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히타이트는 멸망하는가 - 최후조차 사라진 제국의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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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4회 작성일 16-02-06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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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차면 기운다’는 말이 있다. 역사 속 어떤 제국도 이 법칙을 깨지 못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헬레니즘 세계와 카이사르의 로마 제국도,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과 나폴레옹의 유럽도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후기 청동기 시대 오리엔트 세계를 호령했던 히타이트 또한 이 역사의 진리를 피할 수 없었다. 이처럼 어떤 나라도 겪을 수밖에 없는 쇠퇴와 멸망의 길은 그 나라가 강대하면 강대할수록 우리에게 흥미로운 주제를 제공한다. 따라서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에 위치한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 하투샤의 장엄한 유적은 히타이트가 왜, 혹은 어떻게 멸망했는지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제국의 마지막을 현재의 우리는 거의 모른다. 멸망의 원인이 너무 많아서 아직도 논쟁중인 로마 제국의 최후와는 달리, 히타이트의 최후는 역사적 증거가 부족해 아직까지 어떤 학자의 주장도 이렇다 할 정설이 되지 못하고 있다. 가능한 설명이나 유력한 주장은 있으나,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 ‘역사적 사실’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의 여러 가지 정황과 부족하지만 남아 있는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몇몇 학자들이 꽤 논리적인 설명들을 제시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타이트 마지막 왕들의 치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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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뷔위크칼레 궁전 터에서 찍은 하투샤의 천연 방어벽인 괴상암 뷔위크카야. 가파른 경사지에 건물을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하투실리 3세



공식적인 히타이트의 마지막 왕은 수필루리우마 2세(Supiluliuma II, 재위: BC 1207~?)로, 얄궂게도 제국의 전성기를 열었던 수필루리우마 1세와 이름이 같다. 게다가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수필루리우마 1세의 아들 무르실리 2세(Mursili II, 재위: BC 1321~1295)가 바로 수필루리우마 2세의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즉, 제국의 영광이 무르실리 2세 이후 3대를 채 넘기지 못한 것이다. 절정에 이른 제국의 만월(滿月)은 이제 서서히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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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4세기 히타이트 왕국의 지도와 도시의 명칭. <출처: (cc) Javierfv1212 at commons.wikimedia.org>



무르실리 2세 사후 그의 아들 무와탈리 2세(Muwattalli II, 재위: BC 1295~1272)가 제국을 물려받았다. 그는 선대의 강하고 안정된 나라를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전례 없는 평온함 속에 최초로 외부국1), 즉 속국들의 저항이나 반란 없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무와탈리는 이 평화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히타이트 제국은 직접 통치하는 내부국과 동맹이나 충성 서약으로 맺어진 외부국으로 구성되었다. 윌루사, 미라, 타르훈타사, 카르케미시 등이 이 외부국에 속한다. 이러한 속국들은 토착 왕가나 히타이트 대왕이 임명한 왕족 가문이 지배했다. 수탈이나 착취가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외부국과의 관계는 식민지 체제가 아닌, 조약이나 계약 갱신의 방식으로 독립적 지위를 허용한 일종의 연방체제와 비슷했다. 하지만 외교권은 없었기 때문에 속국들이 이에 저항하거나 대왕의 권위에 도전하면 정벌 전쟁을 통해 지배자를 교체하는 일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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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곧 적이 등장했다. 이집트의 세티 1세였다. 람세스 2세의 아버지인 세티 1세는 카데시의 요새를 정복하고 아무루를 재탈환했다2). 하지만 무와탈리는 순식간에 두 지역을 다시 탈환했다. 세티 1세의 승리의 시간이 어찌나 짧았던지 히타이트 측은 이 사건을 아예 기록도 하지 않았다. 무와탈리는 여기서 안심하지 않고, 대책을 강구했다. 전선을 확장하지 않고 북쪽 카스카족의 위협에서 수도 하투샤까지 방어할 수 있는 방식을. 놀랍게도 무와탈리는 수도 이전을 감행했다. 하투샤 남쪽으로 죽 내려가 오늘날 차탈회육의 아래쪽 지중해와 면하고 있는 지역에 타르훈타사(Tarhuntassa)라는 도시를 세웠던 것이다. 이는 명백히 이집트를 의식한 천도였다.



지중해 동부 해안에 위치한 속국, 이집트의 지배를 받다가 수필루리우마 1세에 의해 히타이트의 영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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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여전히 기능하고 있는 하투샤는 카스카족의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지킨단 말인가? 사실 무와탈리가 이런 초강수를 둘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비밀병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의 동생 하투실리였다. 무르실리 2세의 네 아들 중 막내였던 하투실리는 어린 나이에 이미 카스카족을 상대로 승리한 경험이 있는 뛰어난 전사였다. 그는 나중에 그 유명한 카데시 전투에도 참전한다. 무와탈리는 근위대장이었던 동생을 왕국의 거의 최북단에 있는 하크미사의 왕으로 임명하여 북쪽 전선과 하투샤를 방어하게 했고, 하투실리는 이 임무를 훌륭히 완수했다. 무와탈리 또한 서쪽의 동맹국들을 재정비하고, 람세스 2세의 야욕을 카데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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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를 비롯해 이웃 국가를 정복하는 람세스 2세의 모습을 그려놓은 이집트 측의 기록. 람세스 2세는 카데시 전투가 자신의 대승인 양 신전 벽에 거대한 전투 기록을 남겼는데, 그 중에는 과장된 히타이트 측 전사자 수뿐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 무와탈리의 동생 둘이 죽었다는 기록까지 있었다. 그러나 실제 그 전투에 참가했던 왕의 동생 하투실리는 사지 멀쩡히 귀환했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기록은 히타이트 측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왕제(王弟)의 존재는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왕위 계승 절차에 문제를 일으키게 마련이다3). 무와탈리 2세는 카데시 전투가 끝나고 2년 후 세상을 떠났다. 정비로부터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후처의 아들인 우르히테슙(Urhi-Teshub)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약 6년 후, 하투실리는 조카인 우르히테슙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하투실리 3세(Hattusili III, 재위: BC 1267-1237)가 되었다. 숙부가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점에서 얼핏 보면 조선시대의 계유정난이 떠오르지만, 사정을 들여다보면 그 양상은 전혀 달랐다.



무르실리 2세도 왕제로서 왕위에 올랐지만 이 경우에는 그의 형인 아르누완다에게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무르실리는 재위 초기, 안팎으로부터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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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하투실리는 왕위를 빼앗을 마음이 없었고, 그러한 행위는 왕위 계승법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두 사람은 우르히테슙의 재위 초기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조카도 숙부의 의견을 따라 수도를 다시 하투샤로 옮기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우르히테슙의 계속되는 외교적 실정과 하투실리의 영역을 압박하는 행위에 둘의 관계는 결국 불화로 치닫는다. 조카의 실정으로 아시리아와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르자, 하투실리는 이 문제를 수습하고 우르히테슙을 포로로 잡아 추방한 후,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 과정에는 놀랍게도 골육상쟁의 유혈극도, 내부의 저항도 없었다. 하투실리가 명백히 법을 어겼음에도 왕위 찬탈자라는 비난이 쏟아지지 않았고, 그는 무난히 왕위에 올랐다. 이를 보아 둘 사이의 실제 관계나 왕위에 대한 하투실리의 속내를 이제는 알 수 없지만, 우르히테슙은 이미 제국 내에서 신망을 잃었고 반대로 하투실리의 지지자는 늘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카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과 최대한 법과 질서를 지키려 한 하투실리의 태도도 주변국들의 신뢰를 얻었다. 내전을 기대하며 히타이트를 지켜보던 람세스 2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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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투실리 3세를 계승한 투드할리야 4세. 안정된 제국을 물려받았으나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부의 갈등은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이렇게 왕위에 오른 하투실리는 제국을 정비하고 국내외 안정에 힘썼다. 람세스 2세와 그 유명한 평화조약을 맺은 것도, 자신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낸 것도 이러한 외교적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 결과 하투실리의 아들 투드할리야 4세(Tudhaliya IV, 재위: BC 1237~1209)는 안정된 제국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히타이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멸망의 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비교적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쇠퇴의 단초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뒤에 여러 원인들을 살펴보겠지만, 우선 하투실리에 의해 왕위 계승 순서가 꼬인 것도 이후 나타날 내부 분열의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원래대로라면 우르히테슙과 그의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하지만, 하투실리의 자손들이 왕위를 잇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하투실리가 조카를 살려두었기 때문에, 그와 그의 자손들이 왕위의 정통성을 위협하고 왕족 간 내부 분열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히타이트의 마지막 왕들



아니나 다를까 투드할리야 4세 재위 시, 일부 세력들이 이제 와서 하투실리의 왕위 찬탈을 인정할 수 없다고 나섰다. 게다가 하투실리는 투드할리야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후대 학자들이 흥미로운 추측을 가능하게 한 틈을 두 가지 만들었다. 첫째는 원래 하투실리의 후계자가 투드할리야가 아닌, 장남인 투드할리야의 형이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음을 바꾸고 투드할리야를 후계자로 키웠다.

둘째는 그가 자신의 조카 쿠룬타를 양자로 들인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쿠룬타라는 왕자가 선왕과 투드할리야의 총애를 믿고 세력을 키워 투드할리야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투드할리야에게서 잠시 왕위를 빼앗기까지 했다. 비록 곧 원래 상태로 돌아왔지만, 하투실리부터 이어진 왕위 계승과 찬탈의 문제는 왕권을 뿌리부터 흔들었다. 이 일련의 사건을 두고 어떤 학자는 쿠룬타가 투드할리야 때문에 후계자에서 밀려난 하투실리의 장남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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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드할리야 4세와 쿠룬타 사이에 체결된 청동판 조약서. 1986년 하투샤에서 발견된 것으로, 점토판 복사본이 아닌 귀한 진본 조약서다. 청동에 문자를 새긴 도구가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출처: (cc) Bjørn Christian Tørrissen at commons.wikimedia.org>



비록 투드할리야가 다시 왕권을 잡았지만, 왕족 내부의 긴장과 반목은 더욱 심해졌다. 권위와 정통성에 도전을 받은 투드할리야 4세는 주변 속국들로부터 더 확고한 충성 맹세를 받기를 원했고, 더 많은 승전 기록을 쌓고 싶어 했다. 하지만 어떠한 노력도 결코 히타이트 제국을 예전 상태로 돌려놓지 못했다. 주변국들에게 히타이트 대왕의 권위는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투드할리야 4세 사후 그의 아들이 아르누완다 3세(Arnuwanda III, 재위: BC 1209~1207)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약 2년 후 후사 없이 세상을 뜨자, 그의 동생이 수필루리우마 2세로 즉위한다. 히타이트 제국의 마지막 왕이다.

또다시 왕제가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비난이 쏟아지자, 수필루리우마 2세는 아무리 수소문해도 후사가 없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그 자리를 필사적으로 방어해야 했다. 이제 우르히테슙 계열뿐만 아니라, 왕족이라면 누구나 왕위를 노리는 상황이 되었다. 이는 그만큼 왕좌가 공고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수필루리우마는 자신 이외의 어떤 왕족도 인정할 수 없다는 충성 서약을 하게 함으로써 왕좌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여실히 드러냈다. “수필루리우마 1세의 후손도, 무르실리의 후손도, 무와탈리의 후손도, 투드할리야의 후손도, 나아가 나의 형제자매 그 누구도 인정할 수 없다.”

이러한 권력누수 현상은 대외 관계에서도 드러났다. 히타이트의 속국 중 하나인 우가리트(Ugarit)의 예를 살펴보자. 속국의 왕은 새로 왕위에 오르면 충성 서약을 갱신하고 취임 인사차 대왕을 방문해야 하는데, 우가리트의 새 왕 이비라누는 이 방문의 의무 조항을 지키지 않는 무례함을 보여 이미 투드할리야의 질타를 받았다.

우가리트의 다음 왕인 암무라피의 경우는 더 점입가경이었다. 수필루리우마 2세는 자신의 딸을 암무라피에게 시집 보냈는데, 감히 속국의 왕이 대왕의 딸에게 이혼을 요구한 것이다. 이는 하투실리 3세 시절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암무라피는 히타이트 공주에게 다른 좋은 혼처가 정해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쳐버리는 무례함을 범했다. 이러한 우가리트의 도를 넘은 행위에도 불구하고 히타이트가 속국 관계를 끊지 못했다는 사실은 기울어진 국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미 히타이트는 내외부의 거대한 위협에 맞서기 위한 자력을 상실했다.

수필루리우마는 내전을 진압하고 수도 하투샤를 정비했지만, 이미 무너져가는 왕국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정확히 언제인지도 추측할 수도 없이, 수필루리우마 2세의 이름과 수도 하투샤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언제, 어떻게 하투샤가 멸망했는지에 관해 지금까지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투샤뿐 아니라 아나톨리아 남서부 지역, 동부 지중해 연안에 인접한 대부분의 도시와 국가들이 와해되었다. 그나마 이집트가 왕조를 유지하는 정도였고, 미케네는 이미 기원전 13세기 말 히타이트보다 먼저 멸망했다. 아시리아만이 아직 한두 차례의 전성기를 더 남겨둔 채로 건재해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후기 청동기 시대의 주요 문명권들이 차례로 와해되면서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히타이트는 해양 민족들에 의해 멸망했다?



그렇다면 히타이트는 대체 왜 이렇게 급속도로 사라진 것일까? 그리고 그 원인은 무엇일까? 가장 많이 알려진 바로는 “해양 민족들(Sea Peoples)”이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집단에 의해 단시간에 약탈당하고 불타 멸망했다는 설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간편하면서도 드라마틱한 가설은 학자들의 꾸준한 발견과 연구로 인해 학계에서 설득력을 잃고 있다. 우선 “해양 민족들”이라는 용어는 람세스 3세 시기 작성된 보고서에 기초한 것으로, 학자들은 당시 이집트를 비롯한 오리엔트 해안 도시들을 괴롭혔던 불청객들을 지칭할 명칭을 딱히 통일하지 못해 이집트 문헌에 기록된 대로 편의상 “해양 민족”이라는 용어를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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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강 서안의 메디나트 하부(Medinet Habu)에 위치한 람세스 3세의 장제전에 그려진 벽화. 해양 민족과의 전투를 기록했다. “해양 민족”이라는 용어는 람세스 3세 때의 기록에 의한 것으로, 이 시기 해양 민족들의 습격에 따른 약탈 현상이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로 당시 아나톨리아와 소아시아 지역, 동지중해 연안을 휩쓴 약탈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우선 히타이트 멸망 원인으로 지목된 위의 가설이 맞지 않는다는 것은, 이집트 측이 말하는 “해양 민족들”의 습격이 비단 이 시기의 일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람세스 2세 시기부터 해적들의 습격이 빈번했으며, 하투실리 3세 또한 함대를 구축하기 시작해 수필루리우마 2세 때는 그러한 해적들과 싸워 이기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이 해적들은 “해양 민족들”이라고 단일하게 부를 수 없는 여러 지역 출신의 각기 다른 무리들이었고, ‘해양’이란 말이 암시하듯 섬이나 바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직도 출신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시킬라인들이 동부 지중해 지역을 약탈해 히타이트의 식량 보급로를 위협했고, 아나톨리아 남서쪽 지역의 루카와 바다 건너 아히야와 사람들(미케네 멸망으로 떠나온 사람들이라 추측됨)도 해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루카의 해안은 이미 오래전부터 해적들의 도피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들의 약탈 행위는 당시 전(全) 오리엔트적 현상이었고, 꼭 해안가에만 한정된 현상도 아니었다. 트레버 브라이스(Trevor Bryce)는 “해양 민족들”에 의한 히타이트의 멸망설에 반대하면서, 당시의 약탈 행위는 크고 작은 집단들 사이에서 나타난 일종의 ‘민족이동’이라는 큰 틀의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이들의 이동과 약탈 자체가 당시 후기 청동기 세계의 재앙을 가져온 결정적 원인이 아니라, 반대로 무너져가는 후기 청동기 시대 고향에서 쫓겨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으려는 결과적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소위 이 “해양 민족들”들이 청동기 시대를 마감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이미 저물어가던 시대의 영향을 받아 ‘민족대이동’을 하게 된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각지에서 흩어져 나온 집단들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팔레스타인 등 각기 다른 곳에 정착했다.

그리고 50년, 길어야 70년 안에 에게해와 아나톨리아, 지중해 동부 해안의 청동기 왕국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이름 없는 소국으로 전락했다. 히타이트가 그 대표적인 예다.



히타이트, 스러져가는 국운을 막지 못하다



그렇다면 히타이트는 왜 이런 격변의 시기를 맞이했으며 결국 멸망하게 되었을까? 여기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제시한 유력한 이론들을 살펴보자.



1. 기원전 1200년경 동지중해 세계는 장기간 지속된 심한 가뭄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식량 부족에 따른 심각한 위기가 찾아왔다. 실제로 수필루리우마 2세는 이집트로부터 “나라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대량의 식량을 지원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2. 이보다 더 광범위한 이론은 무역·상업을 비롯한 체제 전체의 붕괴에 따른 멸망설이다. 우선 가장 중요한 무역 중심지였던 레반트와 에게해 지역의 경제권이 미케네 왕국의 멸망으로 그 기능을 상실한다. 그러자 동지중해를 둘러싼 국제무역이 위기에 빠지고, 이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정치 동맹까지 존재의 이유를 잃으면서 국가간 갈등 상태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무역망을 통해 공급되던 식량, 금속, 사치품의 재분배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서, 특히 하투샤와 같이 자급자족 능력이 부족한 대도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된다.



3. 후기 청동기 시대에 전쟁을 위한 무기나 기술의 급격한 혁신이 일어나면서, 뒤쳐졌던 지역들이 앞선 기술을 받아들여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창으로 무장한 밀집 보병대, 긴 검과 방어용 갑주 등을 이용한 새로운 전쟁 방식이 전차 부대를 주력으로 오랜 번영을 누린 고대 오리엔트 왕국들을 무력으로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4.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왕가 내부의 정치적 분열이 히타이트 위기의 결정적 원인이 될 수 있다.



5. 이 시기 대규모 민족이동에 의해 소아시아와 지중해 전체의 세력권 재편 현상이 나타났다. 히타이트의 멸망은 이 전체적 현상의 하나로, 기원전 13세기를 지배했던 대왕국들 중 청동기 시대 종말기를 무사히 지나간 곳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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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직접 찍은 하부도시의 대신전 터. 이곳은 위르겐 제어의 주장처럼 버려진 것일까. 현재도 발굴 작업과 조사가 계속되고 있다.



거의 2000년까지도, 많은 학자들이 “해양 민족설”과 같은 단발의 강력한 파괴와 약탈, 화재에 의한 하투샤의 멸망설을 지지했다. 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들과 그에 따른 연구를 통해 이에 반대하는 이론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대표적으로 최근까지 보가즈쾨이의 발굴 작업을 주도했던 위르겐 제어(J. Seeher)는 화재가 일어난 건 분명하지만 갑자기 사방에서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기는 힘들다고 주장한다. 상부도시의 신전이 불탄 흔적은 절반도 안 되며, 불에 타버린 큰 신전 바로 옆의 건물들에서는 화재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제어는 불에 탄 건물들이 텅텅 비어 있었고, 약탈 흔적이 없으며, 죽은 사람도 없는 것으로 보아 신전과 궁전의 인구가 화재에 앞서 먼저 빠져나가고 한참 후에 화재가 일어났을 거라고 결론 내린다. “하투샤는 번성하는 수도로 적과 싸우다 점령당한 것이 아닙니다. 도시는 정복당한 것이 아니라 서서히 버려졌습니다. 파괴당한 것이 아니라 몰락했던 거지요.”

제어는 이 몰락의 원인을 왕위를 둘러싼 내분과 갈등, 무역망의 상실, 기후 변화로 인한 식량부족, 여기에 적의 침략까지를 들고 있다. 사실상 위에 언급된 5가지 멸망 이론을 모두 포함한다. 그는 수필루리우마 2세 때 이미 수도로서 기능을 상실한 하투샤에서 왕족과 귀족들이 먼저 도시를 빠져 나가고 이후 점차 남은 사람들의 이탈과 방화로 도시가 몰락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끝나지 않은 히타이트의 역사



사실 역사상 멸망한 나라들을 보면 그 이유에는 미세하게 차이가 있지만 대개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왕권 약화, 경제 불황, 내란, 외세의 침략. 사실 이것으로 거의 모든 멸망이 설명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막상 히타이트의 멸망 원인이 밝혀지면 그 내용 또한 이와 비슷비슷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히타이트학의 극히 일부다. 로마사(史)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로마제국이 왜 멸망했는지를 연구하는 것보다 어떻게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내는 편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히타이트의 역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제국이나 멸망한다. 중요한 것은 거기까지의 내용이다. 그 속의 삶과 문화, 정치와 전쟁, 신화와 종교에서 우리는 웃고 울고 배워왔다.

히타이트학은 아직 젊다. 문자가 해독된 지 100년도 되지 않았으며, 상형문자 해독의 역사는 그보다 더 짧다. 학자들은 언젠가 (제어의 이론이 맞다면) 도망친 수필루리우마가 정착한 도시를 찾아내어 중요한 문서들을 통해 제국의 마지막을 정확히 밝힐지도 모른다. 혹은 히타이트 왕가의 후손을 자처하는 지배자들의 무덤이나 도시를 발굴하여 히타이트의 역사가 늘어날 수도 있다. 우리 시대에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괜찮다. 역사의 물음표는 사실만큼이나 역사적 상상의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누군가 빙클러나 흐로즈니처럼 엄청난 발견을 할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 비르기크 브란다우, 하르트무트 쉬케르트 지음, 장혜경 옮김, [히타이트], 중앙 M&B, 2002.
  • C. W. 세람 지음, 오흥식 옮김, [발굴과 해독], 푸른역사, 2000.
  • Trevor Bryce, [The Kingdom of the Hittites], Oxford UP, 2010.
  • C. W. Ceram, [The Secret of the Hittites: The Discovery of an Ancient Empire], Phoenix Press, 2001.



김경민 | 역사 저술가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제국주의와 고고학: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일국제영국사학회에 발표한 바 있으며 UNIST(울산과학기술대학교)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제국주의와 문화, 학문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발행2013.12.20.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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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제국은 직접 통치하는 내부국과 동맹이나 충성 서약으로 맺어진 외부국으로 구성되었다. 윌루사, 미라, 타르훈타사, 카르케미시 등이 이 외부국에 속한다. 이러한 속국들은 토착 왕가나 히타이트 대왕이 임명한 왕족 가문이 지배했다. 수탈이나 착취가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외부국과의 관계는 식민지 체제가 아닌, 조약이나 계약 갱신의 방식으로 독립적 지위를 허용한 일종의 연방체제와 비슷했다. 하지만 외교권은 없었기 때문에 속국들이 이에 저항하거나 대왕의 권위에 도전하면 정벌 전쟁을 통해 지배자를 교체하는 일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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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동부 해안에 위치한 속국, 이집트의 지배를 받다가 수필루리우마 1세에 의해 히타이트의 영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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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실리 2세도 왕제로서 왕위에 올랐지만 이 경우에는 그의 형인 아르누완다에게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무르실리는 재위 초기, 안팎으로부터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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