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싱코데마요에 담긴 역사 - 멕시코의 5월 5일 축제, 알고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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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75회 작성일 16-02-0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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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5월 5일에 열리는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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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코데마요 축제에서 화려한 춤을 선보이는 무희들. 5월 5일에 열리는 싱코데마요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멕시코의 국경일이다.


해마다 5월 5일이면, 멕시코와 미국에서는 화려한 축제가 열린다. 축제의 이름은 바로 ‘싱코데마요(Cinco de Mayo)’. 이름 그대로 5월 5일에 벌어지는 싱코데마요는 멕시코의 가장 중요한 국경일 중 하나고, 미국에서는 주로 멕시코계 미국인들의 인구밀도가 높은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텍사스 그리고 뉴욕 등지에서 벌어지는 카니발 같은 행사이다.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국가임을 자부하는 미국의 경우, 싱코데마요는 대표적인 멕시코 전통 축제로 여겨진다. 마치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성 패트릭 축일(Saint Patrick’s Day)’에 온통 초록색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네잎 토끼풀이 그려진 깃발을 흔들며 축제를 즐기는 것처럼 말이다.

5월 5일, 멕시코와 미국의 거리는 거대한 퍼레이드로 뒤덮인다. 이 행렬 속에는 멕시코 전통의상을 입은 여인들이 현란한 몸짓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기도 하고, 고대 아스텍 전사들의 분장을 한 남성들이 전투를 벌이는 듯한 군무를 펼치기도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마리아치(Mariachi)’라고 불리는 4~5인조 악단이 흥겨운 멕시코 전통음악을 연주하고, 빠질 수 없는 멕시코의 요리 타코와 브리또에 시원한 맥주까지 곁들여지면 거리 곳곳은 흥겨운 축제의 분위기 속에 뜨겁게 달아오르고, 축제를 즐기는 모든 사람들은 열정적인 멕시코의 문화 속에서 하루를 보내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수년 전부터 싱코데마요 축제가 소개되어, 멕시코의 문화를 알리는 축제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멕시코 요리를 전문적으로 하는 몇몇 식당은 5월 5일이면 각종 프로모션을 진행하며 그날을 즐거운 파티로 만들곤 한다. 마침 이날이 어린이날인 관계로, 당연한 프로모션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멕시코 사람들은 왜 5월 5일을 축제로 기념하는 것일까? 사실 멕시코인들에게 5월 5일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국경일 중에 하나이다.



후아레스의 자유당 정부와 프랑스, 대립각을 세우다



약 300년간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던 멕시코. 비록 수많은 희생과 오랜 기간의 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해냈지만,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황제정이 들어섰다가, 공화정이 수립되기도 했으며 군주제에 향수를 가진 보수파들과의 내전도 끊임없이 벌어졌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 내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미국의 존재는 멕시코에 큰 위협이었으며, 실제로 멕시코는 현재 자신의 영토만큼이나 많은 땅을 미국에게 넘기기도 하였다.

이렇게 멕시코가 혼란스러웠던 데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원인은 바로 300년이나 지속되었던 식민지배에 있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본국인 스페인에 싼값에 1차 생산물이나 팔던 땅이 어떻게 쉽게 자생적으로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겠는가?

외국의 자본을 끌어들여 겨우 공장을 세운 몇몇 북부의 소도시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멕시코는 노예제 농장농업이 지배하는 저발전 국가였다. 또한 300년간 피부색이 하얀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채로 굳어진 정치 혹은 문화 권력은 멕시코 공화국이 민주주의와 같은 근대적인 가치를 받아들이는 데 큰 장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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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멕시코를 통치했던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안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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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 교회와 군인, 지주들의 부당한 특권을 박탈하는 그의 조치는 보수파와 외래 세력의 결집으로 이어졌다.



이 지난한 독립 후의 역사를 자세히 살핀다는 것은 지면상 불가능하므로, 19세기 중반의 멕시코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9세기 중반 멕시코를 지배했던 사람은 바로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안나(Antonio de Padua María Severino López de Santa Anna y Pérez de Lebrón, 1794 ~ 1876) 장군이었다. 굳이 산타안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단지 그가 1833년부터 1853년까지 무려 11번이나 대통령을 지냈다는 점만 언급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결국 이 엄청난 독재자는 1855년 발생한 민중봉기에 의해 추방되었지만, 여전히 가톨릭 교회와 군부, 지주 세력을 기반에 둔 보수파와 멕시코를 개혁하고자 하는 성향이 강한 자유주의파가 내전을 벌이는 등 멕시코의 정치는 여전히 안정을 되찾지 못하였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이 바로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Pablo Juárez García, 1806 ~ 1872)였다. 멕시코 원주민 출신인 후아레스는 정권을 잡자마자 교회가 가지고 있는 광활한 토지와 군인 및 지주들의 부당한 특권들을 몰수하거나 박탈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히 보수파는 자유당의 조치에 저항했고, 결국 이들이 선택한 것은 유럽 세력의 힘을 끌어와 멕시코를 다시금 유럽식 왕정으로 복귀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들이 잃어가는 특권을 지킬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고 누가 말했다던가? 안팎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후아레스 정부의 발목을 잡은 것은 경제 문제였다. 이미 빚을 질만큼 진 멕시코 정부는 원금과 이자를 갚을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후아레스 대통령은 1861년 7월, 외채와 외채 이자 지불을 중단할 것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멕시코의 채권 국가였던 영국과 스페인, 프랑스는 난리가 났다. 이들은 런던에 모여서 문제를 논의했고, 결국 멕시코에 군대를 파견하여 강제로라도 돈을 추징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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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아메리카 대륙에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했던 그는 멕시코 정부의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을 멕시코의 황제로 옹립시켰다.


이윽고 삼국에서 1만 명에 달하는 군대가 1862년 멕시코 동부의 항구 도시 베라크루스에 상륙했다. 위협을 느낀 후아레스의 자유당 정부는 각 국가와 긴급한 협상을 벌였고, 다행히 영국과 스페인의 군대를 돌려보내는 데에는 성공하게 된다.

그렇지만 오래 전부터 멕시코 내의 보수파와 긴밀한 관련을 맺어왔던 프랑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프랑스의 통치자였던 나폴레옹 3세(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1808 ~ 1873)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의 삼촌인 나폴레옹 황제를 넘어서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지 다소 허황된 거대한 꿈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꿈의 일부가 바로 아메리카 대륙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었다.1)

그는 멕시코 공화국 정부의 채무불이행 선언을 빌미 삼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Maximiliano I, 1832 ~ 1867)을 멕시코의 황제로 옹립시키고, 아메리카 대륙에 자신의 영향력을 미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사실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인 황후 에후헤니아(Eugenia de Montijo, 1826~1920)는 스페인 사람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을 놓고 미국과 사사건건 갈등을 일으켰던 스페인으로서는 프랑스가 미국의 턱밑에 제국을 건설해준다면 자신들이 손을 대지 않고도 코를 풀 수 있는 매우 좋은 견제 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침 미국은 남북전쟁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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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노림수는 멕시코의 특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보수파의 요구와 맞아떨어지는 것이었고, 이들의 지지를 뒤에 업은 프랑스 군대는 기어코 베라크루스로부터 수도 멕시코시티가 있는 서쪽으로 행군을 시작하게 되었다.



1862년 5월 5일, 푸에블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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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가 프랑스 외세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던 푸에블라 전투.


베라크루스 항구와 멕시코시티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 푸에블라. 보수파의 지지를 얻은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군과 멕시코 공화국을 수호한다는 명분을 가진 자유당 정부의 군대는 마침내 푸에블라라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샤를 드 로랑세(Charles de Lorencez, 1814 ~ 1892)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강력한 포병 화력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6,500여 명의 잘 훈련된 대군이었다. 반면 이그나시오 사라고사(Ignacio Zaragoza, 1829 ~ 1862) 장군이 이끄는 멕시코군은 의병대까지 합해서 4,500명 정도 되었으며, 보유하고 있는 무기도 보잘 것 없었다고 한다.

샤를 장군은 자신이 이끄는 군대의 우월함을 너무 믿었는지, 무작정 푸에블라의 멕시코 진지를 정면 돌파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렇지만 가파른 언덕과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푸에블라의 진지는 돌파하기 쉽지 않았고, 결국 퇴각하는 가운데 멕시코군의 복병 작전에까지 걸려들면서 프랑스군은 대패하고야 말았다.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군은 462명 사망, 300명 부상, 8명이 포로로 잡히는 패배를 겪었고, 멕시코 군은 83명 사망, 131명 부상, 12명이 실종되었다고 한다.2)

필자가 찾은 많은 서적은 대부분 멕시코인의 시각에서 쓰인 역사책들로, 명확한 근거로 멕시코군과 프랑스군의 질적 차이를 다루고 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프랑스 군대가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화력을 자랑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멕시코 인들이 자랑하듯, 푸에블라 전투가 엄청난 대승을 거둔 전투라고 보기엔 의심이 가긴 한다. 공성전에는 최소한 수성 인원보다 3~5배의 공성 인원이 필요한 것을 통념으로 삼았을 때, 그런 점에서 프랑스군이 무모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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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영웅 이그나시오 사라고사의 얼굴이 그려진 멕시코 500페소 화폐. <출처: (cc) Banco de México at commons.wikimedia.org>


1862년 5월 5일, 멕시코가 프랑스 외세군을 맞이하여 대승을 거두었던 푸에블라 전투. 이 전투의 승리를 축하하고 멕시코의 국력을 널리 알린 날이 바로 싱코데마요인 것이다. 당연히 이날은 멕시코의 국경일로 지정되었고, 전쟁 영웅 이그나시오 사라고사는 멕시코 지폐에 얼굴을 올리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멕시코의 전승 기념일, 싱코데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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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Execution of Emperor Maximilian of Mexico)>
1868년, 캔버스에 유채, 305 x 252 cm, 만하임 아트센터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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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전쟁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푸에블라 전투에서 멕시코가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결국 프랑스는 멕시코의 보수파들과 결탁하여 막시밀리안을 황제로 옹립하는데 성공했다. 1864년부터 멕시코에는 합스부르크가가 지배하는 괴뢰 제국이 성립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물론 이 제국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자유주의파를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했고, 그렇다고 보수파를 만족시키는 정책을 펴지도 못했다. 멕시코의 독립군 부대는 신출귀몰하며 끊임없이 황제의 군대를 괴롭혔고, 아메리카 대륙에 개입한 유럽에 대한 미국의 반발 또한 거세졌다.

프로이센과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프랑스의 국내 사정도 악화되었고, 결국 프랑스 군대는 불쌍한 황제만을 남겨둔 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867년, 3년의 통치를 끝으로 막시밀리안 1세는 총살당했고, 멕시코는 다시금 공화국으로 복귀하게 된다.3)

막시밀리안 1세는 매우 독특한 성격의 황제였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자신의 피가 멕시코의 안녕에 도움을 줄 수 있길 바란다”며, “멕시코 만세!”를 외치며 죽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멕시코 문화를 너무 사랑해서 죽는 순간, 마지막으로 마리아치의 연주를 요청했다고도 한다.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이지만, 합스부르크가 출신들이 매우 전제적인 통치 행태를 보였던 것과 달리 막시밀리안은 매우 온정주의적이고 일면 자유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의 적인 베니토 후아레스에게 황제 정부에서 역할을 담당할 것을 요청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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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싱코데마요에 얽힌 역사를 통해 이날이 멕시코의 전승기념일이며, 특히 프랑스라는 외세의 침략에 맞선 자랑스러운 기념일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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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코데마요 축제 때 푸에블라 전투를 재연하는 모습. 멕시코에서는 당시의 전투를 재연하는 역할극을 통해 그날을 기억한다.


그런데 싱코데마요를 축하하는 방법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미국의 경우에는 멕시코의 문화적인 면을 강조하고 미국과의 우호를 다지는 멕시코의 전통 문화 축제라는 방식으로 즐기는 반면, 멕시코의 푸에블라 주에서는 넓은 평원에서 당시의 푸에블라 전투를 재연하는 역할극을 한다.4)

물론 미국 내에서도 소규모로 전투 등을 재연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푸에블라 주에서처럼 마치 복기하듯 대규모 재연 행사를 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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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오늘의 결론은 5월 5일의 축제, 싱코데마요가 단순히 흥청망청 놀고 마시는 축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축제 안에는 멕시코의 가슴 아픈 식민지의 역사를 청산하는 지난한 과정들이 얽혀 있으며, 멕시코인들의 자존심과 결부된 영광스런 승리의 기록이 담겨 있다. 이왕이면 알고 즐기고, 주변에 멕시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축하해 주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대화를 나누면 친구가 되지만, 역사를 공유하면 형제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참고문헌

카를로스 푸엔테스, 서성철 역,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까치, 1997; 다니엘 꼬시오 비예가스 외, 고혜션 역, [멕시코의 어제와 오늘], 단국대학교출판부, 1991; Donald W. Miles, [Cinco de Mayo], iUniverse, Inc. 2006; Carol Gnojewski, [Cinco de Mayo, Celebrating Hispanic Pride], Enslow, 2002; Valerie Menard, [The Latino Holiday Book], Marlowe & Company,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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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석 |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유석은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힌 역사관을 바로 잡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쓰기로 표현하는 것이 목표이다.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1960년대 미국 서남부 치카노 운동의 성격: '친쿠바 혁명주의자'들의 영향을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빅이슈에 [국기로 보는 세계사]를 연재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Q&A세계사: 이것만은 알고 죽자](공저, 2010)와 [생각의 탄생: 19세기 자본주의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발행2013.05.24.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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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인 황후 에후헤니아(Eugenia de Montijo, 1826~1920)는 스페인 사람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을 놓고 미국과 사사건건 갈등을 일으켰던 스페인으로서는 프랑스가 미국의 턱밑에 제국을 건설해준다면 자신들이 손을 대지 않고도 코를 풀 수 있는 매우 좋은 견제 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침 미국은 남북전쟁 중이었다.
2
필자가 찾은 많은 서적은 대부분 멕시코인의 시각에서 쓰인 역사책들로, 명확한 근거로 멕시코군과 프랑스군의 질적 차이를 다루고 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프랑스 군대가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화력을 자랑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멕시코 인들이 자랑하듯, 푸에블라 전투가 엄청난 대승을 거둔 전투라고 보기엔 의심이 가긴 한다. 공성전에는 최소한 수성 인원보다 3~5배의 공성 인원이 필요한 것을 통념으로 삼았을 때, 그런 점에서 프랑스군이 무모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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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1세는 매우 독특한 성격의 황제였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자신의 피가 멕시코의 안녕에 도움을 줄 수 있길 바란다”며, “멕시코 만세!”를 외치며 죽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멕시코 문화를 너무 사랑해서 죽는 순간, 마지막으로 마리아치의 연주를 요청했다고도 한다.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이지만, 합스부르크가 출신들이 매우 전제적인 통치 행태를 보였던 것과 달리 막시밀리안은 매우 온정주의적이고 일면 자유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의 적인 베니토 후아레스에게 황제 정부에서 역할을 담당할 것을 요청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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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미국 내에서도 소규모로 전투 등을 재연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푸에블라 주에서처럼 마치 복기하듯 대규모 재연 행사를 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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