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조선통신사를 통해 본 일본과의 문화 교류 -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동력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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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7회 작성일 16-02-06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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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1711년 조선통신사가 에도 성에 들어갈 때의 행렬 수행 악대 모습.
청도기에 이어 순시기, 영기의 뒤쪽으로 나발, 나각, 태평소, 자바라, 동고, 북, 쟁(錚)의 순으로 악대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등성행렬도(登城行列圖〉, [조선시대 통신사 행렬](2005), 121~122면.〉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를 통해서 우리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문화 교류의 다양한 면면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서 펼친 문화 활동 및 그들이 일본에서 접한 문화적 경험 안에는 지금 이 시대의 눈으로 다시 풀어보고 읽어내야 할 다양한 코드가 들어 있다.

이는 조선통신사의 활동을, 문화 간의 상호 이해와 관련된 제반 활동을 의미하는 문화 교류라는 점에서 바라볼 때 그 조망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조선통신사가 에도 성(江戶城)에서 감상한 일본의 궁중음악은 먼 옛날 우리나라에서 흘러 들어간 음악이었으며, 그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백제인의 후손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통신사의 거대한 행렬도(行列圖)(그림 1)는 판화로 제작되어 불티나듯 팔렸고, 소동(小童)들의 춤은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키는 자원이 되었다.

나발을 불며 행진하는 조선 음악인의 모습은 인형으로 탄생하여 지금까지 제작되고 있다. 문화 교류의 현장은 예기치 않은 또 다른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조선통신사의 길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요청에 의해 조선 왕실이 일본에 파견한 외교 사절이다. 조선시대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세종대부터지만, 임진왜란을 겪은 뒤 얼마 동안은 ‘통신(通信)’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부당하다는 이유에서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 1607, 1617, 1624)’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했다.

조선과의 화친을 요구한 도쿠가와의 서신에 대한 회답 및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잡혀간 포로 송환 문제가 당시 사신 파견의 주요 목적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다가 1636년(인조 14) 이후 다시 통신사라는 명칭을 회복하여 1811년(순조 11)까지, 조선통신사는 제12차 행렬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 통신사의 파견이 정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607년(선조 40)의 일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강화 교섭에 힘썼다.

1603년에 막부를 개설했지만 당시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다이묘(大名)들이 존재했고, 내치(內治)에 주력해야 하는 입장에서 조선과의 관계 회복은 긴급한 현안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17세기 중엽 당시 쇄국정책으로 인해 고립되어 있었기에, 정식 외교를 맺은 유일한 나라인 조선과의 우호 관계는 일본의 대외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했다.

조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조선으로부터의 ‘권력 승인’이라는 의미도 지녔으므로 일본에겐 대내외적으로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

결국 조선은 일본의 강력한 요청에 응하여 사신 파견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또 일본의 입장에서는 문화적으로 우월한 조선으로부터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도 시급한 일 중의 하나였다.

일본이 감당해야 할 조선통신사의 접대 경비는 그들의 경제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많아 큰 부담이 되었는데도 열두 차례나 통신사 행렬을 받아들인 맥락이 곧 그것이었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에 걸쳐 일본에 파견한 300~500여 명의 조선통신사 인원은 짧게는 5개월, 길게는 10개월까지 소요되는 긴 여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양을 출발하여 충주, 안동, 경주, 부산을 지나 쓰시마(對馬島), 이키(壹岐), 아이노시마(藍島), 시모노세키(下關), 가미노세키(上關), 우시마도(牛窓), 무로쓰(室津), 효고(兵庫),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히코네(彦根), 나고야(名古屋), 오카자키(岡崎), 시즈오카(靜岡), 하코네(箱根), 에도, 닛코(日光: 1636, 1643, 1655)에 이르는 긴 여정에 오르게 된다.

정사(正使), 부사(副使), 종사관(從事官)의 3사(三使)를 비롯하여 통역을 맡은 통사(通事), 제술관, 사자관(寫字官), 의원, 화원, 자제군관, 서기, 마상재(馬上才), 전악(典樂), 소동, 기수, 포수, 세악수(細樂手), 쟁수, 취수(吹手), 숙수(熟手), 사공과 격군, 포수, 도척(刀尺), 풍악수(風樂手) 등 다양한 사람이 통신사의 구성원으로서 각각에 부여된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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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왼쪽부터 해금, 나각, 대금을 연주하는 악인들의 모습.
음악을 연주하는 풍부한 표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악기를 부느라 한껏 부푼 뺨, 호흡을 맞추기 위한 시선 처리가 재미있다. 〈출처 : 〈통신사인물도〉 부분,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이들의 여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여러 분야에서 조선과 일본 간의 교류를 알려주는 역사적 현장 그 자체가 되었고, 통신사행을 다녀와 남긴 수많은 사행록(使行錄)은 조선시대 외교 관계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준다.

다양한 내용의 일본 체험 기록은 오늘날에도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조선 국왕의 명을 받아 왕의 국서(國書)를 가지고 에도에 도착하여 전달하는 전명의(傳命儀)까지 행하게 되면, 통신사행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마치게 된다. 전명의 이후에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노정에 들어서게 된다.

이 왕복 기간은 길게는 10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날씨가 좋고 바람을 잘 만나면 다녀오는 기간이 짧아지고, 그렇지 않을 경우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그 기간도 길어진다.

수백 명에 달하는 거대한 인원이 한양을 출발하여 일본까지 육로로, 해로로, 다시 육로로 다녀오는 과정은 사건의 연속이다. 폭풍을 만나 배가 침몰하기도 하고, 화재를 만나 배가 전소하기도 한다.

병이 나서 객지에서 생을 마감하는 이도 있다. 중간중간 행하는 공식 의례(儀禮)는 양국 사이의 생생한 외교 현장을 보여주며 그 사이에서 다양한 방식의 소통이 이루어진다.

긴 시간을 함께하는 동안 우정이 싹트기도 한다. 그래서 조선통신사의 이동은 그 자체가 총체적 문화 교류의 현장이 된다.



조선통신사가 감상한 일본의 궁중음악




조선통신사의 최종 목적지는 에도였다. 왕의 국서를 전달하는 곳이 에도 막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신사행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례인 전명의가 바로 에도에서 행해졌다.

전명의를 엄숙하게 행한 후에는 통신사가 참여하는 가장 성대한 연향인 상마연(上馬宴)이 열린다. 귀국하기 위해 말을 타기 전에 행하는 의례라서 상마연이라 한다.

상마연에서는 통신사행의 어느 코스에서도 보지 못한, 일본의 궁중음악 가가쿠(雅樂)를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다.

가가쿠는 한국과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적 요소가 가미되어 9세기 초반의 헤이안(平安) 시대(794~1192)에 현재 형태가 이루어졌다.

가가쿠에는 한국에서 전래된 고마가쿠(高麗樂)와 중국에서 전래된 도가쿠(唐樂)의 두 종류가 각각 악기 편성, 음악 구성의 내용에 따라 간겐(管絃), 부가쿠(舞樂)의 두 가지 형태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서 접한 가가쿠 중에는 이처럼 고대 한국에서 전해진 것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1711년, 조태억(趙泰億)을 정사로 하고 임수간(任守幹)을 부사로 한 제8차 통신사행의 기록을 보자.

1711년의 사행은 임수간의 [동사일기(東槎日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상마연에서 감상한 여러 악무(樂舞)에 대한 내용은 주목할 만하다. 임수간은 마치 음악회를 생중계하듯 상세히 서술하여 눈과 귀를 쫑긋하게 만든다.

이때 연행된 악무 중에는 현재에도 일본 궁중음악으로 연주되는 24곡의 고마가쿠 가운데 장보악(長保樂), 인화악(仁和樂), 고조소(古鳥蘇), 임가(林歌), 납증리(納曾利)의 다섯 곡이 포함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이 24곡의 고마가쿠는 모두 춤이 수반되는 부가쿠, 즉 무악(舞樂)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당시 통신사가 감상한 다섯 곡의 고마가쿠는 모두 춤과 반주가 수반되는 음악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현재 일본의 궁내청에서도 여전히 감상할 수 있는 악무들이다.

1711년 일본 관백(關白)의 내전(內殿)에서 조선통신사를 위해 행해진 상마연은 일본 궁중악무 가운데 엄선한 프로그램으로 짜인 것이었다.

임수간의 [동사일기]에는 그 공연 무대를 잘 묘사해놓았는데, 무대 규모와 장식, 악기 배치, 악인들의 복식과 춤사위, 공연 순서 등의 내용이 보인다. 또 사신들이 악무를 보고 들은 후 느낀 정서도 적혀 있다.

당시의 공연 현장으로 들어가서 1711년의 통신사가 기록한 것과 현재 일본 궁내청에서 연행되고 있는 고마가쿠를 비교해보도록 하자. 당시의 연향에서 올린 공연 종목은 13곡이었는데, 4, 6, 8, 10, 12번째에 고마가쿠를 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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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고마가쿠(高麗樂)의 하나인 인화악(仁和樂).
일본 궁내청 악부의 2003년 추계 아악연주회에서 연행된 모습이다. 조선통신사가 묘사한 1711년의 모습과 현재 연행되고 있는 모습을 비교해보면 외형이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황실(皇室)’ 편집부, [궁내청악부 아악의 정통(宮內庁樂部 雅樂の正統)](도쿄: 후소샤(扶桑社), 2008), 108면.〉



이 중 여섯 번째에 공연된 인화악(그림 3)은 푸른 옷을 입은 4인의 무원이 꽃과 초미(貂尾)를 꽂고 절주(節奏)에 맞추어 춤추는데, 여유 있는 태도에 음조가 화평하다고 묘사했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인화악 또한 4인이 연행하며 푸른 옷을 입고 추는 춤이라는 점도 같아 인화악의 외형은 거의 그대로 전승되는 것으로 보인다.

여덟 번째 공연된 고조소는 소화관(蘇花冠)과 잡록의(雜錄衣)에 푸른 옷자락을 끌며 칼을 차고 등 뒤에 홀(笏)을 꽂은 네 사람이 춤을 추는데, 두 사람이 먼저 물러가 마치 파리채 같은 모양의 불자(拂子)를 가지고 오면 두 사람이 이를 받아서 춤춘다고 묘사해놓았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고조소를 보면 18세기의 조선통신사가 묘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푸른빛의 옷 뒤쪽 자락을 길게 늘어뜨려 끄는 모습과 칼을 차고 뒤쪽에 홀을 꽂은 복식 및 4인이 추는 춤이라는 사실 등이 유사하다.

고조소도 인화악처럼 3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외형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열 번째 공연된 임가(그림 4)를 묘사한 장면을 보자. 통신사의 기록에서 보이는 임가는 엷은 녹색 옷에 황색과 백색의 쥐 모양의 문양인 황백서(黃白鼠)를 수놓았다고 했다.

옷자락이 긴데, 역시 봉관(鳳冠)을 쓴 네 명이 추는 춤이라 했다. 현재 궁내청에서 연행되고 있는 임가도 4인이 연행한다. 또 안쪽에 입은 저고리와 바지는 엷은 녹색이며 황색의 겉옷에 황백서를 수놓은 점에서 유사해 보인다.

다만 현재 입고 있는 옷의 자락은 길지 않아 전승되는 과정에서 변화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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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고마가쿠의 하나인 임가(林歌).
일본 궁내청악부의 2001년 추계 아악연주회에서 연행된 모습이다. 옷의 빛깔이나 문양 등이 현재까지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출처 : 위의 책, 119면.〉



열두 번째에 공연된 납증리는 무원 두 명이 청목가면(靑木假面)을 썼는데, “그 가면은 두 어금니가 몹시 길고 눈동자가 튀어나왔으며, 입을 딱 벌렸고, 채색으로 수놓은 푸른 갑옷에 푸른 비단 실로 단을 둘렀다. 그리고 약(籥)을 잡고 춤춘다”고 기록해놓았다.

납증리의 공연 내용은 현재 궁내청에 전승되고 있는 연행 장면과 크게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어금니가 길고 눈동자가 튀어나온 가면의 모습은 지금과 다르지 않다.

현재 연행하고 있는 가가쿠를 볼 때, 임수간의 기록이 매우 섬세하고 정확한 묘사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통신사로 다녀와 수많은 사람이 기록을 남겼지만, 그 현장성 혹은 사실성은 기록자에 따라 차이가 있다.

현장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다는 점에서는 같아도 기록자의 시선에 포착되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임수간이 묘사한 일본 궁중음악의 공연 장면은 마치 녹화하듯 그 현장성이 확보되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당시 연주했던 반주 음악과 지금 연주되고 있는 음악의 차이는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또 당시의 음악을 듣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에 대해 별반 적어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유 있는 태도에 음조가 화평하다”라는 소감이 고작이다. 음악이란 듣는 이의 정서적 경험에 따라 매우 다르게 들릴 수 있지만, 임수간의 음악 묘사는 정서적인 측면에서 인색한 편이다.

1711년 당시 상마연에서 고마가쿠를 연주한 음악인들, 그들 가운데는 백제인의 후손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을 임수간은 “그들 중에는 혹 고려인의 자손이 있다”고 덤덤하게 기록해놓았을 뿐이다.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고마가쿠를 2천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8세기라는 시점에,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조선인의 눈으로 본 그 현장에 대한 기록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특별한 소회가 있어야 할 듯 보이지만, 통신사들은 그 점에 대해서는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건조하게 묘사했다.

18세기는 삼국시대로부터 긴 시간이 흐른 후이고, 또 조선통신사들이 귀로 확인하며 들은 음악의 악기 편성 또한 이미 일본화된 상태이므로 그 외형적인 요인들만 보았을 때 큰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을 듯도 하다.

그러나 18세기에 일본의 고마가쿠를 연주한 고려인의 자손이 지금 시점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면 거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최근 일본에서 행한 현지 조사를 통해 현재에도 그들의 후손이라 칭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이는 특정 집단의 ‘디아스포라’라는 차원에서 면밀한 조사가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통신사를 위해 연행된 악무 가운데 많은 수가 현재 일본의 가가쿠로 여전히 연주되고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문화 전승의 다양한 모습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당시 사행 때 고마가쿠를 연주한 이들 가운데는 백제인의 후손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후손들은 지금 이 시각에도 자신이 백제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살고 있다.

역사란 흐르는 것이며, 그 흐름은 이처럼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문화는 유입과 전파 과정을 거쳐 다시 새로운 문화로 거듭난다. 이는 ‘지금 이 시대’ 문화 교류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조선통신사 행렬의 수행 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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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1711년 조선통신사 행렬에서 나발수들의 모습.
나발을 부는 이들은 ‘쓰네이시 하리코 인형’의 모델이 되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도중행렬도(道中行列圖〉, [조선시대 통신사 행렬](2005), 33면.〉



조선통신사 행렬에 수행하는 악대의 규모와 악기를 보자. 수행 악대는 각 시기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개 태평소와 나발, 나각 등의 관악기와 장고, 징, 자바라, 대고와 소고 등의 타악기가 필수이다.

여기에 더하여 이들 악기보다 전문적인 연주 기량을 필요로 하는 해금과 대금, 피리 등이 수반되었다. 후자는 음악성이 더 나은 사람들이 연주하는 악기다. 행렬에서 악대는 국서(國書)의 앞, 정사와 부사의 뒤쪽에 30~40여 명이 동원된다.

때로는 거문고와 가야금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악기가 포함되기도 했는데, 이들 악기는 행렬이 이동할 때는 연주하지 않았고 고정된 장소에서 연향을 위한 음악을 주로 담당하였다.

이처럼 조선통신사 수행 악대와 뒤에서 언급하게 될 쓰하치만 궁(津八幡宮)의 당인(唐人) 행렬에서 보이는 악기를 비교해보면, 당인 행렬의 악기는 극히 일부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전문적인 연주 기량이 필요한 해금, 대금, 태평소와 같은 악기들이 긴 기간에 그대로 전수되어 남기는 어려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통신사를 수행하던 악대의 모습은 오늘날 ‘쓰네이시 하리코 인형(張り子人形)’이란 일본 인형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인형 제작자가 쓰네이시에 살았던 사람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쓰네이시 하리코 인형은 목형(木型)에 종이를 발라 말린 후 목형은 빼내고 그 위에 조개껍데기를 갈아 만든 흰빛의 안료를 칠한 위에 다시 채색하여 만든 자그마한 모양이다. 수염이 있는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옷의 빛깔은 붉은색과 푸른색, 검정으로 되어 있고 손에는 누런 빛깔의 나발을 하나씩 들었는데, 악기는 오른발 끝부분까지 길게 내려와 있다.

나발은 한 음만 소리 낼 수 있고 신호용으로 많이 쓰이던 군대용 악기로서 행진 음악인 취타(吹打)를 연주할 때 많이 사용되었다.

15센티미터 정도 되는 자그마한 크기의 이 ‘나발 부는 남자’ 인형의 제작은 메이지 시대 이후 현재까지 3대째 가업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전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제작자는 이 인형이 무엇을 모델로 하고 있는 것인지, 그의 손에 들고 있는 악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 계속 만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조선통신사 연구의 초기 인물인 신기수(辛基秀)에 의해 이 인형이 조선통신사를 수행한 악사를 모델로 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그림 5)



조선통신사 행렬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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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1711년의 사행(使行) 모습을 판화로 제작하여 판매한 곤도 기요노부(近藤淸信)의 작품 〈당인행렬지회도(唐人行列之會圖)〉(영국 대영박물관 소장).
위 단에 열네 명의 악인들이 연주하며 걷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해금과 대금, 피리, 자바라, 북, 장고, 징과 같은 악기가 보이는데, 연주 자세나 악기 쥐는 법 등의 묘사가 어색하다. 아래 단은 정사, 부사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통신사(朝鮮時代通信使)](1986), 96면.〉



조선에서 통신사 파견이 결정되면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영접할 대비에 들어간다. 에도 성에서는 국서를 전달하는 전명의도 함께 이루어진다.

에도 막부는 영접에 필요한 주요 관료들을 임명하고 통신사가 지나가는 지역마다 소용될 경비를 각 번에 할당시켜 조달토록 했는데, 각 번은 통행하는 연로(沿路)를 정비하고 이들이 묵을 수 있는 장소를 물색했다.

수백 명에 달하는 거대한 인원을 한 지역에서 수용하는 일은 쉽지 않다. 결국 기존 건물의 규모로는 수용할 수 없어 새로운 숙소를 지었다. 그런데 애써 지은 이 건물은 통신사들이 돌아가고 난 후 대부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허물어버렸다.

조선통신사의 행렬은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구경거리가 되었다. 청도기를 앞세우고 정사와 부사에 이어 수백 명에 달하는 행렬이 차려 입은 각각의 옷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고, 취타악대의 연주는 새로운 문화 체험의 현장이 되었다.

조선 사신들의 행렬은 그림으로 그려지거나 판화로 제작되어 인기리에 판매되었고,(그림 6) 그 행렬을 모방한 또 하나의 행렬인 마쓰리 계통의 축제도 이내 만들어졌다.

현재 일본에 전하고 있는 당인 행렬과 당자(唐子)춤은 조선통신사 행렬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문화유산이다.

한때 당인 혹은 당자라는 이름이 ‘唐’ 자를 쓰기 때문에 중국과 관련된 것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일본에서 사용되는 ‘당’은 ‘외국’의 개념으로도 쓰인다. 당인을 조선인이라는 의미로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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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통신사행에서 징을 연주하는 악인의 모습.
부리부리한 눈과 힘주어 징을 치느라 굳게 다문 입에서 사행의 위엄이 느껴진다. 〈출처 : 위의 책, 49면. 〉



당인춤 행렬은 1636년에 쓰하치만 궁의 제례의 일부로 시행되었는데, 한동안 중단되다가 다시 복원, 전승된 것이다.

현재 일본에서 연행되고 있는 당인춤 행렬은 조인샤(町印車)를 선두로 하여 대기(大旗), 청도기, 나발, 춤, 피리, 징, 대고, 소고 등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된다.

이들은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가면을 쓰고 행렬에 참가하는데, 매년 10월의 축제에서는 일본 가가쿠의 하나인 에텐라쿠(越天樂)를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미치야바시’라는 음악에 맞추어 행진한다.

이틀에 걸쳐 약 300호 이상의 집을 방문한 후 춤을 추는 방식으로 연행한다. 이는 지난 1991년 미에 현(三重縣)의 무형 민속문화재로 지정을 받았다.

당인춤은 엄숙한 신사의 의례적인 요소가 강한 신악(神樂)과는 달리 축제 기분을 북돋우는 예능이 되었다. 당인이 되어 춤추는 사람은 대개 젊은 사람이 맡았다.

또 오곡 풍요를 빌면서 춤을 추는 것으로 보아 농경사회 문화에 그 연원을 두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인춤 계열은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히로시마 현을 위시한 각지에 있었다고 하는데, 통신사가 여러 차례 왕래한 도카이 도(東海道)의 미에 현, 기후 현, 아이치 현 등에서 특히 성행한 것은 조선통신사 행렬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낯선 문화가 낯선 땅에 유입되어 새로운 문화 자원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오카야마 현(岡山縣)의 우시마도에는 통신사 행렬 가운데 소동 2인이 대무(對舞)하는 것을 보고 만든 당자용(唐子踊), 즉 당자춤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를 ‘가라코 춤’이라 부른다.

특히 우시마도에서는 소동들의 활동이 큰 인상을 남긴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그곳에는 조선통신사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어 관련 자료를 만날 수 있다.

통신사에서 소동의 역할은 여행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목적도 부여되어 있다. 나이 어린 소년이 간간이 추는 귀여운 춤은 수개월간의 여정에 지친 사행 길에서 청량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당자춤은 특별한 기교가 필요한 춤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주로 두 팔과 다리를 활짝 펴거나 몸을 돌리거나 하는 동작이 특징적이다.

춤추는 소년의 의상이라든지, 춤의 끝 부분을 반드시 세 박자로 마무리하는 점은 조선통신사의 소동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조선 후기 200여 년 동안 열두 차례 일본을 다녀온 조선통신사의 활동은 조선과 일본 양국 간에 다각적인 측면에서 서로 영향을 주었다.

일본에서 통신사행을 위해 벌이는 각종 의례 및 연향은 조선의 통신사 구성원 개개인에게 새로운 문화 체험의 기회가 되었다. 통신사 행렬은 일본 땅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곳 분위기를 압도했다.

거대한 인원의 행렬이, 전혀 보지 못한 낯선 옷을 입고 낯선 음악을 연주하며 장대한 행렬을 이루고 행진하는 이국적인 모습은 그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고, 그 행렬은 마쓰리의 자원이 되었다.

그런 음악인들의 모습은 인형으로 재현되었고, 그 인형은 지금도 여전히 제작되어 사람들 곁에 남아 있다. 문화는 생명력이 길고 큰 씨앗이다. 그것이 어느 땅엔가 정착할 때 새로운 꽃을 피워내고 오래 향내를 뿜기 때문이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14547419101664.jpg  http://www.thaehaksa.com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송지원 | 서울대학교 연구원
조선시대 국가 전례와 음악사상사, 음악문화사, 음악사회사 분야의 연구를 통해 예와 악, 인간과 문화, 사회의 관점에서 역사를 읽어내고 있다. 음악 행위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역사 속에서 음악인들의 삶의 궤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 중이다. [한국 음악의 거장들], [정조의 음악정책] 등의 저서와 [담헌 홍대용 연구],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조선 전문가의 일생] 등의 공저, [다산의 경학세계], [역주 시경강의](전 5권, 공역) 등의 번역서가 있다.


발행2013.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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