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굶주린 백성에게 솔잎을 - 사람 살리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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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7회 작성일 16-02-06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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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살리는 구황 ‘식물(食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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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尹斗緖), <채애도(採艾圖)>
제작연도 미상, 비단에 수묵, 25 x 30.2 cm, 해남 녹우당(綠雨堂)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봄날 두 여인이 나물을 캐고 있다.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조선시대에는 봄만 되면 대부분의 백성들이 배를 곯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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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보릿고개’는 추억의 단어일 뿐이다. 하지만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조선시대에는 봄만 되면 대부분의 백성들이 배를 곯아야 했다. 춘궁(春窮)의 고통은 인민들의 생활에 늘 가까이 있었다. 어쩌다 심한 기근이나 역병이 돌기라도 하면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구황(救荒)’의 본래 뜻은 천재지변 등 위급한 상황에 대응하는 것이었지만, 조선시대의 현실은 항상 구황식물을 필요로 했을지도 모르겠다.

국가가 예비곡식을 준비해 두었다가 황년기세(荒年飢歲: 수재와 한재 등으로 곡식이 여물지 않은 해)에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배곯지 않게 한 진대(賑貸)야말로 구황 제도의 핵심이다. 이미 [주례(周禮)]에 진대의 정신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던 만큼, 삼국시대 이래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구황의 제도들이 점차 완비되었음은 물론이다.

조선 정부는 곡식을 마련하여 기근이나 춘궁기에 곡식을 제공하는 이외에 1664년(현종5) 각 읍마다 주자의 사창(社倉) 제도에 따라 지방민들이 구황 물자를 준비하여 흉년에 대비하도록 명했다. 주자의 사창이 지역민의 자율적 구제 활동이었다면 조선은 이를 수령에게 맡겨 국가 주도로 시행하였다. 두 번의 전쟁 끝에 이상기후마저 잦았던 17세기 중엽, 조선의 구황 대책은 매우 급박했다. 수령은 매년 관할 지역의 읍 단위마다 진휼곡(賑恤穀: 기근에 대비하여 비축한 곡식)을 비축하도록 명하였고 이를 연말에 각 도의 감영에 보고했다. 다시 감영은 진휼곡 비축 상황을 비변사에 보고하였고, 이를 기초로 국가는 진휼곡의 전국적 상태를 파악하여 기근에 대비했다.([만기요람] 재용편 5 荒政 ‘賑恤總論諸倉賞罰’ )

국가가 주체가 되든 아니면 지역민이 중심이 되든, 진휼곡을 비축했다가 이를 풀어 기민을 구제하는 일은 구황 대책의 기본이었지만, 진휼곡이 항상 넉넉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주곡(主穀)을 대신하여 비상시에 먹을 수 있는 각종 식물(食物) 정보를 제공해야 했다. 일찍부터 [구황방(救荒方: 흉년으로 기근이 심할 때 굶주림을 면하게 하는 방법)]이 필요했던 이유다.



똥구멍이 찢어지는 가난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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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조선 최초의 구황서 [충주구황절요(忠州救荒切要)]. 솔잎을 주요한 구황식품으로 보고, 흰죽에 솔잎 가루를 섞어 먹는 법을 기록하였다.


이미 세종대에 [구황벽곡방(救荒辟糓方)]이 저술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실물은 남아 있지 않아 전모를 알 길이 없지만, 후대에 인용된 내용으로 유추해 보면 솔잎을 주로 이용한 구황법으로 추측된다. 현존하는 조선 최초의 구황서는 충주에서 지방관으로 재직하던 안위가 1541년 간행한 [충주구황절요(忠州救荒切要)]다. 이 책에도 솔잎은 중요한 구황 식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안위는 흰죽에 솔잎 가루를 섞어 먹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이렇게 하면 그냥 흰죽을 먹는 것보다 기력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솔잎 먹는 방법은 간단하다. 솔잎을 따다가 절구에 찧어 즙을 빼고 덩어리를 지은 후 이를 온돌이나 양지에 말렸다가 다시 찧어 가루를 낸다. 이를 곡식가루와 섞어 죽을 쑤어 먹는 것이다.



솔잎은 먹을 수 있으니 연명에 도움이 된다. 송엽을 따다가 방아에 찧어 즙을 빼고 덩어리 지은 후 온돌이나 양지에 말렸다가 다시 찧어 가루를 낸다. 이를 곡식 가루 2홉과 섞어 묽은 죽을 쑨다. 큰 사발 4푼짜리에 먼저 곡식 풀죽 1푼을 담아 마셔 장위(腸胃)를 윤활하게 한 다음, 풀죽 2푼에 솔잎가루 4홉을 섞어 마신다. 마지막으로 1푼의 풀죽을 마시면 체하는 일도 없으며 입안의 깔깔한 기운도 남지 않는다. 흰 죽만 먹는 것보다 훨씬 좋다. 만일 하도(下道)가 막혀 대변을 볼 수 없다면 날콩을 여러 차례 씹어 삼키면 통한다.




문제는 솔잎을 많이 먹으면 ‘변비’가 생긴다는 사실이다. [충주구황절요]에서는 날콩을 씹어 먹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이야 우스갯소리로 들리지만 ‘똥구멍이 찢어지는 가난의 고통’은 당시 먹을 게 없던 사람들이 죽지 못해 먹을 수밖에 없었던 솔잎의 고통이었다.



솔잎을 먹기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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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 구황식물이었던 솔잎은 오래도록 먹으면 변비의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이 고통을 없애기 위해 느릅나무 껍질을 우려내거나 가루를 첨가하면 쓴맛이 배가되는 문제가 있었다. <출처: (cc) KENPEI at en.wikipedia.org>


1554년(명종 9) 영호남 지방에 기근이 닥쳤다. 조선 정부는 세종대의 [구황촬요(救荒撮要)]를 언해하여 전국에 반포하였다. 국가가 구황방을 언해하여 전국적으로 보급한 첫 번째 사례였다. 서문을 쓴 우부승지 이택은 “서울 사람들의 습속이 사치스러워 화려한 것을 숭상하는데, 더욱이 죽 먹는 일을 부끄럽게 여겨 아침에 좋은 밥을 지어 먹고는 저녁에 밥 짓는 연기가 사라져버리니 참으로 한탄스럽다”고 토로하고 느릅나무 껍질, 솔잎 등은 오곡보다도 사람의 위장에 유익하고 성명(性命: 인간의 본성과 목숨)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구황촬요]에는 솔잎을 먹으면 반드시 뒤따르는 변비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느릅나무 껍질〔楡皮〕을 우려낸 물이나 가루가 효과적이라고 강조하였다.



구황에는 솔잎이 가장 좋지만 느릅나무껍질의 즙을 함께 섞어 사용해야 대변이 막히는 걱정이 없을 것이다.


- [구황촬요] <松葉>



느릅나무 껍질의 성질은 매끄럽다. 오래 복용하면 배고픔을 느끼지 않으니 기근 때 이를 채취하였다가 먹어야 한다. 껍질의 흰 부분을 채취하여 햇볕에 말린 후 찧어 가루 내어 사용한다. 그러나 껍질의 즙을 우려내어 사용하는 것이 더 쉽고 효과적이다.


- [구황촬요] <楡皮>

기근에 대비하여, 늙거나 어린 나무이거나 상관없이 느릅나무 껍질을 많이 채취하여 껍질을 벗긴 후 절구에 찧어 잘게 부순 후 이를 항아리에 넣고 물을 부어두면 진한 느릅나무즙(유피즙, 楡皮汁)을 우려낼 수 있었다. 바로 이 느릅나무 껍질을 활용함으로써, 솔잎은 구황 식물 중에서도 으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솔잎을 오래도록 먹으면 나타나는 변비 문제는 느릅나무 껍질로 해결할 수 있었다지만, 문제는 쓴맛이었다. 솔잎 자체도 쓴데 느릅나무즙을 첨가하면 그 맛이 더욱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에 [구황촬요]에는 솔잎의 쓴맛을 제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소개되어 있다. 첫째, 솔잎을 찧어 말린 후 가루 낸 다음 그대로 사용하는 대신 다시 한 번 솥에 찐 후 말렸다가 가루 내어 복용하는 것이다. 가루 내는 과정을 두 번 거치면서 쓴맛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두 번의 찌고 말리는 과정에서 솔잎의 효능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이에 두 번째 방법이 강구되었다. 솔잎을 찧은 후 자루에 넣거나 헝겊에 싸맨 후 흐르는 물속에 담가 삼사일이 지난 뒤 꺼내어 햇볕이나 구들장 위에 펼쳐 말린 다음 이를 가루 내어 먹는 방법이다. 흐르는 물속에 담가 솔잎의 쓴맛을 제거하는 것이다. 구황에 솔잎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먹을 수 있는 것을 더 찾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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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촬요]는 솔잎 외에 도라지, 메밀, 냉이(사진 왼쪽부터) 등 다양한 구황식물의 정보를 수록하였다. <출처: 네이버 지식사전>


이에 솔잎을 대신할 구황식물을 찾는 일이 시급했다. 16세기 중엽 어숙권(魚叔權)이 편찬한 [고사촬요(攷事撮要)]는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후일 여러 차례 수정ㆍ증보되었는데, 17세기 초 간행될 때 전에 없던 <구황방>이 첨가되었다. [고사촬요] <구황방>은 1554년의 [구황촬요]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솔잎 사용법 외에 다양한 구황식물 정보를 수록하였다. 솔잎을 구황식물의 으뜸으로 소개하면서도, 도라지를 무르게 삶아 밥 위에 쪄서 먹는 방법, 메밀을 수확 전에 어린 줄기째 베어 볶아 미숫가루로 활용하는 방법, 칡뿌리를 깨끗이 씻어 껍질을 벗겨내고 무르게 찧은 후 가루 내어 쌀과 함께 죽을 쑤어 먹는 방법, 냉이로 죽을 쑤어 먹는 법, 삽주(국화과의 다년생 풀로 위장병을 치료하는 데 주로 사용한다) 뿌리[朮]를 캐어 식량을 대신하는 방법 등 다양한 구황식물 활용법을 소개하였다.

그렇지만 솔잎은 가장 중요한 구황식물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1554년 솔잎 위주의 구황법을 기술한 [구황촬요]와 17세기 초 다양한 구황식물을 활용한 <구황방>은 1660년에 이르러 하나의 책으로 합쳐졌다. 신속이 지은 [신간구황촬요(新刊救荒撮要)]가 그것이다. 증보 과정에서 편찬자 신속은 두 책을 합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경험하고 견문한 바를 첨가하였다. 이 가운데 솔잎의 쓴맛을 제거하기 위한 획기적인 방법이 제시되었다. “솔잎을 따다가 방아로 충분히 찧으면 이긴 흙처럼 될 것인데, 곡식가루를 조금 넣어 죽을 쑨 후 이렇게 솔잎 이긴 것을 함께 넣어 풀어먹으면 좋다.” 이 방법은 예전에 솔잎을 찧어 말린 후 가루 낸 것을 곡식 가루와 섞어 죽을 쑤는 것과 달리, 곡식 가루로 죽을 쑨 후 찧어 뭉갠 상태의 솔잎을 죽에 풀어먹는 방법이었다. 신속은 “옛 방법〔舊方〕은 처음에 솔잎을 찧어 덩어리를 만든 후에 햇빛에 말리고 다시 찧어 가루 내어 사용하였으므로 만드는 법이 더디고 맛도 좋지 않았다. 또 느릅나무즙을 넣으면 그 맛이 더욱 나빠져 먹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방법은 맛이 좋다.”고 부언하였다.

솔잎을 먹다 보면 나타나는 변비를 해결하기 위해 느릅나무즙을 넣었더니 변비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맛이 나빠졌다. 이에 신속은 솔잎을 날로 짓이겨 진흙처럼 된 것을 그대로 죽에 넣어 먹는 방법을 고안함으로써 쓴맛을 해결하였다. 그리고 느릅나무즙을 넣지 않아 생기는 변비의 고통은 콩가루를 물에 타 먹는 방법으로 해결하였다.

신속은 솔잎의 쓴맛을 없애는 방법을 제시한 것 외에도 다양한 구황식물을 소개했다. 검은콩과 대추살(대추의 붉은 껍질을 제거한 속살)을 이용하는 방법, 순무 씨를 달인 후 말려 가루 내어 복용하는 방법, 무를 구워먹는 방법, 들깨나 황정(黃精, 둥글레), 천문동(백합과의 다년생 풀, 뿌리를 약재로 활용한다) 뿌리, 하수오(마디풀과의 다년생 풀, 뿌리를 약재로 활용한다) 뿌리, 연근 등을 쪄먹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채취에서 재배로




1660년 간행된 신속의 [신간구황촬요]는 조선 전기 구황 지식의 집대성이자 18세기 새로운 구황법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다양한 구황식물을 채취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재배를 장려한 것이다. 이미 17세기 초 [고사촬요] <구황방>에서도 토란의 재배를 권장하였지만, 여전히 구황은 ‘재배’보다는 ‘채취’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 상황이 달라졌다. [산림경제(山林經濟)] <치포(治圃)> 항목을 보자. 여기에는 주로 구황식물의 재배법이 소개되어 있다.



곡식이 잘되지 못한 것을 기(飢)라 하고 채소가 잘되지 못한 것을 근(饉)이라 한다. 오곡 이외에 채소가 또한 중요하다. 하물며 농가는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고기반찬을 해먹기 어려우니 마땅히 거주하는 곳 근방에다 채소밭을 만들고 채소를 심어 일상의 반찬을 해야 한다. 이에 채소밭을 가꾸는 방법을 기록하여 제4편을 삼는다.




더불어 <치포> 편에서는 소루쟁이(羊蹄라고도 함. 마디풀과의 다년생 풀. 뿌리를 약재로 사용한다)처럼 구황에 중요한 식물의 재배와 관리법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이는 [산림경제]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18세기 후반 고구마 재배법과 감자 재배법 등을 정리한 <종저보>가 널리 소개되기도 했고, [농포문답(農圃問答)] 같은 농서에서도 다양한 채소를 재배하여 황년(荒年)을 대비하도록 제안했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구황은 수동적인 채취로부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재배로 변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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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에 편찬된 [찬송방(餐松方)]은 솔잎 먹는 법을 모두 수집하고 자신의 경험을 덧붙여 가히 솔잎 활용법의 종합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기왕의 솔잎 이용법도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하였다. 솔잎에 그치지 않고 송순(松筍: 새로 돋아난 소나무의 순), 송피(松皮: 소나무의 속껍질), 송홧가루 등 여러 가지 재료들이 활용되었다. 솔잎 활용의 종합판은 19세기 후반 편찬된 [찬송방(餐松方)]이다. 1870년 경주에 살았던 최두익(崔斗翊)은 기왕의 솔 이용법을 모두 수집하고 자신의 경험을 덧붙여 ‘솔 먹는 법’을 편찬했다. 그는 서문에서 “사람이 하루에 두 끼를 먹지 못하면 배를 곯게 되며, 맹자가 말했듯이 배고픈 사람은 사람도 쉬이 잡아먹으니 기근이라면 비록 채소ㆍ초목처럼 거친 음식이라도 달게 먹는 것이 사세의 필연”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고대 의학의 경전인 [내경(內經)]을 인용하여, 오곡으로 몸을 기르고 오채(五菜)로 배를 채우는 것이라며, 비록 사람이 곡식을 먹어야 하지만 만일 곡식이 익지 않았다면 채소를 먹어서라도 배를 채워야 하고, 채소조차 익지 않았다면 들판의 풀이라도 한 번의 임시방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두익은, 이미 옛 사람들이 토란으로 기근을 견디고 약이(藥餌: 약재)와 과품(菓品: 과일 등의 먹을거리)으로 굶주림을 면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말하였지만 이러한 구황식물을 미리 재배하거나 저장해두지 않으면 실제 기근이 닥쳤을 때 아무 소용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전국 산천에 사시사철 푸르게 자라 귀천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용할 수 있는 구황식물로 소나무만한 게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소나무야말로 백 가지 나무의 으뜸이니 공공의 쓰임이 크고도 넓다고 하겠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들이 솔을 먹는 것이 어렵다고 하거나 믿지 않으니 어찌 옳겠는가?” 최두익은 솔 먹는 법은 최악의 경우에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임을 강조했다. “올해의 흉년을 보건대 사람들이 굶주리고 북부 지방은 특히 심하여 1두의 쌀값이 천 냥에 가깝다. 게다가 유행병마저 퍼져 죽은 이들이 늘어나는데도 그저 울기나 할 뿐 구제할 방법이 없으며, 여인들은 그저 캄캄한 방에서 아욱죽마저 먹지 못하여 한탄하니 어찌 슬프지 아니 하리오?” 이에 솔을 먹는 방법을 다양하게 정리하여 [찬송방]을 저술한 것이다.

그는 솔잎을 잘게 잘라 먹는 법, 가루 내어 먹는 법, 김치 담가 먹는 법, 즙을 내어 먹는 법, 환으로 지어 먹는 법 등 다양한 방법을 소개하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잘게 썰어 먹는 것임을 강조했다.



솔잎을 잘게 썰어 물을 부은 후 국수를 만들어〔麪〕 먹으면 곡식을 끊을 수 있으며 악질을 치료할 수 있다. 솔잎을 잘게 썰어 다시 빻은 후에 매일 식전에 술로 두 돈씩 먹으면 좋다. 또한 솔잎을 끓여 즙을 내어 죽을 쑤어 먹는 방법도 좋다. 처음 먹을 때는 조금 힘들지만 오래되면 익숙해진다. 사람을 늙지 않게 하고 몸을 가볍게 해주고 기운을 북돋는다. 곡식을 끊어도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다. 마지막으로 솔잎을 좁쌀 크기로 잘게 썰어 물에 섞어 먹거나 혹 미음으로 끓여먹는다. 혹 콩가루와 섞어 먹어도 좋다.




변비와 쓴맛이 문제였던 솔잎을 가루 대신 잘게 썰어 먹도록 권함으로써 솔잎 활용의 최선책을 새롭게 제안한 것이다. 그동안 솔잎을 대신할 다양한 구황 식물이 개발되고 재배되었지만, [찬송방]으로 솔잎은 구황의 고통을 해결할 소중한 음식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게 되었다.

먹을 게 풍족하여 비만이 사회문제가 되는 오늘날, 우리는 주변의 소나무들을 사철 푸른 나무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소나무는 없어서는 안 될 귀하디 귀한 비상 식물이었다.

대학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조선의 대표 구황식인 솔잎죽을 만들어 먹었던 적이 있다. 당시 목으로 넘기기 힘든 솔잎죽을 먹으며 잠시나마 조선 사람들의 고통을 체험할 수 있었다. 한 학생이 어찌 이를 매일 먹을 수 있었나며 눈물이 난다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이보다 가슴 아픈 음식이 또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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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 |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책임연구원과 가톨릭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를 거쳐 현재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최근에는 조선시대의 '교화와 형벌'에 관해 연구 중이며 지은 책으로 『원통함을 없게 하라』, 『조선의 명의들』,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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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8세기의 맛: 취향의 탄생과 혀끝의 인문학 2014.02.28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18세기를 다채롭고 참신한 시각으로 연구하는 한국18세기의 학회의 첫 프로젝트 결과물, <18세기의 맛>이 책으로 나왔다. 18세기의 '맛'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흥미로운 단면을 맛깔나게 서술했다. 23명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18세기의 동서양을 뒤흔든 맛과 그 맛에 얽힌 흥미로운 현상을 살펴보는 일에 동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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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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