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화재보험과 생명보험의 탄생 - 재난을 대비하는 인식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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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6회 작성일 16-02-0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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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런던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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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6년 발생한 런던 대화재를 묘사한 그림. 불길은 5일간 타오르면서 런던 시내 가옥의 80%를 집어삼켜 수많은 이들이 집을 잃고 이재민이 되었다.



런던이 정의의 피를 요구하리니

6이 세 번 반복되는 해에 불벼락이 내리리라.

고대의 여인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그와 같은 많은 전당들이 소실되리라.-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

1999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예언서로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는 1666년에 발생한 런던 대화재에 대해서도 위와 같은 예언을 했었다.
실제로 1666년 9월 2일 새벽에 어느 빵집에서 치솟은 불길은 5일 동안 타오르면서 대부분이 목조 건축물로 이루어져 있었던 런던 시내 가옥의 80%를 태워버렸다.
이 화재로 타버린 교회나 관청 같은 공공건물만 87개에 달하며 그중에는 런던의 성 베드로 성당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타버린 런던 시내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대화재가 일어날 것을 염려한 영국은 목조 건축에 제한을 두었다. 이후 런던은 석조와 벽돌 건축물들을 위주로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런던 대화재가 이렇게나 막대한 피해를 낸 데에는 당시 영국의 도시화현상이 한몫을 했다. 17세기 런던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 중 하나였고, 이때는 지방에서 런던으로 옮기는 이촌향도 현상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가난한 사람들이 좁은 런던에 몰리면서 자연스럽게 목재로 급하게 지은 거주 밀집 지역이 늘어나게 되었다.
결국 대화재 당시의 런던은 도시 곳곳에 거대한 나무더미들이 잔뜩 쌓여있는 상황이나 다름없었고, 이 불쏘시개들은 5일 동안 런던 전역이 화마에 휩싸이도록 충실한 도우미 역할을 했다.

살고 있던 집이 불타 없어져도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심리인데, 살고 있던 도시 전체가 불타 없어져버린 당시 런던 시민들의 충격은 도저히 필설로는 형용이 불가능할 것이다.
더군다나 지난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던 내란과 역병으로 가뜩이나 흉흉해져 있던 런던 시민들에게 이 화재는 그들의 앞날을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하나의 계시와 같이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러한 불안 속에서 런던 시민들은 앞으로 혹시 또 다가올지 모르는 재앙에 대비하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했다. 이것이 현재에까지 이어지는 ‘화재보험’의 시초가 되었다.


재앙에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화재보험의 탄생



지난 연재에서 살펴본 해상보험과 달리 화재보험은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보험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화재로 인한 손해를 보상해주는 제도는 일부 지역에서 존재해왔다.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던 길드 등의 조합에서는 화재 등의 사고로 발생한 손해에 대해서 구성원들이 돈을 모아 보상해주는 기능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반적인 손해보험의 역할을 하던 조합의 공제가 화재에도 보상을 해준 것이지, 독립적인 화재보험이 존재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화재보험 회사는 런던 대화재가 발생한 그 이듬해에 아주 발빠르게 등장했다. 1667년 치과의사 니콜라스 바본(Nicholas Barbon)은 국왕의 명을 받아 대화재를 대비하고 화재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사무실을 열었다.
혹시나 화재가 발생하여도 그 피해 금액을 보상해준다는 제안은 한창 도시 재건 공사에 열을 올리던 런던 시민들에겐 그야말로 솔깃한 소식이었다.
제대로 된 이름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화재사무소(fire office)로 시작했던 이 사무실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화재보험들이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바본의 화재보험 사무소는 1680년 합자회사로 성장하여 단기간에 정착한 대표적인 화재보험회사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1705년 피닉스 화재 사무소(Pheonix Fire Office)로 개명하면서 약 100여년 간 영업을 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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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년에 문을 연 선 보험사무소의 화재 표식. 집 앞에 부착해 해당 가옥이 화재보험에 가입했음을 확인하는 마크로 쓰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화재보험회사는 1710년 런던의 찰스 포베이(Charles Povey)가 설립한 런던 보험회사(company of London insurer)다.
이 회사 역시 화재보험 가입 붐에 힘입어 빠르게 전국으로 영업망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회사가 영업망을 넓히는 과정에서 ‘런던 보험회사’라는 이름이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이에 런던 보험회사는 1726년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개명하게 되는데, 바로 선 보험사무소(Sun Insurance Office)였다. 회사가 그 이름을 ‘선(Sun)’으로 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존재한다.

당시 영국에서는 화재보험의 가입자에게 화재 표식(fire mark)이라는 것을 나누어 주었다. 이 화재 표식은 현재의 에스원이나 세스코 마크처럼 집 앞에 부착되어 그 집이 화재보험에 가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런던 보험회사의 화재 표식은 태양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이 모습을 따 이름을 지은 것이다.
1710년에 개업한 선 보험회사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합병을 거치며 현재 전 세계 140개 국가에 1700만 명의 가입자를 가진 RSA 보험그룹(RSA insurance group)으로 영업을 지속하고 있다.

런던 대화재와 화재보험의 탄생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당시 사람들의 중요한 인식의 변화는 바로 재앙에 대한 대비이다.
불가항력적인 재난을 신께서 내린 운명으로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것에 대비하고, 혹시 사고가 일어나도 그에 대한 보상을 받는 방법을 강구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손익계산이 빠른 상인 집단은 진작부터 이러한 개념을 갖고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재앙이라는 위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험의 시대



화재보험의 성공에 힘입어 17세기 말의 영국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수많은 보험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해양보험은 물론이거니와 가족의 병이나 장애의 구제를 위한 보험, 스스로 빚을 변제할 능력이 되지 않는 이들을 위한 보험, 친구의 죽음으로 궁핍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보험, 대화 중의 욕설을 자제하기 위한 보험, 자녀가 많은 이들의 이익을 위한 보험 등 그야말로 셀 수 없는 종류의 보험들이 등장해 보험의 춘추전국시대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겨난 보험들 가운데 생명보험이 있었다. 사실 이렇게 보험 시장이 급성장하게 된 데에는 1690년대부터 영국의 금융 산업 자체가 획기적인 도약을 하게 되는 ‘재정 혁명(financial revolution)’이라는 사건이 존재한다. 이 부분은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관계로 다음 연재분에서 상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생명보험은 1699년에 문을 연 머서즈 컴퍼니(Mercer's Company)였다.
본래 포목상들의 조합이었던 머서즈 유니온(Mercer's union)이 조합원들의 복지를 위해 시작한 보험업이 머서즈 컴퍼니로 확장된 것이다.
이 회사는 가입자가 죽을 때까지 납입한 금액의 이자를 사망 시에 지급하는 회사였는데, 그 이자율이 무려 30%나 되었다.
당연하게도 회사는 영업을 시작한 지 수년 만에 파산에 이르렀고, 설립자의 뜻을 기려 몇몇 상인들이 마련한 구제 기금을 받고도 얼마가지 않아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사실 당시에 난립하던 보험회사들에는 이렇게 사업성이 전무하거나 아예 사기인 경우도 많았고, 더 심하게는 변형된 도박인 경우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1712년에 발행된 한 생명보험은 가입자가 100파운드의 보험금을 일시에 납입하고 총 보험금의 20%를 복권 추첨을 통해 한 명에게 몰아주는 방식이었다.
당시의 100파운드는 일반 노동자 10년치의 연봉에 해당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보험은 사실상 보험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아미카블은 이제까지보다 좀 더 쉽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부인이나 자녀 혹은 다른 지인에게 (사망보상금을) 지급하고자 하는 모든 구성원들의 상호 이익을 위하여 다음의 문서에 명시된 방법으로 자애로운 기여에 의해 상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세워졌다.”- 아미카블 소사이어티의 특허장에 적힌 설립 의의

보험 가운데 가장 막내, 생명보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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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카블 소사이어티의 사무실. 1801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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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년에 설립된 최초의 생명보험회사 아미카블 소사이어티의 휘장.



그렇다면 진정한 생명보험의 시초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현대의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정한 보험료를 납부한 가입자가 사망할 경우 약정된 보험금을 지불함으로써 유족을 위로하고 예상되는 경제적 손실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어 정상적인 영업을 지속한 최초의 생명보험회사는 1706년에 설립된 아미카블 소사이어티(Amicable Society for a Perpetual Life Assurance)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생명보험은 해운보험이나 화재보험에 비교해서 상당히 늦은 시점에 시작된 셈이다. 다른 보험에 비해 생명보험이 특히 늦게 만들어진 이유는, 당시로서는 인간의 사망률을 예측하고 적정한 보험료를 책정할 만한 보험계리(actuary)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험에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된 생명 통계가 최초로 정립된 것은 1693년의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 1656~1742, ‘핼리혜성’으로 유명한 그 핼리이다)의 사망 통계였다.
그러나 이 통계는 기본적으로 연금 지급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망보험에는 적절치 못하였다. 핼리 이후 정확한 보험계리를 위한 사망 통계의 작성과 수학의 발달은 계속되었지만, 결국 사망보험에 사용할 만한 제대로 된 통계와 보험계리가 등장한 것은 1764년이나 되어서야 가능했다. 그렇다면 아미카블 소사이어티는 어떠한 방식으로 생명보험을 운용한 것일까?


아미카블 소사이어티의 성공 방식



1705년 플리트가의 서점 주인이었던 존 하틀리는 가입자가 사망한 뒤에 일정 기간 동안 유가족에게 지속적으로 연금을 지급해야 하는 기존 연금보험 체계의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형태의 보험을 개발했다.
이는 당시 보험 가입자의 수요를 제대로 진단한 것이기도 하였는데, 부실한 보험회사나 사기 보험이 워낙 난무하던 시기라 약속된 기한까지 제대로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틀리가 도입한 방법은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고 있던 톤틴 연금을 생명보험에 적합하게 변환한 것이었다. 톤틴 연금은 이탈리아의 톤틴이 개발한 방식으로, 가입자를 2000명 단위로 모집하여 기금을 조성하고 그 이자를 2000명이 균등하게 나누어 갖는 것이었다.
이는 시간이 지나 가입자가 사망하게 될수록 가입자 1인에게 돌아가는 이자 수익이 늘어나고, 최후의 1인은 2000명 분의 이자를 혼자서 받게 되는 방식으로 운용되기 때문에 누가 더 오래 살아남느냐로 당첨이 결정되는 복권과도 같았다.

하틀리가 톤틴 연금의 방식을 생명보험으로 전환하면서 변화를 준 부분은 보험금의 수령을 살아남은 사람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해 사망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분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환은 톤틴 연금이 가지고 있던, 같은 연금 상품에 가입한 ‘내 이웃이 빨리 죽기만을 기다리는’ 도덕적인 결함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또한 사망 시에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생명보험과 조금 더 가까워진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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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틀리가 1705년 회사 설립을 위해 낸 광고.


1706년, 74명의 발기인을 모집하여 앤 여왕의 특허장을 발급받아 설립된 생명보험은 불과 1년 만에 1차 가입자 목표치인 2000명을 달성하였다.
이 보험에 가입하는 사람이 매년 내야 하는 돈은 6파운드 4실링이었는데, 그해의 사망자 수에 따라 매년 달라지는 보험금은 최저 120파운드에서 260파운드에 달해 가입자의 메리트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100파운드는 현재의 1,700만원으로 환산할 수 있으므로, 매년 90만원 정도를 납부하고 1,500만원에서 4,500만원 사이의 보험금을 받은 것으로 환산할 수 있다.

아미카블 소사이어티가 순식간에 목표 인원을 채우고 성공을 거두자 런던에서는 이와 같은 방식을 도입한 보험회사들이 순식간에 늘어나, 2년 사이에 아미카블의 방식을 차용한 생명보험회사만 60개나 설립되었다.
아미카블 방식은 가입자들에게도 안전한 자산을 보전해주었지만 회사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이득이 되는 방식이었다.
회사에서 지급되는 보험금은 매년 납부되는 6파운드 4실링 중에서 6파운드만 보험 기금으로 적립되고, 4실링은 온전히 회사의 이익으로 돌려졌다.
따라서 회사의 입장에서는 가입자 2000명만 채우면 그해의 사망자 수와 관계없이 일정한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구조였고, 무엇보다 최초의 보험금을 지급하기 위한 준비금이나 만약의 사태를 위한 금액을 따로 마련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사망자 수나 보험료 납부 여부와 관계없이 보험금은 그해 조성된 기금에서만 지출되었다.

회사가 설립되고 14년이 지난 뒤인 1720년, 영국에는 남해 거품 사건이라는 주식 버블이 발생하였고 영국 금융 시장 전체가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된다.
생명보험 시장도 이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아미카블 소사이어티를 제외한 모든 아미카블 방식의 생명보험회사가 사라지고 말았다.
아미카블 소사이어티는 1720년 이전에 생명보험에 대한 특허장을 발부받았던 유일한 회사였기 때문에 이 위기에도 살아남아 영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아미카블 소사이어티는 이후 규모를 확장하여 1790년에 4000명, 19세기 초에는 8000명까지 성장하였다가 1867년 놀위치 유니온(Norwich union)에 인수되었다.
19세기 중반이 되자 금융 시장이 촘촘하게 발달한 탓에 안전하고 수익이 안 나는 구식의 보험회사로서는 더 이상 살아남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생명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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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보험은 생명의 가치를 돈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생명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 가격을 매기는 행위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생명보험에 대한 부정적 인식 또한 존재한다.


생명보험의 탄생 과정에서 살펴볼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은 이 시기의 사람들이 생명의 가치를 돈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는 발상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생명의 가치를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현재까지도 도덕적으로 매끄럽지 못한 주제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이 점 때문에 생명보험에 대한 도덕적ㆍ종교적 거부감이 극심했었고, 프랑스에서는 20세기가 다 되도록 생명보험이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았었다.
이것은 배에 실린 화물의 가격이나 불에 탄 집의 건축비를 계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생명보험이 가져다주는 사회적 안전망으로서의 역할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만, 사람의 목숨에 합법적으로 가격을 매기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한 지는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참고문헌

  • 전무부, <로이즈보험시장의 실태분석>, [무역학회지] 제 25권 제4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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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무
글쓴이 강종무는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현상과 제도들의 역사적 기원을 파악하여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학위 논문의 주제는 <남해 거품 사건을 통해 본 18세기 초 영국의 사회문제>이다.


발행201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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