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 이론 - ‘나는 누구인가’에서 시작된 정체성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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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3회 작성일 16-02-0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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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우리랑 달라!”

“왜, 나도 유대인이야!”

“그런데 왜 머리가 금발이고, 눈은 파래? 유대인도 아닌데 왜 유대인 모자를 쓰고 다니냐?”

“우리 아빠랑 엄마는 모두 유대인이란 말이야!”

“말도 안 돼!”

유대인 학교의 학생들이 한 소년을 둘러싸고 놀렸다. 아이는 당황해하면서 자신도 유대인이라고 항변했지만 아이들은 소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또래 유대인 아이들보다 덩치도 훨씬 컸고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유대인들과 달리 금발에 파란 눈이었다. 소년은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난 누구야? 엄마, 아빠 아들 맞아?”

엄마는 올 게 왔다는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암, 넌 엄마가 사랑하는 아들이지.”

“그런데 왜 나는 엄마 아빠랑 다르게 생겼어요?”

“글쎄…… 그건 네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엄마는 더 이상 설명해 주지 않은 채 주방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소년은 거리로 나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려 했지만 “유대인은 저리 가!”라며 그를 따돌렸다. 소년은 도대체 어디에 속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후 소년의 마음속에서는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속해 있는 존재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인생의 화두로 남았다.

소년의 이름은 에릭 홈부르거 에릭슨(Erik Homberger Erikson, 1902~1994년)으로, 그는 성장하여 심리사회적 발달 이론을 수립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그가 정체성과 인간의 발달에 대한 독창적인 이론을 만들어낸 것은 그 인생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




하버드 대학에서 활동을 시작한 미국 최초의 소아정신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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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아정신분석가 에릭 홈부르거 에릭슨. 자신의 어린시절 경험을 계기로아동심리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출처: (cc) Waveformula at en.wikipedia.org>



소년의 어머니인 카를라 아브라함센(Karla Abrahamsen)은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의 유대인 집안에서 자랐는데, 덴마크 남자와 사귀던 중 아이를 가지고 말았다. 남자가 임신한 카를라를 버리고 떠나자 당황한 그녀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건너가서 1902년 아들을 출산했다. 카를라는 독일 바덴 지역의 카를스루에 지방으로 이사하여 간호사 수련을 받다가 유대인 소아과 의사 테오도르 홈부르거(Theodor Homburger)와 결혼했고, 아들의 이름은 비로소 에릭 홈부르거가 되었다. 당시 유럽에서 유대인들의 상당수는 자기들끼리 모여 살면서 유대인 학교에서 교육받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에릭슨은 덴마크인 생부의 유전자를 이어받았기에 일반적인 유대인의 외모와 많이 달랐고, 이로 인해 친구들의 놀림을 받으면서 자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는 에릭슨이 의대에 진학하기 원했으나, 그는 뮌헨의 예술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곧 학교를 그만둔 에릭슨은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에서의 자기 역할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몇 년간 유럽 전역을 떠돌며 여행했다. 25세경 그의 친구인 피터 블로스(Peter Blos)가 빈에서 혁신적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립학교의 교사로 그를 초청했는데, 그곳에는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년)의 딸인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 1895~1982년)가 참여하고 있었고 일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소아정신분석을 하고 있었다. 에릭슨은 정신분석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안나 프로이트의 소개로 빈 정신분석 연구소에 들어갔다. 헬레네 도이치(Helene Deutsch, 1884~1982년), 에드워드 비브링(Edward Bibring, 1894~1959년), 하인츠 하트만(Heinz Hartman, 1894~1970년) 등 유수의 정신분석가의 지도 아래 정신분석 훈련을 받은 그는 1933년 마침내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혁신적 교육기관인 몬테소리의 학위도 취득했다.

이무렵 독일은 나치가 집권했고, 그 여파는 오스트리아에까지 미쳤다. 에릭슨은 나치의 눈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 갔고 하버드 대학에서 미국의 첫 번째 소아정신분석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6년 예일 대학으로 옮겨 시민권을 얻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자신의 성을 ‘에릭슨’이라 지었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자신의 성을 직접 만든 것이다. 흥미롭게도 ‘Erikson’은 ‘Erik+son’ 즉 에릭의 아들, 자기 자신의 아들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만큼 에릭슨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유추할 수 있다. 1939년부터는 서부의 캘리포니아 대학으로 옮겨서 아동발달에 대해 연구했고, 점차 정신분석적 이론을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하면서 독특한 심리 발달 이론을 수립했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심화시킨 에릭슨의 차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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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단계. 사회적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8단계의 발달단계를 거친다.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 이론(psychosocial development theory)은 모든 유기체는 특정한 목적을 갖고 태어났고, 성공적으로 발달하면 이 목적을 완수한다고 보는 후성설(後成說)을 기반으로 한다. 프로이트가 정신성 발달 이론(psychosexual development theory)이 청소년기까지 설명하고 성인기 이후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던 것에 비해 에릭슨은 청소년기 이후의 성인기를 초기 성인기, 중년기, 노년기로 나누어 전 생애를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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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대 불신’ 시기에는, 원하는 것을 얻고 자신이 안전한 곳에서 살고있음을 경험하면, 아기는 세상을 신뢰하게 된다. <출처: Gettyimages>



인간에게는 미리 정해진 8개의 발달 단계가 있는데, 모든 사람들은 유전적 기질을 바탕으로 사회적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한 단계씩 거친다. 각 단계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면 정상적이고 건강한 개인으로 발달해 나갈 수 있지만, 어느 단계에서 실패하면 그 단계와 관련한 정신적 결함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이때 발달 단계에 따라 발달 과업이 정해져 있고, 이를 해결하여 그 핵심적 가치를 달성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발달 정도를 판단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초기 아동기에 부모와의 경험을 가장 중요한 상호작용으로 보지만, 에릭슨의 이론은 그보다 넓은 사회적 경험들, 가족 외의 사람들과 맺는 인간관계의 경험들도 자아의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했는데 이는 두 이론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8단계 중 첫 번째 단계는 생후 1년 사이에 경험하는 ‘신뢰 대 불신(trust vs. mistrust)’ 시기다. 이 시기에 아기가 원하는 것을 일관되게 얻고 욕구를 만족스럽게 충족하며 자신이 안전한 곳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경험하면, 이 세상을 살 만한 곳이라 신뢰하게 된다. 에릭슨은 인간의 가장 밑바탕에서 버팀목이 되어주는 덕목을 ‘신뢰’라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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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성 대 수치심과 의심’ 시기에는 아이의 자율성에 대해 부모가 지나치게 통제하고 혼내면 수치심과 의심을 갖는다. <출처: Gettyimages>





‘주도성 대 죄의식’ 시기에는 또래들과 경쟁하며 아이의 주도성이 길러진다. <출처: Gettyimages>




두 번째는 ‘자율성 대 수치심과 의심(autonomy vs. shame & doubt)’이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고 세상을 탐색해 나가는 2세경의 발달 과제다. 환경에 대해 자유롭게 탐색하고 충분히 경험하여 성취감을 느끼면 자율성이 생기지만, 이때 부모가 지나치게 통제하고 혼내거나 겁주면 수치심과 의심을 갖는다.

3~5세경에는 ‘주도성 대 죄의식(initiative vs. guilt)’의 시기가 온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프스기와 겹치는 시기로, 또래들과 경쟁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동안 아이의 주도성이 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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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면성 대 열등감’ 시기에는 노력한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하면 열등감을 느끼게된다. <출처: Gettyimages>



다음 단계인 ‘근면성 대 열등감(industry vs. inferiority)’의 시기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학령기 연령대로, 이때부터는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통해 성취감을 맛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기가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하면 주변 또래집단에 비해 뒤떨어진다고 느끼게 되어 열등감이 생긴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정체성 대 혼돈(identity vs. role confuison)’의 시기가 온다. 내가 누구인지, 또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면 건강한 정체성이 만들어지지만, 이를 해내지 못하면 혼돈의 심리 상태에 빠져서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정서적으로 큰 괴로움을 겪는다.




청소년기에 꼭 경험해야 할 두 가지 과제, ‘소속감’과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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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감만 있고 탐색할 용기가 없으면 ‘정체성의 조기마감’이 일어나, 부모나 사회가 정해준 것 외의 다른 것을 시도하지 못한다. <출처: Gettyimages>



에릭슨은 특히 이 시기에 주요한 두 가지 과제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자신이 어느 집단에 속하여 그 집단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는 ‘소속감(commitment)’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의 울타리 밖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보려고 시도하는 ‘탐색(exploration)’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잘 해내면 성공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만일 소속감만 있고 탐색할 용기가 없으면 ‘정체성의 조기 마감(foreclosure)’이 일어난다. 부모나 사회가 정해준 “너는 이런 삶을 살아야 해”라는 것만 지킬 뿐, 그 외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시도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모범생으로 자라서 대기업에 취업해 부모가 원하는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삶도 이러한 예로 볼 수 있는데, 그런 경우에도 언젠가는 갑갑함을 느끼고 일탈을 시도한다. 반면, ‘소속감’을 거부한 채 ‘탐색’만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모라토리엄(moratorium)’에 머무른다. 어딘가 소속되어 해야 할 의무들을 거부한 채 그저 새로운 것만 찾아보겠다고 모든 발달 과제를 뒤로 하고 여행만 다니거나, 무엇이든 시도만 할 뿐 끝을 맺지 못하는 것이다. 취업을 미룬 채 계속 새로운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따겠다고 준비만 할 뿐 무엇 하나 실체가 있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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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0세 초기성인기에는 가족 외의 이성,친구와 사회적 관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출처: Gettyimages>





노년기에는 인생을 정리하며 삶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출처: Gettyimages>




여섯 번째 단계가 20~40세 사이의 초기 성인기로 ‘친밀감 대 고립감(intimacy vs. isolation)’의 시기다. 이 단계는 가족이 아닌 이성이나 친구와의 관계를 얼마나 친밀한 사회적 관계로 만들 수 있는지가 중요한 임무다. 적절한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어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거나 직업을 갖고 사회적 정체성을 만들 수 있다. 이를 성취하지 못하면 자신의 삶이 고립되어 있다고 느끼며 강한 우울감에 빠질 수 있다.

일곱 번째 단계는 중년기로 ‘생산성 대 침체성(generativity vs. stagnation)’의 시기다. 자기가 직접 성취하는 것보다 이제는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성취감을 느끼고, 이를 통해 후배들의 감사를 받는 것이 중요해지는 시기다. 이때 자기가 물려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느끼면 침체에 빠진다.

마지막이 노년기로 ‘자아통합 대 절망(ego integrity vs. despair)’의 시기다. 이제는 인생을 정리하고 돌아보면서 삶의 의미에 대해 음미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 단계를 잘 넘긴 사람은 삶의 통찰과 지혜를 얻는다.




막장 드라마 같은 출생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일궈낸 뜻 깊은 성과



에릭슨의 이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지나치게 낙관주의적으로 접근했고, 자아의 역할을 과도하게 설정했으며,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려는 개인의 노력만 강조한 데다, 개인적 관찰에 입각한 이론일 뿐 객관적 증거가 없다는 점 등을 지적한다. 하지만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 이론은 행동과 발달의 생물학적․본능적 근거를 제시했을 뿐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는 결국 사회적 존재이고 사회적 환경에 적응해 나가기 위한 개인의 노력이 정신세계의 발달과 건강한 자아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더욱이 성인기 이후에도 인간은 죽을 때까지 매번 새로운 발달 과제를 갖는다는 점에서, 모든 인생주기를 포괄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는 실용적이고 유용한 이론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이 ‘유아기의 트라우마’로 인한 발달의 결함을 정신병리의 주요 원인으로 봤기에 현재와 미래를 탐색하기보다 살아온 과거를 재탐색하고 재구성하는 데 집중했다면, 에릭슨의 이론은 현재 당면한 인생의 큰 과제를 평가하고 더 나아가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미래적 지향점을 가진다.

에릭슨은 출생의 비밀을 기반으로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고, 살아가면서 경험한 것들을 기반으로 지금까지도 정신의학과 심리학 전반에서 인간의 발달 단계와 현재 정신 상태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독특하고 실용적인 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막장 드라마의 설정 같은 출생의 트라우마가 정신분석의 자아심리학을 인생 전반으로 범위를 넓혀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에릭슨의 일생과 연구는 “자신에게 벌어진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주요한 증거의 하나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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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전공의와 전임의 과정을 마쳤다. 용인정신병원 정신의학연구소에서 근무했고, 캐나다 토론토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연수한 바 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진료를 하며, 읽고 쓰고 가르치며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엄마의 빈틈이 아이를 키운다], [심야 치유 식당], [청소년을 위한 정신의학 에세이], [예능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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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정신의학의 탄생 2016.01.15
『정신의학의 탄생』은 200년 정신의학의 역사적 사실과 과학적 진실을 쉽게 풀어낸 책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갈등한 환자들의 고투가 인류를 보다 나은 삶으로 이끌고자 한 치료자들의 분투와 맞닿은 의학의 교차점을 다루고 있는 이 책에는, 머리에 쇠막대기가 꽂히는 사고를 겪은 피해자 게이지 덕분에 전두엽의 기능을 알 수 있었던 사건, 15년 동안 환자들의 뇌 조직 슬라이드를 정리해 치매의 존재를 밝힌 알츠하이머, 어린 앨버트 실험으로 양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왓슨, 프로이트에게 반기를 든 제자 아들러와 융의 연구로 확장된 정신분석학, 남성을 인위적으로 여성으로 키우고자 했던 급진적인 시도 등 역동적으로 발전해 온 정신의학의 흥미로운 이면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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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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