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오스트레일리아 이민의 역사 - 영국에서 건너간 범죄자들의 나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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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9회 작성일 16-02-06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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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에서 건너간 범죄자들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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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독일 월드컵 오스트레일리아-일본 경기. 오스트레일리아의 팀 케이힐이 동점골을 넣자 일본 선수들이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2006년 월드컵 당시 오스트레일리아와 일본과의 축구 경기가 있었던 날, 언제나처럼 맥주를 한 잔씩 걸치며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전반에는 일본이 앞서는 듯 했으나, 월등한 신체적 능력을 앞세운 오스트레일리아는 3:1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로 승리를 얻어냈다. 경기가 끝난 뒤 친구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원래 영국에서 건너간 범죄자들로 만들어진 나라잖아. 그러니 그 후손들이 당연히 체격도 좋고 운동도 잘하겠지.”

“오죽하면 본토에서 쫓겨날 정도였겠어? 완전 흉악범들이었겠지?”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수긍했고, 이윽고 맥주잔을 기울여 건배를 청했다.

그런데 잠깐!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 버린 이 말은 사실일까? 이게 사실이라면, 오스트레일리아는 항상 올림픽에서 1, 2위를 다투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흉악범은 모두 체격이 좋고 운동을 잘하며, 이 형질들이 우성 인자로 유전되는 걸까? 나로선 대답할 길이 없다. 난 역사학을 전공했지, 생물학이나 유전공학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아는 바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검증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하다. 과연 오스트레일리아는 정말로 영국에서 건너간 범죄자들이 만든 나라인가 하는 사실 말이다.


골드 러시의 꿈을 안고 늘어난 이민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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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토착민인 어보리진 소년. 이들은 광활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흩어져 살며 250여 개의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계속되는 백인 이민자들의 유입과 약탈로 현재는 대부분 멸족 위기에 몰려 있다. <출처: Gettyimages>


우리가 어보리진(aborigines)이라고 부르는 토착민들이 살던 대륙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서양인은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 1728~1779)이었고, 때는 바아흐로 1770년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이미 아메리카라는 보다 가깝고 거대한 대륙에 식민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멀고 먼 남반구의 이 땅은 관심 밖이었다. 그렇지만 프랑스가 이 땅에 눈독을 들이자, 영국 정부는 서둘러 이 땅을 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라 이름 붙이고 자국의 영토임을 공표했다. 1787년에 이루어진 일이다.

당시 영국이 반역자나 범죄자들을 영국 바깥으로 추방하는 정책을 취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고, 이때 주로 추방이 이루어진 곳은 아메리카 식민지였다. 그렇지만 1776년 미국이 독립하게 되자 이러한 기능을 대신할 곳이 필요했다. 바로 그것이 뉴사우스웨일즈(New South Wales), 지금의 오스트레일리아였던 것이다. 즉, 오스트레일리아에 영국의 범죄자가 건너갔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런데 추방자의 숫자는 대체 얼마나 되었을까? 기록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로 추방된 사람들의 숫자는 추방이 이루어진 80여 년의 기간 동안 약 16만 5천 여 명 ‘뿐’이었다. 이 숫자가 많은 것인지 적은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을 테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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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에서 1875년 사이의 골드 러시를 틈타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주로 모여든 광부들.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모여든 이민자들로 인해 오스트레일리아의 인구는 급격히 늘어났다.


사실 오스트레일리아의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1851년에 금광이 발견된 이후부터다. 금맥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오스트레일리아로 유입되는 인구는 이전에 비할 것이 못되었다. 1852년 한 해에만 37만여 명의 이민자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했다. 그리하여 약 20년 후인 1871년의 통계를 보면, 오스트레일리아의 인구는 조사가 가능한 인구만 추렸을 때, 무려 170만 명이 넘었다. 심지어 이때는 백인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일확천금의 꿈을 갖고 모여들었다.1)

이 글은 영국에 적을 두고 있는 “www.ancestry.co.uk”이라는 멋진 홈페이지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는 점을 꼭 언급하고 싶다. 이 사이트는 일종의 자신의 조상이 어디 출신인지, 나는 어떤 혈통인지를 확인해주는 곳인데, 이를 통해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 아메리카, 호주 등 다양한 나라로 건너간 사람들을 추적할 수 있는 귀중한 보물창고이다. 이곳에 공유된 많은 문서들은 ‘이주민’에 대한 많은 사료들을 제공하기도 하며, 수치와 통계 데이터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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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간 범죄자는 전체 이주민의 극소수에 불과했다. 즉, 오스트레일리아가 범죄자들의 나라라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추방자들은 모두 흉악범들이었을까?




그렇다면 영국 본토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추방된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들은 정말 흉악범들이었을까?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당시 영국의 생활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19세기 당시 영국 정부는 산업혁명의 결과 발생한 극심한 사회문제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급속한 인구증가로 일자리를 감당할 수 없었던 도시 골목 곳곳에는 부랑자들과 걸인들이 넘실댔고, 불량한 하수 시설, 더러운 개천 등 위생 상태도 최악의 수준이었다. 직업을 가진 노동자라고 해도 크게 나은 형편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버거운 수준의 임금으로 하루하루를 버텨가야 했다. 아마 찰스 디킨즈의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당시 영국 사회의 병든 모습을 잘 알 수 있으리라.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국 정부가 취한 정책은 아주 사소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도 극형에 처하는 것이었다. 당시 적용된 법령들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감자 몇 개, 빵 몇 개를 훔친 사람들이 교수형을 언도받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땔감으로 쓸 나무를 조금 베어냈다고 체포되어 교수형을 받기도 했다. 오죽하면 후대 사람들이 이러한 법령들을 일컬어 ‘Blood Code’라고 불렀을까? 빵 한 조각을 훔친 대가로 19년의 중노동을 하게 된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의 장발장은 프랑스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시대 영국에도 있었던 것이다.

당시 영국 사람들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19세기 들어서면서부터 많은 법관과 배심원들이 이러한 법 적용은 과하다는 의견을 표출했다. 이에 따라 생계형 범죄자들은 교수형 대신 추방형에 처해졌다.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로의 추방형은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실제로 오스트레일리아로 추방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살펴봄으로써 이 사람들이 과연 어떠한 죄를 지었는지 확인해보도록 하자.

존 데이비스(John Davies, 1814~1872): 존 데이비스는 유명한 언론인으로, 훗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머큐리>라는 신문을 창간한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가 추방된 것은 다른 사람의 계좌를 이용해 양초를 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양초는 생필품이었으므로, 아마도 그리 큰 규모의 범죄는 아니었을 것이다.

 

빌리 블루(Billy Blue, 1767~1834): 빌리 블루는 자메이카 출신의 흑인인데, 런던의 초콜릿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빌리는 설탕을 훔쳤다는 혐의를 받고 추방형에 처해졌다. 아마도 배가 고파서 조금 훔쳤을 것이다. 훗날 빌리는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항에서 승객들을 실어 나르는 페리선 사업에 손을 댔고, 큰 성공을 거두어 대단한 부자가 되었다.

 
에스더 에이브러햄스(Esther Abrahams, 1771~1846): 15세에 오스트레일리아 추방선에 몸을 실은 이 여자 아이의 혐의는 50실링짜리 옷 장신구를 훔쳤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 혐의는 증거불충분이었다.

 
메리 웨이드(Mary Wade, 1777~1859): 그래도 에스더는 메리보다는 나은 편이었을 것이다. 메리는 어린 시절부터 부랑아들과 함께 구걸을 하며 길거리를 전전했는데, 11세 때 다른 부랑아들과 함께 덧옷 한 벌과 스카프, 모자 하나를 훔쳐 전당포에 팔았다가 교수형을 언도받았다. 어린 나이여서 겨우 교수형을 면한 메리 역시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게다가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한 사람들 중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추방된 경우도 많았다. 영국은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를 하나의 영국으로 통합하기 위해 애를 썼는데, 이때 영국 정부에 대항한 독립운동가나 의회반대파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의 추방형에 처해지곤 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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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민족주의자로 유명한 존 미첼. 그는 아일랜드 민족운동을 벌인 이유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오스트레일리아로 옮겨졌다.


존 미첼(John Mitchel, 1815~1875): 아일랜드 민족의 독립을 주장했던 ‘아일랜드 청년당(Young Ireland)’의 지도자이자 민족주의자로 유명한 존 미첼은 아일랜드 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폭동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다시 오스트레일리아로 옮겨졌다.

 


케빈 도허티(Kevin izod O’Dohearty, 1823~1905): 아일랜드의 의학도였던 케빈 도허티는 아일랜드 청년당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몰려 추방을 당했다. 케빈은 훗날 오스트레일리아의 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한다. 윌리엄 스미스 오브라이언(William Smith O’Brien, 1803~1864) 역시 마찬가지의 이유로 추방을 당했다.

 



윌리엄 커파이(William Cuffay, 1788~1870): 윌리엄 커파이의 경우는 아일랜드인만이 아니라 자국의 정치적 반대자들도 오스트레일리아로 추방당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는 가장 유명한 차티스트 운동가중 한 사람이었다. 각종 노동자 집회를 조직하는데 두각을 나타낸 그는 과격분자로 몰려 추방을 당했다.

 



토마스 무어(Thomas Muir, 1765~1799): 스코틀랜드 민족의 지도자였던 토마스 역시 영국 정부에 위협적인 활동가였으며, 반역죄로 추방당했다.

물론 오해는 없어야 한다. 모두가 큰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정말 흉악한 범죄자들도 추방을 당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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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마로 불린 흉악범 알렉산더 피어스의 두개골.


존 타웰(John Tawell, 1784~1845): 그가 오스트레일리아로 추방당한 이유는 사기죄였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이었는지 정착해서는 약사로 큰돈을 벌었고, 다시금 영국으로 귀환하게 된다. 하지만 곧 내연녀를 살해한 혐의로 다시 잡혀 교수형을 당했다.

 


알렉산더 피어스(Alexander Pearce, 1790~1824): 이 사람은 식인마로 불린 아주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 본래는 도둑질로 추방을 당했으나 몇몇 죄수들과 탈출하였고, 이후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피어스는 함께 탈출한 죄수들을 살해해 사람고기를 나눠먹었다. 이후 잡히긴 했으나, 또 1명의 죄수와 탈옥했는데 그 한 명의 죄수도 갈기갈기 찢겨진 채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오스트레일리아가 과연 범죄자의 후손들로 만들어진 나라인가’와 ‘추방된 자들은 정말 흉악범들이었나’에 대한 물음에 답을 나름 구해보았다. 정확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당시 추방된 자들이 모두 잔악한 흉악범이 아니라는 사실은 위에서 밝힌 바와 같다. 많은 수의 사람들은 경미한 생활범 혹은 정치범들이었고, 이들은 오히려 새로운 땅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오스트레일리아의 문화를 일구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2) 그리고 사실 이들 추방자들의 숫자는 이후 금광이 발견되면서 밀려들어 온 인구에 비하면 매우 작은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이들을 전혀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다. 이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들을 몰아내고 살육하고 터전을 빼앗은 침략자이기도 한 것이다. 항상 다양한 시각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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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을 붙이자면, 추방자들의 존재는 근대화 과정 속에서 영국 정부가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실시한 ‘국민대통합’이라는 큰 밑그림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 즉, 이상적인 ‘영국의 국민’이 되지 못하는 부랑자, 걸인, 도둑들 그리고 ‘영국의 국민’이기를 거부하는 정치적 반대파(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민족주의자들)는 영국에서 쫓겨나야만 했던 것이다. 항상 ‘통합’이라는 정치적 레토릭 속에는 ‘배제’의 논리가 숨어있다는 것, 이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실이다.

참고문헌

Mollie Gillen, [The Founders of Australia: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the First Fleet], Library of Australian History, 1989; Charles Bateson, [The Convicts Ships, 1787-1868], 1974; Gordon Greenwood, [Australia: A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Angus & Robertson, 1955; James Edward Gillespie, , [Journal of the American Institute of Criminal Law and Criminology], Vol. 13, No. 3, 1922; F.G. 클라크, 임찬빈 역, [호주의 역사], 나남,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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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석 |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유석은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힌 역사관을 바로 잡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쓰기로 표현하는 것이 목표이다.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1960년대 미국 서남부 치카노 운동의 성격: '친쿠바 혁명주의자'들의 영향을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빅이슈에 [국기로 보는 세계사]를 연재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Q&A세계사: 이것만은 알고 죽자](공저, 2010)와 [생각의 탄생: 19세기 자본주의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발행201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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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국에 적을 두고 있는 “www.ancestry.co.uk”이라는 멋진 홈페이지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는 점을 꼭 언급하고 싶다. 이 사이트는 일종의 자신의 조상이 어디 출신인지, 나는 어떤 혈통인지를 확인해주는 곳인데, 이를 통해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 아메리카, 호주 등 다양한 나라로 건너간 사람들을 추적할 수 있는 귀중한 보물창고이다. 이곳에 공유된 많은 문서들은 ‘이주민’에 대한 많은 사료들을 제공하기도 하며, 수치와 통계 데이터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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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들을 전혀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다. 이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들을 몰아내고 살육하고 터전을 빼앗은 침략자이기도 한 것이다. 항상 다양한 시각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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