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신대륙에 상륙한 각국의 행보는? - 유럽의 팽창과 신대륙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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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6회 작성일 16-02-0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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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와 신대륙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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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신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 그는 정말 신대륙을 ‘발견’한 것일까.


1492년이라는 연도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 해인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미국인을 대상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으라면 예외 없이 매년 1, 2위를 다투는 인물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 ~ 1506)가 훗날 아메리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신대륙을 ‘발견’한 해가 바로 1492년이다.
이후로 스페인과 영국, 포르투갈 등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신대륙과 소통하게 되면서 지중해 중심의 중세 세계로부터 대서양 중심의 근대 세계로 나아갔다는 것이 콜럼버스의 ‘발견’을 칭송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발견’이란 무엇인가? 사전에 따르면 이 단어는 “이제까지 찾아내지 못했거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찾아냄”을 뜻한다.
즉,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말은 이제까지 사람들이 찾지 못했던 것이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대륙을 처음으로 찾아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콜럼버스가 닻을 내리고 땅에 발을 디뎠을 때, 그곳에 사람이 없었을까? 그곳에는 수많은 원주민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발견’이라는 말은 유럽인들 사이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용어인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점을 미루어 ‘조우(encounter)’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매우 중립적인 용어인 것 같지만, 이 역시 맘에 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조우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유럽인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럽인들이 건설한 유럽 내 식민지가 있는가?
그 반대의 경우만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유럽의 팽창’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었으며, 그 자체로 원주민 혹은 비유럽 세계에 대해서 이미 폭력적인 역사를 예비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처럼 유럽 팽창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는 유럽의 팽창이 시장의 확대나 1차 산물의 생산지를 확보하기 위한, 다분히 자본주의적인 이유에서 이루어졌다는 착각이다.
물론 이러한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며, 제국주의 시대에는 분명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15~17세기경 신대륙에 도달했던 유럽인들을 움직인 것은 매우 봉건적인 이유였다.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모험심 때문일 수도 있고, 종교적인 목적, 혹은 경쟁심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일확천금에 대한 꿈도 있었다.

둘째, 신대륙에 발을 내딛은 유럽인들을 모두 동일한 집단으로 이해하는 것도 착각이다. 영국인, 프랑스인, 스페인인, 포르투갈인, 그리고 네덜란드인 등은 모두 유럽에서 왔다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각기 다른 풍습을 가진 문화권의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신대륙에 도달했고, 원주민들을 대했으며, 식민 활동을 펼쳤다.

오늘은 신대륙에 도달한 각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는지’의 과정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이 글은 파트리치아 시드(Patricia Seed)의 명저, [Ceremonies of Possession in Europe’s Conquest of the New World 1492~1640]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이제부터 이 땅은 스페인 왕의 것임을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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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에 도착해 이곳이 스페인 국왕의 땅임을 선언하는 콜럼버스. 페르디난트와 이사벨 여왕의 문장이 깃발에 보인다.


1492년 10월 12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현재 바하마 군도라고 불리는 땅에 도착하였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일까? 일단 콜럼버스는 평평하고 양지바른 땅을 찾았다.
적당한 땅을 찾자 그는 스페인의 공동 통치자인 페르디난트(Ferdinand the Catholic, 1452~1516)와 이사벨 여왕(Isabella the Catholic, 1451~1504)의 깃발을 꽂았다.
그리고 그는 이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 앞에서 이제부터 이 새로운 땅이 페르디난트와 이사벨 여왕의 통치가 미치는 스페인의 영토임을 성대하게 선포하였다.

비단 콜럼버스만이 아니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후 새로운 땅을 발견하게 되면 항상 동일한 절차를 거쳤다.
함께 배를 타고 간 정복자 스페인 사람들만이 아니라 원주민들까지 함께 한 자리에서 미리 준비해간 공식 문서를 펼쳐 다음과 같이 선포하는 것이다.

“…이 세계의 창조주이시고 통치자이신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오니……그의 대리자이신 성 베드로와 그의 영적인 후계자이신 교황, …그리고 그 교황으로부터 전 세계의 통치권을 위임 받으신 스페인의 가톨릭 왕에게 이 새로운 땅과 바다가 주어졌도다.
……너희들은 겸허히 주 하나님과 교황, 그리고 가톨릭 왕의 통치를 받아들일 것이며 복종할지어다. ……만약 그리하지 않고 저항할 때 너희에게 일어나는 죽음 혹은 상처들은 전적으로 너희들의 잘못이지 우리 주군과 나, 그리고 나와 함께한 신사들 때문이 아니다.” 1)

이 선언문은 다양한 형태의 문서로 존재한다. 필자가 번역한 선언문은 파트리치아의 책에 나온 것을 재인용하였으며, 너무 길어서 임의로 생략하였다. 이 선언문은 스페인의 정복 활동이 왕성했던 1512년부터 1573년까지 사용되었다. Patricia Seed, [Ceremonies of Possession in Europe’s Conquest of the New World 1492~1640], 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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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선언은 당연히 스페인어로 이루어졌고, 통역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아마도 원주민들은 대체 얼굴이 하얗고 수염이 길게 자란 사람들이 나타나서 뭐라고 떠드나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복자인 스페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주 경건하고 성대하게 주 하나님의 이름과 교황, 그리고 가톨릭 왕인 스페인의 권리를 선포하는 것만으로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이 성립되는 것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프랑스의 소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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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거행되곤 하는 예배 행렬. 프랑스인들이 신대륙에 발을 내딛고 처음 행한 의식은 바로 이러한 예배 행렬이었다.


1612년 기록에 따르면 아마존 강 어귀에 다다른 프랑스인들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원주민에게 “사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상륙하는 것에 대해 원주민들이 “동의”를 하자 나머지 사람들이 배에서 내려 섬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프랑스 사람들이 한 일은 커다란 나무를 찾는 것이었다. 적당한 나무를 발견한 그들은 그 나무를 다듬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은 거룩한 분위기 속에서 찬송가를 불렀다. 성모 마리아 기도문이 울려 퍼지면서 십자가가 완성되자 조그마한 언덕으로 옮겨졌고, 곧이어 성수로 축성 받은 십자가가 그 언덕에 세워졌다.

이것으로 의식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원주민들의 행동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점차 십자가 주변에 몰려들어 “행복한” 모습을 보였고, 자발적으로 행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거룩하게도 십자가 옆에서 촛불을 들고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며칠 후, 이 종교의식은 프랑스 왕의 문장이 그려진 프랑스 국기가 십자가 꼭대기에 걸리면서, 그것도 원주민들이 그 국기를 게양하면서 끝나게 된다.

이것으로 이 신대륙의 땅은 프랑스 국왕의 소유가 된 것이었다. 그것은 프랑스의 무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자발적인 원주민들의 바람에 의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통한 종교행사에 참여한 원주민들 역시 스스로 프랑스 국왕의 백성임을 받아들인 것이요, 또한 가톨릭을 자신들의 종교로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사실 이러한 예배 행렬은 가톨릭 문화권에 속한 유럽 각국에서 행해지던 것으로, 오늘날에도 다양한 도시와 마을에서 축제 비슷하게 진행되곤 한다.
프랑스 국기를 등장시키며 조금은 세속화된 형태의 예배행렬은 가톨릭 문화를 전혀 접해보지 않은 원주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아마도 필자의 생각에는 커다란 나무 기둥을 세워놓고 노래를 부르는 하얀 얼굴의 수염이 많은 사람들이 신기해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 위협적이지도 않은 의식을 거행하는 것에 흥미를 느낀 원주민들은 자연스럽게 그 행사에 참여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참여를 자기 입맛대로 해석한 것은 프랑스인들이었다.
한 프랑스인의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인디언들은 스스로 프랑스의 상징을 세웠고, 그들의 땅을 프랑스 왕의 소유로 바쳤다.2)

1612년 이 종교 행사에 참여했던 탐험가 클로드 다베뷰(Claude D’Abbevillie)의 기록으로, 역시 시드의 책에서 재인용했다. 위의 책, 1p, 43~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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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울타리를 지어야 내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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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에 발행된 험프리 길버트 기념 우표. ‘뉴펀들랜드’라는 지명이 아래에 크게 적혀 있다.


1583년 험프리 길버트 경(Sir Humphrey Gilbert, 1539~1583)은 현재 뉴펀들랜드 지방에 위치한 세인트 존 항구에 도착했다.
이곳에 도착한 그는 우선 같은 흙에서 난 작은 막대기와 잔디를 가져올 것을 명령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바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전달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그뿐이었다. 어떠한 특별한 의식이나 선언도 없었다.

영국인들은 주로 북미 지역에 도달했고, 이후 수많은 식민지들을 건설해 그곳에 정주하였다. 그런데 독특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평범하다고 해야 할지, 영국에서 온 이들은 스페인이나 프랑스에서 온 사람들과는 다른 행동을 보였다.

일단 그들은 어디에 배를 정박해야 할 지를 관찰한 후, 적당한 곳에 모두 내렸다. 약간의 탐사를 마친 그들은 어느 정도 공간이 확보되면 일단 집과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울타리와 담을 쳤다. 곳곳에 집과 울타리,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정원과 밭이 만들어졌다. 영국인들은 그곳에 씨를 뿌리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식민지에서 새로운 땅을 소유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배타적인 소유권을 보여주기 위해 울타리와 담장을 치고, 그 안에 곡식과 가축을 키우는 것이 그들의 소유권 주장이고, “식민” 활동이었다.3)

이러한 점에서 영국인들이 북미의 인디언과 전쟁을 벌여 그들의 땅을 빼앗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땅을 더 소유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것은 과도한 상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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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대륙에 건너온 영국인은 이러한 기록을 남겼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고, 정원을 가꾸는 것이야말로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며……, 땅을 향상시킴으로써 나라를 이롭게 만드는 공적인 일이다.4)

위의 책, 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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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측정과 계량화 VS 네덜란드의 기록과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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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카토르 도법에 의해 그려진 지도. 1569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근대 지도학의 창시자로 부리는 네덜란드의 지리학자 메르카토르.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달한 후 8년이 지난 1500년의 어느 해, 포르투갈 사람들은 현재 브라질로 불리는 곳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쉽게 땅에 발을 내딛지 않았다.
일단 그 지역에 사는 부족인 투피족(Tupi)과 물물교환을 하며 거래를 텄다. 교역을 통해 거래를 맺은 것이다.

며칠 동안 이 지역의 해안을 따라 항해를 하고 교역을 하면서 지리를 터득하자, 천문학자이자 1등 항해사가 비로소 뭍으로 탐사에 나섰다.
이 사람은 정확한 측정 도구를 가지고 태양의 고도를 측정했으며 별들의 위치를 기록하였다. 파트리치아 시드의 표현에 따르자면, 포르투갈인들의 소유권은 “땅이나 흙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머리 위의 별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5).”

위의 책, 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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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사람들은 또 달랐다. 1616년 8월, 신대륙에 도달한 코르넬리우스 헨릭손(Cornelius Henricxson, 1572 ~ 1650)은 네덜란드 의회에 북위 38도와 40도 사이에 존재하는 새로운 땅을 발견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자 의회가 요구한 것은 그 땅에 대한 지도였다. 헨릭손과 이후 네덜란드 사람들은 모든 새로운 땅에 대한 기록을 수치화하고, 지도로 남겼다. 이렇게 지도로 제출된 땅은 네덜란드의 소유가 되었던 것이다.

지도에 대한 네덜란드의 욕심은 대단한 것이었고, 당시 네덜란드에서 만들어진 지도는 외부로 유출될 수 없는 극비 문서였다. 물론 타국의 사람들은 이 지도를 얻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 지금도 우리가 쓰고 있는 세계 지도는 메르카토르(Gerhardus Mercator, 1512 ~ 1594) 도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네덜란드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지리학자 중에 한 명인 바로 그 메르카토르 말이다.


‘신대륙 발견’을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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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가장 긴 다리 1, 2위를 다투는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 다리’. 식민지 개척으로 포르투갈의 화려한 역사를 여는 데 기여한 바스코 다 가마를 기념하여 그의 이름을 붙였다. 신대륙 발견과 대항해시대에 기여한 탐험가들의 이름은 이처럼 오늘날까지 유럽인들의 머릿 속에 두고두고 기억되고 있다. <출처: (cc) Osvaldo Gago at en.wikipedia.org>


지금까지 우리는 같은 유럽인들이라도 신대륙에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 얼마나 다르게 행동하였는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파트리치아 시드는 이들이 유럽으로서 갖는 동일성과 함께 각국에서 드러나는 문화적 차이점을 부각시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유럽은 모두 로마의 영향을 받았지만, 스페인은 로마의 문화 중 특히 기독교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물려받았으며, 영국은 로마인들의 식민 활동을 크게 본받았다.
프랑스는 로마의 침략을 받은 골족의 저항 정신 덕택에, 자신들의 식민 활동에 있어서도 원주민의 동의를 구하는 형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이 점차 신대륙에서 보여준 정책에서도 차이점을 살펴볼 수가 있는데, 예를 들어 영국의 경우에는 식민지의 토지, 건물 등에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영국의 다른 식민지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반면 스페인은 사람의 머릿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스페인은 원주민과 노예 노동력을 기반으로 대농장 혹은 광산에서 1차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형태로 식민지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물론 스페인 사람들은 이들이 주 하나님과 국왕의 축복받은 신민이기 때문에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어땠냐고? 그들은 그들이 교역하는 상품을 중심으로 세금을 부과했다고 한다.
딱히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 자체로 ‘포르투갈스럽고 네덜란드스럽다’고 말한다면 너무 무책임한 것일까?6)

실제로 영국인들에 비해 스페인의 식민 통치는 오히려 원주민들을 쉽게 말살하거나 죽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는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북미에 비해 스페인의 통치가 이루어졌던 중남미 지역에서 원주민들과 백인들이 결혼도 하고, 메스티소 등의 혼종적 문화를 낳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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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유럽의 팽창’ 혹은 ‘신대륙의 발견’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유럽은 다른 이들이 살고 있는 땅에 도달해서는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다루고 소유했고, 결과적으로 향후 식민주의 혹은 제국주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비유럽인들에게 상처 혹은 폭력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던가? 그 면모를 유심히 살펴보면, 아주 미세한 차이점과 균열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동일하게만 보였던 사람들과 사건들이 알고 보면 매우 다른 것들이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이 역사 공부가 아닐까?

참고문헌

  • Patricia Seed, [Ceremonies of Possession in Europe’s Conquest of the New World 1492~164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 John Thornton, [Africa and Africans in the Making of the Atlantic World, 1400-18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 Randy J. Sparks, [The Two Princes of Calabar: An Eighteenth-Century Atlantic Odyssey], Havard College Press, 2004.
  • Judith Coffin etc., [Western Civilizations: Their History & Their Culture(17th edition)], W. W. Norton & Company, 2011.
  • 설혜심, [지도 만드는 사람], 길, 2007.
  • 장-바티스트 뒤로젤, 이규현 역, [유럽의 탄생], 지식의 풍경, 2003.
  • 크리스토퍼 도슨, 김석희 역, [유럽의 형성], 한길사, 2011.
  • 볼프강 슈말레, 박용희 역, [유럽의 재발견], 을유문화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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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석 |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유석은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힌 역사관을 바로 잡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쓰기로 표현하는 것이 목표이다.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1960년대 미국 서남부 치카노 운동의 성격: '친쿠바 혁명주의자'들의 영향을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빅이슈에 [국기로 보는 세계사]를 연재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Q&A세계사: 이것만은 알고 죽자](공저, 2010)와 [생각의 탄생: 19세기 자본주의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발행2013.09.06.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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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언문은 다양한 형태의 문서로 존재한다. 필자가 번역한 선언문은 파트리치아의 책에 나온 것을 재인용하였으며, 너무 길어서 임의로 생략하였다. 이 선언문은 스페인의 정복 활동이 왕성했던 1512년부터 1573년까지 사용되었다. Patricia Seed, [Ceremonies of Possession in Europe’s Conquest of the New World 1492~1640], 69p.
2
1612년 이 종교 행사에 참여했던 탐험가 클로드 다베뷰(Claude D’Abbevillie)의 기록으로, 역시 시드의 책에서 재인용했다. 위의 책, 1p, 43~44p.
3
이러한 점에서 영국인들이 북미의 인디언과 전쟁을 벌여 그들의 땅을 빼앗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땅을 더 소유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것은 과도한 상상일까?
4
위의 책, 25p.
5
위의 책, 1p.
6
실제로 영국인들에 비해 스페인의 식민 통치는 오히려 원주민들을 쉽게 말살하거나 죽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는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북미에 비해 스페인의 통치가 이루어졌던 중남미 지역에서 원주민들과 백인들이 결혼도 하고, 메스티소 등의 혼종적 문화를 낳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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