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파스타, 우아하게 혹은 걸신들린 듯이 - 스파게티를 먹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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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8회 작성일 16-02-0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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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타는 다양한 길이와 넓이로 잘라 만든 국수에 여러 종류의 소스를 끼얹은 요리를 말한다.<출처: gettyimages>



파스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파스타다. 파스타는 다양한 길이와 넓이로 잘라 만든 국수에 여러 종류의 소스를 얹은 요리를 말한다. 펜네, 마카로니, 스파게티, 링귀네, 푸실리, 라사냐와 같이 모양에 따라 이름도 다채롭고, 다른 재료를 섞으면서 라비올리와 토르텔리니 같은 변형도 나온다. 이름이 다양한 만큼이나 모양과 맛, 색깔, 냄새도 다양하다. 현재 파스타의 종류는 수백 가지에 이를 테지만, 가능한 종류는 그보다 더 엄청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파스타를 사랑한다. 파스타는 세계 어디에서나 사랑받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가야 제맛을 볼 수 있는 비교적 값비싼 음식으로 인식되지만, 처음 생겨나던 18세기 이탈리아에서 파스타는 서민들이 길거리에서 게걸스레 먹어대던 일상의 기본 식단이었다. 한때 파스타라는 말은 그저 반죽 덩어리를 의미했으며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가리키게 된 것은 18세기부터였다. 여기에는 인구의 증가, 생산과 저장 기술의 발전, 그리고 식재료의 다양화와 같은 요인들이 작용했다.



마카로니는 곧 ‘완전과 우아’라네




이탈리아 요리는 고대 에트루리아(Etruria: 이탈리아 중부에 있던 고대의 국가로 후에 로마 제국에 흡수됨)와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탈리아 요리의 대명사로 알고 있는 파스타와 피자 같은 음식들이 이탈리아에 정착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반도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이탈리아 요리는 주변 지역의 요리법과 식재료를 받아들이면서 더욱 다양하고 섬세해졌다. 그런 과정 속에서 파스타는 피자와 함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18세기 유럽에서는 계몽주의 국가 프랑스의 영향력이 단연 지대했으며, 이탈리아는 그에 가려 역사의 그늘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요리에 관해서라면, 이탈리아는 프랑스가 프랑스 요리법 책자를 발간하고 보급하면서 구축한 중앙의 통일된 주류 양식에서 벗어나 지역적 특성을 발전시켜나가고 있었다. 18세기만 해도 ‘이탈리아’라는 용어가 정치적 구체성을 갖지 못했지만, 요리, 즉 입맛에서는 ‘이탈리아’라는 개념이 성립되었다. 입맛의 개별성과 요리법의 일반성. 이탈리아 요리는 전자의 경우를 살리면서 형성된 것이다. 파스타는 그런 역사적 환경에서 이탈리아의 맛으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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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타가 언제 어디서 생겼는지에 대한 정보는 확실하지 않다. 확인 가능한 최초의 언급은 기원전 1000년 경으로 거슬러 오르는데, 그리스어 ‘라가논’에서 오늘날의 ‘라사냐’라는 용어가 나왔다.
<출처: gettyimages>



파스타의 역사는 길고 복잡하며 신화와 모순으로 가득하다. 그만큼 파스타가 언제 어디서 생겼는지 확실한 정보가 부족하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음식으로 자리를 잡은 과정도 단순하지 않다. 파스타의 기원에 관한 것으로 널리 퍼진 설은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가 13세기에 동아시아까지 여행하고 돌아오면서 이탈리아에 파스타를 들여왔다는 것인데, 이는 완전히 잘못된 설로 판명되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파스타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기원전 1000년 경 고대 그리스 문명으로 거슬러 오른다. 그리스어로 ‘라가논(Laganon)’이라는 용어는 반죽으로 만들어 길게 자른 형태의 평평하고 넓은 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기원전 8세기 무렵 그리스인은 이탈리아로 이 반죽을 들여왔고, 라틴어로 ‘라가눔(Laganum)’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오늘날 파스타의 한 종류인 ‘라사냐(Lasagna)’라는 용어가 나왔다. 라가눔이라는 말은 키케로와 호라티우스 같은 로마 작가들이 언급했고, 당시 가장 널리 알려진 미식가 마르쿠스 가비우스 아피키우스는 가장 최초의 요리책이라 할 만한 [요리에 대하여(De re coquinaria)]에서 라가눔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후 14세기에는 보카치오(Boccaccio, 1313~1375)의 [데카메론(Decameron)]에서 마소가 환락의 나라를 묘사하는 대목에서 파스타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마소는 그런 돌들은 대부분 베를린초네라는 바스크인들의 땅에 있다고 대답했어요. 그곳은 사람들이 벤고디라고 부르는 지방에 있는데, 그곳에서는 소시지로 포도나무를 묶고 한 푼만 있어도 거위 한 마리를 살 수 있으며 거기에 병아리를 덤으로 준다면서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파르메산(産) 치즈가 산처럼 쌓여 있고, 그 산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일은 할 것도 없이 마카로니와 라비올리를 만들어 닭을 삶은 수프에 넣어 요리하면 되고, 그걸 아래로 던지면 먹고 싶은 사람이 얼마든지 먹는다고도 했지요. 또 근처에는 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진짜 백포도주 강이 흐르고 있어서 아무나 실컷 마실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어요.”


- [데카메론], <여덟번째 날 세번째 이야기>

이어 16세기에 들어 파스타는 이탈리아의 식생활에 본격 등장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일상의 필수적인 음식은 아니었다. 파스타는 장식용으로 쓰이거나 디저트로도 만들어졌으며, 비싼 가격 때문에 부유층만 소비할 수 있었다. 실제로 1770년대까지 마카로니(Macaroni)라는 말은 영국에서 ‘완전과 우아’를 의미하는 단어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영국에서 “그게 마카로니야”라는 속어는 대단히 좋은 것을 묘사할 때 쓰였다.

18세기 들어 파스타가 대중적인 음식으로 등장한 것은 건조 기술 덕분이었다. 이전에 파스타의 보존 기간은 길어야 삼사 일을 넘지 못했지만, 말려서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게 되자 파스타의 대량 생산과 유통이 가능해졌고 그에 따라 가격도 엄청나게 저렴해졌다. 특히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아말피와 같은 해양 도시에서 건조 파스타를 찾는 수요가 급증했다. 이들 도시에서 이뤄지는 무역량이 증가하면서 장기간 항해하는 배에 쉽게 저장할 수 있는 유형의 음식을 개발할 필요가 생겨난 것이다. 요즘도 시장 한구석에서 판매되는 신선한 파스타를 볼 수 있지만, 건조 파스타는 단연 파스타의 전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파스타를 먹는 길거리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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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종류의 파스타. 파스타의 한 종류인 '마카로니(좁고 짧은 통 모양의 파스타)'라는 말은 1770년대까지 영국에서 ‘완전과 우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출처: gettyimages>



18세기 파스타 제작 기법의 최고 안내서는 파리의 파스타 제조업자인 폴 말루앵(Paul-Jacques Malouin)이 1767년에 발간한 요리책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파스타가 국경을 넘어서는 대중적인 음식으로 퍼졌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또한 프랑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던 당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요리법을 통일했고, 이탈리아는 그에 저항했다.

어쨌든 말루앵의 책은 건조 파스타가 새로운 기술에 힘입어 극적으로 등장한 배경을 설명해준다. 당시 파스타 제작 기술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요리법에 머물러 있었고, 그 종류는 주로 베르미첼리, 마카로니, 라사냐의 세 가지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말루앵은 파스타의 범주를 한껏 넓혔다. 그는 분명 나폴리에서 다양한 종류의 파스타를 만드는 기술을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책에 의하면, 당시 나폴리에서는 30가지 이상의 파스타가 생산되고 있었다.

파스타가 18세기에 이탈리아의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은 곳은 단연 나폴리였다. 18세기 후반 나폴리는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본토 남부를 포괄하는 왕국의 수도이자 40만의 인구를 자랑하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로 떠올랐다. 천성적으로 소리와 색에 민감했던 예술적 기질 탓에 나폴리 사람들은 파스타를 맛뿐만 아니라 전시의 대상으로 삼았다. 비단 나폴리뿐만 아니라 지중해의 강렬한 빛과 그 아래서 성장한 식물은 저마다 원색을 자랑한다. 요즘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괴테(Goethe, 1749~1832)는 [이탈리아 기행]에서 나폴리 장사치들의 바구니에 담긴 음식 재료들의 형형색색에 반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괴테의 묘사에 의하면 당시 나폴리에서는 익힌 마카로니를 어디서든 팔았고, 아주 싼 값에 어느 가게에서나 살 수 있었다. 괴테는 이탈리아 식단 역사의 가장 중요한 발전을 목격한 것이었다. 사실 바로 그 전까지만 해도 나폴리 사람들은 마카로니와 친하지 않았다. 17세기에 나폴리는 브로콜리와 양배추의 도시였다. 그래서 18세기로 접어들 때만 해도 나폴리 사람들은 “잎을 먹는 자들”로 묘사되었다. 채소와 과일, 그리고 나폴리 앞바다가 풍부하게 제공해주던 생선이 그들의 주된 식단이었다. 그러나 나폴리 사람들은 이제 “마카로니를 먹는 자들(mangiamaccheroni/maccheroni)”이라 불리게 된다. 부드럽게 구부러진 해안의 푸른 햇살로 연기를 피워올리고 밤이면 번쩍거리며 불을 내뿜는 베수비오 산과 함께 파스타는 나폴리의 상징이 되었다. 1700년에 나폴리에는 마카로니를 파는 가게가 60여 곳이 있었고, 1785년에는 그 수가 300곳까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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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타가 처음 이탈리아의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은 곳은 나폴리였다. 채소와 과일, 그리고 신선한 해산물을 곁들인 파스타는 18세기 무렵 나폴리의 상징이 되었다. <출처: gettyimages>



처음에 파스타 제조업자는 긴 벤치에 앉아서 발로 밟아 파스타를 반죽했다. 나폴리의 왕 페르디난도 2세는 위생 문제를 비롯해서 미관상으로도 좋지 않았던 이런 식의 제조법을 싫어했고, 체사레 스파다치니라는 유명한 기술자를 불러들여 개선책을 강구하도록 했다. 그 결과 발로 반죽하던 것이 기계로 대체되었다. 18세기 나폴리 인구는 엄청나게 증가했고 이에 따라 음식 공급 문제가 심각해지던 상황에서 반죽 기계의 보급은 파스타를 훨씬 낮은 가격으로 생산하도록 해주었다. 이에 따라 수공 파스타의 전통은 점차 사라졌고, 19세기 산업 혁명으로 파스타는 중산 계층의 필수적인 일상 식단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바다에 근접한 도시인 나폴리에서는 파스타를 쉽게 말릴 수 있었고, 건조된 파스타는 오랜 시간 보관할 수 있었다. 기계도 없고 위생적인 시설도 갖추고 있지 않던 가정에서는 이제 파스타를 따로 만들 이유가 없었다. 그저 싼값에 대량으로 유통되는 파스타를 구매하기만 하면 되었다. 18세기 나폴리에서 파스타는 이미 대중의 음식이었다.

나폴리의 ‘마카로니를 먹는 자들’ 중 대표적인 존재는 라차리(lazzari, 요즘으로 말하면 홈리스(Homeless))였다. 이들은 무엇보다 게을렀는데,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무기력을 명예의 상징으로, 육체노동을 그들 존엄성의 위협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런던이나 파리의 하층민과 달리 종교적인 신앙심이 강했고, 특히 나폴리의 수호성인 산 젠나로(San Gennaro)를 열렬히 떠받들었다. 그들은 유리병에 보존된 그의 마른 피가 신비롭게 액화되어 도시를 재난에서 보호할 것으로 믿었다. 그들은 술에 취하지 않았고 반란이나 폭동에 가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순진무구한 삶의 기쁨을 누렸다. 그들에게는 파스타를 먹을 때보다 더 즐거운 때가 없었다. 엄청난 양의 마카로니가 그들 실존의 중심 목표였다.그들은 하루 동안 넉넉히 마카로니를 먹을 돈 몇 푼을 벌면 내일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라차리의 형성 과정에는 사회적, 경제적인 배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안빈낙도의 삶을 향한 염원이 그들의 파스타에 스며들어 있지 않았을까. 1763년과 그 이듬해에 발발한 대기근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죽어가고 외국 지배 세력의 억압과 수탈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라차리는 점차 마피아와 비슷한 집단으로 변해갔지만, 여전히 폭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기근 동안 3만에서 5만으로 추정되는 라차리들은 죽어가면서도 당국 청사를 습격하기보다는 성 젠나로 상 앞에 엎드려 구원을 호소했다.



어떤 식탐도 만족시키는 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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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 마냐스코, 〈풀치넬라와 콜롬비나의 만찬(The Supper of Pulcinella and Colombina)〉
제작연도 미상, 캔버스 위에 오일. 78.1×105.1 cm, 노스캐롤라이나 미술관 소장.

알레산드로 마냐스코(Alessandro Magnasco, 1667∼1749)의 그림에서 풀치넬라는 부엌에서 손으로 스파게티를 먹으며 빈둥거리고 있다. 늘어질 듯 튀어나온 배는 그의 왕성한 식욕을 보여준다. 그가 앉은 주변에는 게으른 하인들이 있고, 거기에 섞여 있는 작은 풀치넬라들도 보인다.



거리에서 파스타를 먹는 나폴리 대중의 곤궁하지만 낙천적인 모습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콤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의 인물들 중 한 부류인 풀치넬라(Pulcinella)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콤메디아 델라르테는 줄거리가 단순하고 등장인물들이 정형화되어 서민들이 아무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식으로 길거리에서 상연된 연극이었다. 풀치넬라는 헐렁한 튜니카(tunica: 고대 그리스 로마 사람들이 입던, 소매가 짧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겉옷)차림에 길고 뾰족한 모자, 구부러진 코가 툭 튀어나온 검은 가면을 쓴 전형적인 모습으로 친숙했지만, 무엇보다 파스타를 엄청나게 먹어대는 이미지로 인기가 있었다. 그에 따라 파스타를 먹는 풀치넬라(독일에서 그려진 풀치넬라는 주로 소시지를 먹는다)를 그린 그림들이 등장했고, 또 그런 그림이 들어간 주전자와 물병이 인기를 끌었다.

풀치넬라라는 용어는, 부리처럼 생긴 코가 달린 그의 가면이 연상시키듯, “어린 칠면조나 닭”을 의미한다. 1628년 나폴리의 배우 실비오 피오릴로가 창안한 풀치넬라는 프랑스와 영국까지 알려졌다. 1734년에 출판된 콤메디아 델라르테의 한 대본에서는 풀치넬라가 다음과 같이 언급돼 있다.



풀치넬라는 코비엘로에게 자기가 아버지가 태어나기 전에 태어났다고 설명한다. 코비엘로가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하자 풀치넬라는 아버지가 톨레도에서 길을 걸으면서 깜박 졸았는데 그때 달리는 마차에 거의 치일 뻔했다고 대답한다. 마부는 지나가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어제 태어난 놈이냐!” 이 일이 일어난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풀치넬라는 자기가 아버지보다 먼저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게으르고 약삭빠르고 방자한 하인으로 등장하는 풀치넬라는 유쾌해 보이지만 격한 성격도 지니고 있다. 언제나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사회 질서를 얕잡아 보고 주인을 갖고 논다. 그의 식탐은 전설적이다. 그는 파스타 냄새를 대단히 잘 맡고 또 파스타를 끔찍이도 즐긴다. 파스타가 주어지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얼마만큼의 양이든, 다 해치우고 만다. 그런 풀치넬라의 모습은 그림과 형상으로 다양하게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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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그리치, <스파게티 먹는 사람들(The Spaghetti Eaters)>1750, 높이 14.3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제작자 미상, <스파게티 먹는 사람들(The Spaghetti Eaters)>1780, 높이 21.9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제작자 미상, <풀치넬라(Pulcinella)>1759∼1780, 높이 25.4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1750년 경 주세페 그리치(Giuseppe Gricci, 1700∼1770)가 만든 1번 자기에는 ‘스파게티 먹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풀치넬라는 한 손으로 배를 꼭 부여잡고 다른 손으로는 마카로니가 담긴 통의 손잡이를 쥐고 있다. 파스타 맛을 보려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반쯤 먹고 나서 더 못 먹겠다고 하는 것인지는 알기 힘들다. 벗어버린 모자가 파스타 통 옆에 뒹군다.

1780년 경 제작된 2번 도자기는 풀치넬라가 세 명의 작은 풀치넬라와 함께 스파게티를 먹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린애들은 마치 어미 새가 물어다 준 먹이를 받아먹는 어린 새처럼 보인다. 작은 풀치넬라들도 풀치넬라와 똑같은 의상을 입었다.

풀치넬라 혼자서 스파게티를 먹는 모습을 담은 3번 자기를 보자. 여기서 풀치넬라는 오른 손으로 스파게티를 한 움큼 쥐어서 입을 크게 벌리고 위에서부터 넣는 자세를 취한다. 오른 손을 높이 쳐들었기 때문에 왼손은 흘러내린 소매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곁에는 스파게티를 담은 통이 아마 보온을 위해서인 듯 천으로 덮여 있고, 파르미자노 치즈가 체와 함께 놓여 있으며 포도주 병도 보인다. 특이하게 가슴에 고추를 달고 있다. 아마 그의 괄괄하고 예측 불가능한 기질을 상징하는 것 같다.

18세기에 파스타가 그림이나 자기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파스타가 대량 보급되면서 서민들이 아무 데서나 먹을 수 있는 요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풀치넬라와 같이 서민적이고 낙관적인 인물이 파스타를 손으로 게걸스럽게 먹는 장면에서 저들과 비슷한 경험을 해봤을 나폴리 대중은 깊은 공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이탈리아 요리의 대명사 파스타는 중앙의 정통 요리에 대한 지역의 서민 음식으로 출발하여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18세기의 맛'은 한국18세기학회의 기획으로서, 문학동네와 함께 합니다. 1454741828429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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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문학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로 비교문학과 특히 단테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단테 신곡 연구]와 같은 비교문학 연구서들을 펴냈고, [신곡]과 [데카메론]을 비롯해 이탈리아 문학과 철학 책들을 번역했으며, 문명 교류의 공간으로서 지중해에 관심이 많다. 현재 문학과 예술의 상호관계에 대한 비교문학 저서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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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8세기의 맛: 취향의 탄생과 혀끝의 인문학 2014.02.28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18세기를 다채롭고 참신한 시각으로 연구하는 한국18세기의 학회의 첫 프로젝트 결과물, <18세기의 맛>이 책으로 나왔다. 18세기의 '맛'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흥미로운 단면을 맛깔나게 서술했다. 23명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18세기의 동서양을 뒤흔든 맛과 그 맛에 얽힌 흥미로운 현상을 살펴보는 일에 동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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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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