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난 나쁜 놈이다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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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4,966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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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토요일이다. 최종 결과가 나올 때까지 4일이 남았다. 웬만하면 붙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알 수 없기 때문에 긴장이 된다. 계속 붙을까 안 붙을까만 생각하니 시간이 가질 않는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여자 친구가 있었으면 그런 건 잊고 여자 친구에 집중할 수 있었을 텐데. 이상한 곳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나다.
여자 친구인가.
사실 난 지금 혜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지 않다. 외로움을 타는 지금에도 전 여자 친구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내가 떠올리는 사람은 혜미와 헤어지던 날 처음 만났던, 그 전까지는 인연조차 없었던 여자다. 처음 만났을 때 울음으로 화장이 번져 있던 그 얼굴은, 나의 넋을 빼놓았던 그 눈웃음은, 아직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고 있다.
전화해볼까.
전화번호는 있다. 아까부터 갈등이 계속 생겼지만 선뜻 전화할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외로움에 못 이긴 짧은 만남이었다. 이미 상대는 잊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느꼈던 짜릿한 쾌감과 배덕감은, 상대에겐 이제 한순간의 열정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을지 모른다.
전화를 받지 않을까 두렵다. 차라리 전화를 안 받으면 낫다. 전화를 받는 순간 난처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릴까봐 두렵다.
연애 초기에 느끼는 풋풋한 설렘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그냥 혼자 있기 외로워서 아무 여자에게나 연락할 생각이면서.
정혜는 직장인이니까 일을 하고 있을까. 아니, 토요일이니까 쉬고 있을 것이다. 지금 전화하면 전화를 받을까? 받는다고 해도, 만나자고 하면 만나줄까?
“아오!”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연애할 때도 전화하기 전 이렇게 고민한 적이 없다.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 이게 뭐하는 짓이지. 좋아 더 이상 망설이지 말자. 그냥 전화만 하는 건데 뭐.
핸드폰으로 저장된 번호를 찾았다. 그때 송수신목록에 남아있던 번호를 저장해뒀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어디선가 들었던 음악이 컬러링으로 나온다.
전화를 안 받는다.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려고 하자 전화를 끊었다.
그래, 받을 리가 없지. 어쩐지 허탈해졌다. 핸드폰을 침대 구석으로 던져 놨다. 지금까지의 모든 고민과 방황이 쓸데없는 짓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한없이 스스로가 부끄럽다.
그때 내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난 잽싸게 핸드폰을 집어 수신번호를 확인했다.
정혜다. 바로 전화를 받았다.
“아, 저기……. 전화했네.”
“어, 어, 응.”
“자다 일어나서 못 들었어.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이게 무슨 연애 초기 또는 시작 직전의 커플 같은 전화란 말이냐.
“무슨 일로 전화했어?”
“그냥…….”
혼자 집에서 죽치고 있으려니 외로워서 그랬다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다.
“혹시 만날 수 있나 해서.”
말을 해놓고도 깜짝 놀랐다.
“근데 역시 바쁘겠지?”
“아, 아니야! 나 안 바뻐. 오늘 쉬는 날인걸.”
내가 한 발 물러서자 정혜가 다가왔다. 정혜도 지금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오늘 만날 수 있을까?”
“아, 응. 괜찮아.”
정혜가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그럼 몇 시쯤에 볼까? 같이 저녁 먹을래?”
“어, 응. 먹을래.”
“그러면 7시쯤에 보면 될까?”
“응!”
“그러면, 장소는…….”
정혜와 만날 장소와 시간 등을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일단은 씻어야겠다. 지금은 오후 3시니까 여유가 충분히 있다. 방을 나서니 어머니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계시다.
“아, 아들아.”
“네.”
“슈퍼에서 계란 좀 사와라. 계란이 다 떨어졌네.”
“알았어요. 한 판 사오면 돼요?”
“아냐. 두 줄 사와.”
어차피 지금 계란을 사 온다고 약속에 늦을 건 아니다. 얼른 슈퍼에 갔다 와야겠다. 방에서 점퍼를 껴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근데 너 취직은 어떻게 되는 거냐?”
“지금 최종결과 나와야 되요. 4일 남았어요.”
“붙을 거 같어?”
“몰라요.”
웬만하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세상 일은 모르는 거다. 확신하면서 말을 할 수가 없다. 집에서 나와 마당을 걸었다. 대문을 여는데 핸드폰 벨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을 꺼내면서 밖으로 나오자, 낯익은 얼굴이 앞에 서 있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는 여자. 승희다.
“아, 마침 나왔네요 오빠.”
승희가 핸드폰을 끊고 핸드백에 집어넣었다. 내 핸드폰 벨소리도 멈췄다. 승희가 전화하던 중이었나보다.
“너 진짜 매일 우리 집에 올 생각이냐?”
“네. 전 했던 말은 꼭 지켜요.”
그런 말은 안 지켜도 되는데. 정말 끈질기다. 승희가 이런 애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155 정도의 아담한 키. 귀여운 얼굴. 약간 날카로운 눈매는 귀여운 얼굴에 도발적인 매력을 더한다. 공부도 잘하고, 틈이 나면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등 성실하고 착한 이미지가 있다. 그런 애가 이렇게까지 남을 집요하게 괴롭힐 줄 몰랐다.
“안 오면 안 될까?”
“싫어요. 근데 오빠 지금 어디 가요?”
“어머니 심부름. 슈퍼에 계란 사러 간다.”
“그럼 저도 따라갈게요.”
“따라오면서 날 괴롭히겠다고?”
“설득하는 거예요.”
설득이라는 이름을 한 괴롭힘이다. 승희를 뿌리쳐보려고 빠르게 걸었다. 난 걸음이 빠른 편이라 속도를 내면 여자들이 잘 못 따라온다. 그러나 승희는 뒤처지지 않았다. 맞다. 얘 운동도 잘했지.
“너 원래 힐 신고 다니지 않았니?”
“이럴 줄 알고 단화로 신고 왔어요.”
준비가 아주 철저하다. 걸음 속도를 놓쳤다. 어차피 달려가지 않는 한 승희를 따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달려간다고 해도 승희는 그냥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승희는 슈퍼에도 따라 들어왔다. 계란을 고르는 동안에도 계산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 내 옆에 서 있다. 슈퍼 주인 아줌마가 “총각 애인이야?”하고 능글맞게 물었다. 난 그냥 “친척이에요. 놀러왔어요”하고 대답했다. 계란 두 줄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오빠 정말 혜미를 만날 생각이 없는 거예요?”
“없다니까.”
“어째서요?”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만난다고 해도, 나보고 무슨 말을 하라는 거냐. 있지도 않은 사랑이란 감정을 꾸며가며 혜미를 속이라는 거냐? 그런 짓은 못 한다. 이미 혜미에게 잘못할 만큼 잘못했다. 더 이상 죄를 늘려가고 싶지는 않다.
“여자 친구잖아요?”
“전 여자 친구야.”
“혜미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걸요.”
“그렇게 생각할 거다.”
“안 해요.”
승희는 절대 지지 않았다. 정말 고집쟁이다. 예전에 내 동기중 한 명이 승희를 꼬시려고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며칠 후 “걔는 고집이 너무 세. 한 번 아니라고 하면 진짜 끝까지 아니더라고. 걔랑은 사귀라고 해도 못 사귈 거야. 아마 싸움이라도 나면 진짜 끝장을 볼 걸?”이라고 말하며 승희를 포기했다. 그때는 몰랐다. 여자애가 고집이 세면 얼마나 세겠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내 생각이 얼마나 안이했는지 지금 깨달았다. 이 애의 고집은 이길 수가 없다.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제발 내일은 찾아오지 말아라.”
“싫어요.”
뜻을 절대로 굽힐 생각이 없는 승희. 난 한숨을 쉬며 문을 닫았다. 마당을 지나 집으로 들어왔다. 내일도 또 찾아오겠지. 혹시라도 내일 전화 오면 절대 나가지 않을 거다. 굳게 다짐했다. 집에 들어오니 어머니는 여전히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계시다.
“엄마, 계란 어디다 놔요?”
“그거 냉장고에 그냥 넣어놔.”
“네.”
냉장고를 열어 계란을 넣었다. 계란을 가지고 오는데 썼던 비닐봉지는 비닐봉지를 모아두는 자루에 넣었다. 이제 나갈 준비를 할 차례다. 오후 3시 반이 조금 안 된다. 시간은 충분하다. 천천히 준비하고 나가면 되겠다.
샤워를 했다. 온몸을 구석구석 깨끗이 씻었다. 이상한 기대를 하는 건 아니다. 더러운 이미지를 보여줄 수는 없잖아. 정말 그런 이유 때문이다. 세수도 양치도 깨끗하게 했다. 이 정도는 원래 사람을 만나기 전에 하는 기본적인 행동이다. 딱히 뭔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건 절대 아니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었다. 어떤 식으로 입어야 괜찮을지 조금 고민했다. 원래 심플하고 캐주얼한 복장을 선호하고, 대부분 가지고 있는 옷이 그런 종류다. 어떤 것과 같이 입어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그렇다곤 해도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이 됐다. 그렇다고 절대 어떤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 사람을 만나기 전에 하는 기본적인 행동이다.
외출복을 준비하고 침대 위에 꺼내두었다. 아직 약속시간까지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옷을 입을 생각은 없다.
컴퓨터를 켜고 그 앞에 앉았다. 인터넷으로 저녁식사를 해결할 곳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술집인가? 그건 너무 뻔한가? 영화관이라도 갈까? 그게 더 뻔하진 않을까? 핸드폰을 집었다. 그리고 문자를 날렸다.
『혹시 영화 좋아해?』
문자를 보내고 몇 분이 흘렀다. 몇 분 후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응, 좋아해! 영화 볼 거야?』
『어. 영화 보려고. 어떤 게 좋아?』
『난 아무거나 다 좋아.』
아무거나 다 좋다는 말. 남자에게 가장 곤란한 말이다. ‘네가 가진 센스와 능력을 시험해보겠다’라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정말로 아무거나 골랐다가는 모든 게 끝날 거다.
『로맨스 영화도 괜찮을까?』
『응.』
좋아, 로맨스 영화로 해야겠다. 남녀가 영화를 보는데 액션 같은 걸 보는 것보단 그래도 사랑이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좋아,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고, 가까운 술집이나 다른 곳을 찾아보면 되겠다. 어느 정도 데이트 예정을 짜고 세부사항을 찾아보다 보니 약속 시간까지 6시가 조금 넘었다. 약속시간까지 1시간도 안 남았다.
시계를 보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여기서 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거의 10분 간격으로 지나간다. 시내까지 버스로 20분 정도. 이제 옷 입고 대충 준비를 마치고 버스에 타면 시간이 딱 맞을 것이다. 입기 위해 준비해놨던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서둘러 버스를 타고 나가야겠다. 적어도 10분 전에 약속장소에 도착하기 위해선 최대한 빨리 나가야 한다.
옷을 입고, 지갑을 챙기고 핸드폰을 챙겼다. 뭔가 더 챙길게 있는지 고민했다. 오늘 날씨가 추우니까 목도리도 챙겨가야겠다. 장갑도 낄까. 장갑은 관뒀다. 이 정도면 되겠다 싶어 집을 나섰다.
“엄마, 나 약속 있어서 나가볼게요.”
“밥은?”
“밖에서 먹을 거예요.”
집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빠르게 걸었다. 일부러 속도를 냈다기보다는 어쩐지 속도가 저절로 났다. 들떠 있는 걸까. 여자 친구를 사귀었을 때도 이렇게 들떠 있던 적이 있었나. 어쩐지 내 모습이 웃기다. 이제 두 번째로 만나는 여자에게 이런 마음을 느끼다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아까부터 날 지배하고 있던 설렘이란 감정이 약해진 것은 아니다. 난 오히려 윤리적으로 개운치 않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선뜻 맞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선뜻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버스가 금방 도착했다. 버스카드를 찍고 버스에 올라탔다. 시간을 확인했다. 6시 30분. 버스에서 내리고 약속장소까지 가면 적어도 5분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도 오늘 차가 막히지 않아서 버스가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약속장소까지 빠른 속도로 걸었다. 47분. 딱 10분 전에 약속장소에 도착할 수 있겠다. 길 건너에 백화점이 보였다. 우린 백화점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직원이 친절하게 날 반기고 있다.
“예약하신 분인가요?”
“네. 김세화로 2명 예약했거든요.”
“잠시만 확인하겠습니다. 확인 되었습니다. 이쪽으로 따라 오시겠어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창가자리다. 운이 좋게 저녁시간의 창가자리를 예약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음 주라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아마 며칠 뒤에는 예약이 꽉 찰 것이다. 이미 크리스마스 이브나 당일의 예약은 벌써부터 끝나 있을지도 모른다.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보냈다.
『나 지금 도착했어. 레스토랑으로 와.』
답장은 오지 않았다. 답장 대신 본인이 레스토랑에 들어왔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녀는 역시 예뻤다.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오늘은 처음 봤을 때처럼 강렬한 화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맨 얼굴을 살린 청순한 느낌이다. 난 역시 진하고 뚜렷한 아이라인보단 저렇게 은은한 쪽이 좋다.
정혜가 나를 발견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웃으려고 했다기보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많이 기다렸어?”
“방금 도착했어.”
난 원래 상투적으로 말하는 “이제 거의 다 왔어”라든가 “아까 출발 했어”라든가 “방금 도착 했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진짜 다 왔을 때, 진짜 아까 출발했을 때, 진짜 방금 도착했을 때만 그렇게 말을 한다. 만약에 오래 기다렸다면 오래 기다렸다고 말을 했을 거다. 전 여자 친구는 약속에 늘 늦는 편이었는데, 그때마다 “너무 오래 기다려서 다리가 아파”라고 말하곤 했다. 섬세함이 부족하단 소리를 많이 들었다.
“메뉴는 어떻게 할까? 마음에 드는 거 있는지 골라봐.”
정혜에게 메뉴판을 건네주면서 물었다.
“비싼 거 시켜도 돼?”
정혜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괜찮은데, 아마 내 지갑이 안 괜찮을 걸.”
“쿡쿡, 뭐야 그게.”
우린 직원을 불러 메뉴를 주문했다. 다행히 아주 비싼 음식은 시키지 않았다. 쿨한 척 했지만 속으론 걱정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요즘 지갑 사정이 별로 좋지 않다.
정혜가 말없이 날 바라본다.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그 시선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서 당혹스럽다.
“왜 그렇게 봐?”
“그냥. 신기해서. 다시는 연락이 안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
나도 마찬가지다. 연락을 해도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받을 줄은 몰랐어.”
“못 받긴 했다. 끊어지고 내가 다시 했잖아.”
“아, 그랬지.”
“만약에 내가 안 받았으면 어떻게 하려 그랬어?”
그 말에 잠시 고민했다. 안 받았으면, 그대로 핸드폰을 내려놓고 잠이나 잤을까. 아니면 다른 일에 집중했을까. 그 상황이 되어보지 않아서 확신할 수는 없다.
“아마 또 전화하지 않았을까?”
“진짜?”
“몰라.”
아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골머리를 썩었던 것이 떠올라서 부끄러워졌다. 얼굴이 화끈하다. 혹시 눈에 띄게 빨개지진 않았을까. 얼굴을 매만지는 척 하면서 얼굴을 가렸다.
“창피해서 얼굴 가리는 거야?”
들켰다.
“아니야.”
“그래? 아니구나.”
“넌 사람 놀리길 참 좋아하는구나.”
얼굴이 더 화끈해졌다. 그러나 얼굴을 가릴 수는 없다. 가리는 순간 더 놀릴 테니까.
“얼굴 엄청 빨개졌어. 히히”
정혜가 해맑게 웃는다.
“그래도 전화해줘서 기뻤어.”
“그래?”
“응.”
기쁘다고 말해주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한동안은 서로를 웃으며 마주 보았다. 아무런 대화 없이. 몇 초간을 그렇게 서로 응시했다.
“넌 역시 웃는 게 예뻐.”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정혜는 내가 봤던 여자 중 웃는 표정이 가장 아름다운 여자다.
“뭐, 뭐야 뜬금없이.”
정혜가 내 말에 당황하며 말했다. 확실히 뜬금없이 말하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당황할 일인가. 귀엽구나.
“너 얼굴 빨개졌어.”
“안 빨개졌어!”
내 말에 부정하면서도 정혜는 양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우는 모습도 예뻤어.”
“그때 얘기는 하지 마. 그때 화장실 가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알아? 화장 번졌으면 번졌다고 말을 해줬어야지!”
정혜가 새삼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화를 낸다. 정혜가 그렇게도 부끄러워하던 화장이 다 번진 우는 얼굴에 난 넋을 잃었었지.
“근데 그래도 예뻤어.”
“거짓말 하지 마.”
“진짠데.”
정혜는 안 믿는다. 내가 놀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다. 여자 눈화장 번진 모습을 보고 넋을 잃는 사람이 어딨어. 열렬히 내 진심을 주장해도 안 믿을 거다. 혹시나 믿으면 믿는 대로 곤란한 게 변태 취급을 받을 것 같다.
식사가 도착했다. 레스토랑은 일단은 스프와 빵 등 에피타이저가 먼저 나왔다.
“이제 나왔네. 먹자.”
“응.”
내 말에 정혜가 대답했다. 식사를 시작했다. 다음엔 메인이 나오고, 메인을 다 먹고 나니 디저트가 나왔다. 그동안 우린 웃고 떠들며 좋은 분위기를 이어갔다.
“다음엔 영화 보러 갈래?”
“응. 무슨 영화 볼 건데?”
정혜의 물음에 요즘 유행하는 로맨스 영화의 제목을 말했다.
“아, 나 그거 보고 싶었는데. 보자!”
“영화가 8시 45분 시작이야. 여기서 조금 시간을 때우다가 가면 될 것 같아.”
어느덧 8시가 되었다. 영화관으로 10분에서 20분 정도 더 있다가 영화관으로 가면 적당한 시간에 갈 수 있을 것이다.
20분 후 우린 계산을 마치고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영화관은 백화점 안에 있다. 정혜는 자연스럽게 내 옆구리에 팔짱을 꼈다.
예매했던 표를 받아들고 우린 팝콘 파는 곳 앞에 서 있다.
“팝콘이랑 콜라도 살까?”
“으음, 아니야. 저녁 먹었으니까.”
내 질문에 정혜가 고개를 저었다. 저녁도 먹고 했으니 더 먹으면 살이 찔까봐 걱정하는 모양이다. 이해는 간다. 정혜는 마른 편이다. 살이 안 찌는 체질은 극히 드물다. 살이 안 찌는 사람을 보면 입이 아주 짧다. 치킨을 시켜도 한 두 조각 먹고 손을 놓고, 피자를 시키면 한 조각 먹고 배부르다고 한다. 아까 저녁을 먹는 걸 봐선 정혜는 입이 짧은 편은 아니다. 그렇다면 철저히 관리하는 거겠지.
“다이어트 때문에 그런 거야?”
“으응.”
“무슨 다이어트야. 넌 살이 쪄야 돼.”
“아니야. 더 뺄 거야.”
정혜는 그렇게 말했지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넌 살 좀 쪄야 돼. 다이어트 하는 여자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외려 찌지 않아서 걱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럼 우리 카페에서 커피나 사서 들어가자.”
“넌 팝콘 안 먹어도 돼? 나 때문에 안 먹는 거 아니야?”
“아냐. 배불러.”
그리고 식사를 조절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팝콘 바스락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영화관 카페에서 커피를 시켜 영화 시간을 기다렸다. 곧 영화 시작 10분 전이 되었고 우린 영화관 안으로 입장했다. 표에 쓰여 있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중간 높이에 가운데 자리다. 이 자리가 영화를 감상하기에 좋은 곳이다.
“나 이 영화 너무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거든.”
정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외국 배우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브래드 피트나 톰 크루즈처럼 정말 유명한 배우가 아니면 이름을 잘 모른다.
“너 정말 이 영화 보고 싶었구나.”
“응.”
요즘 개봉한 로맨스 영화가 두 편 있었다. 이거랑 다른 거 중에 고민했는데 이거로 고르길 잘했다.
곧 영화가 시작했다. 영화는 잔잔한 사랑 이야기였다. 암에 걸린 여인공과 평범한 회사원인 남주인공이 사랑하는 이야기다. 처음엔 암이라고 해서 눈물을 짜내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내용이 담담하면서 쓸쓸했다. 암에 걸렸지만 삶에 대한 의욕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여자. 그리고 뒤에서 그녀를 지원해주는 남자. 마지막에 여자는 수술을 결심하지만, 결국 실패하여 죽는다.
슬펐다. 등장인물이 처절하게 울어 대는 장면은 마지막 빼곤 거의 나오지도 않는다. 여자의 장례식장에서 남주인공은 처음이자 마지막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 울음소리조차 배경음악에 가려 사라졌다. 그런데 다른 어떤 영화보다도 슬펐다.
눈물 참아보려고 했는데 참을 수가 없다. 뭐 이런 영화가 다 있어. 정혜는 옆에서 코를 훌쩍이며 티슈로 눈물을 닦고 있다. 정혜가 옆에서 휴지를 건네주었다. 휴지를 받아 눈물을 닦았다. 눈물이 흐르기 직전이었다.
“진짜 슬프다.”
“그러게.”
“다른 남자들은 이런 영화 보면 잘 안 울던데 넌 잘 우네.”
“남자들도 잘 울어. 이런 데 오면 안 우는 척 하는 거야.”
“그런 거야?”
영화관에 오면 슬픈데도 슬프지 않은 척 하는 남자가 많다. 친구, 또는 여자 친구가 있어서 창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실은 슬프지 않은 척 하는 남자들 중 하나다. 오늘따라 영화가 너무 슬퍼서 참지 못한 거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오고,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우린 기다렸다가 나가자.”
“응.”
내 말에 정혜가 끄덕였다. 지금 일어나면 사람이 너무 많아 난잡하기도 하고, 영화의 여운을 조금 만끽하고 싶었다. 이렇게 슬프게 본 영화는 처음이다. 원래 영화를 잘 안 보는 탓도 있긴 하지만.
“영화 재밌었다. 그치.”
“응.”
영화관에서 나오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10시 30분이 조금 넘었다. 8시에 시작했으니 거의 두 시간짜리 영화였구나. 도중에 영화에 빠져들어서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났는지 몰랐다. 영화가 조금 짧은 편이라고 느꼈다.
영화관에서 나온 우린 술집으로 향했다. 딱히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지금 시간에 갈 만한 곳이 없어서 일단 술집으로 선택한 것이다. 가벼운 안주와 맥주를 시켰다. 나도 정혜도 오늘은 알콜이 그다지 당기지 않았다.
정혜와 있으면 즐겁다. 정혜는 밝다. 내 재미없는 말에도 잘 웃어준다. 술집에서 있다 보니 어느새 새벽 1시가 되었다.
“우리 이제 어디로 가지?”
내가 물었다. 500짜리 맥주와 마른안주로 몇 시간이나 죽치고 있으니 조금 눈치가 보였다. 지금 시간에 갈 만한 곳은 한 군데밖에 없지만, 말을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걸 목적으로 만난 것 같다.
정혜는 정말 괜찮은 여자다. 만나는 방식이 달랐으면 훨씬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내 음흉한 속내대로 정혜를 끌고 가고 싶지 않다. 단지 외로운 마음을 채우기 위한 비겁한 수단으로 이용하기에 정혜는 너무 아까운 여자다.
“우리 집에 올래?”
“너희 집?”
“나 근처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거든.”
앞에서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망설였다. 욕망이 시키는 대로 하자면 그냥 따라가야 한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이성과 본능이 싸웠다. 아니 이 경우엔 정과 본능인가.
“가자.”
정혜가 내 손을 끌었다. 정혜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내가 살게.”
정혜가 계산을 했다. 계산을 마치고 난 또 정혜에게 끌려갔다. 정말 난 어쩔 수 없는 남자다. 뭔가 망설이는 척을 하더니 잡아끄는 대로 그냥 끌려가는구나. 내가 제대로 된 놈이었다면 여기서 발걸음을 멈췄을 것이다.
정혜에게 계속 끌려갔다. 택시를 타고 근처의 오피스텔촌으로 갔다. 정혜는 택시에 타고 있을 때도 내렸을 때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나도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어쩌지어쩌지 하는 사이에 정혜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오피스텔의 공기는 따뜻했다. 그리고 그 따뜻한 공기에 조금은 정신이 들었다. 뭔가에 홀린 듯 이곳에 따라왔지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혜야. 나, 읍!”
이제 집에 가겠다는 말을 다 하지 못했다. 정혜가 입술로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정혜의 혀가 나에게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내가 어쩔 수 없는 놈이기 때문이다. 난 원래 그런 놈이니까. 정혜의 입에서 아까 먹었던 안주의 향이 풍겼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 냄새가 싫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정혜의 혀가 내 입 안을 돌아다닌다.
이제 집에 가겠다는 말을 다 하지 못했다. 정혜가 입술로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정혜의 혀가 나에게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내가 어쩔 수 없는 놈이기 때문이다. 난 원래 그런 놈이니까. 정혜의 입에서 아까 먹었던 안주의 향이 풍겼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 냄새가 싫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정혜의 혀가 내 입 안을 돌아다닌다.
정혜의 입술이 떨어졌다.
“미안해.”
사과하는 정혜의 얼굴은 침울했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일까. 갑자기 키스한 것? 내 말을 막은 것? 그러나 이 짧은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정혜의 부드러운 혀가 아직도 내 입 안에서 노니는 것 같았다. 아직도 내 입술에는 그 감촉이 남았다. 나는 욕정했다.
아까 나는 대체 무엇을 망설이고 있었지?
망설일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정혜를 끌어안고 정신없이 키스하고 있었다. 정혜를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였다. 정혜의 등에 신발장이 부딪쳤다. 내 목에 매달려 있던 목도리를 풀었다. 정혜의 목에 걸려 있던 것도 풀었다. 정혜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겼다. 방 쪽으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내가 입고 있던 것도 던졌다. 정혜의 스웨터를 벗겼다.
정혜의 하얀 와이셔츠 단추를 풀었다. 가슴 부분의 세 개의 단추를 풀었다. 아담한 사이즈의 가슴과 그것을 가리고 있는 브래지어가 보였다. 브래지어 위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흠!”
정혜가 야릇한 숨소리를 냈다. 한 손은 정혜의 가슴을 애무하고, 한 손은 아래로 내려갔다. 정혜의 스커트를 위로 들어올렸다. 스커트가 충분히 올라간 다음 정혜의 안쪽 허벅지를 만졌다. 정혜의 팬티스타트가 느껴졌다. 손을 좀 더 올려 정혜의 그곳을 애무했다. 팬타와 스타킹이 두 겹이나 내 손을 막고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점차 그녀의 팬티와 스타킹이 습기로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도 충분히 느낄 만큼.
정혜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내 입술에서 떨어지더니 내 목을 핥았다. 키스했다. 내 쇄골을 핥았다. 키스했다. 정혜가 더 아래로 내려갔다. 내 바지의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잘 못 풀어서 내가 풀어주었다. 바지가 내려갔다. 정혜가 내 팬티를 잡아 내렸다. 완전히 발기된 그것이 팬티에 걸려 내려갔다가 다시 튕겨 올라왔다.
“야, 더러워 거긴.”
정혜가 그것을 입으로 집어넣었다. 더러울 텐데 입에 넣다니. 냄새도 나고 찝찝할 텐데 부끄럽다. 난 상관없다. 정혜에게 미안할 뿐. 그러나 정혜는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 그것을 입에 물고 빨아들인다.
오럴을 받아본 적이 많지 않다. 그동안 사귄 여자 친구들이 모두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 친구들이라고 해봤자 둘뿐이지만. 전전 여자 친구 같은 경우는 한 번도 해준 적이 없다. 애초에 전전 여자 친구와는 한 적이 별로 없다. 전 여자 친구, 혜미는 가끔 자기가 조금 심하게 흥분됐을 때만 해줬다. 나도 굳이 싫어하는 걸 해달라고 할 만큼 오럴이 간절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오럴을 좋아하지 않느냐고 한다면, 전혀 아니다. 아주 좋아한다. 어떤 점에 있어선 직접 그곳에 넣는 것보다 더 좋다. 예를 들면 그곳보다 더 세게 조일 수 있는 점? 지루라 감각이 둔한 난 웬만한 자극엔 거의 느낌이 오지 않기 때문에 많이 쌓이고 많이 흥분한 상태에서 섹스를 해야 사정을 할 수 있다. 오럴을 받으면 흥분도 많이 되고 사정 시간을 앞당길 수 있어서 좋다.
정혜의 입안은 따뜻했다. 코로 내뿜는 숨결이 닿는 기분도 좋았다. 부드럽게. 때로는 강하게. 핥기도 하고 빨아들이기도 했다. 다리에 힘이 빠질 것 같다. 정혜의 머리를 쓰다듬자, 야릇한 숨결을 내뱉는다. 그 숨결이 날 더 흥분하게 만든다.
“이제 그만 해줘도 돼.”
정혜를 일으켜 세웠다. 정혜에게 키스했다. 뜨겁게 얽혀 오는 정혜의 혀가 부드럽다. 정혜를 그대로 들어올렸다.
“꺄악!”
정혜가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들어 올려 놀랐나보다. 놀란 것도 잠시 곧 다리로 내 허리를 휘감았다. 매달린 정혜를 안고 그대로 침대로 향했다. 내 움직임을 인식한 현관 조명이 길을 밝혀주었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불빛도 충분히 밝았다.
침대에 정혜를 눕혔다. 들려 올라간, 아니 내가 들춘 치마를 아예 벗겼다. 검은 팬티스타킹 안으로 팬티가 보였다. 스타킹과 팬티를 함께 벗겼다. 완전히 벗기진 않았다. 허벅지 중간 정도까지만 벗겼다. 그리고 정혜의 그곳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안 돼. 더러어!”
정혜가 내 얼굴을 막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여의치 않다. 벗겨지다 만 스타킹도 정혜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다. 자기도 실컷 해놓고 난 안 된다고 하다니, 그러면 더 하고 싶잖아.
찝찔한 맛이 났다. 원래 거기서 나는 맛에 다른 맛이 섞여 있다. 냄새가 났다. 로션 냄새 따위는 아니다. 그런 냄새는 이미 희미해서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로션 따위로 가릴 수 없는 진짜 살내음이 났다.
“으, 응! 더러워! 음, 하지 마앙!”
하지 말라고 하는 것 치곤 이제 반항이 없다. 그녀의 끈적하고 달콤한 신음을 즐기며 그곳을 계속 핥았다.
머리를 들었다. 팬티와 스타킹을 완전히 벗겼다. 스타킹을 벗기는 일이 꽤 힘들었다. 야동에서 스타킹을 찢는 일은 있어도 벗기는 일은 없는데, 그건 더 야하고 안 야하고 문제가 아니라 벗기기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닐까. 겨우겨우 팬티와 스타킹을 벗겨냈다.
침대 옆에 떨어져 있는 내 코트에 손을 내밀었다. 주머니에서 콘돔을 꺼냈다. 콘돔을 늘 준비해 가지고 다닌다. 20살이 되었던 해부터 늘 가지고 다녔다 “20살이 되면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꼭 준비해서 다녀라”, 라고 했던 내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의 말을 아주 잘 지켰다. 결국 20살이 됐던 그 해에는 쓴 일이 없었지만, 콘돔은 의외로 유통기한이 길었다.
팬티를 벗었다. 아까 오럴을 받을 때 완전히 안 벗었었다. 정혜에게 키스하며 브라를 벗겼다. 난 와이셔츠를 벗었다. 나는 이제 런닝셔츠만 입고 있고, 정혜는 하얀 와이셔츠만 입고 있다.
정혜에게 키스했다. 정혜가 능동적으로 혀를 부벼 온다. 장난삼아 입을 다물고 혀의 침입을 막았다. 갈 곳을 못 찾은 정혜의 혀가 내 입술을 핥는다.
“아잉, 장난 치지 마!”
정혜가 애교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목소리를 들으니 장난을 더 치고 싶어졌지만 참았다. 정확히는 키스를 참고 있는 게 더 힘들었다. 난 키스매니아니깐.
키스를 나누는 동안 내 손은 정혜의 그곳으로 내려갔다. 이미 엄청나게 젖어 있다. 아직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는데, 정혜가 오늘따라 많이 흥분한 것 같다. 나도 오늘은 다른 때보다 심하게 흥분했다. 아까 정혜의 오럴이 내 마음속의 불을 댕겼다.
콘돔을 뜯었다. 흥분한데다 마음이 급해서 잘 안 들어갔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제대로 끼웠다.
“아아!”
정혜가 순간 급박한 숨을 내뱉었다. 단숨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정혜의 뜨거운 그곳이 나를 반기고 있다. 시작부터 피치를 올렸다. 원래 처음엔 여자가 아파하지 않도록 천천히 움직이며 반응을 보는 나다. 그런 생각도 못할 정도로 흥분했나보다. 다행히 정혜는 아파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한다. 전부터 느낀 건데 우린 궁합이 좋은 것 같다.
오늘따라 정혜의 그곳이 더 뜨겁다. 오늘은 아무리 나라도 10분 이내에 사정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기분이 좋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정혜의 모습이 섹시했다. 벌어진 와이셔츠 사이로 드러난 앙증맞은 가슴과 잘록한 허리, 어떤 기대감을 품고 있는 듯한 표정과 촉촉한 눈빛도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이리와.”
정혜가 팔을 벌리며 날 유혹한다. 유혹에 넘어갔다. 정혜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정혜의 양팔이 내 목을 휘감았다.
난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했다. 평소의 나라면 더 정혜의 반응을 신경 쓰면서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내 행위에 더 집중하고 있다. 경험이 많다고 할 수도 없는 나지만, 섹스할 때 사정한 적이 별로 없다. 10번 중 1번꼴이다. 하다보면 시간이 오래 흐르고 여자가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아서 거의 도중에 멈췄었다. 아예 애초에 틀린 것 같다 싶으면 사정한 척 연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사정이 가능할 것 같다.
나도 욕구불만에 쌓였던 걸까. 전 여자 친구에 대한 마음이 식으면서 근 두 달을 안 만났고, 당연히 두 달 동안 여자를 만난 적이 없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날 정혜와 만나 섹스를 했지만, 그날도 사정하지 않았다. 자위도 안 했다. 쌓일 만하구나.
어느 순간인가부터 정혜의 신음소리가 사라졌다. 덕분에 정신이 돌아왔다. 움직임을 멈추고 정혜의 상태를 확인했다. 정혜는 전신에 힘이 빠진 듯 늘어져 있다. 눈을 뜨고 있지만 초점이 없다. 정신을 잃은 것 같기도 하다. 느꼈구나.
넋이 나간 채 늘어져 있던 정혜가 불현듯 몸을 바르르 떨었다. 간헐적으로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떤다. 조금씩 진정하고 있다. 정혜가 진정하는 동안 머리카락을 정돈해주었다. 땀에 푹 젖은 얼굴과 몸, 침대에 펼쳐진 검고 긴 생머리가 하얀 침대 시트 위를 장식하고 있다.
정혜의 눈에 점차 초점이 돌아오고 있다. 천장을 향하고 있던 시선이 나에게 왔다. 나와 눈이 마주친 정혜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나 이상하지 않았어?”
“안 이상했는데.”
“거짓말.”
“들켰다.”
“아잉!”
정혜가 주먹으로 가볍게 내 가슴을 때렸다.
“나 원래는 이렇게 잘 느끼는 편이 아니었는데. 지난번에도 그렇고 진짜 이상해졌나봐.”
정혜의 말에 기뻤다. 원래 남자는 성적인 능력을 인정받는다는 기분이 들면 의기양양해지거든.
“오늘 많이 흥분해서 그럴 거야.”
“그래서 그런가? 아하하. 있지, 너도 흥분 돼?”
“응.”
“거짓말.”
“진짜야.”
“내가 아까 입으로 해줄 때도 아무 반응 없었잖아. 나만 좋아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단 말이야, 힝.”
난 원래 소리를 안 내는 편이다. 정확히는 소리를 낼 만큼 기분이 좋아본 적이 없다. 사정을 할 때도 기분은 좋지만, 소리가 나올 정도라고 느낀 적은 없다. 그래도 정혜의 마음씀씀이에 좀 감동했다.
“내가 원래 소리를 잘 안 내. 그래도 아까 진짜 기분 좋았어. 고마워.”
정혜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정말 고맙다. 역시 난 내 기분이 좋은 것보다 여자가 좋아하는 게 더 좋다.
“나 이거 벗을래. 답답해.”
정혜가 와이셔츠를 벗었다. 내가 벗는 걸 도와주었다.
체위를 바꿨다. 정혜를 엎드리게 했다. 사정하기 쉬운 자세로 바꾼 것이다. 오늘은 가능할 것 같다. 사실 난 이 자세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키스를 하기가 힘들다. 나도 힘들지만, 여자가 특히 힘들다. 억지로 고개를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주보면서 하는 체위가 좋다. 하지만 오늘은 사정이 하고 싶다. 그리고 뒤에서 땀에 젖은 등에 키스하는 것도 나름대로 좋다.
“아후웅!”
정혜가 달콤하게 울기 시작한다. 정혜의 그곳이 방금보다 더 조이는 것 같다. 한 번 느끼고 난 후라 성감이 올라 있기 때문인지 금방 반응을 보인다. 정혜가 뒤로 오른손을 내민다. 그 손을 잡아주었다. 내가 허리를 더 빠르게 놀리자 잡은 손의 힘이 더 세졌다.
“으음, 아! 앙! 아!”
정혜는 몸을 웅크리고 침대 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다. 그녀의 오른손은 여전히 내 오른손을 꽉 쥐고 있고, 몸을 받치고 있는 왼손은 침대시트를 부여잡고 있다. 하얗고 작은 엉덩이가 내 치골과 부딪치며 야릇한 소리를 냈다.
슬슬 느낌이 온다. 더 빠르게 허리를 놀렸다. 정혜도 내 빨라지는 움직임에 교성을 높였다.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 그래도 워낙 느낌이 둔한 나라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콘돔이 없었으면 지금쯤 끝났을 것 같은데 조금 아쉽다.
정혜가 먼저 끝에 도달했다. 허리를 활처럼 휘었다. 비명 같던 교성이 뚝 끊겼다. 나도 거의 다 왔다. 몇 번 움직이지 못하고 사정을 시작했다. 짜릿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힘이 빠져 아래로 떨어지려는 정혜의 엉덩이를 잡고 사정이 끝날 때까지 허리를 움직였다.
여기서 더 움직이면 정혜를 더 높은 곳으로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다. 이제 사정이 끝났다. 그래도 이렇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기분이 좋은 걸까. 이럴 때는 여자가 부럽다. 여자가 되어 본 적이 없으니 어떤 느낌인진 몰라도, 적어도 남자의 쾌감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다. 일단 느낄 때의 반응만 봐도 남자와 여자는 천지차이다.
정혜가 침대 위로 무너져 내렸다. 나도 그 위로 함께 쓰러졌다. 정혜가 몸을 떨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쌌어?”
“응.”
정신을 차린 정혜의 질문에 대답했다.
“후후, 아하하하!”
정혜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그냥. 우리 참 이상한 거 같지?”
“뭐어, 그렇지.”
우리 사이의 대부분이 이상해서 정확히 어떤 게 이상하단 건지는 모르겠다.
“나 팔베개 해줘.”
“알았어.”
정혜의 요구에 팔베개를 해줬다. 정혜가 내 팔을 베고 옆구리로 달라붙었다. 팔베개를 한 손을 움직여 정혜의 가슴을 조물딱거렸다.
“헤헤, 간지러! 그만해!”
“싫어.”
정혜의 젖꼭지를 계속 괴롭혔다. 정혜는 간지럽다면서도 내 손을 막지는 않았다. 몸을 옆으로 뉘었다. 정혜도 옆으로 누워 나를 마주본다. 정혜에게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너 엄청 많이 나온 거 같아.”
정혜가 내 그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도 동감이다. 눈으로 보기에도 많은 양의 정액이 콘돔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한번 만져 봐도 돼?”
아직 난 대답도 안 했는데 정혜가 그곳으로 손을 뻗는다. 정혜의 손을 막으며 몸을 뒤로 뺐다. 어쩐지 부끄럽다.
“만지면 안 돼?”
“만져서 뭐 하려고?”
“그냥 궁금해.”
별 게 다 궁금하다. 정혜가 계속 그곳을 만지려 시도했다. 난 정혜의 손을 막았다. 꽤 힘들다. 의외로 힘이 세다.
“왜 못 만지게 해?”
“왜 만지려고 하는데?”
“그냥 만져보고 싶어.”
“그냥 못 만지게 할 거다.”
정혜와 나의 실랑이가 계속 되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어쩐지 우습다.
“알았어. 만지게 해줄게.”
결국 정혜에게 패배를 시인했다. 정혜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곳에 손을 뻗는다. 만지작 만지작.
“어두워서 잘 안 보인다. 불 켤까?”
“그건 좀 참아줘.”
정혜의 말에 애원했다.
“뭔가 느낌이 이상해.”
정혜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말했다. 아마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이 더 이상할 거다.
“신기해.”
“뭐가?”
“이게 몸에 들어가면 아기가 되는 거잖아.”
“응.”
정혜의 눈이 신기한 것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반짝인다.
“그럼 우린 이제 아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거야?”
“굳이 따지면 그렇게 될 걸.”
열락을 탐닉했던 이 방이 사체유기 현장이 되었다. 4000원 주고 산 고무주머니는 사체를 숨긴 비닐봉지가 되었다.
곧 정혜가 콘돔에 대한 흥미를 버렸다. 아니, 아직 흥미를 가지고 있지만 내가 그냥 침대에서 일어났다. 콘돔을 뺐다.
“근데 이거 어디다 버려?”
“욕실에 쓰레기통 있어. 거기에 버려.”
욕실에 들어가 변기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콘돔을 버렸다. 욕실에 온 김에 씻고 싶어졌다. 아니다. 일단은 정혜가 먼저 씻게 해야지. 난 급한 대로 샤워기로 거기만 대충 씻었다.
“정혜야 먼저 씻어.”
“응.”
정혜가 내 말에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온다. 난 욕실에서 나왔다. 조금 춥다.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기다려야겠다. 아니, 그 전에 널브러진 옷부터 정리해야지. 옷가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 옷과 정혜의 옷을 구분해서 정리한다.
“세화야.”
옷 정리가 끝날 때쯤 정혜가 날 불렀다. 살짝 열린 욕실 문 틈 사이에 정혜의 얼굴이 보였다.
“응, 왜?“
“같이 씻을래?”
“응.”
별로 고민하지 말고 바로 대답했다.
“아하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네.”
기다리진 않았지만 기대는 했다. 난 냉큼 욕실로 들어갔다. 함께 씻게 되었다. 정혜가 새 칫솔을 꺼내주어 양치를 할 수 있었다. 양치롤 못 하면 찝찝해서 잠이 잘 안 오는데 잘 됐다. 역시 자기 전엔 입 안이 시원해야 한다.
먼저 양치를 끝낸 정혜는 물로 몸을 적시고 있다.
“세화야 나 저기 배스타올 좀 줘.”
수건걸이에 걸린 배스타올이 보였다. 그것을 집었다.
“저기 바디워시 묻혀줘.”
배스타올을 물에 적셨다. 세면대 옆에 있는 바디워시를 짜서 거품을 냈다.
“고마워.”
내가 다가가자 정혜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난 배스타올을 건네주지 않았다.
“꺅!”
정혜가 가볍게 비명을 질렀다. 내가 배스타올로 정혜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기 때문이다. 잠시 놀란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내 손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애프터서비스야.”
정혜가 내 말에 웃었다.
“앙, 간지러!”
정혜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리부터 꼼꼼히 닦아주었다. 피부에 자극이 가지 않도록 부드럽게 문질렀다. 정혜의 몸이 거품으로 뒤덮였다.
“아, 흐응.”
정혜의 콧소리. 내가 다른 손으로 정혜의 몸을 애무했기 때문이다. 거품으로 미끌미끌한 피부를 타고 내 손이 부드럽게 질주했다. 미끌미끌한 느낌이 꽤 재밌다. 내 몸에 거품을 내고 만졌을 때와 느낌이 아주 다르다. 나중엔 배스타올을 바닥에 떨구고 양손을 사용했다. 한손은 아래에 다른 한 손은 그녀의 쇄골과 가슴, 허리, 등까지 구석구석을 쓸고 다녔다.
“하, 아아!”
정혜가 결국 제대로 서있지 못하고 내게 몸을 기댔다. 이때를 기다렸다.
“자, 다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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