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잊혀진 제국, 히타이트 - 역사에 재등장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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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0회 작성일 16-02-0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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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였던 하투샤의 신전 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출처: (cc) China Crisis at en.wikipedia.org>



잊혀진 제국, 히타이트



터키에 있는 ‘하투샤(Hattusa)’라는 지명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아마 이스탄불은 알아도 이 도시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스탄불과는 달리 관광객의 발길은커녕 자국인들의 발길도 뜸한 이 도시는 놀랍게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역사ㆍ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 하투샤는 바로 기원전 약 18세기에서 13세기 사이 현재 터키를 포함하여 아나톨리아(‘떠오르는 태양을 향한 땅’이라는 뜻) 고원지대를 중심으로 후기 청동기시대 오리엔트 세계를 지배했던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였다. 제철 기술의 발달로 세계 최초로 철제 무기를 가지고 오리엔트 세계를 호령했던 히타이트 제국. 동시대 강국들이 황금 왕좌에 앉아 좋아할 때 히타이트의 왕은 철의 왕좌에 앉아 제국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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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성기 때 히타이트 제국의 영토.


바빌론을 점령하고 이집트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으며, 금석문과 풍요로운 문화, 그리고 고유의 법전까지 갖추고 있었던 히타이트.
이런 강국이 어째서 20세기가 될 때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져 있었을까? 심지어 히타이트는 몰락한 지 몇 백 년도 지나지 않아 아무도 모르는 나라가 되었다.
하투샤에 비해 훨씬 규모가 작은 트로이의 경우 호메로스의 서사시 덕분에 서양 문화사와 정신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건만, 그리스인과 로마인들도 하투샤에 살았던 히타이트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만큼 히타이트는 유례가 없을 만큼 너무도 갑자기, 소리 없이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서 사라져 버린 환상의 나라가 되고 말았다.
덕분에 고대 오리엔트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후기 청동기시대 아나톨리아 지역의 역사는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이집트학과 아시리아학이 생길 정도로 북아프리카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대 문명 연구가 활발했던 반면,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1890)의 트로이 발굴에도 불구하고 소아시아 지역의 고대 역사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였다.

하지만 많은 역사적 발견이 그렇듯, 히타이트 왕국 또한 너무나 갑작스럽게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판도가 바뀌게 된다.


최초의 발견자, 미지의 문명과 조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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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에 세워진 왕궁 뷔위크칼레(Büyükkale)의 터. <출처: (cc) Rita1234 at en.wikipedia.org>


하투샤는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중앙 아나톨리아의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다. 동서 길이 약 1.3km, 남북 길이 약 2.1km로, 8km의 이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해발 약 1000m의 고원지대 위 기복이 심한 비탈면에 건설되었다.

후대 사람들이 보기에 이 수도의 위치와 지형은 참으로 의아하다. 왕국의 중앙에서 벗어난 위치, 건물을 세우기 힘든 가파른 절벽과 산봉우리가 많은 지형, 거기에 고원지대 특유의 심한 일교차까지.
왕국의 최전성기, 히타이트는 에게해까지 닿는 서아시아의 서부 해안에서 코카서스까지, 북쪽 흑해의 산중에서 시리아를 지나 이집트와 맞닿은 레바논의 끝까지 뻗어나갔다.
그런 대제국이 왜 이렇게 힘든 곳에 수도를 건설했을까도 이 문명의 수수께끼 중 하나다. 이러한 의문은 3,000년 가까이 위대한 문명이 왜 발견되지 않았는지도 짐작케 해준다.

1834년, 프랑스의 학자 샤를 펠릭스-마리 텍시에(Charles Félix Marie Texier, 1802-1871)는 당시 동방을 여행하고 탐사했던 여러 유럽인들 중 하나로, 아무것도 모른 채 하투샤 지역의 여행을 계획했다.
황량한 고원지대를 홀로 횡단하고, 터키에서 가장 긴 키질이르마크(Kizil Irmak) 강의 거대한 굴곡부에 있는 보가즈쾨이(Boğazköy)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한 그는 이 마을 근처에서 우연히 바퀴자국을 따라 언덕을 올라갔다가 거대한 돌덩이들이 길고 똑바로 열을 지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오래되어 많이 닳고 완전한 규칙성을 가진 것도 아니었지만, 그것은 분명 거대한 건축물의 일부로 복합적인 짜임새를 갖추고 있었다.
고대 로마 시대의 켈트족이 정착해서 살았다는 소아시아의 타비움(Tavium)이라는 도시를 찾고 있었던 텍시에는, 이 흔적들을 보고 이곳이 혹시 자신이 찾던 타비움이 아닐까 추측했다.

텍시에는 자신의 발로 성벽 잔해의 길이도 재보고 언덕에 올라 주위의 폐허와 건물 잔해들을 둘러보면서 유적지의 대략적 규모를 상상해보았다. 이
것은 뜻밖의 거대한 도시였고, 전성기의 아테네만큼이나 큰 도시였다! 그는 계속 걸으면서 이 거대한 유적지의 일부를 스케치했다.
한쪽에 사람이 조각된 거대한 두 개의 성문과 양쪽에 사자가 조각되어 있는 또 다른 성문은 이전까지 본 적 없는 생소한 양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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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가즈쾨이의 거대한 성벽에 있는 사자문. 문에 조각된 사자는 외부의 적들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출처: (cc) China Crisis at en.wikipedia.org>



“나는 고대 타비움을 발굴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이 폐허를 스트라보가 언급했던 성소인 주피터 신전으로 여겼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러한 견해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로마시대의 어떤 건축물도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역사에 나오는 이런저런 도시의 이름을 아무리 갖다 붙여도 이 폐허의 거대함과 특이함이 그때마다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폐허의 유적은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한 지역 주민이 보가즈쾨이를 출발해 협곡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텍시에를 안내했다.
두 시간 넘게 걸어올라간 끝에 닿은 곳은 자신이 처음 보았던 유적의 맞은편에 있는 고원지대였다. 그는 그곳에서 오늘날 야질리카야(Yazılıkaya, 글자가 새겨진 암벽)라고 불리는 유적지를 보게 된다.

그곳에는 하늘로 치솟은 가파른 암벽의 틈 사이가 자연스럽게 방을 만들고 있었고, 매끄러운 암벽의 표면에는 이상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다.
뾰족한 모자를 쓴 엄숙한 행렬의 사람들을 따라가자 삼중관을 쓴 조각들이 나타났고, 날개 달린 인물 둘과 무언가를 거머쥔 사람의 조각도 보였다.
그는 다른 통로에서 뾰족 모자와 언월도 같은 것을 둘러멘 12명의 전사 혹은 신이 일렬종대로 진군하는 조각과 마주쳤고, 그 위에는 상형문자 같은 기호들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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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질리카야 하계의 12신 부조. 수백 년 동안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야질리카야에서 보존이 가장 잘 된 부조이다. <출처: (cc) China Crisis at en.wikipedia.org>


텍시에는 다시 입구로 돌아왔다. 전방에 펼쳐진 고원지대를 응시하면서 그는 그것이 성벽의 유적임을 확신했다. 또한 암벽 속의 조각들이 신성한 신전의 일부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렇다면 누구를 경배하기 위한 신전이었을까? 그 기호들은 문자일까 단순한 상징이나 장식물일까? 텍시에는 깨달은 만큼 더 많은 미스터리에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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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르카피 요새(The Yerkapi rampart). 피라미드와 비슷한 모양의 이 요새는 방어보다는 위용을 뽐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 (cc) China Crisis at en.wikipedia.org>


그는 맞은편에 있는 폐허의 계곡을 바라보며 이 장대한 유적지의 과거를 그려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산봉우리를 보루 삼아, 천혜의 암벽 위에 거대한 바위들을 쌓아 만든 수수께끼의 성벽은 분명 어떤 막강한 민족의 의지였다.
압도적인 이곳의 장관은 이 도시의 주인들이 보통 왕들이 아니었음을 입증하고 있었다. 하지만 텍시에는 여전히 이 도시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1839년, 그는 파리에서 [소아시아 소묘(Description de l'Asie Mineure faite par ordre du Gouvernement français)]라는 여행기를 발간했다. 텍시에가 그의 책에서 묘사한 내용은 학계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19세기의 역사가들이 알고 있는 한, 소아시아에 그렇게 막강한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고학이란 학문 자체도 당시에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었고, 1830년대 이후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보다 매혹적인 유적의 발굴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결과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 문명과 아시리아 문명 발굴은 이 시기 커다란 학문적 진보를 이루었다.

그렇다고 학자들이 아나톨리아의 이 신비한 폐허를 아주 내버려둔 것은 아니었다.
텍시에 이후 많은 서구의 학자들이 보가즈쾨이를 방문하여 더 정확하고 자세한 스케치를 남겼고, 그것을 바탕으로 보고서를 써내어 지속적으로 이 유적에 대한 관심을 이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이 유적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낸 사람은 없었다.


역사 속에 다시 등장한 히타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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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가즈쾨이의 거대한 성벽에 있는 왕의 문. <출처: (cc) Klaus-Peter Simon at en.wikipedia.org>



주께서 시리아 군에게 대군이 쳐들어오는 소리를, 병거대가 밀려오고 기마대가 달려오는 소리를 들려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큰일났다. 이스라엘 왕이 헷(히타이트 민족)의 왕들과 이집트 왕들에게 돈을 주고 군대를 사다가 우리를 치는구나!”- <열왕기 하>, 7장 6절

보가즈쾨이의 유적이 발견되었지만 그것이 히타이트 왕국의 수도라는 것을 알아낸 사람은 없었다.
제국의 위용이 너무 거대해서 그 일부만을 가지고 알아내기에는 부족했던 것이었는지, 히타이트의 정체는 소아시아 곳곳에서 발견된 동일한 비문과 문자판을 통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1872년, 아일랜드 학자인 윌리엄 라이트(William Wright, 1837~1899)는 오론테스강 주변의 하마트라는 곳에서 뜻 모를 상형문자가 새겨진 거대한 비문(일명 하마트석)을 발견하고 탁본을 떴다.
그렇지만 그는 이 생소한 문자를 어떻게 해독해야 할 지 몰랐다. 또한 아나톨리아의 폐허와 이곳 시리아 지역에서 발견된 하마트석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때 영국박물관의 학자들이 유프라테스강 오른쪽에 위치한 자라불루스라는 지역 근처에서 거대한 폐허를 발견했고, 조사 끝에 그곳이 아시리아 사료에 명시된 카르케미시(Karkemish)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들은 발굴 과정에서 운 좋게 사람의 머리, 손, 다리, 동물 모양을 한 매혹적인 기호들과 초승달, 갈고리, 오벨리스크 같은 기호들로 둘러싸인 유물을 발견한다.
그들은 이것이 하나의 응집력 있는 문자 체계임을 확신했다. 놀랄 만한 점은 이와 비슷한 유물이 시리아뿐 아니라 타우루스의 기념물과 스미르나 근처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들이 텍시에가 발견한 야질리카야의 문자들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기호들은 동일한 문자일까? 그렇다면 한때 이곳에 강력한 나라가 존재했고, 그 나라의 문자가 에게 해안에서부터 아나톨리아를 거쳐 시리아 내륙 깊숙한 곳까지 사용되었다는 말인가?
모든 증거들은 하나의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학자들이 갖고 있는 역사적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이 문자의 분포 이외에는 어떤 단서도 없었고, 다른 민족의 전승에도 그런 국가는 없었다. 논의는 계속되었지만 성과는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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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투샤 알라카회육(Alaca Hüyük)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스핑크스의 문. 히타이트 초기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 중 하나이다. <출처: (cc) Stipich Béla at en.wikipedia.org>


그러던 중, 1879년 아치볼드 헨리 세이스(Archibald Henry Sayce, 1846~1933)라는 영국의 젊은 학자가 드디어 히타이트라는 고대국가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그는 지난 수십 년간 소아시아와 북부 시리아에서 발견된 불가사의한 기념물들과 금석문들이 히타이트 민족의 것임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사실 지금까지 히타이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성서에 몇 번 등장하는 정도의 짤막한 내용 뿐이었다1).
다윗 왕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여 신의 벌을 받았다는 성경 속 유명한 이야기에서 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가 히타이트인이라는 것 정도가 가장 눈에 띈다.
즉, 성서 속 히타이트는 강대국이 아니라 소수 민족 중 하나 정도로 언급된 것이다. 하지만 몇몇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혀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후대 학자들은 제시하고 있다.
위에 언급된 열왕기하의 구절을 보면 “헷(히타이트)의 왕”이 등장한다. 고대 최강의 군주였던 이집트의 파라오와 히타이트의 왕이 나란히 언급되고 있으며, 심지어 파라오보다 먼저 언급되고 있다.
히타이트 왕국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히브리판 성서에서 히타이트인들은 히팀(Hittim)으로 불렸다. 루터는 이를 독일어로 헤티터(Hethiter)로 번역했고, 영국은 히타이츠(Hittites)로, 프랑스는 이티트(Hittites)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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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성경이 알려주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세이스는 아나톨리아 유적의 주인이 히타이트였으며, 그들이 이집트와 맞먹을 만한 강국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둘러싸고 드디어 학계에서 논의가 불붙기 시작해 대중들의 관심까지 불러일으켰다. 3천 년 간 묻혀 있던 나라가 갑자기 영국 일간지의 첫 면을 장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열정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증거가 극도로 빈약했기 때문에 학계의 모든 사람들을 설득시킬 만한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그리고 20세기의 문턱에서 히타이트의 힘을 보여주는 증거가 새로운 곳에서 발견되면서 ‘히타이트 제국’이라는 환상이 드디어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

* 히타이트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 비르기트 브란다우, 하르트무트 쉬케르트 지음, 장혜경 옮김, [히타이트], 중앙 M&B, 2002.
  • C. W. 세람 지음, 오흥식 옮김, [발굴과 해독], 푸른역사, 2000.
  • Trevor Bryce, [The Kingdom of the Hittites], Oxford UP, 2010.
  • C. W. Ceram, [The Secret of the Hittites: The Discovery of an Ancient Empire], Phoenix Press, 2001.




김경민 | 역사 저술가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제국주의와 고고학: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일국제영국사학회에 발표한 바 있으며 UNIST(울산과학기술대학교)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제국주의와 문화, 학문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발행2013.10.18.



주석


1
히브리판 성서에서 히타이트인들은 히팀(Hittim)으로 불렸다. 루터는 이를 독일어로 헤티터(Hethiter)로 번역했고, 영국은 히타이츠(Hittites)로, 프랑스는 이티트(Hittites)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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