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크레펠린과 박물학 - 정신의학 분류체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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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70회 작성일 16-02-06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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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선생님, 제 아들은 무슨 병인가요?”라고 묻자, 의사는 “히스테리입니다. 뇌의 병이죠” 하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의심스러워하며, “다른 병원에서는 퇴행이 된 거라고 하던데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의사는 “내 진단으로는 히스테리입니다”라며 다시 한 번 병명을 확인했다.

석연치 않았던 어머니는 다른 병원을 찾아가 증상을 설명했다. 아이의 행동을 관찰한 의사는 “이건 경련발작성 광증이군요. 치매나 정신지체일 수도 있고요”라고 말했다.

진찰하는 의사마다 환자의 병을 제각각 진단하고 병의 원인을 자기가 생각하는 이론에 따라 중구난방으로 설명했다. 이것이 1800년대 초반까지 유럽과 미국 정신의학계의 상황이었다.

정신질환자들을 수용소보다는 조금 나은 정신병원에 수용하여 사회와 격리시키기 위해서 질병이라는 진단이 필요했지만, 그렇다고 정교하고 정확한 평가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정신질환자들이 악마에 씌었거나 주술에 걸렸다는 믿음은 여전했고, 정신병의 원인에 대한 의견도 분분했다.

철학자나 사회학자, 일부 정신과 의사는 사회적 압력이나 환경적 문제로 병이 생겼다고 주장했고, 뇌 신경계질환의 일종이라고 주장하는 의사들도 있었다.




보이는 만큼만 분류하고 예후를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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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크레펠린은 환자의 증상과 변화를 관찰한 진단 카드를 만들어 자료를 축적했다. 이를 통해 질환을 분류하고 질병의 경과를 예측하고 감별할 수 있는 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출처: Wikipedia>



이런 혼란을 정리해 준 사람이 에밀 크레펠린(Emil Kraepelin 1856~1926)이었다. 독일 북부에서 태어난 그는 1878년 의사가 된 후 뮌헨에서 뇌생물학자인 베른하르트 폰 구덴(Bernhard von Gudden)의 문하생으로 수련을 받았다.

당시 뮌헨 의학계는 현미경으로 뇌 조직을 조사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지만, 심리학에 관심이 많던 크레펠린은 1882년 ‘근대 심리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가 개설한 라이프치히 대학의 심리학 실험실로 옮겼다.

몇 년간 연구에 몰두한 후 정신병원에 취직해 진료했고, 1890년에는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이 생각해 오던 개념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크레펠린은 환자마다 하나의 카드를 만들어 증상과 병력, 퇴원 당시의 상태를 자세하게 써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진료한 환자가 다음에 입원할 때에는 어떤 증상의 변화가 있었고, 나중에는 어떻게 달라지는지 경과를 관찰하고, 카드에 자세히 기록하면서 자료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으로 본다면 ‘의무기록지(차트)’를 쓰는 당연한 일을 한 것이지만, 당시만 해도 정신질환자의 상태를 이렇게 기록하는 것조차 새로운 시도였다.

자료가 쌓이면서 크레펠린은 뇌의 이상이나 사회심리학적 압력, 신경해부학적 변화가 아니라 오직 겉으로 드러나는 질병의 추이를 세밀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질환을 분류하고 질병의 경과를 예측하고 감별할 수 있는 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크레펠린은 환자마다 증상과 경과를 세세히 기록한 카드를 ‘진단상자’라 이름 붙인 곳에 모아 보관했다. 그리고 환자를 진료할 때마다 그 환자의 카드를 꺼내서 진단을 정정하고, 증상의 특징적 변화를 적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환자에 대해 충분히 포괄적인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어떤 진단이 틀렸고, 근거가 없으며, 어떤 진단이 잘못된 개념에 이르게 되었는지 추론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몇 년간 이런 분류 작업으로 일종의 ‘데이터베이스’를 광범위하게 만들어낸 크레펠린은 환자로부터 얻은 자료를 자신이 갖고 있는 기존의 이론에 끼워 맞추거나, 해석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러나는 질병 과정 자체로 분류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식이라는 것이다.

환자의 상태를 보이는 대로만 기술하고 그 증상들을 잘 모아서 하나의 집단을 만들면, 특징적인 증상의 꾸러미가 일정 기간 이상 지속되는 다른 환자에게도 같은 진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분류를 하면 앞으로 환자의 경과가 어떻게 될지, 그 예후(prognosis)를 예측할 수 있었다.

진단이 질병의 과거를 유추하여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라면, 예후는 미래를 관측하여 치료방침과 전략을 수립하고 기대치를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 치료에 보다 중요한 정보가 되었다.

크레펠린은 당시의 의학과 과학의 발달 수준으로는 정신질환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원인에 따라 진단명을 분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불분명하고 부정확하게 진단하기보다는 ‘보이는 만큼’만 가지고 분류하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예후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많은 반발을 산 개념이었으나, 사실 현대정신의학의 진단분류체계의 근간이 된 혁명적 시선이었다.




근대 과학의 발전으로 진단체계의 분류가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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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펠린은 식물학자인 린네의 분류체계에서 영향을 받아 진단 분류체계를 만들 수 있었다. <출처: Wikipedia>



이런 생각은 크레펠린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니었다. 이는 흥미롭게 의학계가 아닌 박물학과 동식물학의 영향을 받았다.

17세기 린네의 분류체계를 만든 칼 폰 린네(Carl von Linné)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식물학자였다.

그는 제자들이 전 세계에서 채집해 온 식물표본을 바탕으로 복잡해 보이는 동식물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했고, 이를 통해 생명의 다양성을 해석하고자 했다.

그는 몇 년의 노력 끝에 설득력 있는 분류체계를 개발해서 7,700종의 식물과 4,400종의 동물을 ‘종속목강문계’라는 위계에 따라 6단계로 분류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유지되는 분류체계의 기본이 되었다.

린네는 일단 자연계를 관찰하여 정확하고 자세하게 묘사하고, 관찰된 유사성을 근거로 분류하면, 표면적 복잡성을 감당할 수 있는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폭넓게 관찰하고 좋은 분류와 계통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개념이었다.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와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천문학 분류와 드미트리 멘델레예프(Dmitri Ivanovich Mendeleev)의 주기율표도 근대 과학이 발달하던 17세기에 린네의 동식물 분류법과 함께 등장했다.

이러한 과학적 체계 발달의 세례를 받은 것은 에밀 크레펠린보다 열 살 위의 형인 칼 크레펠린(Karl Kraepelin)이었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관찰을 통해 분류하고 체계를 세우는 작업에 대해 많은 토론을 했고, 크레펠린은 뛰어난 박물학자였던 형의 작업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를 기반으로 크레펠린은 오직 관찰만으로도 충분히 정신질환의 진단의 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개념적 확신을 갖고 환자의 증상을 분류하고 그들의 경과를 기록하면서 하나의 분류체계를 만드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의학에서 질환을 진단하고 분류할 때는 여러 측면에서 접근한다. 먼저 장기와 조직의 변화다. 예를 들어 간경화는 간이라는 장기 조직이 딱딱해지는 변성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외부 원인을 진단명으로 쓰는 것이다. 바이러스로 감염되는 B형간염, 말라리아 원충에 감염되어 발생하는 말라리아 등이 그 예이다.

세 번째는 기능의 변화를 진단명으로 쓰는데, 눈의 조절력에 이상이 생겨 발생하는 근시나 소리를 전달하는 기관의 기능에 문제가 생긴 난청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진단은 원인이나 변화의 부위가 상대적으로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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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펠린은 정신질환을 13가지 범주로 나누었고, 정서적 요소의 유무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영역으로 나누었다. 이 범주는 현대 정신의학에서도 거의 유사하게 사용하고 있다. <출처: gettyimages>



이에 반해 정신질환의 진단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특징적인 심리적 불편감과 행동의 변화를 기술한 항목들 중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일정 개수를 충족하고 특정 기간 이상 지속될 때 한 가지 질환이 있다고 진단한다.

오직 관찰되는 증상만으로 진단하는 것이다. 이를 ‘기술적 정신의학(descriptive psychiatry)’이라고 하며, 현대 정신의학에서 정신병리학(psychopathology)이라는 하나의 학문적 토대를 이룬다.

크레펠린은 바로 이 기술적 정신의학의 기초를 마련한 것이다. 그는 정신질환을 모두 13가지 범주로 나눴다.

신경증, 열성 정신병, 정신지체, 조현병, 우울-조울병 등으로 분류한 이 범주는 현대 정신의학에서도 거의 유사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크레펠린의 제일 큰 업적은 당시 ‘미쳤다’고만 치부하던 정신병을 정서적 요소의 유무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영역으로 나눈 것이었다.

정서적 요소가 있는 정신병은 현대 정신의학적 용어로 하면 주요 우울장애와 양극성 정동장애를 합친 것으로, 증상의 발현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호전되기도 하지만 악화되기도 하는 순환적 경과를 거친다.

두 번째는 정서적 요소가 없는 정신병으로 요즘의 개념으로는 조현병(정신분열병)이다. 이는 한 번 발병하면 서서히 악화되어 크레펠린이 ‘조발성 치매(dementia praecox)’라 불렀던 인격적 황폐화를 겪게 된다.

그의 제자였던 오이겐 블로일러(Eugen Bleuler)가 ‘정신분열병(schizophrenia)’이라는 진단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진단체계를 분류하기 시작하면서 정신질환의 경과가 뚜렷하게 차이 나고 예후도 달라질 수 있었다.




지속적인 관찰과 이해가 독립적인 진단을 가능케 한다



누구나 똑같이 관찰한다면 같은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체계가 크레펠린에 의해 마련되면서 정신의학은 비로소 의학적 모델로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모두가 동의하는 진단이 가능해졌으니 같은 치료법을 적용해 원인을 찾는 연구를 하며 예후와 경과에 대해서 예측할 수 있게 됨으로써,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와 의학적 치료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는 현대의 국제질병분류(ICD)나 진단과 통계를 위한 매뉴얼(DSM)로 발전하게 된다.

현재 게임중독이 정신질환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놓고 많은 논쟁이 있다. 사회적 변화의 영향, 게임에 대한 편향적 시선, 새로운 매체에 대한 적응 과정으로 보는 시선, 다른 기저 정신질환의 새로운 증상 표현이라는 입장 등 다양한 주장이 있다.

이럴 때는 하나의 진단명을 먼저 정하는 것보다 크레펠린이 이미 200여 년 전에 그랬듯이 특징적인 행동과 증상을 면밀히 관찰하고, 진짜 문제가 있는 환자군을 분류해서 이들의 경과를 장기간 조사함으로써, 이들에게만 효과적인 치료법이 있는지, 또 어떠한 특징적 경과를 거치는지를 밝혀내야만 비로소 독립적인 진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크레펠린이 박물학적 경험을 차용해 개발한 정신질환의 진단분류 시스템은 하나의 진단을 확립하는 과정의 원칙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현대 정신의학 발달의 시작을 알리는 결정적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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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전공의와 전임의 과정을 마쳤다. 용인정신병원 정신의학연구소에서 근무했고, 캐나다 토론토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연수한 바 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진료를 하며, 읽고 쓰고 가르치며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엄마의 빈틈이 아이를 키운다], [심야 치유 식당], [청소년을 위한 정신의학 에세이], [예능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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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정신의학의 탄생 2016.01.15
『정신의학의 탄생』은 200년 정신의학의 역사적 사실과 과학적 진실을 쉽게 풀어낸 책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갈등한 환자들의 고투가 인류를 보다 나은 삶으로 이끌고자 한 치료자들의 분투와 맞닿은 의학의 교차점을 다루고 있는 이 책에는, 머리에 쇠막대기가 꽂히는 사고를 겪은 피해자 게이지 덕분에 전두엽의 기능을 알 수 있었던 사건, 15년 동안 환자들의 뇌 조직 슬라이드를 정리해 치매의 존재를 밝힌 알츠하이머, 어린 앨버트 실험으로 양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왓슨, 프로이트에게 반기를 든 제자 아들러와 융의 연구로 확장된 정신분석학, 남성을 인위적으로 여성으로 키우고자 했던 급진적인 시도 등 역동적으로 발전해 온 정신의학의 흥미로운 이면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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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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