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고종 황제의 역사 만들기, 조경단 - 조선의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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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8회 작성일 16-02-0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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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시조, 이한




마태복음 1장의 첫 구절을 기억할 것이다. 아브라함에서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누가 누구를 낳고’가 연속되다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14대이며,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라’로 마무리되는 문장 말이다.

[태조실록]의 총서를 보면 이와 비슷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제일 먼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국왕이 된 후 이단(李旦)으로 이름을 바꾼 것을 소개하고, 이한(李翰)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안사(李安社)까지 ‘누가 누구를 낳고’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여기에서 이안사는 태조의 고조부로 목조(穆祖)에 추존되었다. 태조의 가계를 기록한 문장은 정릉(貞陵) 비문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1393년 9월에 태조는 함주(咸州: 함흥)에 있던 부친 이자춘(李自春)의 무덤에 비석을 세웠으며, 비문을 지은 사람은 훗날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게 되는 정총(鄭摠)이었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태조는 전주에서 명망이 있던 집안의 출신으로, 시조인 이한은 신라에서 사공(司空) 벼슬을 했으며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인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하여 시중 벼슬을 지낸 이자연(李自淵)을 낳았다”고 했다. 이를 보면 조선이 건국될 당시 태조는 원래 전주 지역의 출신이며 그 시조는 이한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전주 이씨의 시조로 알려진 이한이라는 이름은 이후 조선 정부가 명나라에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요청하는 외교 문서에서 주로 나타났다. 종계변무란 명에서 편찬된 역사서에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인 이성계가 고려 말의 네 국왕을 살해하고 왕이 되었다”고 기록된 내용을 고쳐달라고 요청한 사건으로, 조선이 건국된 직후부터 명과 조선에 있어 중요한 외교 현안이었다. 조선 정부에서 명나라에 보낸 외교 문서를 보면 “태조의 22대조인 이한은 신라에서 사공 벼슬을 했고, 이한의 6세손인 이긍휴(李兢休)는 고려에서 벼슬을 했으며, 이긍휴의 13세손인 이안사는 원나라에서 다루가치 벼슬을 했다”는 내용이 반드시 들어 있다. 태조는 전주 출신의 이한에서 이어지는 분명한 혈통이 있으며, 이인임이란 인물은 태조의 적수이지 태조의 부친이 될 수 없다는 해명이었다.


건지산 수목의 보호




전주의 건지산(乾止山)은 전주부에서 북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진산(鎭山)이다. 전주의 지형은 전체적으로 볼 때 남쪽이 높고 북쪽은 허전하여 땅의 기운이 분산되므로, 진산의 이름을 건지산이라 하고, 덕진(德津)이라 불리는 제방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의 태종은 전주에 태조의 어진을 모신 건물을 세웠다. 세종은 그 건물의 이름을 경기전(慶基殿)이라 하면서, 건지산을 경기전의 비보소(裨補所, 풍수지리상 결함이 있는 곳의 기를 보충하는 장소)로 지정했다. 이로 인해 건지산의 수목은 조선 초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건지산의 수목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다. 연산군이 장녹주(張綠珠)에게 건지산을 떼어주자 산의 계곡과 제방에 있던 나무들은 베어지고 개간이 되었다. 중종은 공신 유순정(柳順汀)에게 이곳을 떼어주어 역시 개간이 진행되었다. 인조는 건지산에 금표를 세워 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지만, 효종은 다시 이곳을 숙안공주에게 떼어주려고 했다.

영조 초년에도 건지산의 개간 문제를 놓고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1729년(영조 5)에 영조는 새로 태어난 옹주에게 건지산을 떼어주려 했다. 그러나 전라 관찰사 이광덕이 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이광덕은 “예부터 건지산의 땅이 비옥하여 유순정, 임해군, 숙안공주, 숙원(淑媛), 진휼청, 충훈부, 종부시 등이 이곳을 차지하려 했지만 아무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면서, 경기전의 주맥(主脈)이 되는 건지산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조가 건지산을 딸에게 떼어주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영조는 이광덕의 발언에 화가 나서 그를 처벌하려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완강한 반대로 결국 마음을 돌리고 말았다. 이 무렵 영조는 건지산 일대에 있던 백성들의 무덤을 이장시키고, 주변 10리 지역에 표지를 세워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는 금양(禁養) 조치를 내렸다. 이때까지 건지산은 경기전의 비보소로 이해되었다.


조경묘의 건설




1765년(영조 41) 종실인 학림군 이육(李焴)이 이한의 묘소가 있는 건지산에 사당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건지산과 시조 이한의 묘소를 분명하게 연결시킨 발언이었다.

건지산은 전주부의 경계에 있으며, 사람들이 사공(司空)의 묘소가 있다고 말하는 곳입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니 어찌 혼령이 오르내리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묘역의 위치가 확실하지 않아 축대를 쌓고 계절에 따른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 우리 성상께서 덕과 효에 통달하시어 삼대를 본받으시니, 높이고 제사 지내는 법식도 상(商)나라 주(周)나라의 예법과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표지를 세워 수호하는 것에 그치십니까? 건지산의 산록에 비석을 세우고 묘역을 조성하며, 산 아래에 사당을 건립하여, 조상을 영원히 추모하고 제사에 정성을 다하는 장소로 삼아 옛 성인께서 동짓날 조상들께 제사한 뜻에 합치되게 하소서.

이육은 건지산에 있는 시조의 묘역을 정비하고 제사를 지낼 사당을 건립하자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시조의 묘소가 어느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육의 건의는 수용되지 않았지만, 태조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 뒤에 시조의 사당인 조경묘(肇慶廟)를 건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1771년 10월에 이득리(李得履) 등 유생들은 왕실 시조에 대한 제사를 지내자는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건지산의 묘소는 위치가 부정확하여 묘역을 조성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천자는 천자대로, 사(士)와 서인(庶人)은 그들대로 시조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데, 국왕만 시조의 사당을 만들어 제사를 지낼 수 없는 것인가 반문했다. 이에 대해 영조는 시조의 위판(位版: 위패)을 종묘에 모시기는 어렵지만, 전주에 따로 사당을 만드는 것은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고구려와 신라의 시조도 사당을 세웠는데, 우리 시조의 사당을 세우지 않겠느냐?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살펴보면 부인의 성씨도 있고 그 선조도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사대부들은 시조를 살피는 것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물며 국조(國朝)의 시조이겠는가? 백두산은 조선의 조종산(祖宗山)으로 이제 그 사당을 세웠다. 하물며 국군(國君)의 시조이겠는가?

이튿날 영조는 삼국시대에 시조묘를 세웠듯이 경기전 옆에 사당을 세우게 하고 그 이름을 ‘조경묘’로 정했다. 또한 시조의 위판은 ‘시조 고 신라 사공 신위(始祖考新羅司空神位)’라 했고, 부인의 위판은 처음에는 ‘시조 비 신라 경주 김씨(始祖妣新羅慶州金氏)’로 했다가 얼마 후 ‘시조 비 경주 김씨 신위(始祖妣慶州金氏神位)’로 바꾸었다.(그림 1) 조경묘의 관리와 제사는 경기전과 역대시조묘의 선례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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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조경묘에 모셔진 시조 위판.
왼쪽에 ‘시조 고 신라 사공 신위(始祖考新羅司空神位)’, 오른쪽에 ‘시조 비 경주 김씨 신위(始祖妣慶州金氏神位)’가 보인다. 현재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있다.


위판이 만들어지자 글씨는 세손 정조가 썼다. 위판을 보관하는 독(櫝: 함)의 앞면에 쓰는 ‘전(前)’ 자는 영조가 먼저 쓴 후에 세손이 그 획을 보충했다. 영조는 조경묘의 위판을 경희궁의 자정전에 6일 동안 모셔놓고 매일 아침마다 그곳을 찾아가 절을 올렸으며, 위판을 전주로 모셔갈 때에는 서빙고 나루터까지 따라갔다가 위판이 강을 건널 때 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이때 영조는 왕실 시조의 사당을 건립한 것은 천 년 만에 있는 성대한 일이라고 했다. 후직(后稷)이 덕을 심은 지 천 년 만에 문왕(文王)이 주나라를 건설하고 그 제사를 지냈듯이, 이한이 덕을 심은 지 천 년 만에 전주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였다.

조경묘는 경기전과 같은 수준에서 관리되었고 관리 책임자는 전라 관찰사였다. 1868년(고종 5)에 전주 출신의 윤내형이 대역죄를 저질러 전주의 읍호(邑號: 읍의 칭호)가 강등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전주에는 경기전과 조경묘가 있었기 때문에 읍호의 강등을 피할 수 있었다. 1894년에는 동학운동이 일어나 전주성이 점령되었다. 이때 경기전에 있던 태조의 어진과 조경묘에 있던 시조의 신주는 위봉산성 행궁으로 피난을 갔다. 관찰사였던 김문현은 관리 소홀을 이유로 거제도에 유배되었고, 어진과 신주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모실 때에는 우의정 정범조와 예조판서가 현지로 파견되었다. 조선 왕실에서 경기전과 조경묘에 각별한 관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조경단의 건설




영조 대 이후 건지산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수목 관리는 여전히 형편없었다. 소나무 숲이 없어지고 백성들의 무덤이 늘어났으며, 산을 개간하고 쇠를 다루는 야장(冶場)까지 설치되는 상황이었다. 1782년(정조 6)에 정조는 사태가 심각하다고 보고, 전라 관찰사가 매년 봄가을에 건지산의 상태를 살펴 장계(狀啓)로 보고할 것과 예조에서 매년 낭관(郎官)을 파견하여 비리를 적발하라고 지시했다. 정조는 건지산과 전주성 안의 형세를 그림으로 그려 보고하라고 했다.

건지산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된 것은 대한제국이 건설된 직후였다. 1898년(고종 35)에 종실 출신의 이종건(李鍾健)이 상소를 올렸다. 태조 이후로 시조의 묘소가 있는 건지산에 수호군(守護軍)을 두어 나무를 베거나 짐승 기르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근래에 나무를 베어내거나 몰래 무덤을 쓰는 것이 점점 늘어난다는 지적이었다. 이종건은 몰래 쓴 무덤을 모두 파내고, 금지 표지를 한 경계를 다시 조사하여 바로잡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고종은 ‘일반 백성도 조상을 잘 모시려고 정성을 다하는데, 하물며 황제의 집안은 어떠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건지산을 보호할 방안을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1899년 초에 궁내부 대신 이재순(李載純)이 대책을 보고했다. 이전 국왕들이 묘소의 이름을 정하지 않은 것은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미 조경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으므로, 묘소의 구역 안에 제단과 담장을 쌓고 비석을 세워 영원히 보존하자는 건의였다. 이재순이 묘소를 정비하는 대신에 제단을 쌓자고 한 것은 그때까지도 묘소의 위치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고종은 건지산에 조경단(肇慶壇)이란 제단을 쌓고 비석을 세우되, 비석 앞면의 글씨는 황제가 직접 쓰고, 뒷면의 글은 직접 지었다.(그림 2) 비석의 글씨는 궁내부 특진관 윤용구(尹用求)가 썼다. 고종은 건지산에 제단을 쌓는 일은 선대의 국왕들이 미처 하지 못한 일이므로 자신은 선대의 뜻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겠다고 선언했다. 건지산에 조경단이 건설된 것은 1899년 5월 10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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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고종 친필의 조경단 비석과 탁본.
‘대한 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 썼다. 현재 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에 있다.


고종은 현지 사정을 살피기 위해 특진관 이재곤(李載崐)을 파견했다. 이재곤이 돌아와 시조의 묘소가 있는 터는 “주룡(主龍)을 타고 내려오다가 모래 언덕이 조금 높고 산세가 껴안는 듯한 형상이며, 그 아래에 잔디가 비단처럼 펼쳐져 있다”고 했다. 고종은 묘소의 봉분을 개축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으므로 묘소 위에 흙을 더하여 자리를 표시하고, 묘소 아래에 비석을 세우고, 정자각을 짓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고종은 마지막 순간까지 시조의 묘소를 확정하지 못했다. 다음은 이재곤의 보고이다.

위 무덤과 아래 무덤 사이의 거리는 17척(尺)이며, 그 사이에 또 세 군데에 무덤으로 짐작되는 곳이 있습니다. 사공(이한) 공 이하로 15대의 묘소가 [선원보략]에는 실려 있지 않으니, 지금 이 묘역 안은 땅을 파지도 못하고, 풀뿌리나 나무뿌리를 뽑아내지도 못했습니다.

조경단 일대에는 묘소로 보이는 곳이 많았고, 황실에서는 시조 이한에서 15대에 이르는 선조의 묏자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어느 것이 시조의 묘소라고 지정하지는 못하고 그 아래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 지내는 것으로 대처했다. 고종 황제는 황실의 역사를 새로 만들었지만 근거가 전혀 없는 날조된 역사는 아니었다.

1899년 조경단을 조성한 관리들은 황제 보고용으로 〈조경단 비각 재실 도형(肇慶壇碑閣齋室圖形)〉을 작성했다.(그림 3-1) 그림 상단에 재실이 있고, 하단 조경단 입구에 서 있는 홍살문, 그 우측 위쪽에 제단, 아래쪽에 비각, 오른쪽에 ‘의묘소(疑墓所)’라 기록된 시조의 묘소가 있다. 중하단의 우측과 좌측에는 흰 바탕에 비각의 전면도와 비신의 세부도를 그렸으며, 비석을 만들 때 사용한 석척(石尺)의 견본을 붙여 두었다. 시조 이한의 묘소라 확정할 수 없었기에 ‘의심스럽다’고 표현한 것이 눈에 뜨인다. 현재 장서각에는 〈조경단 비각 재실 도형〉과 한 세트를 이루는 〈완산 도형(完山圖形)〉과 〈전주 건지산 도형(全州乾止山圖形)〉(그림 3-2)이 함께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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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1 <조경단 비각 재실 도형(肇慶壇碑閣齋室圖形)>
1899년(광무 3), 63.2×49.5cm, 장서각 소장.
위에서부터 재실, 홍살문, 조경단, 비각, 의묘소가 보인다. 비각의 전면도와 비신의 세부도, 석척(石尺) 견본은 별도의 종이에 그려서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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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2 <전주 건지산 도형(全州乾止山圖形)>
1899년(광무 3), 61.2×49.6cm, 장서각 소장.
건지산 왕자봉(王字峯) 아래에 의묘소(疑墓所), 조경단, 비각이 있고, 왼편에 재실이 보인다.




또 다른 역사 만들기




고종 황제의 역사 만들기는 조경단의 건설에서 끝나지 않았다. 태조의 5대조인 이양무(李陽茂) 부부의 묘소를 정비하고 비석을 세웠으며, 태조의 4대조인 이안사의 집터가 있던 전주의 활기동과 삼척의 자만동, 태조가 황산전투에 승리하고 잔치를 열었다는 전주 오목대에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이 사실을 새로 편찬하는 [선원보략]에 모두 기록하게 했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조치는 삼척에 있는 이양무 부부의 묘소를 정비한 일이다. [조경단 준경묘 영경묘 영건청 의궤(肇慶壇濬慶墓永慶墓營建廳儀軌)]가 작성된 것은 조경단과 이양무 부부의 묘소가 함께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1898년에 이종건은 건지산의 관리를 건의하면서 삼척에 있는 이양무 부부의 묘소에 대해서도 주의를 환기시켰다. 세월이 오래되어 묘소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면서 묘소 가까이에 새롭게 조성된 백성들의 무덤이 많다는 지적이었다. 이에 대해 이재순은 종실 출신의 재상을 파견하여 경계 구역을 다시 정하고, 삼척군수가 매년 봄가을에 묘소를 살핀 후 조정에 보고하게 할 것을 제안했다.

고종은 특진관 이중하(李重夏)를 삼척에 파견하여 노동(蘆洞)과 동산(東山)에 있는 이양무 부부의 묘소와 삼척 관아에 있는 붉은 서대(犀帶: 무소뿔 띠)를 살펴보게 했다. 서대는 1393년(태조 2)에 태조가 삼척군을 삼척부로 승격시키면서 삼척부사에게 하사한 것으로, 영조가 이를 보고 기문(記文)을 작성하기도 했다. 고종은 이중하에게 묘소에 관한 문헌을 널리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이중하는 조사를 통해 삼척의 묘소는 세종 대에 처음 발견되었고, 성종 대에 묘역을 정비하다가 이내 공사가 중지되었다고 했다. 이양무 부부의 묘소라는 근거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중하는 선조 대에 강원 관찰사로 나갔던 정철의 보고, 현종 대에 삼척부사를 지낸 허목이 지은 서문과 기문을 근거로 할 때 이양무 부부의 묘소가 확실하며, [동국여지승람], [읍지], 숙종 대에 편찬된 [선원보략]에 관련 기록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고종은 두 묘소의 이름을 준경묘(濬慶墓)와 영경묘(永慶墓)로 정하고, 묘역을 정비한 후 비석을 세우게 했다. 또한 정자각, 전사청, 재실 같은 부속 건물도 건축하라고 명령했다. 건지산의 시조 묘소는 문헌적 근거가 분명하지 않아 제단을 세우는 데 그쳤지만, 삼척의 묘소는 근거가 분명하므로 선조의 묘소로 확정한다는 논리였다. 고종은 두 묘소에 세운 비석의 앞면 글씨를 쓰고, 뒷면의 글도 직접 지었다. 현재 삼척의 준경묘는 ‘전주 이씨의 실제 묘소로는 남한에서 최고(最古)의 시조묘’로 알려져 있다.

1899년에 있었던 고종 황제의 역사 만들기는 원래 전주에서 살았던 황실의 선조가 함흥에 정착하기 이전까지의 역사, 즉 전주에서 삼척에 이르는 역사적 흔적을 찾아내어 보존하고 이를 의례적 공간으로 발전시키는 조치였다. 이 조치가 있은 후 고종은 태조를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했고, 동짓날 환구단 제사에서 태조의 신위를 호천상제(昊天上帝)의 신위에 배향하는 배천대제(配天大祭)를 거행했다. 이는 국가 제사에 있어 황제국의 건설을 완전히 구현하는 행사였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14547416702273.jpg  http://www.thaehaksa.com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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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식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정조와 경기학인의 경학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조선 후기 경학사상 연구],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정조의 제왕학], [조선 후기 지식인의 대외 인식], [정조의 생각] 등이 있고, 공저로 [정조의 비밀 어찰: 정조가 그의 시대를 말하다], [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조선 국왕의 일생] 등이 있다. 최근에는 조선시대의 국가 전례 및 왕실 문화에 나타나는 예악(禮樂) 국가로서의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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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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