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히타이트 제국의 목소리가 들리다 - “너는 빵을 먹을 것이고 물을 마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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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3회 작성일 16-02-06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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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을 넘어 ‘역사’를 복원하라



하투실리 3세와 람세스 2세가 맺은 평화조약문을 극적으로 찾아내고 약 7년 후, 빙클러(Hugo Winckler, 1863~1913)는 세상을 떠났다. 빙글러의 발견으로 히타이트는 제국의 수도를 되찾았지만, ‘역사’를 되찾지는 못했다.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사료, 히타이트의 세력권 곳곳에서 발견된 아카드어로 쓰인 설형문자판의 해독으로 어느 정도 히타이트의 역사가 재구성 될 수 있었지만, ‘아르자와어’와 기이한 상형문자들은 아직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이제 히타이트학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이전까지는 발굴만으로도 히타이트 제국의 존재를 증명하는 엄청난 발견이 되었지만, 이제 발굴만으로는 히타이트의 비밀을 풀 수 없었다. 히타이트어 원문으로 “히타이트 민족이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게 하는 일”이 필요했다. 이때 히타이트 제국을 말하게 한 것은 체코의 젊은 학자 프리드리히 흐로즈니(Friedrich 혹은 Bedřich Hrozný, 1879~1952)였다.1)

흐로즈니는 체코인이었기 때문에 원래 이름은 베드리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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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히타이트학



19세기의 고고학은 그야말로 탐험가들과 영웅들의 시대였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들고 트로이를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1890), 호주머니에 60파운드를 넣고 니네베를 발견한 오스텐 레이어드(Austen Layard, 1817~1894), 망치로 파라오의 묘를 열었던 조반니 벨초니(Giovanni Belzoni, 1778~1823)까지. 모험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들이 19세기 고고학사에서는 빈번히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삽 하나로 보물을 찾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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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의 설형문자와 상형문자가 같이 새겨진 인장. 1860년 영국박물관은 이 인장이 너무 이국적이어서 위조품같다는 이유로 구입을 거부했다. 현재는 보스턴에 보관되어 있다.


20세기 초, 진짜 학자였던 빙클러마저도 고고학자로서는 있을 수 없는 우를 범했다. 보가즈쾨이에서 기적 같은 발견을 한 그 당시, 빙클러는 발굴팀을 지휘하거나 작업에 참가하지 않고 천막에 앉아 일꾼이 가져다준 점토판만을 읽었다. 그 결과 그곳에서 발굴된 수많은 점토판들은 어떤 상태로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나왔는지 출처가 불분명하게 되었다. 일꾼들은 그저 땅을 파고 발견된 점토판들을 한 곳에 쌓아두었던 것이다.

발굴의 기본적인 원칙마저 지켜지지 않은, 당시로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빙클러의 평화조약문 발굴이 천운과도 같다는 것은 단지 중요한 문서를 발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러한 발굴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분리되거나 깨지거나 심지어 분실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이제 시대도 상황도 바뀌었다. 여러 학문의 성립과 과학의 발달로 고고학은 보다 정교해졌고, 발굴만으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1913년, 히타이트학은 정확히 이 기로에 서 있었다. 이제 우연도 기적도 히타이트의 역사를 알려줄 수 없었다. 언어의 해독만이 히타이트학의 돌파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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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자와어’를 해독한 흐로즈니. 1차 세계대전 군 복무 중, 역사에 기록될 업적을 이루었다.


빙클러가 사망한 후, ‘독일 오리엔트 학회’는 보가즈쾨이에서 나온 히타이트 설형문자 모음을 젊은 아시리아학 학자들에게 연구하라고 넘겼다. 이 학자들 중 한 명이 바로 흐로즈니였다. 그리고 곧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정부는 필요가 없어진 이 고대어 연구원들에게 군복을 입혀 그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영국과 독일의 연구 공조도 중지되었고, 베를린박물관과 영국박물관 사이에는 대포들이 길게 들어찼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로 징집된 흐로즈니는 이러한 전쟁 상황에도 불구하고 점토판 해독에 대한 학문적 열정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봐준 고마운 상관이 있었으니,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A. 캄머그루버(A. Kammergruber) 중위였다. 35세의 젊고 열정적인 학자였던 흐로즈니를 마음에 들어 했던 이 너그러운 상관은 자신의 힘이 닿는 대로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우리는 어쩌면 흐로즈니보다 이 캄머그루버 중위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흐로즈니의 성과가 늦어졌을 수도, 혹은 전쟁으로 그가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흐로즈니 상관의 배려는 결국 역사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흐로즈니, ‘아르자와어’의 봉인을 풀다




“필자의 연구를 책으로 발간하는 것은 제쳐놓고라도 전쟁이 연구의 완성을 심각하게 지체시킬지도 모른다는 점과 히타이트에 관한 발표를 다른 분야에서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려하여, 필자는 [독일 오리엔트학회의 전갈]에 축약된 형태로나마 논문의 머리말을 즉각 싣기로 결정했다.”- 흐로즈니, 1915년 12월 [히타이트 문제에 대한 해답] 첫 번째 각주

흐로즈니는 후에 히타이트어와 관련된 결정판의 책머리에서 “저자의 연구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를 보여준 캄머그루버 중위에게 감사를 보낸다. 그는 흐로즈니를 사병의 의무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고, 심지어 그 당시 다른 유럽 학자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히타이트어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 이스탄불에 체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러한 도움 속에서 흐로즈니의 열정과 뛰어난 학문적 지식, 선입견 없는 문제의식이 빛을 발하게 된다.

흐로즈니가 '아르자와어'를 해독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학문적 배경에는 언어학계에서 나온 인도-유럽어족의 성립이 있었다. 이는 간단히 말해 인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그리고 유럽 대부분의 언어가 하나의 어원에서 파생되어 어휘와 형태가 매우 유사하다는 이론이다. 가장 유명한 예로 ‘아버지’란 단어를 들 수 있다. 영어의 father, 독일어의 vater, 불의어 père, 스페인어의 padre, 라틴어의 pater, 옛 아일랜드어의 athir, 고트어의 fadar, 산스크리트어의 pitar, 토카라어2)의 pacar까지. 이처럼 동일 어족이란 오늘날에는 다소의 차이가 나지만 하나의 원어(原語)에서 유래된 언어들을 말한다.

타림분지의 중국령 투르키스탄 북부에서 사용하던 언어로, 현재는 사어(死語)이다. 1세기경에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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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도-유럽어의 언어학이 히타이트 점토판들의 ‘아르자와어’ 봉인을 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흐로즈니는 바빌로니아-아시리아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적으로는 동(東)셈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였다. 그런 그가 인도-유럽어족의 이론으로 해독에 성공한 것 또한 역사의 흥미로운 부분이다.

어떤 분야에서든 천재는 있지만, 천재라고 해서 모든 문제를 간단히 혹은 한 번에 푸는 데 성공할 수는 없다. 이것은 금석문 해독 분야에서 특히 더 했다. 잘못된 발상과 참신한 통찰력, 그리고 그것을 숱하게 비교하고 버리고 다시 만들어내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다른 언어를 빨리 익히는 천재라도 모르는 언어를 인내와 끈기 없이 단번에 해독할 수는 없다. 천재로 유명한 샹폴리옹도 로제타석(Rosetta Stone)을 한 번에 해독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인고의 시간 끝에 한 줄기의 빛을 발견한다면 그 이후의 시간은 물 흐르듯 빨리 흘러가게 마련이다. 샹폴리옹도 그랬고 흐로즈니도 마찬가지였다. 흐로즈니에게 한 줄기 빛은 바로 다음의 문장이었다.

“nu ninda-an ezzatteni vadar-ma ekutteni(누 닌다-안 에자테니 바다르-마 에쿠테니).”

흐로즈니도 처음에는 이 ‘아르자와어’를 두고 고심했다. 하지만 앞선 글에서 우리는 학자들이 ‘아르자와어’를 읽을 수는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전혀 모르는 문자가 아닌 수메르어에 기원을 둔 설형문자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읽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몇몇 단어는 초기 수메르어에서 파생된 표의문자나 그림문자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흐로즈니는 ‘아버지’, ‘물고기’와 같은 단어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위의 인용된 문장에서 뜻을 아는 한 단어가 있었는데, 빙클러가 유일하게 해독했던 수메르 문자 “ninda”였다. 이 단어의 뜻은 ‘빵’이다. 이즈음 흐로즈니는 지루한 정밀조사 과정에서 이 언어의 형태 변화들을 쫒아가며 ‘아르자와어’가 인도-유럽어족의 전형적인 문법 형태를 지니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단 한 줄도 해석할 수 없었지만, 단어들의 형태 변화만으로도 이를 알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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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로즈니 처음으로 해독한 문장, “너는 빵을 먹을 것이고, 물을 마실 것이다”의 설형문자. 히타이트어 해독의 결정적 단서가 된 문장이다.


흐로즈니는 이 발견이 해독으로 이어지면 “학문상의 폭풍우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학자들 중 누구도(한 사람을 제외하고)3)이 언어가 인도-유럽어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인도-유럽인이 기원전 2000년대 아나톨리아 내부에서 권력을 장악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기존의 오리엔트사(史) 연구와 모순되는 것이었다. 흐로즈니는 자신의 학설이 대담하지만 옳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ninda”, 즉 ‘빵’이라는 이 수메르 표의문자로부터 뜻을 추론해나갔다.

1902년 노르웨이의 학자 크누트존은 히타이트어가 인도-유럽어족임을 주장했지만, 현실성이 없다는 학계의 반발로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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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빵이 있는 문장에는 당연히 ‘먹다’라는 말도 있을 것이다(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더라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먹다’라는 뜻의 인도-유럽어의 낱말 목록을 작성해나갔다. 영어로는 eat, 라틴어로 edere, 독일어로 essen, 독일 고어로는 ...... ezzan! 자, 이제 여러분도 발견했을 것이다. 이 단어가 위 인용문의 “ezzatteni”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일이 이렇게 되자 일사천리로 이 문장이 이해되었다. ‘빵’을 ‘먹다’라는 내용이 나온 것으로 보아, 바로 뒤 문장도 먹는 것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한 흐로즈니는 “vadar”의 형태와 유사한 인도-유럽어를 떠올렸다. 그것은 영어의 water, 독일어의 wasser, 고대 작센어의 watar와 같은 뜻이었다. 즉, ‘물’이었던 것이다! “너는 빵을 먹을 것이고, 물을 마실 것이다.”가 이 문장의 뜻이었다. 이제 ‘아르자와어’의 비밀은 풀렸다.

흐로즈니의 이 발견으로 고대 오리엔트학에 대한 정설이 뿌리부터 흔들렸다. 기원전 2000년대에 중앙 아나톨리아에 한 왕국이 있었고, 그 지배자는 이집트의 파라오와 맞먹는 권력을 지녔으며, 인도-유럽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 결과 히타이트어는 문자로 남겨진 인도-유럽어 중 가장 오래된 언어가 되었다.


히타이트의 목소리가 들리다




“이 연구서에서 지금까지 신비에 싸여 있던 히타이트어의 본질과 구조를 확립하고 해독을 시도했다. …… 히타이트어가 대체로 인도-유럽어라는 사실이 제시될 것이다.”- 흐로즈니, 1917년 [히타이트의 언어] 머리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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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설형문자 독음표.


아직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11월 24일, 흐로즈니는 ‘베를린 근동학회’ 회원들에게 자신의 해독에 대해 발표하였고, 실제적인 해독에 관한 책인 [히타이트의 언어(Sprache der Hethiter)]를 1917년 라이프치히에서 출간했다. 246쪽에 이르는 이 책에서 흐로즈니는 이 고대의 언어를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해독해낸다. 그것도 추측이나 가설이 아닌 명백한 결론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말이다.

흥미롭게도 흐로즈니에게 결정적 힌트를 주었던 ‘빵’이라는 수메르 단어 “ninda”가 실은 히타이트어로는 “zuba(주바)”라는 사실이 1990년대 후반이 돼서야 밝혀졌다. 또한 ‘히타이트어’라는 명칭은 엄밀히 말해서 잘못된 것이다. 후대 사람들의 관습적 명칭이 굳어졌을 뿐, 히타이트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네사어4)(nesili)’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하지만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히타이트어’라는 명칭이 굳어져서 소위 ‘네사어 쓰기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네사’는 아나톨리아 한 지역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히타이트 왕국의 시조로 알려진 아니타 왕의 단검이 발견된 히타이트 왕국의 첫 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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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헤맸던 히타이트학은 흐로즈니의 발견으로 그야말로 고속도로를 달리며 오리엔트사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들 자신의 언어로 기록한 문서들을 통해 히타이트 제국의 법, 종교, 의학, 도덕, 관습, 왕들과 부족들의 행적이 밝혀졌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가 그 역사와 문화를 드러내며 빈칸이었던 후기 청동기시대 아나톨리아 지역의 이야기를 채웠던 것이다. 이는 학문에의 열정과 힘겨운 과정을 이겨낸 끈기를 지닌 흐로즈니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학문의 과정에서 그의 선배들처럼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유물을 발견하지도, 기적 같은 우연을 만난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이루어낸 결과가 곧 보물이고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저명한 고고학 저술가인 C. W. 세람은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황금 보물과 미라를 발굴한 자만이, 과거를 자신의 손으로 만지고 있다는 전광석화와 같은 감동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그만한 전율은 구부린 채 서재에서 책을 보고 있는 사람도 느낄 수 있다. 그는 한 문장을 꼼꼼히 뜯어보다가 마침내 먼 옛날의 무덤에서 터져나오는 외침을 갑자기 듣게 된다. 거기에는 무미건조한 언어학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다. 사막에서 부르짖는 ‘워터(water)’라는 외침은 목이 타는 갈증을 뜻하지 않는가? 독일의 북쪽 해안에 살고 있는 프리슬란트 사람과 미국 북동부의 펜실베이니아주에 사는 한 네덜란드인이 3천 년이나 떨어져 있는 어느 히타이트인의 목마른 절규를 이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 그것을 깨닫는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렇다. 흐로즈니의 발견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반대도 가능하지 않을까? 국내에도 소개된 히타이트 역사를 소재로 한 일본의 유명 만화 [하늘은 붉은 강가5)]에서 주인공이 고대 히타이트로 ‘타임슬립’을 한 것처럼 우리도 만약 그 시대로 갈 수 있다면, 그리고 영어나 독일어와 같은 인도-유럽어를 조금이라도 익혔다면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 같다.

히타이트 제국이 최전성기를 구가하였던 수필루리우마 1세와 그의 아들 무르실리 2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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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세 번의 여정을 통해 히타이트 제국이 3000년의 시간을 넘어 어떻게 발견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하게 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 짧은 지면에 다 담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지만, 마지막 이야기를 향해 가야 하기 때문에 발굴과 해독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이 여정의 마지막은 히타이트 역사 최대의 수수께끼 중 하나인 제국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 흥미진진한 히타이트의 마지막 이야기가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 비르기크 브란다우, 하르트무트 쉬케르트 지음, 장혜경 옮김, [히타이트], 중앙 M&B, 2002.
  • C. W. 세람 지음, 오흥식 옮김, [발굴과 해독], 푸른역사, 2000.
  • Trevor Bryce, [The Kingdom of the Hittites], Oxford UP, 2010.
  • C. W. Ceram, [The Secret of the Hittites: The Discovery of an Ancient Empire], Phoenix Press, 2001.




김경민 | 역사 저술가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제국주의와 고고학: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일국제영국사학회에 발표한 바 있으며 UNIST(울산과학기술대학교)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제국주의와 문화, 학문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발행2013.11.29.



주석


1
흐로즈니는 체코인이었기 때문에 원래 이름은 베드리히다.
2
타림분지의 중국령 투르키스탄 북부에서 사용하던 언어로, 현재는 사어(死語)이다. 1세기경에 소멸했다.
3
1902년 노르웨이의 학자 크누트존은 히타이트어가 인도-유럽어족임을 주장했지만, 현실성이 없다는 학계의 반발로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다.
4
‘네사’는 아나톨리아 한 지역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히타이트 왕국의 시조로 알려진 아니타 왕의 단검이 발견된 히타이트 왕국의 첫 수도였다.
5
히타이트 제국이 최전성기를 구가하였던 수필루리우마 1세와 그의 아들 무르실리 2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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