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정조의 <환어행렬도> - 사실과 정교하게 편집된 기억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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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0회 작성일 16-02-06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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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어머니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하다



1795년 윤2월 9일 이른 아침, 정조(正祖, 1752~1800)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으로 행차하였다. 정조가 수원으로 행차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지금의 수원 남쪽 화산(華山) 자락에 옮기고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 지었다. 그 후 정조는 매년 사도세자의 생신 무렵인 1월이나 2월이면 이곳을 방문했다. 그런데 정조에게 이날의 행차가 더욱 각별했던 것은 이해가 바로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 두 분의 회갑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임금의 행차라면 기본적으로 시위 군관과 의장이 수백 명에 이른다. 그런데 이날의 행차에는 이에 더해서 혜경궁을 시중하는 나인들과 회갑 잔치를 위한 행사 인원, 잔치에 참석하는 내ㆍ외빈까지 함께 갔으니 수행 인원은 6천여 명에 달했다. 물론 이들이 모두 함께 움직이는 것은 아니고, 현지에 먼저 가서 준비하거나 길목을 지키고 대기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고 해도 어가 행렬은 어림잡아 1킬로미터는 족히 되었음직하다. 1백여 명의 악대가 연주하고 수백 개의 깃발이 펄럭이며 말과 가마가 줄지어 가는 행차는 당시에도 대단한 장관이었을 것이다.

만약 현재에 이러한 행차를 재현한다면 어떻게 기록할까? 아마 수십 대의 카메라가 동원될 것이다. 행렬을 따라가는 카메라, 임금을 클로즈업 하는 카메라, 관중의 반응과 주변 풍경을 담는 카메라는 물론이고, 대열 전체를 담기 위해 항공 촬영도 필요하다. 이렇게 찍은 필름들을 다시 편집하고 지도나 도표도 삽입해야, 어느 정도 행차의 면모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한 폭에 담은 그림이 있다. 바로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병풍의 일곱 번째 폭인 <서울로 돌아오는 임금의 행차 그림―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이다(그림1). 어떻게 담고 있는지 오늘은 이 한 폭만을 유심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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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김득신 외, [화성능행도] 제7폭 <환어행렬도>
1795년경, 비단에 채색, 156.5×65.3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환어행렬도>가 어떤 그림인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 이 그림이 속한 [화성능행도] 8폭 병풍의 나머지 폭에는 무엇이 그려 있는지 간단한 설명이 필요하다(당시 정조의 현륭원 방문은 ‘원행(園行)’이기 때문에 이 그림을 ‘화성원행도’라 부르는 것이 옳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기존 명칭인 ‘화성능행도’를 사용하겠다). 이 병풍의 제1폭부터 6폭까지는 1795년 화성에서 열린 주요 행사를 한 폭씩 그렸다. 우선 주행사인 혜경궁의 회갑잔치를 비롯해, 이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베푼 양로연(養老宴)과 과거시험 등을 그렸다. 정조의 문무진작을 상징하는 문묘 참배와 군사 훈련, 활쏘기 의식 등도 주제로 채택하였다([화성능행도] 각 폭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송희경의 네이버캐스트 -<화성능행도>를 참고하라). 그런데 이 병풍의 마지막 두 폭은 특정한 행사가 아니라 길 위의 여정을 그렸다. 제7폭은 어가 행렬이 수원에서 출발하여 시흥을 지나는 장면이고, 제8폭은 노량진에 배다리를 설치하고 한강을 건너오는 장면이다. 그중에서 마지막 폭이 배다리를 주제로 하고 있다고 본다면, 이 글에서 다룰 일곱 번째 폭은 온전히 행차 장면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행차는 단순히 서울에서 화성을 오고 가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능행의 핵심 사안이었던 것이다.


어가 행렬을 정비하고 그림으로 그려 정식으로 삼다 – 반차도와 행렬도



정조가 원행 준비에 있어 가장 신경 쓴 부분 중에 하나는 바로 어가 행렬의 대열 구성이었다. 국왕 스스로가 군복을 입고 검을 차고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는 행차는 그 자체로 군사 훈련의 일부였다. 새로 설립한 국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비롯하여 서로 다른 소속의 군사들을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치밀한 사전 계획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가 행렬을 정밀하게 구성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은 군사 통솔과 같은 실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왕을 보위한 가운데 모든 구성원이 각자 맡은 자리에 적합하게 서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국왕을 중심으로 한 통치 질서의 확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환어행렬도>가 행렬의 일부를 확대하거나 생략하지 않고 대열의 전체 구성을 보여주는 점이 주목된다. <환어행렬도>를 당시 행차의 사전 연습을 위해 제작된 반차도(班次圖)와 비교해보면 그 배열이 놀랍도록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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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화성능행도] 제7폭 <환어행렬도> ‘의장기’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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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화성원행반차도> ‘의장기’ 부분
1794년, 책 크기 15.36×36.6cm, 규장각 소장(규16031)



그 일례로 규장각에 소장된 <화성원행반차도>와 <환어행렬도>의 의장기 부분을 비교해 보자(그림 2, 3). 말을 탄 장교를 필두로 19기의 깃발이 뒤따른다. 사각형의 큰 깃발인 대기치(大旗幟)가 좌우로 7기씩 늘어섰고 가운데에는 좁고 긴 고초기(高招旗)가 5기 자리하였다. 대기치를 살펴보면 우선 도로를 정리하는 푸른색 깃발인 청도(靑道)가 좌우로 앞장선다. 이어서 두 가지 색이 반씩 칠해진 깃발이 등장한다. 진영의 네 모퉁이에 세워지기 위한 각기(角旗)이다. 네 개의 각기 사이에는 중앙을 상징하는 황문기(黃門旗)가 자리한다. 그 뒤로는 백호기와 현무기 그리고 주작기와 청룡기가 좌우로 각각 따른다. 반차도에는 희미하게 사신(四神) 문양이 남아 있는데, <환어행렬도>에는 좁은 지면 때문인지 문양 대신에 각 사신의 방위에 해당하는 사방색을 채워 넣었다. 의장기의 마지막에는 황색의 금고기(金鼓旗) 2기와 등사기(螣蛇旗)가 따른다. 금고기는 취타수를 지휘하는 깃발로서 ‘金鼓(금고)’ 두 글자가 적혀 있고, 등사기는 역시 지휘용 깃발로서 ‘나는 뱀’이 그려진다고 한다. 여기서는 반차도와 행렬도 모두 문양은 삽입하지 않았지만 황색 바탕에 붉은 언저리를 댄다는 지침은 지키고 있다.

이처럼 의장기의 대열을 자세히 비교하니, 반차도와 <환어행렬도>가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이들 깃발의 모양과 색은 가까운 시기의 군정 서적인 [만기요람](1808)의 지침과 같다. 이는<환어행렬도>가 대단히 ‘사실적’으로 그려졌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행차의 모든 대열이 법식에 맞게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정조는 적법한 도열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시각 자료를 이용하였는가. <환어행렬도>의 사실성 이면에 있는 정조의 의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기초 자료가 되는 반차도에 대해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반차도는 맡은 소임과 신분(班)에 따라 차례대로 세운(次) 그림이라는 뜻이다. 의식이나 행렬 중에 참석자의 위치를 글이나 그림으로 표시한 것인데, 행사 전에 대열을 점검하거나 행사 후에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제작하였다. 반차도가 정조대에 처음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이때 혁신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혁신 중 하나는 국왕의 도성 밖 행차와 같이 거대한 행렬을 처음 반차도로 정리하여 정식으로 삼은 것이다. 정조는 1795년 원행에 앞서 반차도를 들여오게 하고 여러 차례 연습하였다고 하니 정조의 철저함과 이에 부합하는 반차도의 효용을 짐작해볼 수 있다.

정조대 반차도의 혁신 중 또 다른 하나는 행차의 현장감을 드러내기 위해 반차도에 새로운 도해(圖解: 글의 내용을 그림으로 풀이함) 방식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현재 정조의 화성 원행을 기록한 반차도는 여러 본이 남아 있다. 그중 도해 방식이 크게 구별되는 두 종의 반차도를 비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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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화성원행반차도> ‘혜경궁의 가교’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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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도식>에 실린 <반차도> ‘혜경궁의 가교' 부분
1796년, 책 크기 33.8×21.8cm, 규장각 소장



우선 앞서 살펴본 규장각 소장의 반차도는 전통적인 도법의 반차도이다(그림 4). 두루마리를 펴가면서 볼 때 행렬의 앞에서부터 점검할 수 있도록 대부분의 인물을 뒤에서 본 시점으로 그렸다. 단지 가마와 같이 옆에서 보아야만 그 모습을 온전히 알 수 있는 사물은 측면 시점으로 그렸다. 이처럼 후면과 측면이 복합된 시점은 자연스러운 장면을 연출하지는 않지만 대열을 파악하기에는 적합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반복되는 인물들은 도장으로 찍어냈는데, 이를 통해 이 반차도가 감상용이 아니라 실무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수록된 반차도는 기존에 볼 수 없었던 혁신적인 형식을 사용하였다(그림5). 인물을 모두 옆에서 보듯 겹쳐 그린 것이다. 보기에 자연스럽고 회화적이지만, 인물들이 겹쳐 있으니 실무용으로 쓰기엔 적합하지 않다. 의궤는 국가 행사를 치른 후에 관청에 두어 후대의 전범으로 삼기 위해 제작된 국가 기록물이다. 그러나 을묘년(1795) 화성 원행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이례적으로 101건이 출간되어 관청뿐 아니라 참석자들에게도 나누어졌다. ‘기록물’의 성격뿐 아니라 ‘기념물’의 성격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의궤에 수록된 반차도는 참석자들이 행차의 장관을 떠올릴 수 있도록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정조는 이처럼 행차의 실무적인 사전 준비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후에 당시의 장관을 실감나게 기억하기 위해 반차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환어행렬도>는 새로운 형식의 반차도가 가졌던 시각적 효과에 시공간을 부여함으로써 더 현장감 넘치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전통적인 반차도에서 새로운 형식의 반차도, 그리고 <환어행렬도>로의 표현 변화는 이를테면 2D에서 3D로의 변화라고나 할까. 행차의 법식을 유지하면서도 현장을 더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열망이 <환어행렬도>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께 미음 다반을 올리기 위해 행차를 멈추다



<환어행렬도>의 대열은 반차도와 상당히 유사하지만, 그렇다고 반차도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다. <환어행렬도>는 특정한 시점을 상정하였는데, 바로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께 미음 다반을 올리기 위해 멈춰 선 시점이다. 화면 상단에 시위가 집중되어 있는 부분이 혜경궁의 가마가 위치한 곳이다(그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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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화성능행도] 제7폭 <환어행렬도> ‘혜경궁의 가교’와 ‘정조의 어마’ 부분


그 주변은 푸른 포장으로 둘러져 있고, 대열에서 나온 궁중 내인과 일부 장교들이 이 주위에 몰려있다. 혜경궁이 가마에서 나와 쉬기 위해 포장을 둘러 가리고 시중을 들기 위해 내인과 장교들이 시위한 모습이다. 그 옆으로는 음식을 실은 수라마차가 대기해 있고, 음식을 준비하기 위한 막차도 설치되었다. 임금과 왕실 친척은 함부로 그리지 않는 전통 때문에 혜경궁께 다반을 올리는 정조의 모습은 직접 볼 수 없다. 그러나 반차도와 비교해 달라진 수행원의 대열을 통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행차 도중 미음을 진상하는 시점을 택했을까? 이는 을묘년 원행 자체가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탄신 일주갑을 기념하여 계획된 행사로서 행사의 상당 부분이 혜경궁에 집중된 것과 관련이 있다. 정조는 행차 중에도 혜경궁의 안위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이처럼 종종 행렬을 멈추고 혜경궁의 원기 회복을 위해 직접 미음이나 대추차 등을 올렸으며, 숙소에 다다르기 전에는 항상 먼저 가서 살폈다고 한다. 즉, 그림 속에서 미음 다반이 진상되는 장면은 이번 행차가 어머니에 대한 효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환어행렬도>에서 혜경궁의 가마는 상단 중앙에 가장 눈에 띄게 표현되었다. 심지어 정조의 어가보다 혜경궁의 가마를 더 강조한 표현은 이러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정조는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는 명목상 효의 실천이었지만, 그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였다. 혜경궁의 위상을 높임으로써 왕위의 정통성 강화를 도모한 정조의 원행은 그림 속 행차의 구조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화려하게 부각된 혜경궁 가마에서 수직으로 내려오면 행렬 중 두 번째로 눈에 띄는 교룡기(蛟龍旗)와 독기(纛旗)가 있다(그림7). 교룡기와 독기는 왕권을 상징하는 국왕의 고유한 의장으로서 이러한 배치는 혜경궁의 추존과 왕권 강화 사이의 관계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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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화성능행도] 제7폭 <환어행렬도> ‘교룡기’와 ‘독기’ 부분



수도권을 ‘새로이 부흥(始興)’ 시키다 –시흥로와 시흥행궁



<환어행렬도>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곳은 시흥행궁을 앞에 둔 시흥로이다. 화면에서 하단 왼쪽에 있는 건물이 시흥행궁이다. 곧 행차할 국왕을 맞이하기 위해 호위 군사들이 시흥행궁에 천막을 두르고 대기하고 있다(그림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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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화성능행도] 제7폭 <환어행렬도> ‘시흥행궁’ 부분


그런데 실제로 미음 다반이 진상되었던 장소와 시흥행궁은 11리나 떨어져 있어서 그림에서처럼 행렬의 끝과 시흥행궁의 입구가 맞닿을 수 없다. 왜곡을 감수하면서 시흥행궁을 화면 안에 끌어들인 것은 미음 진상이라는 사건뿐 아니라 시흥이라는 장소가 이 행차에 특별한 의미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혜경궁에게 행차 중에 미음 다반을 진상한 곳은 모두 여덟 군데이다. 그중에서 특히 시흥행궁 주변을 배경으로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 그림의 공간적 배경인 시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조는 을묘년 원행에 앞서 이미 여섯 번의 원행을 거행하였는데 시흥을 거쳐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별히 장대해진 행렬을 수용하기 위해, 남태령을 거치는 좁고 험한 과천로 대신에 시흥을 거쳐 오는 평탄한 길을 새로 닦았다. 31리가 넘는 시흥로 상에는 중간 경숙처(經宿處)도 마련하였는데, 이것이 114칸에 이르는 시흥행궁이다. <환어행렬도>에 시흥로와 시흥행궁이 포함된 것은 이들이 이번 원행을 위해 특별히 시행된 대규모 사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그재그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도로의 표현도 눈에 띈다. 도로를 주변 지세와 구분하여 표현한 것은 새로 닦은 시흥로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시흥로의 건설은 원행을 위한 일회성 공사가 아니었다. 시흥로는 장기적으로 수도권의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촉진하고자 계획되었다. 이는 공사를 마친 후 정조가 내린 조치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정조는 금천현감을 현령으로 승격시키고 읍호(邑號)를 ‘금천(衿川)’에서 ‘새로운 흥성’을 의미하는 ‘시흥(始興)’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승격은 작업에 대한 포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오히려 시흥로의 건설이 애초에 시흥의 승격과 육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정조가 ‘시흥’뿐 아니라 시흥로 상의 많은 지명을 이처럼 개칭하고, 개칭한 지명을 돌에 새겨 길가에 세우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개칭된 지명은 ‘소사현(素沙縣)→만안현(萬安縣)’, ‘소황교(小黃橋)→황교(黃橋)’, ‘황교(黃橋)→대황교(大黃橋)’, ‘방축수(防築藪)→만년제(萬年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수수한(素)’ ‘작은(小)’ 등의 접두어 대신에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황(黃), 만(萬) 등을 사용하였다. 이는 시흥로를 명실공히 국왕의 행차로로 이름 짓는 과정이며, 이를 시각적으로 공표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정비된 시흥로에서 정조의 행차를 보며 사람들은 시흥의 부흥을 곧 국왕의 위업과 연결 지어 생각하지 않았을까.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백성들의 고충을 직접 듣다



<환어행렬도>는 행차의 방향으로 볼 때 화성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환궁’ 장면을 그렸다. 이 그림이 환궁을 택한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국왕의 행차에서 환궁할 때 벌어진 일들을 참고해보면 환궁의 의미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역대 왕의 행차 기록을 살펴보면, 관습적으로 환궁 시에 백성들이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상언(上言)을 들어주는 예가 많았다. 정조는 특히 대민 접촉과 민안 해결의 기회로 행차를 적극 활용하였다. 이번 을묘년 원행에서도 환궁 시에 상언을 허용하였는데, 특히 시흥행궁에서 하루 머문 다음 날에는 시흥현령과 백성들과의 만남을 마련하여 고충을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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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화성능행도]의 제7폭 <환어행렬도> ‘관광민인’ 부분


<환어행렬도>에서 특별히 백성들이 왕 앞에서 상언하는 장면은 그려지지 않았지만 행렬의 주변에 빽빽하게 늘어선 백성들을 발견할 수 있다(그림 9). 이들은 국왕이 거동할 때면 성 밖으로 구경 나오는 ‘관광민인(觀光民人)’ 이라 지칭되는 존재들이다. 각자 자유로운 자세로 행렬을 구경하며 심지어는 천막을 치고 술을 파는 모습도 보인다. 이처럼 행차는 하나의 떠들썩한 구경거리이자 잔치로 변한 것이다. 정조는 이 원행에서 “백성들이 협로에서 관광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1792년과 1794년의 행차에서는 관광민인들을 배려하여 통금을 늦추도록 조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단순히 백성들의 접근을 용인하는 것일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광을 장려한다고 볼 수 있다. 국왕 행차의 위용이 백성들에게 미치는 효과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행차 시 백성들에게 국왕의 위용을 과시할 뿐 아니라, 행차 주변으로 몰려든 인파를 통해서 자신의 정치가 잘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1779년 남한행궁에 행차하였을 때 적은 아래의 글은 ‘관광민인’을 대하는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산에 가득한 백성과 들에 가득한 곡식을 보니 감회가 있도다. 한 해 농사가 다행히 평년보다 잘된 것도 황천이 돌보심이다. 내 부덕함으로 어찌 여기에 이를 수 있었겠느냐. 관광민인 또한 담장처럼 둘러서니 억만을 헤아리는구나. 노인과 어린아이를 이끌고서 길을 가득 메웠도다. 내 오늘 이 곳에 임하여 이 백성들을 대하니 한 가지 생각에 가슴이 뛴다. 어찌하면 모든 이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오직 믿는 것은 경들이 돕고 보좌하는 정성뿐이다. ([일성록] 1779년 8월 3일)

정조는 행차에 모인 관광민인을 자신의 정치가 잘되고 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거울로 삼았다. 이를 그림 속에 적용하면 “담장처럼 둘러서 (……) 길을 가득 메”운 관광민인의 묘사가 역으로 정조의 선정(善政)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행차의 기억을 유포하다



[화성능행도]는 모두 21건이 제작되어 궁중에 보관되었을 뿐 아니라, 행사를 담당한 참석자 15명에게 하사되었다. 이처럼 궁중의 행사를 국가에서 일괄적으로 제작하여 관원들에게 나누어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날 그 대열 속에 있던 참석자들은 병풍을 받아 보고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행차는 기록하듯이 사실적으로 그려졌으니, 그들은 이 안에서 자신의 위치마저 찾아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환어행렬도>와 같은 시점으로 경험한 적이 없다. 그들은 이 그림을 보듯이 행렬의 전 구성을 한눈에 볼 수 없었고, 다반이 진상되는 혜경궁의 가마와 시흥행궁을 한 시점에서 조망할 수 없었다. <환어행렬도>가 택한 시흥이라는 행차의 공간과 환궁이라는 시점, 그리고 혜경궁께 올리는 다반 진상이라는 의식은 각각 정조가 원행을 통해서 의도하였던 수도권의 발전과 대민 정치, 그리고 선친의 추존을 통한 왕위 전통성의 강화를 드러내기 위해 채택되었다. 이를테면 <환어행렬도>는 정교하게 편집된 기억인 것이다. 정조가 이 그림의 제작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행차의 시각 기록을 국가가 관장하고 유포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은 분명하다. 이로써 그는 행차의 사전 계획뿐 아니라 사후 기억까지도 주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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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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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유재빈 | 하버드-예칭 연구소 연구원
한국회화사를 전공하였다. 조선시대 회화가 담고 있는 역사와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고 공부를 시작하였다. 현재는 정조연간 왕실 회화의 기능과 정치성에 대한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논문으로는 <건륭 초상화, 제국 이미지의 형성>, <추모의 정치성과 재현 - 정조의 단종 사적 정비와 ‘월중도(越中圖)’>, <정조대 어진과 신화초상의 제작> 등이 있다.


발행201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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