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자유와 권리의 상징, 마그나카르타 - 누구를 위한 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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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67회 작성일 16-02-0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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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립도서관에 있는 1215년 판 마그나카르타 원본.



자유민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와 같은 신분의 동료에 의한 합법적 재판 또는 국법에 의하지 않는 한 체포, 감금, 점유 침탈, 법익 박탈, 추방 또는 그 외의 어떠한 방법에 의하여서라도 자유가 침해되지 아니하며, 또 짐 스스로가 자유민에게 개입되거나 또는 관헌을 파견하지 아니한다.-1215년 마그나카르타, 제 39절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잡는 한 장의 종이



영국 국립도서관(British Library)의 문화재 전시장에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책과 필사본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름답게 채색된 8세기경 비드의 [잉글랜드인들의 교회사], 셰익스피어 사후 7년 후에 출판된 작품 전집,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에서부터 모차르트, 헨델, 쇼팽, 베토벤의 자필 악보들과 비틀즈의 노래 가사 등이 망라되어 있다.
거기에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기계식 인쇄술로 찍은 구텐베르크 성서 2개의 완전본까지, 그야말로 유럽 문화의 보물 창고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의외로 가장 많은 관람객들의 발길이 머무는 전시품은 따로 있다. 방탄유리 속에 보관된, 빽빽하게 글씨가 들어찬 밋밋하고 칙칙한 누런 양피지 한 장. 그 유명한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 대헌장)이다.

서구 헌법의 기초를 세웠다고 평가 받는 이것은 세계의 어떤 박물관이나 의회에서도 거론될 만큼 유명하며, 미국독립선언문 또한 이 마그나카르타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다.
그 작성자가 마그나카르타를 정독한 후에 독립선언문을 작성했다고 공언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특히 초판인 1215년 판 마그나카르타의 39절은 오늘날까지 인류의 자유를 강하게 대변하고 있는 구절로 유명하다.
미국에서는 이 대헌장을 현대적 자유의 주춧돌로 생각하며, 영국에서도 영국 의회와 헌법의 기초로 중요시 여긴다.
왕의 절대 권력을 제어하는 권리 및 자유를 향한 외침이자 법 위에는 왕도 없다는 입헌주의를 정착시킨 영국의 이미지는 바로 이 마그나카르타의 역사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도 모든 사람의 자유와 기본권을 보장하는 근원적 상징으로 회자되는 마그나카르타. 이것은 애초부터 바람직한 이유로 만들어졌을까?
마그나카르타 안에 명기된 조항들은 과연 ‘모든 자유민’을 위한 것이었을까? 마그나카르타는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이제 이것이 만들어진 13세기 초 잉글랜드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야심에 비해 무능했던 사자왕의 후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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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에서 용맹한 활약을 보여 ‘사자의 심장을 지닌 왕’으로 불린 리처드 1세.





형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자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던 존 왕.




존 왕(John, the King of England, 1167~1216)은 앙주 왕조의 시작이자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켓을 살해한 왕으로 유명한 헨리 2세(Henry II, 1133~1189)의 막내아들로, 살라딘과 싸운 서방 십자군 원정의 용장 사자심왕(獅子心王) 리처드(Richard the Lionheart, 리처드 1세, 1157~1199)의 동생이다.

그리고 영국 왕실 역사에서 손꼽히는 폭군이자 무능한 왕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을 총애한 아버지를 배신하고 형들과 어머니 엘리노어와 결탁해 헨리 2세에 반기를 들었으며, 형인 리처드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가 원정으로 나라를 비우자 호시탐탐 왕의 자리를 노리던 인물이었다. 결국 후사가 없었던 리처드 1세가 마지막 순간에 존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나서야 1199년, 드디어 염원하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야심에 비해 능력이 없었다. 프랑스 혈통의 노르만 왕조의 선대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프랑스 내 영지를 전쟁의 패배로 모두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빼앗겨 ‘실지왕(失地王)’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형이 ‘사자의 심장을 가진’ 것에 비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별명이다.

물론 그에게도 억울한 부분은 있었다. 존 치세의 수많은 문제점들, 즉 농노 수탈, 빈부 격차, 인플레이션, 재정 고갈, 전쟁의 위협, 십자군 문제 등은 이미 선대인 리처드 때부터 심각했으며, 하물며 ‘사자왕’인 그가 계속 전쟁에 나가고 포로로 붙잡혀 몸값까지 치르게 하는 바람에 외교 관계와 재정 상황까지 악화된 상황이었다. 존이 무능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가 물려받은 잉글랜드 또한 이미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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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왕의 두 번째 왕비이자 그가 마지막까지 사랑했다는 앙굴렘의 이자벨라.


안 그래도 리처드 시절부터 라이벌 관계였던 필리프 2세와 사이가 안 좋은 마당에 존 왕은 호시탐탐 그의 프랑스 영지를 노리는 필리프에게 결혼 문제로 분쟁의 씨앗을 제공한다.
존 왕이 마지막까지 사랑했다고 알려진 그의 두 번째 왕비 앙굴렘의 이자벨라와의 결혼이 문제였다. 부유한 상속녀인 이자벨라는 원래 한 프랑스 귀족의 약혼녀였는데, 존 왕이 가로채어 결혼해 버린 것이다.

이때다 하고 빌미를 잡은 필리프는 명목상 프랑스 왕의 봉신1)인 존 왕을 소환했다.

당연히 존은 이에 불응했고, 필리프는 그것을 구실로 프랑스 내 존의 영지를 몰수했다. 존 왕은 이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벌였지만 모두 실패했고, 1214년 마지막 남은 프랑스 내 잉글랜드의 영지이자 자존심이었던 가스코뉴 지방까지 빼앗기면서 그의 실정은 절정에 달했다.

당시 잉글랜드의 왕은 프랑스 내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왕인 동시에 중세 봉건제의 전통에 따라 위계상으로는 프랑스 왕의 봉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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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백성들의 원성과 귀족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으며, 특히 귀족들은 프랑스와의 연이은 전쟁으로 인해 부과되는 막대한 세금과 왕의 무능에 진절머리가 나 있었다.

더 이상 왕의 횡포와 실정,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자신들의 세력 약화를 두고 볼 수 없었던 귀족들은 1215년 1월, 런던 회의에서 무장을 하고 왕과 맞닥뜨리게 된다. 사실상의 반란이었다.


누구를 위하여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했나




짐은 누구를 위하여서라도 정의와 재판을 팔지 아니하며, 또 누구에 대하여도 이를 거부 또는 지연시키지 아니한다.-1215년 마그나카르타, 제 40절

자, 그렇다면 마그나카르타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예상하다시피 왕의 권위를 제한하는 마그나카르타는 당연히 존 왕이 만든 것도 아니며 그가 좋아서 서명한 것도 아니다.

그러면 계속되는 폭정에 지친 백성들이 그들의 권리를 찾고자 들고일어선 결과일까? 그것도 아니다. 마그나카르타는 귀족들에 의해 작성되었고, 사실상 일반 백성들의 요구나 의지는 반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시의 상황에서 이 헌장은 귀족들에게 어떠한 의미였을까?

역사를 통틀어봤을 때 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킬 때 필수적인 조건이 있다. 바로 ‘명분’이다. 그리고 이 명분에는 정통성을 가진 다른 왕 후보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당시 존 왕에게 대항한 귀족들에게는 이 명분이 없었다. 왕의 폭정? 과도한 세금과 빚 독촉? 사실 이 정도의 문제가 없는 왕은 거의 없으며, 병역면제세 부과나 빚 독촉은 왕의 당연한 권리로 여겨졌던 당시에 이것만으로는 왕에 대항해 안팎의 지지를 얻기는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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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5년 6월 15일,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고 있는 존 왕. 카셀(Cassell)의 [잉글랜드사(History of England)]에 수록된 삽화로 1902년에 그려진 것이다.


반란을 정당화하기 위한 가장 큰 카드는 바로 기존 왕을 대체할 후보자인데, 당시의 잉글랜드에는 반란 귀족들이 선두에 세울 만한 왕실 후계자가 없었다.

존 왕의 하나 있던 조카는 이미 죽었고, 존의 아들(후의 헨리 3세)은 10살도 채 되지 않는 어린아이였다. 그나마 앙주 가문의 피가 섞인 인물이 프랑스의 루이 왕자였는데 아무리 반란군이어도 적국의 사람을 왕으로 앉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이유로 반란 귀족들의 가장 큰 문제는 지지자를 모을 구심점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울 만한 충성의 대상이 부재했던 것이다.

여기서 마그나카르타가 등장한다. 반란 귀족들은 전략을 수정했다. 왕을 바꾸는 대신 왕의 권한을 억제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증대시켜 줄 조항들로 가득 채운 마그나카르타, 대헌장을 들고 가 존 왕에게 서명시켜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의명분에 그런 이유를 내세울 수는 없는 법이라, ‘국가의 개혁’이라는 포장을 씌워 ‘나라 전체’의, 즉 ‘공동체’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는 명분을 마그나카르타를 통해 앞세웠다. 그야말로 대의명분이었다. 모두의 기본권과 자유를 위한 정의로운 싸움, 그것이 반란 귀족들의 무기였던 것이다.

군사적 패배와 압박에 못이긴 존 왕은 결국 1215년 6월 15일, 후에 역사적인 장소가 되는 템스 강변의 시골 러니미드(Runnymede)라 불리는 초원에서 반란을 일으킨 국왕 봉신들과 마그나카르타의 63개 조항들에 동의할 것을 약속하며 이에 서명했다. 하지만 이것은 헌장에 언급된 ‘자유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태어난 ‘마그나카르타’




신의 은총에 연원한 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의 영주, 노르망디와 아키텐의 공작, 앙주의 백작인 존은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백작, 봉신, 재판관, 삼림관, 주장, 집사, 종복, 그리고 모든 대관 및 충성스러운 인민에게 인사드린다.-1215년 마그나카르타 첫머리말

마그나카르타의 중요한 조항들에는 외국 용병 사용의 금지, 교회의 독립, 리처드 때의 몸값과 같은 봉건적 보조금 지급의 폐지, 통일된 도량 단위의 요구 등이 있으며, 앞서 언급된 39절은 근대 이후 인신보호영장, 고문 금지, 배심재판, 법의 지배를 파생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이 헌장은 교회, 봉건귀족, 상인들, 유태인들의 이익을 보호하였으며, 게다가 ‘평민들’을 인정하였다. 지금의 눈으로 봐도 매우 ‘근대적’이며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 조항들이 당시에 얼마만큼의 의미를 가졌으며 얼마나 유효했을까? 역설적이게도 후대의 평가와 다르게 당시의 마그나카르타는 실패작에 가까웠다.

우선 영국 역사상 가장 무능한 왕으로 꼽히는 존 왕 치세에 만들어진 것도 아이러니지만, 이 헌장은 궁극적으로 국가 개혁이나 권리와 자유의 보장이 아닌, 왕과 귀족 사이의 갈등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체결된 일종의 위장된 평화 조약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 헌장이 중세 시대 계속된 봉건 대귀족과 왕 사이의 권력 싸움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근대적 조항이 아닌 과거 봉건영주들의 주장을 재탕한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잉글랜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사실 이 협정으로 이득을 보지 못했다. ‘자유민’은 지위도 땅도 없는 농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헌장은 당시 막 성장하고 있었던 상인 계층의 신변 안전을 다소 보장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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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3세가 서명한 1225년 판 마그나카르타.


급한 불을 끈 존은 9월이 되자 교황에게 “그 수치스럽고 품위를 손상시키는, 폭력과 공포에 의해 강요된 협약”을 무효화 시켜줄 것을 요청하며 러니미드의 협정을 파기하고자 했다.

그리고 잉글랜드는 다시 내전에 휩싸였다. 역사적인 마그나카르타 협정이 체결된 지 고작 세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내란은 이듬 해 존 왕이 이질로 사망하고 나서야 종식되었다.

대귀족들의 섭정 통치하에 9살에 불과한 그의 아들이 헨리 3세로 즉위하고, 마그나카르타가 다시 부활했다. 그리하여 존을 압박하기 위해 넣었던 봉신에 의한 왕의 억류 조항을 삭제한 후 1217년과 1225년 새로운 버전의 마그나카르타가 공표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시대적 필요에 따른 조약일 뿐, 모든 자유민을 위해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마그나카르타의 정신은 17세기 스튜어트 왕조의 내전 시기에 법률가 에드워드 코크(Edward Coke)에 의해 되살려질 때까지 잊혀져 있었다.

코크를 비롯한 하원의 법률가들과 젠트리(gentry, 중세 후기부터 나타난 중산적 토지소유계층)들은 전제 왕권을 꿈꾸는 스튜어트 왕실에 맞서면서 마그나카르타를 인용하여 잉글랜드는 고대 관습에서부터 왕권이 관습법에 종속돼 있음을 주장했다.

이후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지식인이나 운동가들은 이 마그나카르타를 인용하며 여기에 근대적 의미를 불어넣었다.

또한 식민지 개척자들과 함께 북아메리카로 전파되어 미국 독립 정신의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 그 증거로 이후 미국변호사회가 러니미드에 마그나카르타를 기념하는 기념탑을 세우고, 인접한 곳에 존 F. 케네디 대통령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자유와 권리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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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국회의사당에 전시된 1297년 판 마그나카르타. 마그나카르타는 현재도 인간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상징적 가치로서 남아 있다.


마그나카르타의 실효성이나 그 효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어찌됐든 그것이 인간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상징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수백 년간 사장되었지만 모든 사람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한 인류의 노력 속에서 다시 태어난 마그나카르타는 불의에 저항하려는 자, 개혁하려는 자, 독립하려는 자들의 편에서 여전히 투쟁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법의 형평성을 비판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여전히 나오고 있는 현재, 마그나카르타는 한 장의 양피지에 적힌 글자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고 발전시키는 인간에게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참고문헌

  • Kent Worcester, ‘The Meaning and Legacy of the Magna Carta,’ Political Science & Politics 43(3) (Jul 2010), pp. 451-456.
  • 나종일, 송규범, [영국의 역사 상], 한울 아카데미, 2005.
  • 케네스 O. 모건 외 다수, [옥스포드 영국사], 한울 아카데미, 1997.
  • 박지향, [영국사: 보수와 개혁의 드라마], 까치, 2002.
  • 피터 라인보우, 정남영 옮김, [마그나카르타 선언: 모두를 위한 자유권들과 커먼즈], 갈무리, 2012.
  • 존 길리엄, 대니 댄지거, 황정하 옮김. [1215: 마그나카르타의 해], 생각의 나무, 2005.
  • 아이버 제닝스 경, 안경환, 이동민 옮김, [마그나카르타와 그 영향], 저스티스 第27卷 第2號, 1994, pp.133-176.




김경민 | 역사 저술가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제국주의와 고고학: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일국제영국사학회에 발표한 바 있으며 UNIST(울산과학기술대학교)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제국주의와 문화, 학문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발행2013.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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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잉글랜드의 왕은 프랑스 내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왕인 동시에 중세 봉건제의 전통에 따라 위계상으로는 프랑스 왕의 봉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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