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버터, 섬세한 맛의 승리 - 부드러운 맛에 면죄부를 발행하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21회 작성일 16-02-06 15:52

본문















14547415758849.png




미각의 구조






14547415769929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 요리에서 매운 음식이 물러나고 부드럽고 섬세한 맛 위주의 음식이 널리 퍼진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그 변화의 흐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버터의 확산이었다.<출처: gettyimages>


현재 서양요리에 관한 한 우리나라 최고의 고수가 된 셰프와 유학 시절에 함께 지낸 적이 있다. 셰프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이 서양요리를 좋아하려면 결국 우리의 혀가 버터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버터가 맛있다고 느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서양요리 대부분의 소스에 사용되는 버터는 마치 우리 음식에 들어가는 장(醬)과 같은 역할을 한다. 외국인이 우리 음식에 맛을 들이려면 간장, 고추장, 된장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실 외국인이 고추장이나 청국장 같은 강력한 소스에 익숙해지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다른 나라 음식에 입문하는 게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요즘 워낙 서양풍 음식을 자주 접해서 예전에 비하면 많이 익숙해진 편이지만, 그래도 해외여행을 할 때 며칠 동안 우리 음식을 전혀 못 먹고 버터와 크림소스 위주의 음식만 계속 먹게 되면 익숙한 음식의 중독성이 얼마나 강력한지 몸으로 깨닫게 된다.

맛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어떤 특정 사회의 사람들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지배하는 실체다. 역사가들은 이를 ‘미각의 구조’라 부른다. 한국 사회에는 그 나름의 특별한 미각의 구조가 있고, 태국에는 태국 나름의, 또 프랑스에는 역시 그 나라 나름의 특이한 미각의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것들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되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속하고 지배한다. 일단 그 구조 속에 살면서 특정한 맛에 길들여지고 나면 다른 미각의 구조를 가진 사회로 들어가는 것이 당황스럽거나 심지어 고통스러운 경험이 된다.

유럽의 음식, 특히 프랑스 요리는 언제부터 그렇게 부드럽고 섬세한(달리 표현하면 ‘느끼한’) 맛을 내게 되었을까? 천 년 전 중세시대에도 유럽인들은 그런 맛을 좋아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놀랍게도 후추를 많이 첨가한 유럽의 중세 음식은 오늘날 인도 음식보다 더 매웠고, 매울수록 더 고급 음식으로 쳤다. 귀족들의 경우 음식에 후추를 쳤다기보다 차라리 후추를 즐기기 위한 베이스로 다른 음식 재료를 사용한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이런 매운 음식이 물러나고 부드럽고 순한 맛 위주의 음식이 널리 퍼진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말하자면 유럽에서는 신료(辛料, 후추나 고추처럼 강한 향취를 내는 양념류) 중심의 중세의 구조로부터 향료(香料, 허브처럼 그윽한 향취를 내는 양념류) 중심의 근대의 구조로 변화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 큰 변화의 흐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버터의 확산이었다.



버터의 확산




버터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이 개발한 후 주변 지역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소, 염소, 양, 야크 등의 젖에서 얻어낸 지방질을 기둥에 걸어둔 가죽 주머니에 넣어 수평으로 저어서 버터를 만드는 것이 가장 오래된 방식이었다. 기원전 3500년 수메르의 기록이나 기원전 1500년 이집트의 기록에 버터가 나오는 것을 보면 고대 문명 초기에 이미 유목 세계로부터 농경 세계로 버터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알려졌다는 것과 그것이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에서도 버터가 알려져 있었지만 요리할 때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고대 로마의 정치인이자 역사학자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23~79)가 버터를 두고 ‘야만인의 음식’이라고 한 것을 보면 대충 분위기 파악이 가능하다. 스칸디나비아나 게르만 지역에서는 버터를 많이 사용한 반면 지중해 지역에서는 올리브기름이 최상의 음식 재료였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올리브기름은 문명의 상징이었다(올리브나무를 인간에게 전해준 아테나 여신이 아테네의 수호신이 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북쪽의 버터, 남쪽의 올리브기름이라는 이분(二分) 구조는 문명 초기부터 형성되어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버터와 올리브기름이 서로 상대방 지역에 많이 보급되어 들어갔지만,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 구분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버터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곳 중 하나가 노르망디 지방이다. 지명 자체가 말해주듯이 노르망디(Normandie)는 북쪽 사람들(Norman, Northman), 다시 말해서 바이킹이 내려와 정복한 곳이다. 곧 프랑스 왕실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 바이킹의 살벌한 관습을 버리고 ‘문명화’되었지만 여전히 출신지의 문화 요소를 많이 유지했는데, 그 중 하나가 버터였다. 오늘날에도 노르망디는 우유와 버터, 치즈 등 축산물의 품질이 뛰어난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 지방으로부터 이웃의 네덜란드 지역이나 스위스 방향으로 목축이 보급되어 갔다.



14547415781640



<버터 만드는 여자>, 1499.
버터는 오랫동안 유럽 본토로 확산되지 못하고 북유럽과 동유럽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버터가 남쪽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경에 이르러서였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버터는 유럽 본토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고 주로 북유럽 혹은 동유럽에서만 인기를 누렸다. 14세기 후반에 나온 프랑스의 요리책에서 버터가 사용된 레시피는 전체의 2퍼센트에 불과했다. 15세기에 들어 이탈리아의 유명한 요리사 마르티노의 요리책에 드디어 버터가 등장하지만 결코 많이 사용되지는 못했다. 16세기에 들어와서야 프랑스 요리책에 나오는 전체 요리의 3분의 1 정도에 버터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대략 16세기경에 버터가 남쪽으로 많이 보급되기 시작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버터가 얼마나 많이 사용되었는지 말해주는 표지는 역설적으로 버터 사용 금지 조항이다. 종교개혁 이전에 유럽이 로마가톨릭의 단일한 신앙 아래 있을 때, 사람들은 교회가 정한 대로 사순절과 금요일에는 육식을 금하고 생선을 먹었다. 이때에는 라드 같은 동물성 지방도 사용하지 않고 식물성 기름을 사용해야 했다. 그렇다면 버터는 동물성 지방의 한 종류로서 사용을 금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오랫동안 이에 관한 규정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버터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니 금지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금식기간 중에 버터를 사용할 수 없다는 금지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14세기 무렵부터다. 그런데 이것이 꽤나 큰 문제를 일으켰다. 남유럽의 올리브기름을 수입해서 쓰는 것을 북유럽 사람들이 마뜩치 않게 생각한 것이다. 이에 버터에 완전히 길들여져 있는 일부 지역의 지도자들이 교황청에 특별 요청을 하여 금식기간이라도 버터를 사용할 수 있는 특권, 곧 일종의 ‘면죄부’를 얻었다. 1492년에 브르타뉴 공작령의 여공작 안(Anne)이 프랑수아 2세와 결혼하여 그 땅이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던 당시, 안은 브르타뉴 사람들 모두 버터를 사용할 수 있다는 면죄부를 선물로 받았다. 1495년에는 독일, 헝가리, 보헤미아, 프랑스의 여러 지역에서도 똑같은 면죄부를 받았다. 그렇지만 이는 공짜가 아니었다. 교황청은 이 면죄부를 발행해주는 대신 많은 돈을 챙겼던 것이다.

이 문제가 종교개혁 당시 큰 논란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옷 입는 방식에 대해 관여하시지는 않는다”는 루터의 주장은 벌써 시비를 거는 투가 완연하다. 그러더니 1520년에 발표한 ‘독일의 그리스도교 신도들에게 보내는 연설’에서 작심하고 이런 비판을 가한다.




“가톨릭교도들은 엉터리 금식을 하고 있다. 자신들은 신발에도 바르지 않을 저급한 기름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강요한다. 그러면서 금식 기간에 금지된 식품을 먹을 수 있는 권리를 팔고 있다. 그들은 교회법을 핑계로 우리의 자유를 훔쳐갔다. 그들은 버터를 먹는 일이 거짓말을 하거나 신을 모독하거나 부정을 탐하는 것보다 더 나쁜 죄악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14547415789781



16세기에 가톨릭교회에서 이탈한 나라와 버터를 주로 사용하는 나라가 거의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올 만큼 버터는 종교개혁을 전후해 유럽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출처: gettyimages>


버터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역사가 플랑드랭은 16세기에 가톨릭교회에서 이탈한 나라와 버터를 주로 사용하는 나라가 거의 일치한다는 흥미로운 관찰을 했다. 버터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음식으로 대표되는 문화의 차이가 종교 문제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종교개혁을 전후해서 유럽의 많은 지방에서 버터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점점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버터가 음식을 만드는 기본 베이스가 되면 당연히 음식 맛이 크게 변화한다. 이는 각 시대별 요리책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중세의 조리법이 정리된 14세기의 요리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소스에는 기름, 버터, 혹은 그 외의 어떤 지방 성분도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 포도주, 식초, 포도즙, 자두 즙 그리고 여러 종류의 향초와 향신료가 들어가서 신맛이 강했다. 중세에 많이 사용되던 소스 중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혹시 비슷한 이름의 소스가 있다 해도 이는 후일 기름과 버터를 첨가하여 풍취와 맛이 변화된 것이다. 수백 년 전 중세 음식들은 과연 맛이 어땠을까? 음식의 역사 전문가인 플랑드랭은 이렇게 충고한다. “중세 요리책에 나오는 레시피를 직접 실험해 볼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다 만들어보았는데, 요즘 요리보다 나은 것은 거의 없습니다.”



욕망이 미각의 구조를 변화시킨다




과거 중세의 음식은 고급 요리일수록 후추를 많이 첨가하여 매웠다고 하지만, 근대의 음식은 고급 요리일수록 부드러워졌다. 특히 프랑스의 섬세한 요리는 유럽 엘리트들 사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프랑스 요리를 따라 하곤 했다. 다만 독일, 네덜란드, 폴란드, 러시아 같은 중동부 혹은 북부 유럽에는 여전히 향신료를 많이 첨부해 강한 맛으로 요리하는 전통이 남아 있다. 아마도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의 도입 자체가 늦어져서 그렇지 않겠느냐는 것이 브로델(Fernand Braudel) 같은 학자의 추론이다.

그렇다면 이런 미각의 구조의 변화는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답은 인간의 욕망에서 찾을 수 있다. 사회구조를 반영하여 욕망이 변화하기도 하지만, 욕망이 먼저 변화하여 사회구조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욕망은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



14547415799757


장 자크 에네, <버터를 젓는 마리 안 에네르(Marie-Anne Henner barattant le beurre)>
1854, 캔버스에 유채, 47×34.5 cm, 장 자크 에네 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맛의 유행에서 희소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새로운 맛을 평가하고 그것을 유행시키는 것은 주로 상층 부르주아들이며, 그것이 맛있다고 느끼기까지는 사회적 습득 과정이 필요하다.작품 보러가기


인간의 욕망이 사회구조를 바꾼다는 이 설명은 생각보다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마르크시스트적 설명에 전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사고의 경향은 사회구조라는 하부구조가 주요 동인(動因)이고 인간의 의식이나 감성 같은 상부구조가 거기에 맞춰 변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변하므로 인간의 감성이 변한다고 보는 게 순리인 듯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음식의 역사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 점을 이렇게 설명해보자. “부드러운 음식 재료가 많아진 결과 사람들이 부드러운 음식을 더 많이 먹게 되고 그래서 섬세한 맛이 지배적인 맛으로 굳어졌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논리는 그 반대다. 사람들이 부드러운 맛을 더 원하게 되면서 그런 음식 재료를 더 찾게 되고 그래서 생산이 거기에 맞춰 변화한 것이다. 17, 18세기에 프랑스에서 우유를 생산하는 가축이 늘어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여기에서 다시 고려해 볼 사항은 사람이 향유하는 맛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생물학적인 게 아니라 사회적인 현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어떤 음식이 왜 사랑받고 왜 고상하다는 평가를 받을까? 그런 음식에는 분명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요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상어 지느러미가 아무 맛도 없고 밍밍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푸아그라가 맛있기는커녕 역겹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특정 음식을 맛있다고 느끼기까지는 분명 사회적으로 배워서 습득하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새로운 맛을 평가하고 새로운 요리법을 퍼뜨리는 주역은 대개 상층사회 인사들이다. 귀족이나 부르주아가 어떤 음식을 즐기는 것은 그들만이 그 음식을 독점한다는 것과 무관치 않다. 그런 면에서 보면 맛의 유행에는 희소성이 지극히 중요한 요소다. 중세 유럽에서 매운 맛이 그토록 고귀한 지위를 누린 것은 후추가 워낙 고가의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후추는 지상낙원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얻는다는 전설까지 가미되어 최고의 상품으로 승격했다. 보석처럼 후추를 수집하고 선물한 데에서 알 수 있듯, 후추는 단순히 맛을 위한 재료일 뿐 아니라 일종의 의식(儀式)의 요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유럽인들이 아시아를 찾아가려는 욕구야말로 세계사를 움직인 큰 동력일진대, 그런 엄청난 사건 이면에는 맛의 추구라는 언뜻 시시해 보이는 현상이 존재한다. 그런데 정작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직항로가 개척되고 후추가 대량으로 수입되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가격이 하락하여 모든 사람이 후추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상류층은 그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7세기에 프랑스 엘리트들은 후추 대신 다른 향료를 찾았고, 최대한 섬세한 맛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유럽 음식의 역사를 장기적 시각에서 고찰한다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중세의 매운 맛에서 근대의 부드러운 맛으로 이행한 것이고, 그 정점을 차지한 것이 18세기 프랑스 요리였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한 그 현상이 이제 바뀌어가고 있다. 인간의 다양한 욕망이 사회 요인들과 복잡하게 얽히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

 

'18세기의 맛'은 한국18세기학회의 기획으로서, 문학동네와 함께 합니다.  14547415800394.jpg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14547415801025.jpg





14547415806788

주경철 |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양사학과에서 석사를 마친 후 프랑스의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럽경제사 분야에서 출발하여 문화와 경제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여러 분야로 관심을 확장하였다. [대항해시대], [문명과 바다], [문화로 읽는 세계사] 등의 저서가 있다.

저자의 책 보러가기
|
인물정보 더보기



14547415807430

출처
18세기의 맛: 취향의 탄생과 혀끝의 인문학 2014.02.28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18세기를 다채롭고 참신한 시각으로 연구하는 한국18세기의 학회의 첫 프로젝트 결과물, <18세기의 맛>이 책으로 나왔다. 18세기의 '맛'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흥미로운 단면을 맛깔나게 서술했다. 23명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18세기의 동서양을 뒤흔든 맛과 그 맛에 얽힌 흥미로운 현상을 살펴보는 일에 동참해보자.

책정보 보러가기


발행2012.12.1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