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아나바시스(1) - 제국의 심장을 향한 행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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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6회 작성일 16-02-0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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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바시스의 행로. 사르디스에서 출정하여 전투가 벌어진 쿠낙사, 돌아오는 길의 비잔티움까지 본대가 유지되었다. 이후 크세노폰의 부대는 따로 페르가모스까지 이동했다가 거기서 크세노폰이 대열을 이탈했다.





‘아나바시스’ 개요


· 장정의 주인공들 : 아테네, 스파르타, 보이오티아 등 그리스 도시국가들 출신의 용병대

· 장정 시기 : BC 401~BC 399

· 장정 경로 : 소아시아 서부-시리아-바빌로니아-아르메니아-흑해 연안-비잔티움

· 장정 거리 : 약 6300Km

· 관련 링크 : 지식백과 결과보기

아득한 옛날,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아프리카에서 나와 세계 각지로 퍼지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인류 문명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여행은 인간의 발달사와 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역사 시대에 이루어진 오랜 여정들, 먼 나라를 침략하고 정복하려는 원정이나, 미지의 세계를 향해 출발한 탐험, 머나먼 곳에 있다는 세계를 향한 여행 등등, 장정(長征)들은 보기 드문 용기와 지혜가, 경이로움과 비참함이 어우러졌던 장대한 인간 드라마였다. 그리고 그런 장정은 단지 그 참여자들의 필생의 위업이었을 뿐 아니라, 역사의 발전에 큰 도약으로 남기도 했다.

문명사에서 가장 오래 전에 있었다는, 가장 유명한 장정으로는 ‘엑소더스(출애굽)’와 ‘오디세이’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노예로 살던 이집트를 탈출해 신이 점지한 “약속의 땅”을 찾아 40년을 방황한 히브리인들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트로이를 멸망시킨 오디세우스 일행이 자신이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겪어야 했던 수많은 모험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두 일말의 역사성을 담고 있을지 몰라도, 신화의 영역에 속해 있다. 한편 하투셉수트 여왕의 명으로 아프리카 남단을 탐험했다는 한노의 장정이나, 바이칼 호 주변에서 살다가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한반도까지 이르렀다는 한민족의 원류의 장정 등은 구체적인 과정을 담은 자료가 거의 없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면서, 자료가 비교적 자세히 남은 것으로 가장 오래된 역사적 장정으로는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의 틈에 벌어졌던 “아나바시스(Anabasis)”가 있다.




혼란과 쇠퇴의 에게 해



“아나바시스”란 고대 그리스어로 “높은 곳으로 가기”란 뜻인데, 좁은 의미로는 이 장정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바빌론 근처의 쿠낙사(Cunaxa)에서 카프카스 산맥 아래의 구릉지대를 통과해 흑해에 닿을 때까지의 여정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에 이어졌던 바닷길과 해변길을 주로 사용한 “카타바시스(katabasis, 바다로 가기)”와 처음에 그리스인들이 소아시아의 사르디스(Sardis)에서 출발해 쿠낙사에 이르기까지의 여정까지를 모두 합쳐 아나바시스라고 부르는 게 보통이다. 또한 이 장정에 참여한 그리스 병사들이 대략 1만 명에 달했기 때문에, “1만 명의 퇴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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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세기경의 술잔. 페르시아 병사(왼쪽)을 쓰러뜨리는 그리스 병사(오른쪽)가 그려져 있다.



1만 명의 그리스 병사들은 어찌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까지 갔으며, 그곳에서 다시 되돌아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산길과 바닷길로 퇴각해야 했을까? 기원전 5세기 말은 에게 해를 둘러싼 동서양의 역사적 전환기였다. 기원전 6세기 중엽에 성립되어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며 승승장구했던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는 기원전 5세기 초중반 “페르시아 전쟁”에서 힘을 합친 헬라스(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패배함으로써 쇠퇴기에 들어갔다.

한편 그리스도 평화와 번영을 오래 누리지는 못했으니,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델로스 동맹 국가들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국가들 사이의 알력이 심해지다가 결국 5세기 후반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비화된다. 이 전쟁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저력을 고갈시키고 체제를 부식시켰으니, 패자인 아테네도 승자인 스파르타도 침체와 혼란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렇게 에게 해의 양쪽이 모두 쇠퇴하는 가운데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의 내부 갈등에 관여하고, 반대로 페르시아가 그리스 국가들끼리의 다툼에 개입하는 등 바야흐로 종족과 문화마저 초월한 ‘춘추전국시대’가 전개되는 중이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분투했던 용병들



이런 ‘에게 해 전국시대’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바로 용병이었다. 그리스 도시국가는 본래 민병대 체제였다. 시민들이 “우리 도시는 우리가 지킨다”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치열함은 시민들만으로는 병력이 모자라, 제3국에 돈을 뿌려 용병을 모집하는 관행을 낳았다. 게다가 오랜 전쟁으로 사회는 피폐해지고 다수의 시민이 빈민으로 전락하면서, 먹고 살기 위해 아무 연고도 없는 전쟁에서 싸우려는 용병 지원자들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도시국가의 민주주의는 서서히 몰락하고, 일하지도 싸우지도 않는 부유층과 살기 위해서는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하층민으로 양분화된 세상이 되어갔다.

용병의 모집은 도시국가들과 그 북쪽의 여러 종족들, 그리고 페르시아 등에서 두루 이루어졌으나 기원전 401년의 페르시아 왕자, 키루스(Cyrus)의 용병대만큼 거창한 규모는 거의 없었다. 키루스는 다리우스 2세의 아들로, 십대 소년 시절 이미 부왕의 명을 받들어 소아시아 지방의 사트라프(태수)가 되고, 그곳에서 업적을 쌓고 인망을 얻으며 페르시아의 옥좌에 대한 야망을 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기원전 404년에 부왕의 뒤를 이어 옥좌에 오르자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모함의 대상이 되었고, 두 아들 중 그를 더 편애했던 모후, 파리사티스의 노력으로 간신히 처형을 면하자 그 누명을 사실로 만들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10만 명의 페르시아 군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으나, 페르시아 전쟁 이래 유명해진 그리스 중장보병들의 용맹과 돌파력도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친분이 있던 스파르타 계열 용병대장들을 중심으로 용병을 모집했던 것이다.

기원전 401년 초 에페소스를 비롯한 그리스 각지에서 모여들기 시작, 3월에 소아시아의 사르디스에서 1차로 출정하고, 이후 후속 부대들이 속속 도착하여 이루어진 그리스 용병대는 1만 4천에 달했다. 병과로 따지면 중장보병이 1만 1700명, 경장보병이 2300명이었으며 출신지로 따지면 스파르타를 비롯한 펠로폰네소스 출신이 7300명으로 절반 이상이고, 아테네 출신이 500, 보이오티아가 2000, 테살리아가 1500, 트라키아가 800, 시라쿠사가 300, 크레타가 200 등이었다.

그 중에는 키루스나 소속 용병대장과의 개인적 친분이나 존경심에서 참전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생계가 어려워서 헬라스를 떠나 이번 원정에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었다. …… 더러는 다른 사람을 데려왔고, 더러는 돈을 내고 참여할 기회를 잡았으며, 더러는 집을 나온 가출 소년들, 또 더러는 어떻게든 가족을 부양하려는 가장이었으니, 모두가 이제껏 키루스에게 봉사했던 용병들은 특히 많은 급료를 받았다는 소문에 이끌려 왔다.”([아나바시스] 제4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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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 원정에 종군해 [아나바시스]를 쓴 그리스의 군인이자 역사가, 크세노폰.



이 원정의 상세한 종군기, [아나바시스]를 써서 이 일이 역사 속에 묻히지 않게 한 장본인인 아테네 출신의 크세노폰(Xenophon, BC 430?~BC 355?)도 그중에 끼어 있었다. 그의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은데, 원정 당시에 서른 전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그는 이 원정에 참여할지를 두고 스승의 조언을 구했고, 소크라테스는 마땅치 않아 하며 델포이의 신탁에 물어볼 것을 권했다. 그가 “어떻게 하면 원정을 잘 마치고 무사히 귀향할 수 있을까요”하고 신탁에 물었다고 보고하자 소크라테스는 “원정에 참여할지 말지를 물었어야지!”하며 탄식했으나 만류하지는 않았다. 이미 크세노폰의 마음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귀족 출신으로 가정 형편이 별로 어렵지 않았던 크세노폰이 왜 용병이 되기를 자처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여러 나라를 다니고 두루 경험을 쌓아, 그의 사형(師兄)인 알키비아데스(Alkibiades, BC 450?~BC 404)처럼 풍운아가 되어보려는 야심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그를 포함한 1만 명 이상의 그리스 병사들은 키루스의 깃발 아래 제국의 중심부로 가는 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원정의 진짜 목적을 모르고 있었다. 보안 문제에다 군심의 동요 가능성을 고려한 키루스는 처음 사열하면서 “눈엣가시였던 피시다이족을 정벌하려 한다”고 밝혔던 것이다.




제국의 심장을 향해 행군하다



원정대는 그리스 용병들이 앞장서고, 그 뒤를 조금 떨어져서 키루스의 페르시아 군이 따르는 식으로 진군했다. 그리스 군의 행군 편제는 중장보병이 방진을 이루어 선두에서 행군하고, 그 다음을 가벼운 방패를 든 경장보병이 따르며, 마지막에 기병이 따르는 식이었는데 중장보병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런 행군 방식이나 전투 방식은 나중에 상황에 따라 변하게 된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원정대는 하루에 40킬로미터 정도를 행군했으며, 그 거리는 쉬면서 물과 식량을 보충할 만한 마을이나 강변의 위치에 따라 늘거나 줄었다. 어떤 때는 쉬지 못하고 꼬박 10여 일을 행군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도착한 휴식처에서 오랫동안 쉬어야 했다. 병사들은 자기가 먹을 식량을 휴대하지 않고 부대를 뒤따르는 상인들이나 휴식처의 상인들에게서 사먹었는데, 나중에 상황이 절박해졌을 때는 다른 방식을 취했을 것 같다. 행군 대열에는 병사들 외에도 많은 비전투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거운 장비를 운반하고 손질하는 사람들, 가축을 돌보는 사람들, 무기를 고치고 만드는 대장장이들, 전투를 벌였을 때 승운(勝運)이 따를지 등을 그때그때 점치기 위한 예언자들, 상인들, 그리고 병사들의 수발을 들 뿐 아니라 다른 욕구까지 채워줄 ‘종군위안부들’ 등등이 있었다.

이 장정의 첫 번째 위기는 출정 후 두 달이 좀 넘었을 때 일어났다. 키루스가 그때까지 급료를 전혀 지급하지 않았다며 그리스 병사들이 소요를 일으킨 것이었다. 아마도 생각보다 진격 속도가 늦어지면서(프리기아의 켈라이나이에서는 한 달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았는데, 후속 합류 부대를 기다리는 등의 이유가 있었다) 식비 등의 경비 지출이 예상을 초과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난처한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해준 것은, 일산(日傘)을 드리운 화려한 마차를 타고 나타나 전차에 올라앉아 키루스에게 미소를 보내는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킬리키아 왕국의 왕비였던 에피악사(Epiaxa)로, 키루스와는 내연의 관계라는 소문이 있는 여인이었다. 아무튼 그녀가 아낌없이 내놓은 돈으로 밀린 급료 말고도 한 달치 급료를 선불해준 키루스는 그녀에게 자신의 군대를 사열시켰다. 이때 작은 해프닝이 있었는데, 그리스 보병대가 절도 있게 전진하다가 “돌격, 앞으로”라는 구호에 고함을 지르며 에피악사의 마차 방향으로 돌진하자, 혼비백산한 그녀가 마차를 몰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난 일이었다. 그리스 병사들은 껄껄대며 자신들의 급료를 책임져준 여왕을 조롱했고, 키루스도 그리스 용병의 ‘용맹한 모습에 흐뭇해했다’는데, 그리스인도 페르시아인도 마음속으로는 서로를 ‘야만인’이라고 얕잡아보고 있었기에 그런 해프닝이 벌어진 게 아니었을까?

두 번째 위기가 일어난 때는 그로부터 다시 두 달이 지난 기원전 401년 7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기 직전이었다. 이때 비로소 키루스는 클레아르코스, 케이리소포스, 메논 등 용병대장들에게 원정의 진짜 목적을 알렸다. 처음 공격한다던 피시다이족의 본거지와는 다른 영 엉뚱한 방향으로, 계속 페르시아 중심부로 들어가기만 하는 상황에서 그리스인들의 의심을 더 이상 무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소동이 벌어졌는데, 키루스는 “약속했던 것보다 더 많은 급료를 주겠다. 너희들 중에 원한다면, 내가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의 신하로서 높은 자리에 앉을 수도 있다”며 병사들을 달래려 애썼다.

일개 부족을 무찌르는 싸움이 제국 자체를 상대로 하는 싸움이 되어버린 것에 불안해하는 사람들과, 오히려 이것을 다시 없는 기회라고 여기는 사람들 사이에 입씨름이 한창 벌어지던 중, 테살리아 출신 부대를 이끌던 메논이 “우리가 가장 먼저 이 강을 건너면 공로가 으뜸이 될 것이다”고 부하들을 선동해 유프라테스를 건너버렸다. 그러자 다른 부대들도 질세라 강물로 뛰어들어, 키루스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후 키루스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천하가 다 알게 되자, 우호적이었던 마을들도 등을 돌리거나 왕의 군대에 의해 차단됨에 따라 원정군은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두 차례 내분이 일어날 뻔도 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행군은 계속되어, 9월에 접어들 무렵, 키루스는 페르시아의 수도 바빌론에서 불과 60여 킬로미터 떨어진 쿠낙사에서 마침내 왕의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병력은 120만에 달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 과장이 섞여 있었을 듯하고, 6천 명의 불멸대가 왕을 보호하는 가운데 2백 대의 전차가 적진에 돌진할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에 맞서는 동생의 병력은 전차 20대에 병력 10만. 그나마 이제는 1만 3천 정도로 다소 줄어들어 있던 그리스 용병들의 돌파력이 키루스의 희망이었다.




쿠낙사 전투의 결과, 그리고 낯선 땅 한복판의 용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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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낙사 전투를 상상해서 그린 19세기의 삽화.



전투는, 크세노폰의 설명대로라면, 그리스 용병들의 활약 덕분에 키루스 군의 승리로 마감되었다. 아니, 마감될 뻔했다. 문제는 선두의 그리스 용병들이 너무 빠른 속도로 눈앞의 적군을 밀어붙이면서, 뒤따라오던 키루스의 본진과 거리가 크게 벌어져버린 데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로써 아르타크세르크세스 군의 대열이 흐트러지면서, 군 중앙에 있던 왕과 친위 부대가 그대로 노출되어 버렸다. 뒤따라오던 키루스는 그것을 보았다. 목표가 바로 눈앞에 있다는 생각에, 그는 그만 냉정한 판단력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자신의 친위대와 함께, 자욱한 먼지구름 속에서 빛나는 왕의 깃발을 향해 일점돌파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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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낙사 전투에서 승리한 페르시아 군이 전사한 키루스의 머리와 손을 창대에 매단 채 행진하고 있다.



분명히 허를 찌르는 기습이었지만, 불멸대는 불멸대였다. 왕의 전차 가까이까지 육박했던 키루스와 그의 병사들은 삽시간에 몇 배나 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였다. 키루스는 분전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저만치 앞서 달려가버린 그리스 용병들을 부를 수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기원전 401년 9월, 페르시아 제국을 세운 정복왕 키루스와 같은 이름을 타고났고, 크세노폰에 따르면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통틀어 당대의 가장 비범한 지도자였으며, 그가 쿠데타에 성공해 옥좌에 앉았다면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나타나지 못했을지도, 아니 거꾸로 페르시아가 주도하여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을지도 모를, 스무 살을 막 넘긴 젊은 왕자의 숨이 끊겼다.

그리스 용병대는 거의 하루가 지나도록 키루스의 전사를 몰랐다. 자신들이 거둔 승리에 취하고, 즐비한 전리품을 챙기느라 본진의 소식이 꽤 늦는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던 그들에게 마침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키루스의 머리가 잘려, 말뚝에 꽂힌 채 높이 매달려 있다!” 이제 그들은 지도자가 없는 상태로, 고국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수백만의 적들이 우글거리는 낯선 땅의 한복판에 있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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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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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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