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보험 산업의 발달 - 현재와 같은 보험의 구조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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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66회 작성일 16-02-0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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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이 사업이 되기까지 무엇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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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이 사업 혹은 제도로서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고 발생 확률을 예측할 수 있는 확률적 수학 기술, 통계에 기반해 그것을 운용할 보험 단체, 그리고 위험 집단으로서의 고객이 필요하다.


본 연재에서는 지금까지 14세기에서 17세기까지 생겨난 각종 보험의 탄생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때 생겨난 보험들이 현재와 유사한 형태로 정립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화재보험의 경우 그 적용 방식이 전반적인 대물보험으로 확대된 것 이외에는, 17세기에 탄생한 이후 현재까지 기본적인 형태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보험 산업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생명보험과 해상보험 분야라고 할 수 있다.

먼저 현재 일반적인 보험의 정의는 “보험 계약자가 우연적인 손실 위험을 보험자에게 전가하고, 보험자는 다수의 보험 계약자로부터 동질적 손실 위험을 결합함으로써 손실 발생 시 보험 계약자에게 손실을 보상해주는 사회적 제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보험이 사업 혹은 제도로서 성립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할까? 첫째로 사고 발생 확률을 예측할 수 있는 통계, 즉 확률적 수학 기술(보험계리, Actuary)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또한 보험계리를 사용하여 다수의 위험 집단으로부터 보험료를 받아 기금을 조성하고 운용할 ‘보험 단체’가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보험업계의 ‘고객’이라고 할 수 있는 ‘위험 집단’이 필요하다.
제도로서의 보험이 만들어지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요건 가운데 보험계리와 보험 단체가 18세기 영국에서 등장함으로써, 보험 산업은 오늘날과 유사한 형태로 정립되게 된다.


사람은 언제 죽는가? - 예상 수명을 예측하고 생명표를 만들다



지난 연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생명보험은 당시에 크게 연금보험과 사망보험으로 나눌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연금보험은 중세의 성직자 집단을 중심으로 오랜 시간 발달되어 온 보험이었다.
연금보험은 노쇠한 구성원을 위한 집단 내 상호부조나 국가의 전쟁보상 등을 중심으로 발달해오다가 연금 상품이 개발되면서 17, 18세기 프랑스의 톤틴 연금을 통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으며 성장했다.

한편 사망보험은 1706년 설립된 아미카블 소사이어티(Amicable Society for a Perpetual Life Assurance)를 그 시작으로 본다. 그 전에도 사망보험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미카블 소사이어티가 근대적 생명보험의 시초로 인정받게 된 것은, 아미카블 이전의 보험 가운데 도박 보험의 성격을 띤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3년 동안 보험료를 납입해야 하는 노인의 보험증을 경매에 붙여 3년 안에 그가 사망할 경우 보험증 낙찰자가 보험금을 타게 된 사례나 왕 혹은 런던 시장, 상원 의원과 같은 유명인이 어느 시점 안에 사망하게 되면 보험금을 타는 방식의 보험이 성행하였다.
심지어 영국 내전으로 도망간 찰스 2세(Chalres II, 1630~1685)가 언제쯤 영국으로 돌아올 것인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의 군대가 공성 중인 도시가 언제까지 버텨낼 것인지와 같은 내용의 보험이 유행할 정도였다. 또한 당시 특허 회사인 로열 익스체인지 어슈어런스가 판매하던 사망보험같은 경우 1년 기한의 것으로, 보험료를 납부하기 시작하고 1년 안에 사망하면 보험금을 주고 1년이 지나면 원금을 반환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계학과 확률론에 기반하는 최초의 보험계리를 적용시킨 보험이 바로 생명보험이었다. 본래 해상보험이나 화재보험의 경우는 재화를 보상의 대상으로 하는 대물 보험이었기 때문에 보험금으로 지급해야 하는 액수가 명확하였고, 리스크와 무관하게 일정한 보험료 체계가 존재했다.

반면 생명보험은 다른 보험에 비해 리스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이 리스크는 예측 불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보험업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 명의 보험 가입자로부터 예상되는 수익과 손실을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인간 수명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많은 보험업자들이 높은 보험료율을 제시했다가 고사하거나, 혹은 지나친 보험금 지급으로 파산하기도 하는 등 기존의 생명보험은 도박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생명보험 업계에서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바로 ‘사망률을 예측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수리학의 발달에 의한 확률론의 등장과 사망 집계를 누적시켜 통계 처리한 사망표에 의해 해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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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에퀴터블 생명보험 회사 건물. 1919년 엽서에 등장하는 모습이다.





윌리엄 모스델이 고안한 노샘프턴 생명표. 보험 계리를 도입한 생명보험으로 에퀴터블은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인간의 사망률과 보험 산업을 처음 결합한 것은 1764년 문을 연 에퀴터블 생명보험(Equitable Assurance)이었다. 에퀴터블의 고안자인 제임스 도슨(James Dodson, 1705~1757)은 최초로 통계와 확률론을 도입하여 예상 수명을 예측하고 이를 보험에 이용하여 적절한 보험료 및 보험업자의 수익성을 보장하였다. 최초의 보험계리인인 윌리엄 모스델은 나이에 따른 생존률을 기록한 노샘프턴 생명표(Northampton Table)를 기반으로 보험료를 책정하여 아미카블이 고안한 장기 보장을 유지하면서도 평균 2%대의 낮은 보험료율로 많은 고객들을 유치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수학적으로 계산된 사망 확률은 꽤나 정확하여 투자자들의 입장에서도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것은 과학과 수학의 발달이 대중들의 보험에 대한 수요와 안정적인 투자처를 찾던 자본가의 요구를 결합시켜준 사례로, 에퀴터블을 통해 생겨난 생명표와 확률 계산 기반의 보험계리는 현재의 생명보험 업계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더구나 이 당시 모스델이 적용한 노샘프턴 생명표는 실제보다 높은 사망 확률을 기반으로 고안된 것이라 보험업자들에게 많은 수익을 안겨다 주었다. 에퀴터블이 보험계리를 도입한 생명보험으로 큰 수익을 얻자 보험계리는 곧 모든 보험업자들에게 필수적인 기술이 되었고, 생명보험 이외의 보험에도 사고 발생 확률을 통계적으로 예측하여 보험료율 산정에 반영하는 보험계리가 일반화되었다.


누가 사고를 보장할 것인가? – 연합하고 분담하는 보험의 기술



초기의 보험 중에서도 해상보험은 주로 금융업자나 상인 계층 중 많은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공증인을 통해 보험계약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문적으로 보험업을 하는 보험업자들은 16세기 후반에나 등장하였다. 이후로도 해상보험은 꾸준히 로이드 커피하우스의 보험업자들과 같이 개인 보험업자들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최초의 해상보험 회사가 등장하게 된 것은 1720년으로, 왕의 특허장을 받은 로열 익스체인지 어슈어런스(Royal Exchange Assurance)와 런던 어슈어런스(London Assurance)가 설립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당시 금융시장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하여 이 두 회사를 설립한 조지 1세가 “화재보험, 생명보험, 해상보험 영업에 특허를 가진 유일한 회사들”로 특허장을 발부한 것이다. 당시의 법안은 이 두 회사를 제외한 어떠한 회사도 해상보험 영업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었기에, 이들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막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두 회사는 생명보험과 해상보험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고, 화재보험에 집중하였다. 왕의 명령으로 소집된 보험업자들에게 당시 해상ㆍ생명보험 업계가 짊어져야 했던 리스크는 너무 거칠었던 것이다. 로열 익스체인지 어슈어런스가 1720년 창립 이후 40년 간 생명보험으로 얻은 수익은 10,915파운드에 불과했으며, 해상보험의 경우 런던에서 거래되는 해상보험의 90%를 로이드 커피하우스의 개인 보험업자들이 소화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이 두 회사는 해상ㆍ생명보험 분야에서는 거의 영업을 하지 않거나 실패한 영업을 지속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법안에도 불구하고 로이드의 개인 보험업자들이 영업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로열 익스체인지와 런던 어슈어런스를 제외한 어떠한 ‘회사’도 영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규제 법안의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로이드의 보험업자들은 보험업을 하는 ‘개인’들일 뿐, 회사가 아니었기에 법망의 규제를 피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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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에 그려진 로이드 커피하우스의 모습. 로이드 커피하우스의 개인 보험업자들은 대규모 보험회사에 맞서 자신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신디케이트나 재보험 제도와 같은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두 특허 회사가 경험 미숙으로 해상보험에서 고전을 하고 있었더라도, 왕실의 비호를 받는 자금력 만큼은 로이드의 개인 보험업자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고,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대형 보험계약을 인수하지 못한 로이드의 보험업자들이 실패를 통해 경험을 축적한 보험회사들에 밀리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로이드의 보험업자들은 이러한 스스로의 결점을 보완할 보험 기술을 개발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신디케이트(Syndicate)와 재보험(Reinsurance)다.

신디케이트는 몇 명의 보험업자들이 하나의 연합을 조직하여 공동으로 보험계약을 인수하고, 수익금을 투자 금액에 대비하여 나누어 갖는 방법이었다. 하나의 보험계약에 따르는 리스크를 여러 보험업자들이 분담하고 몇몇 보험업자들이 연속적으로 공동 보험계약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신디케이트라는 조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2013년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로이드의 신디케이트 시스템은 개인 보험업자들이 연합을 통하여 보험회사 못지않은 큰 보험을 계약할 수 있도록 해준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겨난 또 하나의 기술이 바로 재보험이다. 재보험은 하나의 리스크를 담보하고 있는 보험계약에 다시 보험을 걸어, 보험금 지급으로 인한 업자의 손실을 분담하는 방법이다.
이는 개인이 부담하기 어려운 큰 계약으로 인한 손해를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소 규모의 계약도 재보험을 통하여 보험업자의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 ‘위험의 전가’라는 보험의 근본적인 개념에 충실한 기술이다. 19세기를 전후로 해상보험 이외의 보험에도 진출한 로이드는 현재도 재보험 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보험업계 내부의 혁신을 이루어 내는 데 개인 보험업자들이 모일 장소와 보험 관련 정보를 제공한 로이드 커피하우스가 큰 역할을 해낸 것이다.


커피하우스에서 전문 보험 집단으로



로이드가 해운 중심의 보험업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커피하우스로 해상보험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커피하우스는 해상보험과 관계없는 손님들도 많이 찾고 있었다. 즉, 로이드 커피하우스가 해상보험업자들에게 유용한 장소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해상보험업자들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고, 이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로이드 커피하우스가 해상보험의 중심지로 알려지게 되면서 기존에 영국에 만연하던 도박 보험도 이곳에서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도박 보험 업자와 도박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으로 로이드 커피하우스가 가득차게 되자, 해상보험업자들은 자신들의 일터가 ‘도박의 명소’로 알려지는 것에 분개했다.

결국 로이드의 보험업자들은 1769년 포프스 헤드 앨리(Pope`s Head Alley) 5번지에 신(新) 로이드 커피하우스를 개점하여 옮기는 방법을 선택했다. 새로운 로이드는 기존의 로이드와 같은 병폐를 막기 위해 회원제로 운영되었고, 순수하게 해상보험업자들만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스스로를 여타의 노름꾼들과 차별화하여 전문적인 보험업자로서 정체성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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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있는 로이드 보험회사의 모습. 로이드는 18세기 이후 꾸준히 세계 보험업계를 지켜오고 있다. <출처: (cc) phogel at en.wikipedia.org>


신 로이드 커피하우스를 통하여 독립된 집단으로 존재하게 된 해상보험업자들은 1771년 로이드 협회(Lloyd`s Society)를 발족하였고 로이드 위원회(Lloyd`s Committe)를 설립하여 해상보험업자들을 하나로 묶었다. 79명의 발기인들로 구성된 로이드 협회는 1774년 로얄 익스체인지 2층으로 이사하면서 ‘커피하우스에 모인 보험업자’들을 벗어나 스스로를 ‘보험인 집단’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로이드의 보험업자들은 1778년 협회를 회원제로 전환함과 동시에 전 회원이 동일한 양식으로 보험을 작성하기 위한 해상보험 증권 양식(Lloyd`s S.G. policy)을 채택하였다. 이때의 로이드 증권 양식은 현재까지도 해상보험증권의 기본이 되고 있다. 이후 1800년 총회를 통하여 로이드 협회의 가입 조건을 강화함과 동시에 1811년 로이드 신탁증서(Trust Deed, 내부규정)를 제정하여 가입과 운영에 대한 성문 규정을 마련하면서 가입 조건도 상향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로이드가 전문 보험인 집단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전히 군림하고 있는 18세기의 보험회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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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쓰이는 보험의 기본 기술들은 18세기 영국에서 발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18세기 영국의 보험 집단과 보험회사들이 현재와 비슷한 보험 산업의 구조를 완성한 탓이다.


초기 형성 과정을 거쳐 18세기의 영국에서 발달하게 된 보험 집단과 보험회사들은 이 시기에 현재와 같은 ‘보험 산업’의 구조를 완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보험업계 내부에서는 좀 더 세밀하고 정교한 리스크 예측 방법이나 수익 개선 방안이 발달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확률 통계를 통한 리스크의 예측, 공동 인수나 재보험, 집단화를 통한 리스크의 분산과 같은 기술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시 형성된 에퀴터블 생명보험이 현재 대한민국에도 들어와 있는 AXA 보험 그룹의 일부로 존속하고 있는 점이나 로이드 보험이 지금까지도 세계 보험업계의 막강한 축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Alexander Fingland Jack,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Life Assurance], London, P.S.King & Son, 1912.
  • Barry Supple, [The Royal Exchange Assurance – A History of British Insurance 1720-1970], London: Cambridge UP., 1970.
  • Geoffrey Clark, [Betting on Lives – The culture of life insurance in England, 1695-1775], New York, Manchester: Manchester UP., 1999.
  • Maurice Ogborn, [Equitable Assurances - the story of life assurance in the experience of the Equitable Life Assurance Society, 1762-1962], Routledge, 2005.
  • 전무부, <로이즈보험시장의 실태분석>, [무역학회지] 제 25권 제4호, 2000.
  • V.A.R. 제라이저 지음, 원용찬 옮김, [죽음의 문화와 생명보험], 신아출판사, 2006,
  • 하인리히 브라운 지음, 류성경, 신동호 옮김, [생명보험사],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 2010.
  • 김주동, 이원근, [보험학 원론], 형설출판사, 1996.




강종무
글쓴이 강종무는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현상과 제도들의 역사적 기원을 파악하여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학위 논문의 주제는 <남해 거품 사건을 통해 본 18세기 초 영국의 사회문제>이다.


발행2013.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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