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벤세레모스 여단 - 쿠바로 농활 떠난 미국의 젊은이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384회 작성일 16-02-06 16:03

본문















14547422254924.png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 세력과 쿠바 정부의 연합





조국이 아니라면 죽음을 (Patria o muerte)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Venceremos)

- 사령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Comendero Ernesto Che Guevara)




14547422262651




쿠바의 3페소 동전. 체 게바라의 모습과 함께 ‘조국이 아니라면 죽음을(Patria o muerte)’이라는 문구가 강렬하게 새겨져 있다.



체 게바라(1928~1967)는 항상 편지 말미에 위와 같은 강렬한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혹은 ‘우리는 극복할 것이다’라는 뜻의 스페인어 ‘벤세레모스1)(Venceremos)’.

아마도 체 게바라의 의미심장한 이 메시지는 오늘 살펴볼 한 단체에게 매우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아예 단체의 이름 자체가 ‘벤세레모스 여단(Venceremos Brigade)’이니 말이다.2)

벤세레모스 여단은 68운동 혹은 혁명3)의 활기가 절정에 치달았던 시기, 1967년에 만들어진 단체다. 이 단체를 만든 것은 당시 미국의 급진적인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연합’과 쿠바 정부에 의해서였다. 잠깐? 미국의 학생운동 단체와 사회주의 국가 쿠바라고?

쿠바와 미국은 1961년 ‘피그스만(Bay of Pigs) 침공’ 실패 이후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4). 이후 쿠바와 미국 사이에는 공식적인 교류와 사적인 여행이 금지되었다.

그러므로 미국인이 쿠바와 어떠한 연관을 맺는다는 것은 불법적인 것이며 이는 체제에 반항하는 의미의, 소위 ‘적성 행위’임이 분명하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이들은 미국 사회의 ‘빨갱이’ 취급을 받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벤세레모스 여단이 주로 한 일은 미국의 젊은이들을 쿠바로 보내 직접 쿠바 혁명정부의 주요 시설을 견학하도록 하고, 젊은이들이 사탕수수 농장을 비롯한 산업 현장에 뛰어들어 직접 노동을 경험해보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었다5).

이번 회에서는 이들이 남긴 [벤세레모스 여단(Venceremos Braigade)]이라는 수기집을 통해, 이들의 흔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수기를 통해 이들이 왜 이렇게 위험한 일을 감행했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왜 쿠바에 가고 싶었을까?







14547422276114




68운동 당시, 베트남전 반대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 벤세레모스 여단 운동 또한 기존 사회질서에 반대하는 당시의 흐름 속에서 생겨났다.



1971년 출간된 [벤세레모스 여단]이라는 제목의 수기는 쿠바를 다녀온 미국 젊은이들의 일기와 편지, 인터뷰, 에세이와 시 등을 편집한 것으로, 아마도 더 많은 여단 활동을 조직하기 위한 선전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6).

벤세레모스 여단 참가자들의 여정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미국 전역에서 모인 여단 참가자들은, 멕시코 여행 비자를 비롯한 제반 서류를 마련한 후 1969년 12월 말에 멕시코를 향해 떠났다. 미국에서 쿠바로 직접 이동할 수 있는 경로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멕시코를 경유해야 했던 것이다. 이들은 멕시코에서 배를 갈아타고 쿠바로 입국할 수 있었다.

쿠바에 입국한 이들은 6주간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 경험을 하고 오후에는 여러 세미나를 통해서 쿠바의 혁명 정신에 대해 학습했으며, 2주간 쿠바 섬의 곳곳을 여행한 후 다시 배를 타고 캐나다를 경유하여 1970년 2월 경 미국으로 돌아왔다.

베트남 전에 참전했다 제대한 찰스 위넌트(Charles Winant)라는 한 참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질문자: 당신은 왜 쿠바에 가고 싶으십니까? 그리고, 특히 왜 당신은 여단에 참여하고 싶으신 건가요?



찰스 위넌트: 저는 쿠바의 사회주의에 대해 많은 것을 들어왔고, 그것은 저를 매혹시켰습니다. 제가 듣고 읽은 것들에 대해서 확인하기 위해 쿠바에 가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은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급진적인 그룹들과 함께하는 사회주의 국가로의 여행은 저에게 SDS(Students for Democratic Society,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연맹) 모임에 50번, 100번 나가는 것보다 많은 것들을 가르쳐줄 것입니다. 저는 또한 미국이 쿠바의 해변을 침공함으로써 쿠바를 다시 예속시키고 자신의 지배하에 놓이도록 만들고자 시도했으며, 이에 쿠바가 불합리하게 그리고 끔찍하게 고통받아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역자의 한 사람으로서 미국의 제국주의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에 구역질을 느끼고, 따라서 사탕수수 노동을 통해 쿠바 정부에 봉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위넌트는 베트남전 참전 용사로서 오히려 현실에 각성된 젊은이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예는 당시 젊은이들이 얼마나 자국의 대외 정책에 실망하였고, 불신을 갖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미국과 베트남의 젊은이들이 함께 어울리다



벤세레모스 여단 프로그램의 주요 부분 중 하나는 미국의 국제 정책으로 인한 폐해를 각종 세미나를 통해 학습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푸에르토리코나 과테말라 등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피해를 겪고 있는 많은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에 대해 공부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상 깊은 것은 베트남인들과 함께하는 노동과 세미나였다. 벤세레모스 여단 참가자들은 베트남에서 온 젊은이들과 어울려 사탕수수를 베고, 춤을 추고, 세미나를 함께 하면서 국제주의적 연대감을 느꼈던 것이다.
일본계 미국인이었던 로버트 다카기(Robert Takagi)는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처럼 조국(필자 주: 미국)을 몹시도 증오하는 이들이 그 안에서 혁명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쿠바인들과 베트남인에게 있어 혁명은 자신들 각각의 나라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부터 인도받아왔기 때문이다.
- 로버트 다카기(Robert Takagi)

로버트는 제국주의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자신의 조국 미국을 미워하고, 오히려 함께 관계를 맺은 쿠바와 베트남인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벤세레모스 여단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들







14547422291745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벤세레모스 여단 참가자들은 이곳에서 베트남 사람들뿐 아니라 북한의 천리마 노동자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다.



벤세레모스 여단의 참가자들은 쿠바인, 베트남인들과 함께하는 노동의 경험을 통해 국제주의적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배우게 되었다. 비단 베트남인들뿐만이 아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과 동일한 시기에 북한에서도 ‘천리마 노동자(Riders of Chullima)’라고 불리는 이들을 벤세레모스 여단에 파견했다는 점이다.
버크 암스트롱(Birk Armstrong)이라는 한 참여자는 이들을 환영하면서 미국 제국주의의 위협을 국제주의적 수준의 단결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매우 흥미롭다.



“미국의 간섭에 의한 또 다른 희생자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바로 한국인들입니다. 40년 동안 이어진 일본의 억압적인 통치 후에, 그들의 나라는 미국에 의해 임의적으로 “북한”과 “남한”으로 분리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이 그들의 땅을 통일하고자 시도하였을 때, 미국은 북한의 “공격”에 맞서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침입을 “경찰”로서의 행위로 정당화하였습니다. …… 한국에 대한 군사적 침공이 실패한 후에, 미국은 리(Rhee)와 박(Park)의 정부를 식민지적 상태의 공연장의 꼭두각시로 만들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거의 총체적인 파괴를 당한 후에도, 북한은 놀라운 경제적 성과를 거둔 반면, 남한은 여전히 빈곤의 왕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그곳은 억압과 착취, 그리고 부패의 땅이기도 합니다.



…… 우리는 이제 당신들의 나라와 여단의 상징이 왜 하늘을 나는 천리마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혁명은 실로 말의 힘과 새의 민첩함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단결과 국제주의에 감동받아, 우리는 함께 천만 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집에 돌아갔을 때, 우리는 당신들의 전투를 우리들의 것인 양 기억하며, 당신들에 대한 어떠한 폭력과 도발도 우리를 향한 것처럼 생각하고, 침묵으로 일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처럼 항상 혁명 정신 속에 함께 할 것입니다. 벤세레모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남한의 국력이 북한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나 보다. 그 사실을 떠나서, 특히 이 연설은 당시 남한의 정치가 외국인의 눈에 어떠한 시각으로 비추어졌는지를 알 수 있는 단편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료라고 생각된다.




벤세레모스 여단 참여 이후



벤세레모스 여단에 참가한 멕시코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에서도 적극적인 저항에 돌입할 것을 다짐했다. 쿠바 공산당 기관지와 나눈 대화에서, 여단의 일원이었던 한 익명의 멕시코계 미국인은 이렇게 말했다.



“쿠바 인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서 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그들은 꼿꼿하게 일어서선 자신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집에 돌아가면, 그곳의 사람들은 여전히 스스로에 대해 의심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피부색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으며,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집에 돌아가면, 해방시켜야만 할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가슴 속에 새겨야 합니다. 집에 돌아가면, 우리는 우리의 사람들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벤세레모스 여단은 간접적인 쿠바혁명의 경험에 만족하지 못한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급진주의적인 저항정신을 고취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이들은 쿠바에서 직접 노동을 경험하고, 또한 각종 세미나를 통해서 쿠바의 혁명정신에 대해 학습하고 사회주의적 투쟁의 전략과 전술에 대해서 익히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베트남, 북한 등과 같은 제3세계 민족들과 함께하는 노동과 세미나 등의 경험은 이러한 투쟁이 국제주의적인 연대를 통해서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음을 몸소 체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들을 ‘빨갱이’라고 말하기 전에







14547422304926




2012년 파견된 벤세레모스 여단. 국경을 넘는 그들의 노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출처: 벤세레모스 여단 공식 홈페이지>



오늘 살펴본 ‘벤세레모스 여단’은 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미국 내의 ‘빨갱이’ 집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국경을 넘어 자국이 금하는 적성 국가인 쿠바로 건너갔고, 쿠바인들을 찬양했으며, 조국을 비판했다.
심지어는 자국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베트남 사람들과 손을 잡고 친교를 나누며, 사탕수수 노동을 함께 하기도 했다. 미국 내에서 자신들이 벌일 혁명 혹은 투쟁을 기약하며 말이다.

하지만 벤세레모스 여단의 활동을 단순히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에 심취한 얼빠진 젊은이들의 치기어린 행동으로 이해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들은 베트남전쟁을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포장하는 자국 정부를 비판적으로 돌아볼 줄 알았다. 그리고 자신들과 국적, 피부색이 다른 이들을 같은 인간의 범주에서 동일하게 바라보고 연민하고 동정할 줄 알았다.

예를 들어 대학 시절 벤세레모스 여단에 참가했던 루이스 발데스7)(Luis Valdez)라는 인물은 대표적이라 볼 수 있다. 그 자신이 멕시칸-아메리칸이었던 그는 쿠바에 다녀온 이후 귀국하여 멕시칸-아메리칸의 차별 반대와 베트남전 반전 시위, 노동자 권익 보호를 위해 헌신하였다. 다음은 발데스가 발표한 델라노 선언의 일부분이다.



“우리 캘리포니아의 멕시코인들과 필리핀인 노동자들이 처한 빈곤은 전 세계의 농민들과 똑같은 것이며, 요컨대 미국의 모든 억압받는 소수자를 형성하는 흑인들과 가난한 백인들, 그리고 푸에르토리코인들과 일본인, 아라비아인들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 우리는 멕시코혁명의 아들들이다. 그 혁명은 가난한 자들이 추구하는 것이었으며, 빵과 정의를 위한 것이었다. 우리의 혁명은 무장투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존의 사회질서가 용해되기를 바라며, 새로운 사회질서를 원한다. ……”
- 델라노 선언 중 일부

필자가 생각하기에 68운동 혹은 68혁명의 위대함은 바로 이런 국제주의적인 연대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정신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혹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과 같은 이분법적인 이데올로기로는 파악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분명히 미국 사회에서 소수 집단에 불과했을, 그리고 빨갱이 취급을 받았음이 분명한 벤세레모스 여단에 참여했던 젊은이들의 고민과 열정은 분명히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잠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자. 우리의 노동운동은 얼마만큼 노동자를 보편적인 지평에서 바라보는가? 그들의 운동에서 비정규 노동자들의 권리 역시 보호받을 수 있는가?
3D 업종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아시아 노동자들의 권리 역시 보호받을 수 있는가? 여성운동, 장애인차별폐지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연 성적 소수자의 권리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지니는가? 이러한 모든 고민들에 대한 우리들의 답은 여전히 답보 상태 혹은 뒷걸음질하는 수준이 아닐까?

참고문헌

  • Guevara, Ernesto, [Che Guevara Reader], Edited by David Deutschmann, Melbourne and New York: Ocean Press, 2003.
  • Levinson, Sandra and Carol Brightman, eds., [Venceremos Brigade],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71.
  • Acuña, Rodolfo F., [Occupied America: A History of Chicanos], 6th edition, New york: Pearson Longman, 2007.
  • aldez, Luis and Roberto Rubalcava, “Venceremos!: Mexican-American Statement on Travel to Cuba,” Aztlan: an anthology of Mexican American literature, Edited by Luis Valdez and Stan Steiner, New York: Vintage Books, 1972.
  • 타리크 알리, 수잔 왓킨슨, 안찬수, 강정석 역, [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 삼인, 2001.
  • 조지 카치아피카스, 이재원, 이종태 역, [신좌파의 상상력], 이후, 1999.
  • 송충기, <68운동과 그 역사화>, [역사비평] 78호, 2007, 봄, 48-67.
1970년 9월 4일,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부가 등장하였는데, 바로 칠레의 아옌데(Salvador Allende) 정권이었다. 당시 살바도르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Unidad Popular)을 지지하며 찬양하는 찬가가 있었는데, 그 찬가의 제목 역시 ‘Venceremos’였다. 칠레의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Victor Jara)가 부른 이 노래는, 미국을 등에 업고 아옌데 정권을 붕괴시킨 피노체트에 항거하는 시위에서 자주 불렸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죽음에 맞서, 결코 조국을 저버리지 않으리”라는 가사로 유명한 이 찬가는 후렴부가 “venceremos”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노래를 부른 빅토르 하라는 결국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체포된 후 잔인한 고문 끝에 처형당하였다.
주석 레이어창 닫기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가장 보람찬 일이란, 1차 사료를 접했을 때이다. 벤세레모스 여단에 관한 내용은 필자가 석사논문을 준비하던 시기,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서 무작정 특정 검색어에 일치하는 중고 서적들을 사서 모으다가 우연히 구매하게 된 한 권의 책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은 쿠바에 ‘농활’(?)을 다녀온 젊은이들의 기록을 모아 출간한 매우 희귀한 자료로, 아직도 필자가 가장 아끼는 책 중에 하나다.
주석 레이어창 닫기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학생과 근로자들이 연합하여 벌인 시위로부터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퍼져 대규모의 사회변혁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사실 그 양상은 각국에 따라 상이한 특징을 보이는데, 미국의 경우 반전ㆍ인종ㆍ소수인권 등 다양한 지점에서 변혁운동이 나타났다.
주석 레이어창 닫기
1961년 4월 17일, 2천 명의 군대가 쿠바의 피그스만에 상륙했다. 이들은 쿠바혁명으로 인해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인들로 이루어진 군인들로, 미국 CIA에 의해 훈련받고 무기를 지원받은 군대였다. 사실 이 계획은 미국 공군이 지원 폭격을 해주기로 되어 있었으며, CIA는 쿠바 내의 반(反) 카스트로 민중들이 이 공격과 함께 봉기를 일으키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케네디는 미국이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침공에 개입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따라서 공군 지원은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기대했던 쿠바 내의 봉기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카스트로의 군대는 이들 침략자들을 이틀 만에 간단히 진압하였다. 사실 피그스만은 쿠바 내에서는 코치노스만(Bahía de Cochinos)으로 불리므로, 코치노스만 침공이라는 표현이 맞다.
주석 레이어창 닫기
벤세레모스 여단은 현재도 존재하는 조직이며 다음의 홈페이지를 참조할 수 있다. http://www.venceremosbrigade.org
주석 레이어창 닫기
따라서 이 수기는 분명히 당시의 쿠바에 대해서 미화를 시키고 있을 가능성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차 사료에 접근할 때에는 반드시 그러한 점을 충분히 감안하고 분석해야 한다.
주석 레이어창 닫기
루이스 발데스가 헐리우드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라 밤바(La Bamba)>(1987)라는 영화를 통해서였다. <라 밤바>는 17세에 비행기 사고로 요절한 리치 발렌스(Ritchie Valens)라는 멕시칸-아메리칸 가수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였는데, 발데스는 이외에도 멕시칸-아메리칸들의 삶과 관련한 수많은 영화를 제작하여 발표하였고, 치카노 필름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주석 레이어창 닫기




14547422305564

김유석 |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유석은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힌 역사관을 바로 잡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쓰기로 표현하는 것이 목표이다.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1960년대 미국 서남부 치카노 운동의 성격: '친쿠바 혁명주의자'들의 영향을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빅이슈에 [국기로 보는 세계사]를 연재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Q&A세계사: 이것만은 알고 죽자](공저, 2010)와 [생각의 탄생: 19세기 자본주의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발행2013.10.04.



주석


1
1970년 9월 4일,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부가 등장하였는데, 바로 칠레의 아옌데(Salvador Allende) 정권이었다. 당시 살바도르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Unidad Popular)을 지지하며 찬양하는 찬가가 있었는데, 그 찬가의 제목 역시 ‘Venceremos’였다. 칠레의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Victor Jara)가 부른 이 노래는, 미국을 등에 업고 아옌데 정권을 붕괴시킨 피노체트에 항거하는 시위에서 자주 불렸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죽음에 맞서, 결코 조국을 저버리지 않으리”라는 가사로 유명한 이 찬가는 후렴부가 “venceremos”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노래를 부른 빅토르 하라는 결국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체포된 후 잔인한 고문 끝에 처형당하였다.
2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가장 보람찬 일이란, 1차 사료를 접했을 때이다. 벤세레모스 여단에 관한 내용은 필자가 석사논문을 준비하던 시기,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서 무작정 특정 검색어에 일치하는 중고 서적들을 사서 모으다가 우연히 구매하게 된 한 권의 책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은 쿠바에 ‘농활’(?)을 다녀온 젊은이들의 기록을 모아 출간한 매우 희귀한 자료로, 아직도 필자가 가장 아끼는 책 중에 하나다.
3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학생과 근로자들이 연합하여 벌인 시위로부터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퍼져 대규모의 사회변혁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사실 그 양상은 각국에 따라 상이한 특징을 보이는데, 미국의 경우 반전ㆍ인종ㆍ소수인권 등 다양한 지점에서 변혁운동이 나타났다.
4
1961년 4월 17일, 2천 명의 군대가 쿠바의 피그스만에 상륙했다. 이들은 쿠바혁명으로 인해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인들로 이루어진 군인들로, 미국 CIA에 의해 훈련받고 무기를 지원받은 군대였다. 사실 이 계획은 미국 공군이 지원 폭격을 해주기로 되어 있었으며, CIA는 쿠바 내의 반(反) 카스트로 민중들이 이 공격과 함께 봉기를 일으키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케네디는 미국이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침공에 개입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따라서 공군 지원은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기대했던 쿠바 내의 봉기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카스트로의 군대는 이들 침략자들을 이틀 만에 간단히 진압하였다. 사실 피그스만은 쿠바 내에서는 코치노스만(Bahía de Cochinos)으로 불리므로, 코치노스만 침공이라는 표현이 맞다.
5
벤세레모스 여단은 현재도 존재하는 조직이며 다음의 홈페이지를 참조할 수 있다. http://www.venceremosbrigade.org
6
따라서 이 수기는 분명히 당시의 쿠바에 대해서 미화를 시키고 있을 가능성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차 사료에 접근할 때에는 반드시 그러한 점을 충분히 감안하고 분석해야 한다.
7
루이스 발데스가 헐리우드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라 밤바(La Bamba)>(1987)라는 영화를 통해서였다. <라 밤바>는 17세에 비행기 사고로 요절한 리치 발렌스(Ritchie Valens)라는 멕시칸-아메리칸 가수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였는데, 발데스는 이외에도 멕시칸-아메리칸들의 삶과 관련한 수많은 영화를 제작하여 발표하였고, 치카노 필름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