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진장 - 중세 최대의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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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4회 작성일 16-02-06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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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은 왜 피핀의 손을 잡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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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경 이탈리아 반도의 세력권.


8세기경 유럽은 소위 ‘야만족’이 지배하고 있었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리된 이후 서로마제국은 이미 멸망했고, 그 공백은 프랑크족과 롬바르드족 등 게르만족이 채우고 있었다. 지금 스페인, 프랑스가 위치한 지역은 프랑크족이, 그리고 이탈리아와 독일, 스위스가 위치한 지역은 롬바르드족이 각각 왕국을 세우고 그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로마제국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잃어버린 교황은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기댈 만한 곳은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동로마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동로마제국은 이미 콘스탄티노플로 중심을 옮긴 지 오래였고, 이탈리아 반도 몇몇의 도시만이 비잔티움에 충성하고 있었을 뿐 반도의 대부분은 롬바르드의 것이었다. 따라서 로마에 근거지를 둔 교황은 언제 롬바드르족의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성상(聖像)파괴운동1)을 두고 대립해온 로마의 교황과 비잔티움의 황제는 같은 뿌리를 둔 기독교 문화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서로를 증오하고 있었다. 비잔티움마저 등을 돌린 상황에서 점차 롬바르디아가 세력을 확대해나가자 교황은 숨통이 조여오는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8~9세기경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명령에 의해 성화상 공경을 금지하고, 성상을 파괴했던 운동.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도 성상 파괴에 대한 갈등과 논쟁, 내전이 있었고 성상 파괴에 반대한 서로마 교회 역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를 비난하였다. 다양한 논쟁과 갈등이 벌어졌지만, 결과를 놓고 본다면 성상파괴운동은 동방정교회가 로마가톨릭과 분열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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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교황의 눈에 들어온 것이 프랑크 왕국이었다. 당시 프랑크 왕국은 이슬람 세력의 서유럽 진출을 방어하는 데 성공한 궁재(majordomus, 宮宰) 카를 마르텔2)(Karl Martell, 688~741)을 이어 그의 아들인 피핀3)(Pepin the Short, 714~768)이 다스리고 있었다. 피핀은 유명무실한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를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명분 없이 왕을 몰아낸다는 것은 떠안고 싶지 않은 정치적 부담이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카를 마르텔은 732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 쳐들어온 사라센의 침입을 격퇴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이슬람의 서유럽 진출이 일단은 좌절되었다. 그의 이름 뒤에 붙은 마르텔은 ‘망치’라는 뜻으로, 이슬람의 진출을 망치처럼 강력하게 막아내었다는 존경의 표시로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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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작았었는지 ‘단신왕 피핀’ 혹은 ‘소(小) 피핀’이라고 불린다. 할아버지인 피핀은 ‘중(中) 피핀’, 증조 할아버지는 ‘대(大) 피핀’으로, ‘피핀’이라는 이름을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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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피핀에게 손을 내민 것이 당시 교황이었던 자카리아스(Zacharias, 679~752)였다. 그는 실권을 가진 피핀이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는 것이 세계의 질서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피핀이 카롤링거 왕조를 여는 것을 지지했다. 게다가 즉위식 때 기름을 부어 축성4)(祝聖)까지 해주면서 정당성을 더해주었다.



‘기름을 붓는다’는 행위는 기독교 문화권에서 매우 성스러운 의미로 해석된다. 구약성경에도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기름을 부음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예수가 태어났을 때에도 동방박사들은 값비싼 향유를 바친다. 간략하게 말해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데, 프랑크 왕을 기름부어 축성했다는 것은 그를 기독교의 수호자로 인정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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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리아스의 뒤를 이어 선출된 교황 스테파누스 2세(Stefanus Ⅱ, ?~757)는 더욱 적극적으로 프랑크 왕국과 연합을 추구했다. 그는 롬바르디아 공격을 눈앞에 둔 754년, 파리의 근교에 있는 생드니 수도원까지 찾아와 화려하고 장엄한 의식을 집전하며 피핀에게 다시 기름을 부어줌으로써 카롤링거 왕조의 정당성에 보증수표를 얹어주었다.

피핀에게는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허수아비일지라도 왕은 왕이고, 궁재는 궁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메로빙거 가문을 몰아내고 스스로가 왕이 되고 싶었던 피핀으로서는 그에게 왕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해준 교황에게 보답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아마도 이 순간 교황 스테파누스 2세가 프랑크의 왕 피핀에게 그 유명한 문서 하나를 내밀었다고 생각한다. 이 문서가 무엇이었냐고? 바로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Ι, 274~337)가 교황 실베스테르(Sylvester Ι, 314~335)에게 넘겨주었다고 알려진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Donatio Constantin)>이다.


콘스탄티누스, 세속에 대한 교황의 우위를 선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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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각상. <출처: (cc) Gernot Keller at en.wikipedia.org>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다. 기독교 세계의 영웅인 셈이다. 당시 그는 기독교를 수많은 로마의 종교 중 하나로 인정하고, 박해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했을 뿐이다. 종교적인 이유보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이유가 더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기독교가 지금처럼 세계적인 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게 만든 사건이나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빼놓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덕택에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라면 어디든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 로마제국이 멸망하여 사라진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동방정교회나 로마가톨릭 교회가 모두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여 성 콘스탄티누스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이만큼 기독교 세계에서 유명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남겼다는 문서를 교황 스테파누스 2세가 피핀에게 보여준 것이다. 피핀은 이 문서에 담긴 교황의 뜻을 받들어 프랑크족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었다. 그리고는 이탈리아 반도를 주무르던 롬바르디아족을 정벌하고, 그나마 남아 있던 비잔티움의 관할령도 빼앗아 이 땅의 일부를 교황에게 양도했다. 덕택에 로마와 그 주변의 일부에 국한되었던 교황령은 라벤나 지역까지 확대된다.

그렇다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진장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었기에 피핀이 교황을 위한 원정을 떠나도록 결심하게 만들었을까. “성부와 성자, 성령이라는 신성하고 불가분의 삼위일체의 이름으로”라는 고백으로 시작되는 이 문서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세기에 교황 실베스테르는 콘스탄티누스를 만나 그의 한센병을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이때 실베스테르는 마태복음(마태오복음) 16장 19절에 나온 말씀을 인용하며 설교한다. 예수가 “베드로를 반석 삼아 교회를 세우겠다” 선언했고,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건네받은 예수의 후계자라는 내용이다.

감복한 콘스탄티누스는 이때 “교황이 베드로의 권위를 물려받았고, 우리 제국과 지상의 옥좌보다 더 영광스럽고 고귀한 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교황은 기독교 세계의 가장 중요한 네 개의 교구인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예루살렘보다 우월한 지위를 갖게 되었고, 따라서 온 세계의 교회 전체를 관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콘스탄티누스는 이 문서를 통해 교황에게 “로마시와 이탈리아, 더 나아가 서방 세계의 전체를 양도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교황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로마를 피해 제국의 중심을 비잔틴으로 옮겼다고 한다.5)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 원문이 궁금하다면 다음의 사이트를 참조할 것을 추천한다.
http://www.thelatinlibrary.com/donation.html

영문 번역본의 경우 인터넷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아래 사이트에서는 영문으로 된 전문을 볼 수 있다.
http://www.fordham.edu/Halsall/source/donatconst.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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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서방 세계 전체를 양도한다는 문서를 건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13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로, 교황이 황제보다 권위 있는 인물로 묘사된 점이 눈길을 끈다 .


이 문서대로라면, 최소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다스렸던 서유럽 세계는 모두 교황의 것이다. 만약 세속 군주가 다스리고 있는 땅이 있다면 그것은 교황에게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4세기에 교황에게 모든 땅을 양도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스테파누스 2세가 이 기진장을 피핀에게 보여주었을 때, 롬바르드족을 정복하고 빼앗은 땅을 교황에게 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세속에 대한 교황의 우위를 증명하는 이 문서, 기진장이 위조문서였다는 놀라운 사실이 그것이다.6)



이 기진장을 누가 만들었느냐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서 추측을 할 뿐이다. 연구자들은 8세기 중엽 교황청에서 만들어진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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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발라, “기진장은 위조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이 허위 문서라는 사실을 폭로한 사람은 이 문서가 출현하고 난 뒤 약 700여 년이 지난 후에 등장한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1407~1457)였다. 로렌초 발라는 15세기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인문주의자 중 한 사람으로, 일찍이 언어문헌학의 방법론을 확립하여 고전의 비판적 연구로 유명한 학자다. 로렌초 발라는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저술은 바로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이 가진 허위성에 관하여(De falso credita et ementita Constantini Donatione declamatio, 1440)]다. 그는 자신의 비판적인 연구 방법론을 통해 기진장이 허위 문서임을 밝혀냈다.

물론 기진장의 진위 여부에 대해 의심을 제기한 사람은 발라만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오토 3세(Otto III, 980~1002)도 기진장이 위조문서라는 점을 주장하며 교황과 대립했다. 후대의 많은 연구자들 또한 스테파누스 2세가 피핀에게 문서를 내밀었던 그 순간, 피핀 역시 그 기진장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처음 역사에 등장한 이후 길고 긴 중세를 거치는 동안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은 거의 의심받지 않았다. 교황들은 대대로 황제에 대한 우위권을 뒷받침하는 근거 문서로서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을 수시로 이용했고,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기진장의 내용이 사실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렇게 기독교 세계는 70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콘스탄티누스가 교황에게 로마와 이탈리아를 포함한 서방 세계 전부를 양도했고, 이후 서방 세계에 세워진 세속 권력의 통치권이 미치는 땅은 교황의 봉토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믿음을 유지했다. 로렌초 발라가 나서 본격적으로 기진장을 비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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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로렌초 발라. 언어문헌학 방법론의 확립자답게 치밀한 연구로 기진장이 위조문서임을 밝혔다.


로렌초 발라는 언어문헌학을 연구한 학자답게 문서에 쓰인 라틴어가 실제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사용했던 라틴어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기진장이 위조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지명이 없었는데 문서에는 그 지명이 쓰여 있다는 점에서 기진장은 사실 관계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기진장에서 인용된 문서의 연도가 잘못 기록되어 있는 등의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이 문서가 진짜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모든 근거들을 바탕으로 로렌초 발라는 이 문서가 후대에 만들어진 위조문서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다7).



발라는 다양한 방면에서 문서의 허위성을 들추어낸다. 기진장에 사용된 성경은 불가타 번역본이라 불리는 것인데, 이 번역본을 만든 성 히에로니무스는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4세기에 사용된 라틴어는 고전 라틴어로, 문서에 쓰인 라틴어와는 성격과 시대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또한 문서에 나오는 다양한 의식과 의복 등이 4세기에는 없었던 것이라는 사실 분석까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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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발라의 이러한 연구는 르네상스 문화가 단순히 고전을 베끼고 모방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로렌초 발라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황청은 로렌초 발라의 증명을 부정하고, 16세기 중반까지 그의 책을 금서목록에 포함시킴으로써 진실을 은폐하고자 했다. 기독교계의 이러한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를 살았던 계몽주의 철학자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는 ‘기진장의 내용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저서에 기록함으로써 교회의 논리를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거짓이 만든 역사가 현재를 지배한다



기진장으로 교황이 얻은 이득은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다. 기독교는 중세 유럽을 정신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근거를 얻게 되었다. 로마의 주교는 다른 도시의 주교보다도 우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예수의 대리인이자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으로서 인정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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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나가는 모습. ‘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한 이 사건은 세속 권력이 교회 권력에 굴복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세속 권력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진장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교황의 운명을 결정짓는 정치적 변곡점이었다. 제대로 된 군사력이 없었음에도 교황이 세속 권력을 봉신처럼 거느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서 콘스탄티누스가 기진장에서 언급했다는 “로마 시와 이탈리아, 더 나아가 서방 세계의 전체를 양도한다”는 문구는 그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중세가 깊어가면서 점차 교황에 반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며, 신성을 위해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고 더욱 굳건해졌다. 중세 역사를 보면 수많은 왕이나 귀족들이 ‘파문’을 그 어떤 것보다 두려워하며,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교황의 명령에 복종하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따지고 보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중세를 거치며 다져진 교황의 지위는 세속 권력과 투쟁하며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결국 정신적인 지도자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오늘날에도 교황은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로서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진장은 위조문서였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세워진 교황권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그 자체로 반석이 되어 현재의 존경받는 교황을 잉태한 셈이다.

스테파누스 2세의 기진장 사건은 엄밀히 말하면 피해자가 없는 사기 사건에 불과하다. 사기꾼과 피해자라는 도식으로 볼 때, 피해자 입장인 피핀도 사실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속은 것’일 뿐이다. 당사자가 합의하면 사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거짓은 진실로 굳어진다.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더라도 이미 구축된 믿음의 구조는 쉽게 허물어지지 않고,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닌 채 다시 현실을 지배하게 된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말이 없는 이유는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 재판을 받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문헌

  • 프란체스코 키오바로, 김주경 역, [교황의 역사-도시에서 세계로], 시공사, 1998.
  • 수잔 와이즈 바우어, 이광일 역, [수잔 바우어의 중세 이야기 2], 이론과 실천, 2011.
  • P. G. 맥스웰 스튜어트, 박기영 역, [교황의 역사], 갑인공방, 2005.
  • 게리 윌스, 박준영 역, [교황의 죄], 중심, 2005.
  •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김수은 역, [교황들], 동화출판사, 2009.
  • Valla, Lorenzo, Coleman, Christopher B. trans., [Discourse on the Forgery of the Alleged Donation of Constantin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22
  • Vauchez, Andre, [Encyclopedia of the Middle Ages], Routledge, 2001
  • Kristina Sessa, [The Formation of Papal Authority in Late Antique Italy: Roman Bishops and the Domestic Sphe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 Colin Morris, [The Papal Monarchy: The Western Church from 1050 to 1250],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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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석 |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유석은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힌 역사관을 바로 잡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쓰기로 표현하는 것이 목표이다.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1960년대 미국 서남부 치카노 운동의 성격: '친쿠바 혁명주의자'들의 영향을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빅이슈에 [국기로 보는 세계사]를 연재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Q&A세계사: 이것만은 알고 죽자](공저, 2010)와 [생각의 탄생: 19세기 자본주의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발행2013.12.06.



주석


1


8~9세기경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명령에 의해 성화상 공경을 금지하고, 성상을 파괴했던 운동.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도 성상 파괴에 대한 갈등과 논쟁, 내전이 있었고 성상 파괴에 반대한 서로마 교회 역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를 비난하였다. 다양한 논쟁과 갈등이 벌어졌지만, 결과를 놓고 본다면 성상파괴운동은 동방정교회가 로마가톨릭과 분열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카를 마르텔은 732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 쳐들어온 사라센의 침입을 격퇴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이슬람의 서유럽 진출이 일단은 좌절되었다. 그의 이름 뒤에 붙은 마르텔은 ‘망치’라는 뜻으로, 이슬람의 진출을 망치처럼 강력하게 막아내었다는 존경의 표시로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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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작았었는지 ‘단신왕 피핀’ 혹은 ‘소(小) 피핀’이라고 불린다. 할아버지인 피핀은 ‘중(中) 피핀’, 증조 할아버지는 ‘대(大) 피핀’으로, ‘피핀’이라는 이름을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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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을 붓는다’는 행위는 기독교 문화권에서 매우 성스러운 의미로 해석된다. 구약성경에도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기름을 부음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예수가 태어났을 때에도 동방박사들은 값비싼 향유를 바친다. 간략하게 말해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데, 프랑크 왕을 기름부어 축성했다는 것은 그를 기독교의 수호자로 인정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5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 원문이 궁금하다면 다음의 사이트를 참조할 것을 추천한다.
http://www.thelatinlibrary.com/donation.html

영문 번역본의 경우 인터넷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아래 사이트에서는 영문으로 된 전문을 볼 수 있다.
http://www.fordham.edu/Halsall/source/donatconst.asp

6


이 기진장을 누가 만들었느냐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서 추측을 할 뿐이다. 연구자들은 8세기 중엽 교황청에서 만들어진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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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는 다양한 방면에서 문서의 허위성을 들추어낸다. 기진장에 사용된 성경은 불가타 번역본이라 불리는 것인데, 이 번역본을 만든 성 히에로니무스는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4세기에 사용된 라틴어는 고전 라틴어로, 문서에 쓰인 라틴어와는 성격과 시대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또한 문서에 나오는 다양한 의식과 의복 등이 4세기에는 없었던 것이라는 사실 분석까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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