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한글 자판의 역사 - 한글 고유의 의미를 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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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66회 작성일 16-02-0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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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자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독창적인 체계를 가진 우수한 문자로 인정받는 우리의 한글. 그러나 한글 기계화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한글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인식되던 요소들이 한글 기계화 측면에서는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1914년에 등장한 최초의 한글 타자기부터 기계식 타자기를 거쳐 오늘날의 컴퓨터 운영체제의 자판 시스템까지. 한글이 가진 고유한 의미를 담고자 노력했던 많은 연구자들의 시도를 통해 한글 기계화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 명확한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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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세종 28년(1446)에 만든 한문 해설서이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언해본 원문보기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문자사(文字史)에서 유례가 없는 독창적인 체계를 가지고 어느 한 시대에 갑자기 출현한 문자라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며, 그 창제 원리의 과학성은 놀라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한 어느 나라 문자든,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는 그 탄생 과정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데 반해, 훈민정음 한글은 1444년 1월(세종 25년)에 세종대왕이 천ㆍ지ㆍ인 삼재와 발음기관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기록을 남겨놓고 있다.

이렇게 진화가 아닌 의도적인 발명을 통해 창제된 한글은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유일한 문자이다.

한글은 1446년 반포 때부터 목판 글자를 시작으로, 금속활자로 발전하면서 과학성을 더하게 되었고 인쇄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한글 기계화’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글 타자기의 보급으로 기계화가 가속되었고, 라이노타이프, 노모타이프, 사진식자기를 거쳐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한글 기계화는 계속 발전해 오고 있다.


한글 자판 개발, 왜 어려웠을까



한글은 다른 문자 체계와 달리 ‘초성-중성-종성’ 각각의 음소를 하나의 음절로 모아 써, 시각적으로 음절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한 문자이다.

이는 한글만의 고유한 특징이며 한글의 문자 체계가 간단하고 과학적이라 할 수 있는 구체적 근거이다. 그러나 한글 기계화 측면에서는 이토록 과학적인 모아쓰기가 큰 걸림돌이 되었다.

첫째, 한글 타자기는 한 음절의 글자 안에 종성(받침)까지 모아쓰기 때문에 알파벳 타자기처럼 한 글자를 찍을 때마다 종이가 움직이면 종성을 제자리에 찍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한글 타자기는 알파벳 타자기와 달리, 글쇠 일부는 글자가 찍혀도 종이가 움직이지 않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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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쓰기에서 ‘ㄱ’의 모양 변화. 각각의 경우에 따라 낱글자 ‘ㄱ’의 위치와 크기가 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둘째, 영어의 경우 로마자의 자모를 풀어쓰기 때문에 26개의 알파벳만으로 모든 단어를 쓰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한글의 경우 기본 자모는 자음 14개, 모음 10개로 전부 24개이지만, 실제 한글의 자모는 기본 24개의 자모 외에도 쌍자음과, ‘ㅐ’, ‘ㅝ’와 같이 두 개 이상의 기본모음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16개의 자모가 더해져 총 40개가 된다.

여기에 ‘ㄻ’, ‘ㄶ’과 같은 자음을 더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 쓰이는 한글 자모들을 조합하여 만들 수 있는 음절의 수는 총 11,172개에 이른다.

이에 따른 큰 문제는 모아쓰는 과정에서 낱글자들의 모양이 조금씩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타자기를 만들 때 몇 벌의 글쇠를 만들지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글씨의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발자는 작은 차이를 무시하더라도 4~5벌식의 글쇠를 갖춘 타자기를 개발하게 되었고, 타자의 속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개발자는 음절의 모양이 반듯하지 않더라도 글쇠의 벌수를 줄인 타자기를 개발하게 되었다.


광복 이전의 타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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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3월 2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조선문 타자기 완성 축하회 개최’ 기사. 송기주가 언더우드 포터블 타자기를 개조해 만든 네벌식 타자기에 대한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최초의 한글 타자기는 1914년 무렵 재미교포 이원익(李元翼)이 만든 것이다.

이원익의 한글 타자기는 미국에서 쓰이던 로마자 타자기의 활자를 한글로 바꾸어 만든 것으로, 세로모음과 함께 쓰는 초성, 가로모음과 함께 쓰는 초성, 받침 없이 쓰는 중성, 받침과 함께 쓰는 중성, 종성 이렇게 다섯벌식을 갖춘 세로쓰기 타자기였다.

또한 글자를 왼쪽으로 드러누운 꼴로 찍어, 나중에 인쇄한 종이를 오른쪽으로 돌려보면 세로로 쓰인 문서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글쇠는 안움직글쇠여서 한 음절을 완성하고 사이띄개를 눌러 종이를 한 칸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1929년 무렵에는 송기주(宋基柱)가 언더우드 포터블 타자기를 개조하여 네벌식(옆자음, 윗자음 겸 받침, 복자음과 쓰이는 작은 자음, 모음) 세로쓰기 타자기를 개발하였다.

송기주는 192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주립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시카고대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면서 지도 제작 및 도안 일을 하던 중 이 타자기를 발명하게 되었다.

송기주 타자기는 1934년 초 신문을 통해 고국에 알려졌고, <동아일보>는 그해 3월 그를 서울로 초청하여 대대적인 후원회를 열기도 했다.

이 외에도 미국에서 활동하던 김준성 목사가 1946년 영문 타자기를 개조하여 한글 타자기를 만들었다. 이 타자기는 풀어쓰기 타자기로서, ‘한글날’을 타자기로 치면 ‘하ㄴ그ㄹ나ㄹ’과 같이 표기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설명한 타자기들은 재미교포들이 로마자 타자기를 개조해 개발한 것이기에 여러 한계점들을 갖고 있었고 대중화되지는 못했지만, 일제강점기의 고국에서는 시도조차 하기 어려운 한글 기계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데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공병우 타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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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의사였던 공병우가 만든 세벌식 타자기, 공병우 한영타자기. 세종대왕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복 이후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나며 한글 타자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1949년 7월에 조선발명장려회에서 한글 타자기 현상공모를 하였다.

이 공모에서 대상은 없었고, 2등상 3명, 3등상을 2명이 수상하게 되었는데 2등상 수상자 중 1명이 공병우이고, 3등상 중 1명이 김동훈이었다.

공병우(公炳禹)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안과병원인 ‘공안과’를 세운 안과의사이다.

1938년, 안국동에 ‘공안과’를 열었는데, 우연히 환자로 안과를 찾은 국어학자 이극로(李克魯)를 만나 한글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광복 후 일본글로 되어 있던 시력검사표를 한글로 고쳐 만들고, [소안과학]이라는 책을 한글로 옮기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한글 타자기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글쇠의 벌수가 많았던 기존의 세로쓰는 타자기의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직접 한글 타자기를 만들기로 하였다.

1948년 2월, 공병우는 쌍초점 방식(초성과 중성은 움직글쇠, 종성은 안움직글쇠로 배당하고, 타이프가이드의 왼쪽에 또 하나의 초점을 만들어 받침의 활자를 왼쪽으로 유도함)의 세벌식 타자기를 만들어 특허출원을 하고, 1949년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의 시제품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한글전용정책 실시 전이었기 때문에 한자와 함께 작성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고, 타자의 속도는 빨랐지만 글자꼴이 고르지 않아 문서의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타자기 최대 수요자인 행정기관에서는 이 세벌식 타자기를 선호하지 않았다.

또한 시제품 완성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전쟁이 한글 타자기에 끼친 영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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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문 한글본에 사용된 공병우 타자기. 공병우 타자기는 능률과 속도를 지향하는 군대의 특성과 맞아 떨어지면서 군을 시작으로 국방부와 외무부 등 정부 기관으로 확산되었다.


한국전쟁은 한글 타자기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글 타자기를 연구하던 송기주가 납북되었고, 이로 인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송기주 타자기의 발전은 멈추게 되었으며, 송기주의 납북 이후 행적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병우도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정치범으로 연행되었는데, 타자기에 관심을 보인 인민군 장교가 공병우를 형무소 밖으로 빼내어 타자기를 설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공병우는 타자기 설계도를 그리는 척 시간을 끌다가 인민군이 서울에서 퇴각할 때의 혼란을 틈타 달아날 수 있었다.

타자기 시제품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당시 해군참모총장 손원일(孫元一)은 전쟁 중 해병대원에게 타자교육을 시키기 위해 공병우를 찾았고, 이후 해병대 타자 교육을 위해 200여 대의 공병우식 타자기를 미국에서 들여왔다.

이때 공병우 타자기로 교육을 받은 해병대 타자수들은 이후 전군의 타자수를 양성하는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군에서 많이 사용되던 공병우 타자기는 이후 국방부와 외무부를 중심으로 정부 기관에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이전 행정기관에서 선호하지 않았던 공병우 타자기는 능률과 속도를 지향하는 군대의 특성과 들어맞아 군인사회를 통해 활발히 보급되기 시작했다.


다양한 타자기의 보급



1960년대에는 타자기의 보급이 많이 확산되었다. 위에서처럼 국방부, 외무부 등 사무 처리의 속도를 우선하는 기관은 공병우 타자기를 많이 사용하였고, 문교부, 원호처 등 속도보다는 글씨를 중요하게 여기는 곳에서는 김동훈 타자기를 주로 사용하였다.

김동훈 타자기는 세로모음과 함께 쓰는 초성, 가로모음과 함께 쓰는 종성, 받침 없는 중성, 받침과 함께 쓰는 중성, 종성 다섯 벌의 글쇠로 이루어져 있고, 받침과 쓰는 중성의 글쇠가 안움직글쇠로 만들어져 종성을 바로 쓸 수 있었다.

자판의 배치도 비교적 능률적이었다고 평가된다. 그 외에도 장봉선(다섯벌식), 백성죽(네벌식), 진윤권(네벌식) 타자기 등이 시판되었다.

1968년의 통계에 따르면 행정기관에서 사용되는 11,163대의 타자기 중 공병우식 타자기가 6,702대, 김동훈식 타자기가 4,264대, 그 외 타자기가 197대로, 공병우식 타자기와 김동훈식 타자기 두 제품이 시장의 98% 이상을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글 자판의 표준화



공병우식 타자기와 김동훈식 타자기의 공존은 한글 자판의 혼란을 가져왔다. 두 타자기의 자판이 달라 공병우 타자기를 치는 사람은 김동훈 타자기를 칠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김동훈 타자기를 치는 사람은 공병우 타자기를 칠 수 없었던 것이다.

서로 다른 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글 자판의 표준화는 비용 절감과 효율성 증가를 위한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그래서 공병우는 김동훈에게 회사 통합을 제의하였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1957년 문교부에서 최초의 한글 타자기 표준 자판 시안을 작성하였다. 이 글자판은 2벌식 풀어쓰기를 바탕으로 한 글자판이었다.

모아쓰기도 할 수 있도록 윗글쇠(Shift key)를 이용해서 옆자음과 윗자음, 받침이 함께 쓰는 모음과 그렇지 않은 모음을 찍을 수 있게 하였으며, 받침은 오른쪽 가장자리에 배열하였다.

따라서 이 표준 자판은 2벌식을 바탕으로 한 5벌식 글자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자판은 이미 사용되고 있는 공병우 타자기에 비해 글쇠를 누르기가 불편하여 속도가 느렸고, 또한 같은 5벌식인 김동훈 타자기에 비해 윗글쇠 사용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표준 자판 시안을 실용화할 기술도 부족했기 때문에 채택되지 못하였다. 이어 1962년 한글학회 등 민간에 의한 표준화 작업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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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벌식 자판 배열.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자판을 통일하기 위한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1983년 국무총리 훈령에 따라 두벌식 자판을 새로운 표준 자판으로 공표하였다.


1969년 상공부가 타자기의 글자판 표준화 작업을 하고 있을 때, 문화공보부에서는 자동식자기의 글자판 표준화를, 과학기술처에서는 컴퓨터의 글자판 표준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대통령은 한글 기계화 개발 사업을 과학기술처가 주관하도록 하여 일원화된 한글 기계화 종합개발계획을 지시하였다.

이에 7월 28일, 국무총리 훈령(제81호)으로 표준 자판이 확정되는데 타자기용은 네벌식 자판, 인쇄전신기용은 두벌식 자판으로 확정되었다.

당시 과학기술처 연구조정관 황해용은 한글 타자기의 구비 조건으로 기계 구조의 간편 및 실용성, 국제 규격 및 타 기종의 적용성, 글자의 균형성, 타자 동작의 효율성, 타자 학습의 용이성을 고려하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기존 제품의 제작자들이 크게 반발했으며, 언론에서도 “공병우식과 김동훈식의 단점만 모아 만든 자판”이라 혹평하였다.

이런 비판 속에서도 네벌식 표준 자판은 정부 부처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당시 타자기의 주요 수요가 정부에 집중되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네벌식 표준 자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전자타자기와 PC가 보급되면서 컴퓨터, 전자타자기, 인쇄 전신기, 기계식 타자기 등의 자판을 통일하기 위해 1983년 국무총리 훈령(제21호)로 타자기용 네벌식 표준 자판을 폐기하고, 인쇄전신기용 두벌식 자판과 거의 같은 자판을 새 표준 자판으로 공표하였기 때문이다.


컴퓨터로 진화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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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자판이 두벌식으로 결정됐지만, 세벌식 자판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지금의 표준 컴퓨터 자판과 거의 비슷한 새 표준의 두벌식 타자기는 타자 동작으로 보면 두벌식이 아니라 네벌식이라고 볼 수 있다.

받침은 초성 자음의 윗글쇠에, 짧은 모음은 긴 모음 윗글쇠에 배당되어 있어 시프트 키(Shift key)를 누르고 입력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새 표준의 두벌식 타자기는 이전보다 더 다루기 어려웠다. 그러나 1980년 후반에서 1990년대가 되면서 전자식 타자기, 컴퓨터의 보급과 더불어 워드프로세서 사용이 확산되면서 기계식 타자기의 사용은 점차 줄어들었다.

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는 기계식 타자기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들을 쉽게 해결해줬다. 먼저, 받침을 누르기 위해 시프트 키를 누를 필요가 없어졌다.

자음(초성)과 모음(중성)을 입력한 뒤 세 번째 자음을 입력하면 컴퓨터 프로그램(Automata)은 네 번째 입력을 기다렸다가 자음이면 세 번째 자음을 받침으로 판단하고, 모음이면 세 번째 자음을 뒷글자의 초성으로 판단하게 된다.

또 받침이 있을 때와 없을 때를 가려 모음글쇠를 구분하지 않아도 된다. 화면에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완성된 글자 형태로 보여주기 때문에 타자를 입력하는 사람이 긴 모음일 때와 짧은 모음일 때를 구분할 필요 없이 네모난 모양의 예쁜 글씨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한글 전산화에 관심이 많고 프로그래밍에 대한 식견이 높았던 초창기 컴퓨터 사용자들은 빠른 타자 속도, 초성, 중성, 종성에 대한 구분의 논리성 등으로 세벌식 자판을 비교적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Window95’ 운영체제가 보급되면서 컴퓨터 구조 등을 몰라도 컴퓨터를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한글 기계화는 점점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또 표준 자판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어진 뒤에는 두벌식과 세벌식의 비교는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한글 타자기가 처음 만들어진지 100년, 한글 기계화 과정을 통해 한글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의미를 담고자 했던 많은 연구자들의 한글 사랑을 되새겨 보는 시간이 되었길 바란다.

참고문헌

  • 한양대학교 과학철학교육위원회 편, [(이공계 학생을 위한)과학기술의 철학적 이해], 한양대학교 출판부, 2008.
  • 최재필, 홍승현 저, <한글 자판 표준화 과정 사례연구>, [경제논집] 제38권 제4호, 1999, 311-337.




고영민 | 국립한글박물관 사서
부산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국립한글박물관 개관준비팀에서 한글 아카이브와 한글자료 수집을 담당하고 있으며, 한글 문화 가치의 보존과 확산을 위해 조그만 보탬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제공

국립한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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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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