그 이후 병서보겁협에 숨어 지냈던 것이다.


후왕은 바로 그 단체에서 그를 추격해 온 자였다. 당시 포대숭은 유언을 남겼다. 그것은 강아로 하여금 복수를 하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 비밀단체에 대해 몇 마디 하고 죽은 것이다.


그런데 포대강이 그 이야기를 엿들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백룡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아! 녀석의 마음 속에 원한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니 ."


그는 술 세 근에 곯아 떨어진 채 아무 것도 몰랐던 자신에 대해 고소(苦笑)했다. 이제 강아의 생각은 분명했다.


열쇠를 훔쳐 얻은 천마신경으로 무공을 연성한 다음 스스로의 힘으로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아는 한 가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백룡은 그 때문에 다급한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천마신경을 잘못 연마하다가는 마성(魔性)에 빠진다. 강아가 그것을 알 리가 없지 않은가. 막아야 한다.'


휙!


더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신형을 날렸다.


'제발! 녀석이 아직 천마신경을 얻지 못했기를 .'


그러나 그의 바램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가 태백산 오지봉의 제4봉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후였다. 제4봉의 귀두암 아래 비밀 장소는 이미 파헤쳐져 있을 뿐더러 천마신경을 넣어두었던 철궤가 뚜껑이 열린 채 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포대강은 천마신경을 얻어 어딘가로 사라진 후였다.


백룡은 한숨을 쉬었다.


'대체 , 녀석은 어디로 갔을까?'


강아가 간 곳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강아는 분명 그가 자신을 찾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어딘가 깊이 숨어 버릴 것이 뻔했다.


백룡은 강아가 비록 나이가 어리다고는 해도 생각이 치밀하고 한 번 마음먹은 것은 절대로 철회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녀석은 무공을 익히기 전에는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천마신경으로 무공을 연성한 후에는 틀림없이 복수를 하러 다시 강호에 나올 것이다. 그때 만날 수밖에 없구나."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한 가닥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의 불찰이었다. 포대강의 눈빛이 달라졌을 때 이미 깨달았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녀석이 마성(魔性)에 빠지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일이구나.'


백룡은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신형을 날렸다. 그런데 .


그가 귀두암을 떠난 직후 귀두암 뒤켠으로부터 인영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 인영은 바로 포대강이었다. 포대강은 백룡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었다.


"백룡 형 . 미안해요. 강아가 죽을 죄를 지었어요. 하지만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포대강의 커다란 눈에서 한가닥 기광이 흘러나왔다.


"할아버지께서는 복수를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강아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무공을 연성한 후 놈들을 반드시 강아의 손으로 쳐죽이고 말겠어요."


포대강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겨울 하늘은 시리도록 맑았다. 그 하늘에 언뜻 두 개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로 포대숭과 포대봉의 얼굴이었다.


"할아버지 ! 봉 누나 !"


포대강의 처절한 외침이 한 동안 오지봉을 메아리쳤다.


★ ★ ★




진령산(秦嶺山)은 북방의 험역이다.


이 곳은 주로 산적들이 출몰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따라서 이 지역을 지나는 상인들은 함께 모였다 고개를 넘는 것이 상식이었다.


또는 표국에 호송을 의뢰하여 산을 넘기도 했다. 녹림의 도적들이 들끓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으므로 이같은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평안객점(平安客店)은 이런 상인들이 무리를 만들 때까지 기다리는 곳으로 장사가 번창하고 있었다.


진령산 아래의 마을은 보잘 것이 없었으나 객점만은 크고 시설도 훌륭한 편이었다.


소녀는 창가에 홀로 앉아 음식을 들고 있었다. 일신에는 평범한 청의를 입고 있었는데 몸에 잘 맞지 않았다. 소녀의 체격에 비해 옷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녀의 용모는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피부는 눈처럼 희고 윤기가 감돌았으며 입술은 꽃잎처럼 붉었다. 코는 옥으로 빚어놓은 에술품인 듯했으며 눈은 별빛처럼 초롱하고 맑았다.


나이는 16세쯤 되어 보였는데 세상물정을 모르는 소녀인 듯 연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약간 상큼하게 치켜 올라간 눈에는 한가닥 교활한 빛이 흐르고 있었으나 그것은 도리어 소녀를 귀엽게 보이게 할 뿐이었다.


이것저것 되는 대로 시킨 듯 상에는 온갖 종류의 음식이 가득차 있었다. 소녀는 그 많은 음식을 다만 젓갈로 한 젓갈씩 들 뿐이었다.


이따금 창 밖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에는 언뜻 불안한 기색이 어른거리기도 했지만 붉은 입술 가에는 가벼운 흥분이 어려 있었다.


'아름다운 소녀로군.'


백룡은 구석진 자리에 앉아 그 소녀를 보았다.


소녀가 객점으로 들어온 것은 얼마 전이었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소녀의 행동 때문이었다. 세상물정에 쑥맥인 듯 점소이가 음식 주문을 받으러 왔을 때 소녀는 어리둥절했던 것이다.


대체 음식 이름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점소이가 불러주는 대로 듣고 있다가 주문을 했다. 그런데 혼자서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엄청난 분량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주문한 것이었다.


점소이는 입을 딱 벌렸다. 그러나 장사는 장사인지라 아무 말없이 주문한 음식을 모두 날라왔다.


백룡이 소녀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그 밖에도 몇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저 소녀는 필시 고귀한 집안에서 지체높은 신분이었을 것이다. 행동거지나 법도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물정에 캄캄한 것은 한 번도 혼자서 밖으로 나와 본적이 없기 때문일 테고 , 두리번거리며 불안해하는 것은 몰래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자기를 찾으러 사람이 오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격은 밝고 대담할 것이다. 불안한 가운데도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는 것으로 보아 모험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백룡은 소녀가 귀엽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약간 교활해 보이는 눈매는 도리어 그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기련산(기蓮山)으로 가는 중이었다.


기련산에 있는 열 명의 노인들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기련팔마와 검노, 검마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과거 그는 그들에게 말하지 않고 기련산을 떠났었다.


이제 다시 그들을 찾아가는 것은 앞으로의 행동을 상의하기 위해서 였다. 그들이라면 충심으로 그를 위해 좋은 조언을 해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들은 부친에 대해 이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들이었다. 과거 그는 그 사실을 캐물었으나 아무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들은 자신에게 더이상 숨기지 않을 것이다.


"헤헤 ! 아가씨. 음식값을 계산하셔야죠."


점소이의 음성이 들렸다.


백룡은 고개를 돌렸다. 소녀가 밖으로 나가려다 점소이와 맞부딪친 것이다. 소녀는 음식을 먹고 그냥 나가려고 한 것이었다.


"음식값?"


소녀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빛이 어렸다. 점소이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음식값을 내지 않겠다는 거야?"


점소이의 말투가 대뜸 사납게 변했다. 그는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 자였다. 평소에는 배알도 없는 인간처럼 굽신거리다가도 이런 경우에는 불량배나 다름없이 화하는 것이다.


소녀는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음식값 ? 그게 뭔데?"


"헤헤헤헤 !"


점소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눈에는 사나운 빛이 흘렀다. 그는 손가락을 깍지끼며 뚝뚝 꺾었다. 사뭇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알겠어. 은자가 없다 이거지?"


이제는 아예 반말이었다. 소녀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반문했다.


"은자? 아하, 그 반짝이는 물건 말이지?"


점소이는 기가 찼다. 그러나 금세 비굴한 웃음을 지었다.


"아가씨께서 소인을 놀리시는군요. 헤헤! 은자 육십 냥이 되겠습니다요."


그 말에 객점 안에 있던 사람들은 내심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은 점소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소녀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무리 많은 음식을 시켰다 해도 고작해야 은자 스무 냥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소녀는 손을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다.


"호호 . 그런 것이라면 나에게 많이 있어. 자, 여기."


그런데 문득 소녀의 얼굴이 묘해졌다. 소녀는 눈망울을 사르르 굴리더니 혀를 쏙 내밀었다.


"호호! 내 정신 좀 봐. 옷을 바꿔입으며 주머니를 함께 주었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네."


그만 점소이의 눈썹이 역팔자가 되었다.


"뭐라구? 그럼 은자가 한 푼도 없단 말이오?"


"호호! 그래. 아무 것도 없는데?"


소녀는 깔깔거렸다. 자신이 생각을 해도 우스운 듯 허리를 비틀어대며 웃었다.


"내가 깜박 잊었지 뭐야. 그 계집애에게 몽땅 다 주어 버렸거든."


"이런 빌어먹을! 그럼 공짜로 음식을 먹겠다는 것인가?"


그는 다시 손마디를 꺾었다. 여차하면 폭력이라도 쓸 기색이었다. 그의 눈은 소녀의 아래 위를 음흉하게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아무 것도 모르고 눈웃음치며 말했다.


"은자가 없으면 안 되는 거야? 집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철이 없다고 해도 세상 물정을 이렇게 모르는 소녀가 있다니. 개중에는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다.


평안객점에는 주로 상인 차림의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그들은 고개를 넘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썅! 어떻게 할 거야?"


마침내 점소이는 상소리를 내뱉았다. 소녀는 깜짝 놀라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 어饽게 해야 하지?"


점소이는 눈알을 부라렸다.


"은자도 없이 음식을 처먹었으면 대가를 지불해야지!"


"댓가? 어떻게 하는 거지?"


"흥! 보아하니 입고 있는 옷을 벗겨 봐야 얼마 나가지 않을 것이고, 흐흥! 일을 해서 갚는 수밖에 없군!"


"일?"


문득 소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그 일이란 걸 시켜 줘. 그럼 음식값을 대신할 수 있다 이거지?"


점소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계집이 바보인가? 아니면 일부러 이러는 건가?'


그는 점소이 생활 십 년이 넘었으나 이런 경우는 한 번도 당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소녀를 쓸어보면서 차츰 마음 속에 흑심이 생기고 있었다.


'흐흐 . 보아하니 이 계집은 아무 것도 모르는 쑥맥인 것같다. 하지만 얼굴은 기가 차게 예쁘다. 몸매도 제법이고. 흐흐흐! 잘만 구슬리면 한 번 품은 후에 팔아 넘겨 거금을 손에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신매매(人身賣賣).


대륙 어디를 가도 그런 행위는 존재했다. 중원에서는 여자가 귀했으므로 여인을 팔아먹는 일은 비일비재 했다. 먹고 살기가 힘들면 때로는 자신의 마누라나 딸을 팔아먹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


여자의 값은 물론 얼굴이다. 얼굴이 아름다우면 그만큼 값이 비싸게 팔리는 것이다.


"후후후 . 날 따라 와라."


점소이는 소녀를 데리고 갔다. 그 광경에 중인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서 막지 못했다. 점소이의 인상이 워낙 험악했을 뿐더러 공연히 남의 일에 개입하다 자칫 봉변을 당할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즐거운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점소이를 따라갔다.


한편 백룡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점소이 놈이 흑심을 품고 있군. 아무 것도 모르는 소녀를 팔아 넘기려 하는군.'


그는 더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마음 한구석으로 깊은 탄식이 나오는 것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디를 가도 선자보다는 악인이 많은 세상이로군.'


그는 몸을 일으켰다.



소녀는 점소이 황삼(黃三)의 뒤를 따라가며 종알거렸다.


"난 한 번도 일이란 걸 해본 적이 없다구요. 늘상 나서서 일을 해보려고 하면 무슨 난리가 난 것처럼 말렸죠. 호호호! 대체 내게 시키려는 일이 뭐죠?"


황삼은 후원으로 돌아가며 음흉하게 웃었다.


"후후! 힘든 일은 아니야. 아주 쉬운 일이지. 아가씨는 곱게 자라 힘든 일을 해본 적이 없는 것같은데 이 황삼 나리가 어찌 미인을 험한 일에 부려먹겠나?"


인심이라도 쓰는 양 그는 거들먹거렸다.


"아주 쉬운 일이야. 아주 . 후후,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 그런 일이지."


황삼은 소녀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의미 있는 미소를 지었다.


소녀는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같았다. 그저 일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운 것이라도 되는 양 오히려 기대감을 품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황삼은 한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퀴퀴했고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다만 구석진 곳에 낡은 침대 하나가 전부였다. 바로 황삼이 기거하는 방이었다. 소녀는 방 안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에 가볍게 콧등을 찡그렸다.


"여, 여기서 일을 하는 건가요?"


"후후후! 그렇소. 아가씨."


소녀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몹시 지저분한데 .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하면 안 될까?"


황삼은 이미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아랫부분은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흐흐흐 . 장소가 문제인가? 아무 데서도 그 짓은 할 수가 있지."


"그 짓?"


소녀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도무지 그 짓이라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황삼은 음소를 흘리며 소녀를 침대 쪽으로 이끌었다.


"흐흐. 잘 다뤄줄 테니 겁내지 말라구. 이 황가는 이래봬도 그 방면에서는 기술이 뛰어난 편이라구."


"무, 무슨 짓을!"


소녀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황삼이 구린내 나는 입술을 자신의 입술을 향해 찍어 왔기 때문이었다.


황삼은 소녀가 고개를 피하자 두 손으로 소녀의 가는 허리를 잡아채며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그는 성급하게 자신의 바지를 까내렸다.


"앗!"


소녀는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난생 처음보는 기괴하게 생긴 흉물을 보고야 만 것이었다. 그것은 몹시 무섭게 생겼으며 소녀를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헤헤헤 ."


황삼은 소녀의 몸을 향해 덮쳐갔다. 그가 막 나긋한 소녀의 몸뚱이를 찍어 눌렀다고 생각했을 때,


"으악!"


그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소녀가 작은 발로 그의 사타구니를 걷어찬 것이었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소녀의 발은 정확히 그의 불두덩이를 찼고, 소중하기 짝이 없는 그의 물건은 그만 터져 버리고 말았다.


"으아아아악!"


황삼의 입에서는 돼지 멱 따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사타구니를 움켜지고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이때 소녀는 발딱 일어섰다. 징그러운 물건을 보기가 두려운 듯 고개를 돌린 채 코웃음쳤다.


"나빠!"


뿌직!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황삼은 천정을 본 채 굳어버렸다. 소녀의 발이 그의 목을 눌러버린 순간이었다. 단 한 번의 소녀의 귀여운 발길이 목뼈를 바수어 버린 것이었다.


소녀는 흐트러진 청의를 매만지며 밖으로 나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화사한 미소를 입가에 달며.


그러나 소녀는 몇 걸음을 가지 않아 흠칫했다. 누군가 서 있었다. 백룡이었다. 백룡은 그녀가 방에서 아무일 없이 나오는 것을 보고 약간 안심했다. 그러나 의문이 일어났다.


'그 작자가 순순히 놓아 줄 리가 없는데.'


소녀는 그를 보다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백룡의 앞에서 고개를 들어 빤히 바라보면서 달콤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무척 잘 생겼군요?"


백룡은 미소지었다. 그는 어느 정도 소녀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그 말에 담담히 되받았다.


"아가씨도 아름답군."


"정말?"


소녀는 기쁜 듯 활짝 웃었다. 마치 백합이 꽃잎을 펼치는 것같은 미소였다.


"내 이름은 사라(沙羅)예요. 당신은 뭐라고 부르죠?"


"백룡."


"백룡? 호호호! 멋진 이름이에요."


백룡은 사라가 귀여우면서도 어딘가 사악한 면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의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에서 때때로 교활한 기운이 엿보였던 것이다.


"날 사라라고 불러 줘요. 사라는 당신을 백가가 아니, 용 오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백룡은 픽 웃었다. 사라가 너무나 거침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원의 남녀지간의 예절은 엄격한 것이다. 모르는 남녀가 한 자리에 앉을 수 없음은 물론이려니와 이름을 부르는 것도 예의에 어긋났다. 하물며 가다오다 만난 사이 아닌가?


비록 그는 사대부가 아닌 강호인이었으나 사라의 솔직담대한 면에는 도리어 기가 꺾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백룡은 이 소녀가 너무나 철이 없고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런 소녀가 마음대로 나다니게 된다면 머지않아 화를 만나게 될 것이다. 다행히 나의 눈에 띄게 되었으니 당분간 내가 보호해 주어야겠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물론이지. 사라 아가씨."



사라가 새빨간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백룡은 황삼이 어떻게 그녀를 놓아주었는지 물었다. 그 질문에 사라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그는 무척 좋은 사람이었어요. 집 밖에 다닐 때는 은자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면서 나에게 은자를 구해 주기까지 하던 걸요?"


사라는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 보였다. 주머니는 묵직했고 아닌 게 아니라 안에는 은자가 가득 들어 있었다.


백룡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 정도의 재물을 일개 점소이가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애당초 은자가 없다는 것은 장난이었구나.'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황삼이 이미 목이 부러져 죽었을 뿐만 아니라 사라가 지니고 있는 비단 주머니도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라는 한 명의 상인에게서 그것을 슬쩍한 것이었다.


사라의 손놀림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상인은 단지 그녀가 곁을 지나갔다는 것을 느꼈을 뿐, 비단 주머니를 빼가는것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상인들은 그녀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안도를 느꼈다. 반면 그녀가 백룡과 어울리는 것에 일면은 질투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미시(未時) 무렵이 되자 상인들은 4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윽고 그들은 고개를 넘기로 합의했다. 백룡도 그들과 함께 고개를 넘기로 했다. 기련산으로 가려면 어쩔 수 없이 지나야 하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고갯길은 험하기도 하거니와 미끄럽기 짝이 없었다. 워낙 폭설이 내린 데다 날씨마저 춥고 보니 온통 사위는 눈과 얼음뿐이었다.


시리도록 투명한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으되 매서운 한풍이 비수처럼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어떠한 악조건일지라도 생업이란 것을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상인들은 저마다 바삐 서둘렀다.


대략 40여 명의 인원이 모이자 그들은 10여 대의 마차에 제각기 갖가지의 상품들을 싣고 고개를 넘을 채비를 갖추었다. 대오의 앞과 뒤에는 경장을 한 무인 12명이 그들을 호위했다.


물론 무인들은 상인들이 은자를 갹출하여 호송을 청부한 강호인들이었다. 최근 들어 진령산에는 수많은 도적들이 출몰하기로 소문난 바였다. 그래서 상인들은 도적떼로부터 귀중한 생명과 물건을 보호받기 위해 이런 자위수단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이 일단의 행렬은 고갯길에 올랐다. 길조차 미끄러워 전진의 속도가 매우 더딜 수밖에 없었다. 힘겹게 마차 바퀴가 고갯마루를 오르는 동안 상인들은 저마다 불안과 초조함을 떨칠 수 없는 듯 잔뜩 긴장했다.


12명이나 되는 무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앞뒤를 지켜주는 것도 결코 그들을 안심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편 사라는 지치지도 않는지 끊임없이 종알거렸다.


"용 오빠는 어디 가는 거죠?"


"기련산."


"그 곳에는 왜요?"


무심히 대꾸해 오던 백룡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적당한 대답이 없었기에 그는 빙긋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 곳에 집이 있지."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사라의 집은 어디인가?"


그 말에 사라는 금세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울먹이기 시작했다.


"사라는 집이 없어요 ."


"집이 없다고?"


사라의 눈에는 어느새 찰랑찰랑하게 눈물이 고여들었다.


"얼마 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사라 혼자 집을 나온 거예요. 어머니가 없는 집은 싫거든요."


백룡의 미간이 얼핏 좁혀졌다. 그는 내심 쓴 입맛을 다셨다.


'대체 어디까지가 정말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모르겠구나. 순진하기 그지없어 보이는가 하면 무한한 속임수를 지닌 것같기도 하고 .'


사라는 아예 흐느끼고 있었다.


"흑흑 . 사라는 갈 곳이 없는 천애고아예요. 그저 정처없이 아무 곳이나 갈 수밖에 없다구요."


진주같은 눈물이 뺨을 적셨다. 사라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하염없이 울었다.


백룡은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아울러 그는 생각을 고쳐 먹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괜한 의심을 품었나 보구나.'


그는 표정을 풀며 사라에게 다가갔다.


"사라."


그의 손이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어차피 인간은 누구라도 언젠가는 죽는 법이다. 사라의 모친께서 돌아가신 것은 결국 하늘의 뜻인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도 사라는 슬픈 걸요 ?"


"그렇다고 마냥 이렇게 울기만 하면 지하에 계신 어머니가 걱정을 하실 게다."


"정말 그럴까요?"


사라는 눈물젖은 얼굴로 백룡을 빤히 올려다 보았다. 그 모습은 비맞은 새처럼 가련하고 측은했다.


"그럼. 꿋꿋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야 어머니도 기뻐하시겠지."


백룡은 진심으로 그녀를 위로해 마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사라는 눈물을 소매로 쓰윽 훔치더니 언제 울었냐 싶게 활짝 웃었다.


"호호 . 고마워요. 사라는 용 오빠의 말대로 할 거예요."


꽃잎같은 입술이 배시시 열리며 하얀 치열을 내 보였다. 아름답고 고혹적인 웃음이었다. 사나이의 심혼을 울릴 듯 기이한 마력이 숨어 있는 웃음이었다.


백룡은 그 웃음을 대하자 또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도시 종잡을 수 없는 소녀다.'


"저어."


사라는 문득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듯 머뭇거리며 그를 불렀다. 백룡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해라. 사라."


사라는 잠시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용 오빠를 따라 가면 안 돼요?"


"글쎄 ."


백룡은 당혹감을 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지금 그는 어린 소녀를 대동할 처지가 못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라는 갈 곳이 없어요."


사라의 얼굴은 갑자기 쓸쓸하고 고독해졌다. 그녀는 시선을 하늘로 향하며 넋두리처럼 말을 이었다.


"안 된다면 할 수 없죠.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갈 뿐이죠."


백룡은 그만 마음이 약해졌다.


"정말 갈 곳이 없다면 당분간 나와 함께 있도록 하자."


사라의 두 눈이 한껏 커졌다.


"와아!"


그녀는 함성을 지르며 대뜸 팔짝 뛰어 올라 백룡의 목에 매달렸다.


"사라 !"


백룡은 일순 당황해 마지 않았다. 동행하던 상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사라로 말하면 소녀 티가 채 가시지 않았다고는 하나 분명 여인이었다. 남녀가 유별한 것을 무시하고 중인환시리에 사내를 끌어 안는 것은 실로 대담무쌍한 행동이었다.


상인들이 놀라 쳐다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백룡은 정색을 하며 그녀를 나무랐다.


"사라. 여자는 항시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


"쳇! 용 오빠는 공자님같은 말만 하네."


사라는 샐쭉해지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천진한 어린애였다.


" ."


백룡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런 소녀를 상대로 남녀유별을 논하는 자신이 오히려 쑥스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이 행렬은 어느새 고개를 거의 넘어가고 있었다. 그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상인들은 모두 안도의 빛을 띄우며 일보 일보를 마음 놓고 내딛었다.


그러나 불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지 않는가?


그들은 고갯길 아래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 무리가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막 고개를 넘어서는 찰나였다.


그들 앞에 섬전처럼 내리꽂히는 인영들이 있었다. 일신에 흑의를 걸친 자들이었다.


"앗!"


"도, 도적들이다!"


상인들은 기겁을 하며 놀랐다. 그들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덜덜 떨며 호위무사들을 향해 구원의 눈빛을 던졌다.


창! 창!


무사들은 병기를 들며 분연히 앞으로 나섰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승리를 확신하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흑의인의 숫자는 불과 5인이었던 것이다. 단지 가슴에 새겨진 백골 문양이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을 뿐.


"흐흐 ! 목숨을 내놓겠느냐? 아니면 물건을 두고 가겠느냐?"


흑의인들의 말에 무사들은 그들을 에워싸며 일갈했다.


"닥쳐라!"


"네놈들에게 내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더러운 도적놈들 "


그러자 가운데에 서 있던 매부리코의 흑의인이 가소롭다는 듯이 냉소했다.


"흐흐 .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은 놈들이군. 너희들은 진령오웅(秦嶺五雄)이라는 명호도 들어 보지 못했느냐?"


그 말에 무사들의 안색은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어찌 모르겠는가? 진령오웅 아니, 진령오흉(兇)이라면 손속이 극히 잔랄하기로 유명한 도적들이 아닌가?


그들은 진령산 일대를 누비며 흉악한 짓을 일삼는 도적들로서 무공 또한 고강하기로 이름이 나 있다. 각 개인이 저마다 일파의 우두머리급은 족히 된다고 전해지는 정도였다.


그에 반해 12명의 무사들은 강호에서 그저 평범한 무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왕 은자를 받고 고용된 바에야 그대로 달아날 수만은 없었다. 더구나 이쪽은 어쨌거나 숫적으로 우세하지 않은가?


" !"


무사들은 무언의 눈짓을 교환하더니 일제히 흑의인들을 공격해 갔다. 포위망을 구축한 그들은 혼신을 다해 각기 병기를 휘둘렀다.


우 웅!


그리 대단치 않은 무위였으나 12인의 합격의 위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5흉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핫! 가소롭구나!"


5흉은 일제히 쌍장을 내뻗었다.


꽈르릉---!


"으악!"


"캐---액!"


단 일장에 무사 3인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공중에 세 줄기의 선연한 피무지개가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이것을 필두로,


펑!


"크아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은 계속 이어졌다.


삽시에 무사 12명 중 절반이 살해되고 말았다. 나머지 무사들은 중상을 입은 채 바닥에 쓰러져 신음했다.


상인들은 그만 사색이 된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일이 이쯤 되고 보면 재물이고 뭐고 없었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돌연 숲속으로부터 빗발치듯 암기가 퍼부어지는 것이 아닌가?


"으악!"


"크아악!"


그 바람에 무공이라곤 무자도 모르는 상인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갔다.


그 광경에 백룡의 눈썹이 무섭게 곤두섰다 그는 사라의 손목을 나꿔채듯 잡으며 신형을 날렸다.


쐐---액!


그때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그를 향해 암기들이 쏘아져 왔다.


그는 소매를 가볍게 저었다. 순간 암기는 도로 퉁겨 나가며 숲을 향해 쏘아져 갔다.


"으악!"


"허억!"


숲속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퉁겨져 나간 암기에 맞아 도리어 암습자들이 즉사했다.


백룡은 사라를 옆구리에 낀 채 키가 큰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사라를 내려 놓으며 당부했다.


"사라. 잠시 이 곳에서 꼼짝도 하지 말고 기다려라."


"알았어요. 용 오빠."


사라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백룡은 즉시 숲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숲속에는 대략 4, 50명에 달하는 흑의인들이 매복해 있었다. 그들은 진령산 일대를 주름잡는 도적떼로서 백골곡(白骨谷) 혁련광(赫連光)이라는 녹림 출신의 마두가 이끄는 무리들이었다.


그들을 발견한 백룡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무공을 익힌 것은 불의를 물리치고 약자를 돕기 위한 것이거늘, 도리어 양민을 학살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구나.'


스스스 !


그의 신형이 연기처럼 흐려지는가 싶더니 도적떼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도적들은 그저 스치는 바람이려니 하며 아무도 그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비명이 난무했다.


"허억!"


"크아악---!"


그것은 처절한 단말마였다.


어떤 자는 자신이 던진 암기에 고슴도치가 되어 있는가 하면 어떤 자는 머리가 으깨어져 있고, 어떤 자는 두 눈이 터진 채 죽었다.


그것은 실로 눈깜짝할 사이의 일이었으며 도적들은 모조리 비명횡사를 면치 못했다. 백룡은 일다경도 못되어 도적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처치했다. 손속에 인정을 베풀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사위는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이때, 진령오흉은 10대의 마차를 모두 뒤집어 놓고 있었다. 보물을 찾기 위해 그들은 지금 혈안이 되어 있었다.


"후후! 오늘은 수확이 좋은 편이군."


"그렇소. 피(皮) 형. 흐흐! 이 정도면 당분간은 걱정이 없을 것이오."


그들은 쏟아져 나온 금은보화며 귀한 상품들을 펼쳐 보이며 서로 흡족한 웃음을 나누었다. 그때였다. 칼날처럼 싸늘한 음성이 그들의 귓전을 울렸다.


"무엇이 걱정 없다는 건가?"


"억! 누구냐?"


5흉 중 3흉이 기겁을 하며 돌아섰다.


찰나지간 퍽! 하는 둔탁한 음향과 함께 그는 이마 한가운데 동전만한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피화살이 그 구멍으로부터 솟구쳐 올랐다.


"셋째!"


나머지 4흉이 대경하여 그 곁으로 몰려 들었다. 그들의 눈에 한 백의 청년이 술호로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으으 ! 네놈은 누구냐?"


백의 청년은 냉담하게 대꾸했다.


"너희같은 강호의 패륜아를 몹시 싫어하는 나리다."


그는 물론 백룡이었다.


"건방진 놈! 주둥이를 도려내겠다!"


쐐액!


무쇠로 된 갈고리가 달린 구절편이 허공을 갈랐다.


"어딜!"


백의 청년은 가볍게 손가락을 퉁겼다.


파파팍 !


구절편은 허공에서 가루로 화하고 말았다.


"헉!"


4흉들은 대경실색하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백의 청년은 단호한 어조로 내뱉았다.


"너희들이 갈 곳은 한 곳밖에 없다. 그 곳은 지옥이다."


그는 서서히 손을 들었다. 그의 손바닥은 기이하게도 투명한 백옥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그가 손바닥을 수평으로 내치는 찰나,


"으아악!"


"크악!"


4인은 처절한 비명을 토함과 동시에 쩌저적! 몸뚱이가 갈라져 나가는 것이었다.


백옥마인(白玉魔刃)!


그 절공 앞에 그들은 속수무책인 채 짚단처럼 모두 쓰러졌다. 쪼개진 가슴팍에서 더운 피가 콸콸 솟구쳤다. 백룡은 담담한 눈길로 그 시신들을 내려다 보았다.


"애당초 너희같은 인간쓰레기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나았으리라."


이어 그는 상인들을 바라 보았다.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상인들은 벌벌 떨면서 모두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있었다. 그들은 감히 고개를 쳐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같았다. 백룡은 부드러운 어조로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에게 이제 더이상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오. 이제 그만 일어서시오."


그러나 아무도 일어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백룡은 쓰게 웃었다.


"진령산의 도적들은 모두 죽었소. 이제 물건을 챙기고 산을 내려가시오."


그래도 상인들은 도무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너무도 겁에 질린 나머지 몸이 굳어버린 듯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백룡은 탄식했다.


"아아 ! 강호가 썩었구나. 양민들은 이제 무림인을 전부 불신하는구나."


말과 함께 그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지 일다경이 지났을 때에야 상인들은 그 자리에서 하나둘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 본 그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다. 온통 시뻘건 혈해였다.


"가, 갑시다 !"


그들은 공포에 질린 채 대충 물건을 챙기고는 도망치듯 산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 그 곳에는 피에 젖은 시신들만이 나뒹굴고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그 시각.


백룡은 사라를 남겨 두었던 곳에 당도했다. 그런데 없었다.


"사라!"


백룡은 경악하며 사라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문득 그의 시야에 나뭇가지 끝에 걸린 사라의 청의자락이 들어왔다.


누군가 고의로 찢어내어 남겨둔 듯한 옷자락을 백룡은 정신없이 집어 들었다. 과연 거기에는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계집을 구(求)하고 싶으며 백골곡(白骨谷)으로 오라.>


백룡은 크게 분노했다.


"놈들이 사라를?"


그때였다. 언뜻 그는 근처에 은은한 향기가 남아 있는 것을 감지 했다.


'미약(迷藥)을 썼구나. 비열한 놈들!'


백룡은 분기충천했으나 경솔할 수는 없었다. 그는 염두를 굴렸다.


'백골곡이라면 진령산에 출몰하는 도적들의 은거지다. 백골신군 혁련광이란 자가 그 우두머리라고 했다. 그 곳으로 사라가 잡혀 갔다면 구하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더욱이 백골곡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문득 그의 눈빛이 타올랐다.


'이번 기회에 이 곳에서 양인을 괴롭히는 도적떼를 아예 소탕해야 겠다. 다시는 준동하지 못하도록.'


그는 청의자락을 움켜 쥐었다. 우수수 청의자락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휘익!


그의 신형이 무섭게 쏘아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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