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운학문(雲鶴紋) 청자(靑瓷) - 고려의 영원한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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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6회 작성일 16-02-0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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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상감 운학문 매병(국보 제68호) 부분.



그림이 도자기로 들었다. 구름이 가볍게 뜬 사이로 흰빛 학이 유영하는 비취빛 하늘 그림, 때로는 둥근 테두리 창 밖으로 구름 위 높이 나는 학이 보이는 그림이다. 청자와 운학문(雲鶴紋: 구름과 학을 도안한 문양)은 우리 눈에 들어 뇌리에 박힌 ‘고려의 초상’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책과 교과서 등에 실린 사진으로 보다가 박물관에서 만나게 되는 청자. 우리가 고려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운학문 청자이다.



고려의 안정과 ‘비색 청자’의 완성




고려의 청자는 국가가 안정됨으로써 당시 중국이 주도하던 동아시아 도자 산업사에서 점차 뚜렷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10세기 중엽 수도 개경 인근의 경기도와 황해도 일원에서 본격적으로 청자가 제작되기 시작했고, 이후 전라도 강진이 요업(窯業: 흙을 구워 도자기 등을 만드는 공업) 중심지로 부각되면서 11~12세기에는 청자의 기술과 조형에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중국 남북방의 요업 기술과 장식 기법이 유입되면서 고려는 짧은 시간에 자기(瓷器) 제작 시스템을 갖추고 기술력을 향상시켰다. 12세기경에 이르면 그간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고려의 특징이 나타난다. 이미 생활 용기로 자리 잡은 청자는 오래전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어오던 도기(陶器)나 금속기의 형태와 기능상의 장점들을 적극적으로 응용하면서 도자(陶瓷)만의 새로운 경지를 만들어 나가게 되었다.

고려 인종 원년(1123) 개경에 온 송(宋)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수행 기록 [선화 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는 “고려 사람들은 도기 가운데 푸른빛을 띠는 것을 비색(翡色)이라 한다”고 하였고, 중국 남송의 태평노인(太平老人)의 [수중금(袖中錦)]에서는, “건주(建州)의 차(茶), 촉(蜀) 지방의 비단, 정요(定窯) 백자, 절강의 칠(漆), (……) 고려 비색 (……) 모두 천하제일이라, 다른 곳에서는 따라 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고 했다. 결국, 고려자기는 중국의 기술과 조형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지만, 이내 독자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비색 자기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청자에 운학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절정의 시기부터이다. 음각이나 양각, 상감 같은 여러 기법으로 완ㆍ발(鉢)ㆍ접시ㆍ병ㆍ합(盒) 등을 운학문으로 장식했다. 이 가운데 특히 운학문이 그려진 매병(梅甁)에서는 고려청자 절정기의 면모가 두루 보인다. 매병이란 몸체가 높고 크며 입이 작은 용기(容器)인데, 중국 송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져 고려와 일본의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성행하였다. 그 이름은 입이 매화꽃 같아 붙여진 것이라고도 하고, 혹은 이후 중국 원ㆍ명대(元明代)에 이처럼 생긴 병에 매화 가지를 꽂아 감상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면 송나라 소동파(蘇東坡, 1036~1101)의 글에 ‘매온(梅醞)’(매실주로 추정)이라는 말이 나오고, 여러 그림과 벽화, 그리고 중국의 무덤 내부에서 유사한 형태의 병이 술병이 놓이는 위치에 나타나 있어, 술을 담는 그릇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국보 68호,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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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
고려 13세기, 높이 42.1cm, 간송미술관 소장. 국보 제68호.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지금 전하는 고려의 청자 운학문 매병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간송미술관 소장의 국보 제68호 매병이다.(그림 1) 작고 나지막한 반구형(盤口形)의 짧은 구연(口緣: 입의 가장자리)은 둥글게 부푼 팽만한 몸체와 대조를 이루면서 탱탱한 긴장감을 준다. 몸체 아래쪽으로는 날씬한 곡선을 그리며 잘록하게 좁아졌다가 벌어져, 강하게 팽창된 어깨와 대조를 이루면서 위엄을 더해준다. 자토(赭土: 검은 흙)와 백토(白土)를 사용하여 몸 전체에 운학문을 상감했는데, 목 아래에는 백상감으로 두 줄 원문(圓文)을 두르고 그에 잇대어 여의두(如意頭) 무늬를 돌렸으며, 병의 바닥 쪽에는 흑백상감으로 두 겹 연잎[蓮瓣] 무늬를 넣어 장식하였다. 동체(胴體) 전면에 펼쳐진 운학문은 원(圓) 안쪽과 그 바깥 바탕에 각각 그려졌는데, 간격과 배치가 일정하여 매우 장식적이다. 원은 두 겹으로 안쪽은 검은색, 바깥쪽은 흰색으로 메워 상감하고, 어깨에서 몸체 아래까지 모두 6단을 서로 엇갈리게 배치하였다.

이 6단은 한 단에 7개씩, 총 42개의 원형 창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형 창 안에는 하늘로 비상(飛上)하는 학과 구름을, 그 바깥에는 지상으로 내려가는 학을 구름과 함께 새겨 넣어, 학의 움직임이 서로 사방으로 교차하는 형상이다. 자칫 평면적이고 단조로울 수 있는 기면(器面)을 효과적 배치로 확장시켜 깊이감과 아울러 입체감까지 더했다. 이처럼 정밀하게 계산된 듯한 문양의 구성과 배치는 고려의 또 다른 공예 기법인 나전칠기(螺鈿漆器)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단순한 장식에 머물지 않고 팽창감과 안정된 비례를 준 기법에서 고려인의 치밀함과 재기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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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청자상감 국화문 매병.
고려 13세기, 하북성 석가장시 후태보 소재의 사천택(1202~1275) 묘 출토.



사실, 도자기에서 몸체를 파내어 다른 색 흙을 메워 넣는 기법인 상감(象嵌)은 이미 중국 당나라(7~9세기) 때부터 나타난다. 하지만 이처럼 두 가지 이상의 다른 흙을 사용하여 상감한 것은 고려만의 특기였다. 다른 성질의 흙을 함께 사용해야 하는 상감 기법은 빚는 과정에서도 까다롭지만, 흙마다 수축ㆍ팽창률이 서로 달라 불에 굽고 식히는 동안 기면이 파이거나 튀어나와 완제품을 얻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런데 이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은 얕은 상감으로 요변(窯變: 도자기가 가마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일)을 최대한 줄이는 기법으로 완성도를 높였다.

그동안 이 매병은 12세기 고려의 대표작으로 알려져왔는데, 13세기 유적에서 이와 비슷한 양식을 가진 매병이 발견되어 그 제작 연대를 대략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 하북성(河北省) 석가장시(石家庄市) 후태보(后太保) 소재의 사천택(史天澤, 1202~1275) 무덤에서 발굴된 매병이 그것이다.(그림 2) 사천택은 쿠빌라이(1215~1294)가 원(元)의 황제가 되면서 재상에 등용된 인물이다. 그의 무덤에서는 중국 용천요(龍泉窯) 청자와 함께 고려에서 만든 청자상감 국화문 매병이 출토되었다. 질과 형태 등에서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매병보다 뒤지지만, 문양의 구성과 형식은 유사하다. 그런데 국보 68호인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은 강화도 고려산 인근에 있던 최충헌의 아들 최우(崔瑀, ?~1249)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에서 일본인 야마모토가 도굴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매병은 13세기 중반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사천택과 그의 가족묘가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쯤에 매장이 마무리되었을 것이라 추정되므로, 이와 조형이 유사한 간송미술관 소장품의 제작 시기를 가늠하는 데 참고할 만하다.



고려의 ‘운학’, 상서로움의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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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전(傳) 휘종,〈서학도(瑞鶴圖)〉.
북송 1122년, 요령성박물관 소장.



구름과 학은 무슨 의미였을까? 왜 그들은 도자기에 구름과 학을 저토록 자주 그려 넣었을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구름과 학은 길상(吉祥)을 상징한다. 일부 중국 회화에 나타나는 학 그림은 고려청자의 운학문 장식과 매우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북송의 마지막 황제인 휘종(徽宗, 1082~1135) 등이 그렸다고 하는 〈서학도(瑞鶴圖)〉가 그렇다.(그림 3) 1112년 정월 어느 날 갑자기 황도 변경(卞京)의 하늘에 구름이 몰려오더니 학들이 무리지어 궁전 위로 날아들어 한참 동안 머물자, 휘종은 상서로운 징조로 여기고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서학도>에는 궁정 지붕 위로 열여덟 마리의 학이 여러 모습으로 날고, 두 마리는 지붕 양끝에 앉아 있다. 다른 배경 없이 구름 위로 날고 있는 학들 가운데, 날개를 펼치고 다리를 수평으로 쭉 뻗어 나는 모습은, 고려청자에서 유유히 날고 있는 학과 비교된다. 하늘을 나는 학은 중국 고대부터 선정(善政)의 상징으로 활용되어왔기에, 중국 송 황실도 이를 통해 의장화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이처럼 선학(仙鶴)의 이미지는 상서(祥瑞)로움으로 가시화되었다.

구름 사이를 나는 운학과는 다르지만 하북성 선화(宣化) 지역에서는 요(遼)나라 시대 무덤이 여러 기 발굴되었다. 거란의 상류층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무덤들이다.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엽에 조성된 이 무덤 벽화들에는 그들의 생활 모습뿐만 아니라 학(鶴)이 그려져 있다. 장광정 묘(1093), 장문조 묘(1093) 등에는 물풀과 붉은 꽃 사이로 노니는 학이 그려졌고, 6호 묘 후실 서남 벽화에는 물풀과 꽃 사이에서 부리로 땅을 쪼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장세고 묘(1117)에는 병풍 같은 화면에 꽃과 새들이 있는데, 그중 학은 괴석이나 꽃 등과 함께 그려졌다. 물론 요대(遼代) 벽화에 그려진 다양한 자세의 학들과, 여백이 넓은 화면 위에 구름과 학으로 이루어진 고려청자의 운학문을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그러나 11세기 전반기에 매장이 이루어진 요나라의 진국(陳國) 공주와 부마 합장묘 전실(前室) 동벽과 서벽 상단에는 각각 운학문이 채색화로 그려져 있고,(그림 4) 최근 발굴 성과가 알려진 요령성(遼寧省) 서북부 부신(阜新)의 몽골 자치현 관산(關山) 지역의 요대 무덤에서도 선명하고 상세한 운학문이 문의 윗부분에서 발견되었다.(그림 5) 여기에서 운학문이 상서로움의 상징으로 어느 정도 공유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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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진국 공주묘 벽화 운학문.
요나라 1018년경, 하북성 선화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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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관산(關山) 요묘(遼廟) 벽화 운학문.
요나라 11세기, 요령성 관산 소재.



이 밖에도 송ㆍ원대 도자기, 남송대 금속기 등에서도 운학문 장식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동안 고려의 맑은 하늘과 고려인의 고운 심성에 종종 비유되곤 했던 청자 운학문은 다른 무늬와 마찬가지로 중국과의 문화적 교류 속에서 자리 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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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은제 매병.
남송 12세기 말~13세기 초, 높이 20.5cm, 팽주박물관 소장. 사천성(四川省) 팽주시 금은기 교장(窖藏) 출토.



중국 문화와의 교류는 특히 사천성(四川省) 팽주시 금은기 교장(窖藏: 전란 등이 일어나 위급할 때 움을 파고 집기나 물품을 넣어두던 곳)에서 출토된 남송대(1127~1279)의 새 무늬 은병(銀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그림 6) 이 병은 20.5cm의 매병으로 표면에는 새와 구름이 음각[彫金]되어 있다. 새는 깃털 등이 세심하게 표현되었고, 머리와 다리는 한 방향으로 모두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구름과 새를 매병의 전면에 일정하게 배치한 구도는 고려청자에서 보이는 운학문과 매우 유사하다. 팽주에서 함께 출토된 많은 금은기 가운데는 고려청자와 동일한 기종과 문양을 지닌 것들이 많아 그 연관성 또한 염두에 둘 수 있다.

그렇지만 중국 도자기에서 구름과 학이 어우러진 운학문을 찾기는 어렵다. 송대 자주요(磁州窯)에서는 장식 문양의 하나로 학 그림이 사용되기는 했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거나, 물가에 학이 서 있는 장면이 도자기, 베개 등에서 보이기는 하나 그 수가 많지 않다. 송대 요주요(耀州蓔) 청자완에는 각화(刻畵) 기법으로 입에 무엇인가를 물고 있는 쌍학이 새겨져 있는데, 이 역시 흔히 발견되는 무늬가 아니다. 더구나 입에 무엇인가를 물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함조문(銜鳥文) 혹은 색조문(咋鳥文)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중국 송대 이래 학에 대한 상징이 굳건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도자기에 학 무늬가 즐겨 사용되지 않은 점으로 볼 때, 고려청자가 중국 도자기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어느 일정 시기에 중국에서 회화나 도안 등으로 전래된 운학의 이미지가 고려를 통해 굳건히 그리고 널리 자리 잡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운학이 청자에 빈번하게 그려진 점은 고려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조선으로 계승된 운학문




그래서였을까? 운학문은 흥미롭게도 조선초까지도 청자의 장식 소재로 애용되었다. 상감 운학문은 일일이 조각하는 방법 외에도, 학이나 구름 무늬를 도장으로 만들어 찍고 그 부위를 메우는 인화(印花) 기법 위주로 바뀌어갔다. 그러다 보니 바람 위로 꼬리를 끌며 풍성하게 나는 구름은 그저 동글동글한 구슬더미나 빗방울처럼 바뀌었고, 하늘을 가르는 학의 수려한 날개와 늘씬한 다리는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변해갔다. 전성기 운학문에서 볼 수 있는 치밀한 조각 솜씨나 사실적 세부 표현은 생략되거나 점차 무뎌졌다. 하지만 상감 장식이 중요한 문양으로 비중 있게 취급된 것은 여전했다.

조선 왕실의 백자 위주 사용 정책으로 청자는 급속한 변화를 맞지만, 가마터나 생활 유적 등에 대한 발굴 조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소량이지만 청자가 제작되었고, 때로는 외국산 청자들이 수입되기도 했다.

조선에서 고려청자에 대해 관심을 표현한 글이나 수장의 자료는 대체로 18세기 이후의 역사서와 문집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19세기 이후로 증가한다. 조선후기 사람들에게 고려청자는 격조 있고 깊이 있는 고급 물건, 혹은 사사로움이 끼어들 수 없는 진품 등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아마도 고려 사적이 기록된 역사서나 문집 같은 텍스트를 통한 이해와, 전해지는 실물에의 경험이 합해져 일정한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 것이지 싶다. 특히 중국으로부터 서적과 문물이 급속히 전래되는 조선후기를 거치면서, 중국에서 발간된 고려 관련 기록들에 관심이 촉발되어 고려청자의 이미지가 확고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의 문인들이 본 운학문 청자




조선의 기록에서 우리는 고려의 ‘운학문’ 청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조선후기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문집인 [연경재 전집(硏經齋全集)]에는 고려말의 유학자 안향(安珦, 1243~1306)의 개성 옛 집터에서 얻게 된 한 말들이의 청자 항아리에 대해 쓴 글이 있다. 성해응은 1788년 정조에 의해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된 후 각종 편찬 사업에 종사한 인물로, 당시 그와 교유한 사람들 가운데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같은 북학파 인사들이 있었다. 그는 벼슬을 그만둔 후 포천에 머물며 연구와 저술을 지속하였는데, 이 기간에 정조의 명에 따라 책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성해응은 이 항아리의 용도와 크기 등을 서술하며 의례용기로써 쓰임이 법도와 격식에 맞다고도 했다.

흥미롭게도 성해응이 기록한 이 청자 항아리에 대한 세세한 형상은 조선말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 〈화동옥삼편(華東玉糝編)〉 ‘고려기(高麗器)’에 나타나 있다.

두실[斗室: 심상규(沈象奎, 1766~1838)] 댁에는 옛날 고려시대의 비색(祕色) 자기 항아리를 간직하고 있는데, 옛날 안향의 집터에서 습득한 것으로서 보배로 여길 만하다. 양연(養硏) 노인[신위(申緯, 1769~1845)]이 이 그릇을 빌려다가 8년간 쓰고 되돌려 보냈다. (……) 이 고려자기는 안향 선생의 옛 물건으로, 날아가는 여섯 마리 학과 피어오르는 구름 열여덟 송이를 그렸으며, 모두 분청(粉靑)이다.

항아리를 빌려간 신위(申緯)도 그 내용을 글로 남기면서 그 항아리의 생김새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전에 고려 비색 항아리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 꽃송이가 분청색 위에 선명히 드러나고, 나는 새와 구름의 기운이 신선 같구나. (인용자 주: 여기서 ‘분청색’이란 뽀얗고 고운 청자 빛깔로, 특히 중국에서 송ㆍ원시대의 용천요 청자를 지칭할 때 사용하던 용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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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
고려 13세기, 높이 39.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앞서 소개한 성해응의 [연경재 전집] 내용과 연결을 지어보면, 결국 고려말 안향의 집에 있었던 운학문 청자 항아리는 나중에 심상규(沈象奎)의 집에 전세되어 보관되어 왔으며, 이를 다시 자하(紫霞) 신위가 8년이나 가져다 쓰고 되돌려주었는데, 이유원이 그것을 본 것이다. 심상규와 성해응, 이유원, 신위가 함께 살아 있던 기간은 1814년부터 1838년 사이이고, 특히 1845년에 죽은 신위가 8년간 지니다 심상규에게 돌려주었다면, 19세기 전반에 일어난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특히 항아리의 문양을 설명하면서 여섯 마리 학과 열여덟 송이의 구름으로 장식되었다고 하니 운학문이 그려진 매병을 설명하는 내용이라 추정된다. 현전하는 유물들 가운데 이와 비슷한 사례를 살펴보면,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의 운학문 매병이나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운학문 매병 등이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이 그중 가장 비슷하다.(그림 7)

[임하필기] 〈벽려신지(薜荔新志)〉에는 “일본 사람들은 고려자기를 좋아하여 값을 아끼지 않는다. (……) 옛 무덤을 파 들어가다가 왕릉에서 옥대(玉帶)를 발굴하고 또 운학(雲鶴)이 그려진 자기 반상기 한 벌을 발굴하였는데, 값이 700금(金)이나 되었다”라는 대목도 나온다. 운학문 자기를 발굴한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갑신년(甲申年)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 것과 그의 문집이 출간된 시기를 가늠하면 19세기 전반기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기록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운학문 청자가 이미 일본인들에게도 인기가 좋았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원한 고려의 초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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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황인춘, 청자상감 운학문 병.
1942년, 개인 소장.



근대기에 청자 수집의 열풍이 불었고, 간송미술관 소장 국보 68호 매병도 그때 세상에 알려졌다. 이 매병이 주인을 찾게 된 것은 1935년,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이 30세 때의 일이다. 야마모토에 의한 최우의 무덤 도굴로 세상에 나오게 된 이 매병은 고려청자 거간(居間: 사고파는 사람 사이에서 흥정을 붙이는 일)으로 유명했던 스즈키 다케오(鈴木武雄), 대구의 수집가 신창재(愼昌宰)를 거쳐 다시 경성의 골동품상 마에다 마치로(前田才一郞)에게 들어갔다고 한다. 그때 골동상인 신보기조(新保喜三)에 의해 간송에게 이 매병이 소개된 것이다. 명품을 알아본 간송은 망설임 없이 2만 원(당시 경성의 8칸짜리 기와집 20채 값, 현재 서울의 집값을 평균 3억이라 한다면 그 20배 정도로 추정)을 지불하고 소장하게 되었고,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망국과 도굴과 전란의 고단한 세월을 견딘 끝에 세상의 빛을 받은 것이다.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고려식 청자는 끊임없이 재현되었다. 특히 일본 자본으로 세워진 ‘한양고려소(漢陽高麗燒)’, ‘삼화고려소(三和高麗燒)’ 등 청자 재현 공장에서는 운학문이 새겨진 상품들이 제작되었다. 뿐만아니라 한국인으로 개성에서 공방을 열었던 도공 황인춘(黃仁春, 1894∼1950), 이천에 가마를 열었던 해강 유근형(柳根瀅, 1894~1993) 등의 작품에서도 운학문 상감 청자들이 주요 품목으로 만들어지면서 그 전통이 현대로 이어졌다.(그림 8)

날렵하고 매끄러운 도자기의 몸체는 공예적 치밀함으로 빈틈이 없다. 하지만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천공(天空)으로 만학(萬鶴)이 날아든다. 흩어질 듯 모이면서 고려의 하늘을 에워싼다. 사라진 고려는 청자 위 운학문으로 떠올라 변치 않는 징표로 기억될 것이다. 영원한 고려의 초상으로 …….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14547418090563.jpg  http://www.thaehaksa.com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장남원 | 이화여자대학교 부교수
한국과 중국, 일본 도자기의 제작과 쓰임에 관심이 많다. 특히 도자기의 양식사 외에 수용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을 읽어내는 데 노력하고 있다. 저서 및 논문으로 [고려중기 청자 연구], 〈고려 초ㆍ중기 자기(瓷器) 상감 기법의 연원과 발전〉, 〈조선시대 상장(喪葬) 공예품의 의미와 구성〉, 〈고려청자의 사회적 기억 형성 과정으로 본 조선후기의 정황〉등이 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인문대학 미술사학과에서 한국 및 중국, 일본의 도자 및 공예사를 가르치고 있다.


발행2013.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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