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만들어진 기억 - 실재와 허구 사이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389회 작성일 16-02-06 14:49

본문















14547377530869.png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마들렌을 찍어 먹다가 그 맛을 통해서 문득 어린 시절 일요일 아침에 먹던 홍차와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이처럼 완전히 잊고 있었던 어떤 기억이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다. 그 기억은 종종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한데, 그러나 과연 그 기억은 믿을 만한 것일까?

우리는 많은 사실을 기억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모두 사실인 것은 아니다. 당신은 친구가 비난했다는 것을 기억하겠지만, 친구의 비난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는가? 친구는 당신에게 왜 늦었느냐고 물었는데도, 당신은 친구가 당신을 신뢰할 수 없다며 비난했다고 기억할지 모른다. 우리는 종종 사실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믿거나 믿고 싶은 것을 기억하는 경우가 있다.



디즈-뢰디거-맥더멋(Deese-Roediger-McDermott) 과제







14547377535929





위 표에는 두 개의 목록1), A와 B가 있다. 목록 A의 단어들을 차례대로 읽은 다음, 또 목록 B의 단어들을 차례대로 읽어보라. 그런 다음 이 글의 끝에 있는 문제(문제와 정답은 링크 클릭)에 도전해 보자(더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이 목록 A의 단어들을 2~3초 간격으로 불러주고, 불러주기가 끝난 후 방금 들은 단어들을 최대한 많이 회상하여 공책에 적는 것이다. 목록 B도 같은 방법으로 한다).

이 목록은 박미자(2004)의 논문, “인지부하가 오기억에 미치는 영향”에서 사용된 것 중 일부이다.
주석 레이어창 닫기

정답을 맞히었는가? 장한 일이다. 그런데 혹시 다른 단어도 고르지 않았는가? 예컨대, 병원에서 진찰하는 의사나 아니면 경찰이 붙잡는 도둑과 같이 목록에 나와 있지 않은 단어들을? 나타난 것을 정확히 고르는 것도 기억이지만, 나타나지 않은 것을 고르지 않는 것도 기억이다. 만일 당신이 엉뚱한 것을 선택했다면, 당신은 오기억(false memory)을 범한 것이다. 실험 자료들은 조건에 따라 편차를 보이지만, 목록에 없었던 유인어를 잘못 재인하는2) 비율이 50%나 그 이상에 이르기도 한다. 심지어 “목록이 오기억을 일으키도록 만들어졌으니 회상할 때 유인어를 피하라”라는 경고를 준 경우에도 오기억이 발생했다.3) 그러니 경고가 없었던 상황에서 질문에 틀린 것을 골랐다고 해서 상심할 일은 아니다.

‘유인어’란 목록의 단어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나 실제 제시되지 않아서 사람들이 오기억하게 만드는 단어이다. 기억한 단어들을 생각해 내는 것을 ‘회상’이라 하고, 여기의 질문처럼 단어 목록 중에서 고르는 것을 ‘재인’이라 한다. 오기억은 회상과 재인 모두에서 발생할 수 있다.
주석 레이어창 닫기
박명숙과 박창호(2004)의 “반복 학습-검사 DRM 과제에서 경고가 노인과 젊은이의 오기억에 미치는 영향”
주석 레이어창 닫기


오기억의 한 원인 : 점화



좋은 기억은 종종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추억을 할 때뿐만 아니라, 심부름(과제)을 할 때나 시험을 칠 때에도 중요하고, 그리고 법정에서는 종종 증인의 기억(즉, 증언)에 근거해서 판결이 내려진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을 상당히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본 대로 들은 대로”라면서 마치 사진기나 녹음기처럼 기억할 수 있을 것으로 말하곤 한다. 그런데 하버드대의 Schacter(2001)는 인간 기억의 취약성을 무려 일곱 가지나 열거했다.





14547377542989





연상어를 주고 핵심이 되는 단어를 생각해내는 과제를 원격연상검사라고 한다.



‘보름달’이란 단어에 대해 무엇이 연상되는가? (급하게 읽기 전에 생각을 점검해 보자.) ‘보름달’과 ‘선물’에는 무엇이 연상되는가? ‘보름달’과 ‘선물’과 ‘고향’에는? 아마 여러분은 두 번째나 세 번째 단계에서 ‘추석’을 생각했을 것이다.4) 이처럼 연상어를 주고, 핵심이 되는 단어를 생각해 내는 과제를 원격연상검사(remote association test)라고 한다. 이런 현상의 배후에는 점화(priming)가 있다. 이것은 생각(혹은 개념)들이 다른 생각(혹은 개념)들과 연합되어 있어서, 그 중 하나가 자극되어 흥분하게 되면 그 흥분이 퍼져나가서 다른 연합된 생각들을 자극하여 흥분시키는 작용을 말한다.

본문의 예는 필자가 즉석에서 만든 것이라서 충분히 좋은 것이 아닐 수 있다. 다른 예는 ‘성경’, ‘동물’, ‘홍수’인데(Anderson, 2012), 이 단어들은 당신에게 무슨 생각을 불러일으키는가?
주석 레이어창 닫기

보름달, 선물, 고향이란 단어는 각각 혼자서는 추석을 생각나게 할 만큼 강한 점화 효과를 가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 단어가 동시에 주어지면, 이들의 점화가 집중되는 단어인 ‘추석’은 머릿속에서 충분히 강하게 흥분되어 생각이 떠오르게 된다. 같은 방식의 분석을 위의 디즈-뢰디거-맥더멋 과제의 목록에도 적용할 수 있다. 각 목록에서 유인어(의사와 도둑)는 실제로 제시되지 않았지만, 목록 속의 단어들로부터 집중적으로 점화되기 때문에 결국에는 실제로 제시된 단어 못지않게 강하게 흥분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과 점화된 비-사실을 혼동하는 것이다.



점화의 응용 : 광고



한 가지 생각이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이것들은 또 다른 생각들과 결합하여, 나타나지 않았던 제3의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작용은 은밀히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장면, 예컨대 광고에 종종 응용된다. 다음은 미국에서 실제로 방송된 광고이다.


“아이가 감기에 걸리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 어떤 것도 그렇게 할 수는 없어.” [아이가 콧물을 훌쩍인다.] “그러나 감기에 도움이 되는 것이 있지. 아이에게 OOO으로 양치질을 시켜야지. OOO이 감기에 걸리지 않게 해준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감기를 이겨내도록 해줄 거야. 감기에 자주 걸리는 계절에는 하루에 두 번씩 OOO으로 양치질을 시켜야지. 음식에 신경을 쓰고, 잠을 충분히 재우고, 그러면 감기에 걸릴 리는 거의 없을 거고 올해에는 감기에 걸리더라도 아주 가벼운 감기일 거야.”5)
Anderson(2012), “인지심리학과 그 응용”, 231면.
주석 레이어창 닫기

이 광고를 들은 실험참여자들은 모두 OOO로 양치질을 하면 감기를 예방할 수 있다고 응답했는데, 실제로는 이런 주장이 광고문에는 없었다(게다가 앞에서 “감기를 예방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이 광고를 본 사람들은 OOO이 감기 예방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기억하기 쉽다. 어떤 국내 광고도 “써보면 알지” 라고 하면서, 어떤 효과가 있음(아니면 말고)을 암시한다. 사람들은 세부적인 것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기 때문에, 광고에서 암시된 것이 실제로 제시된 것인지를, 그 기억의 출처에 특별히 주의를 주지 않는 한 세세하게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오정보 효과 : 목격자 증언과 기억 회복







14547377551039





교통사고 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보여주고 유도질문을 한 실험을 통해, 인간 기억과 목격자 증언이 유도신문이나 오정보에 의해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종 경험한 것을 기억하는 대신에 경험으로부터 추리한(유도한) 것을 기억하는 것은 아닐까? 유도신문 혹은 암시 연구에서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다. Loftus(1975)는 실험참가자들에게 교통사고 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보여 주었다. 그런 다음 어떤 참가자들에게 “차가 멈춤 신호를 무시하고 달렸을 때 얼마나 빨리 달렸느냐?”는 질문을 주고, 다른 참가자들에게는 “차가 우회전을 하였을 때, 차가 얼마나 빨리 달렸느냐?”는 질문을 주었다.

두 번째 질문으로, 두 집단 모두에게 “멈춤 신호를 봤습니까?”라는 질문을 주었을 때, (멈춤 신호가 언급된) 첫째 집단은 53%가 그렇다고 답한 반면, (우회전이 언급된) 둘째 집단은 35%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첫째 집단에게 한 질문에는 ‘멈춤 신호’가 있었다는 것이 묵시적으로 전제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두 번째 답변에 영향을 준 것이다. 이처럼 틀린 정보의 제공으로 정확 기억이 왜곡되는 현상을 오정보 효과(misinformation effect)라고 한다. Loftus와 동료들은 인간 기억과 목격자 증언이 유도신문이나 오정보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는 증거를 여러 실험을 통해 보여주었다.

가끔 최면을 써서 잊었던 기억을 찾았다거나 트라우마에 의해 억압된 기억이 심리치료를 통해 회복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기억이 복구된다면,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어릴 때의 성적 학대나 가학 행위의 처벌이나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한때 이런 소송이 잦았다. 이런 기억 회복은 오기억이나 오정보 효과로 보면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과연 사실 그대로에 대한 기억이 회복된 것일까? 아니면 여러 주변 정보에 의해 점화된, 혹은 최면요법사나 심리치료사에 의해 유도된 기억이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한 논쟁은 쉽사리 결론나지 않는다.



오기억은 나쁘기만 한 것인가?







14547377558808




컴퓨터 메모리에 비해 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하다. 주어진 것 너머에 대해 추리와 상상을 하는 인간 기억의 구성적인 특성은 기억 왜곡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서 또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과 비교하면, 입력한 그대로 저장하는 컴퓨터의 메모리는 얼마나 뛰어난가! 주어진 그대로 저장한다는 측면에서 컴퓨터 메모리나 책은 우수한 기억 장치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컴퓨터 메모리는 아직까지 인간 기억을 따라올 수 없다. 인간 기억은 구성적인 특성을 가지는데, 즉 인간은 주어진 것 그 너머에 대한 생각(혹은 가설)을 만들고, 실상을 추리하거나 상상하기도 한다. 이것은 또한 기억 왜곡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기억의 구성과정은 인간 기억이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 중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임기응변할 수 있고 또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도 아닐까?

우리의 기억이 완벽하게 정확하지 못하다는 점은 오히려 축복일지 모른다. 일생의 행복에 대한 연구는 과거에 행복했던 기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강도와 마지막(최근)에 행복했던 강도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Kahneman, 2012). 과거의 어려웠던 일들은 최근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중 한 장면으로 미화될 가능성이 있다. 오기억은 과거가 자연스럽게 미화되도록 하는 초점흐리기(디포커싱) 역할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 Anderson, J. R. (2012). 인지심리학과 그 응용. (이영애 역) 서울: 시그마프레스.

· Kahneman, D. (2012). 생각에 관한 생각. (원저명은 Thinking: Fast and Slow) 파주: 김영사.

· Loftus, E. F. (1975). Leading questions and the eyewitness report. Cognitive Psychology, 7, 560-572.

· Schacter, D. (2006). 기억의 일곱 가지 죄악. (원제는 The Seven Sins of Memory) 한승출판사.

· 박명숙, 박창호(2007). 반복 학습-검사 DRM 과제에서 경고가 노인과 젊은이의 오기억에 미치는 영향. 한국심리학회지: 실험, 19권, 113-125면.

· 박미자(2004). 인지부하가 오기억에 미치는 영향. 한국심리학회지: 실험, 16권, 111-130면.










  • * 단어 목록에 관한 질문



    1. 목록 A(왼쪽)에서 다음 단어들 중 나타난 것은? (단어) 가운, 의사, 진찰, 보험


    2. 목록 B(오른쪽)에서 다음 단어들 중 나타난 것은? (단어) 창문, 밤, 도둑, 경찰







박창호 | 전북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전북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있다. 공저로 인지심리학, 인지학습심리학, 인지공학심리학, 실험심리학용어사전 등이 있다.


발행2014.07.29.



주석


1
이 목록은 박미자(2004)의 논문, “인지부하가 오기억에 미치는 영향”에서 사용된 것 중 일부이다.
2
‘유인어’란 목록의 단어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나 실제 제시되지 않아서 사람들이 오기억하게 만드는 단어이다. 기억한 단어들을 생각해 내는 것을 ‘회상’이라 하고, 여기의 질문처럼 단어 목록 중에서 고르는 것을 ‘재인’이라 한다. 오기억은 회상과 재인 모두에서 발생할 수 있다.
3
박명숙과 박창호(2004)의 “반복 학습-검사 DRM 과제에서 경고가 노인과 젊은이의 오기억에 미치는 영향”
4
본문의 예는 필자가 즉석에서 만든 것이라서 충분히 좋은 것이 아닐 수 있다. 다른 예는 ‘성경’, ‘동물’, ‘홍수’인데(Anderson, 2012), 이 단어들은 당신에게 무슨 생각을 불러일으키는가?
5
Anderson(2012), “인지심리학과 그 응용”, 231면.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