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아나바시스(2) - 그리스 용병들, 제국의 한복판에서 돌아오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34회 작성일 16-02-06 16:06

본문















14547423768384.png






14547423769362





아나바시스의 행로. 사르디스에서 출정하여 전투가 벌어진 쿠낙사, 돌아오는 길의 비잔티움까지 본대가 유지되었다. 이후 크세노폰의 부대는 따로 페르가모스까지 이동했다가 거기서 크세노폰이 대열을 이탈했다.





‘아나바시스’ 개요


· 장정의 주인공들 : 아테네, 스파르타, 보이오티아 등 그리스 도시국가들 출신의 용병대

· 장정 시기 : BC 401~BC 399

· 장정 경로 : 소아시아 서부-시리아-바빌로니아-아르메니아-흑해 연안-비잔티움

· 장정 거리 : 약 6300Km

· 관련 링크 : 지식백과 결과보기




스스로를 믿고 싸우며 나가기를 선택하다



불안과 초조 속에서 밤을 보낸 그리스 용병들이 처음으로 취한 행동은 “일단 먹고 보자”였다.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수송대와도 떨어지게 되어서, 그들은 노획한 화살과 나무 방패를 땔감으로 일으킨 모닥불에 군용 말과 소를 잡아 구웠다. 크세노폰은 달리 말이 없으나, 어쩌면 그런 행동은 ‘이제는 항복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음을 의미했을지도 모른다.





14547423782965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가 아테네에서 추방되자 자신이 쳐부순 페르시아 왕을 찾아가 의탁하는 모습. 그리스 용병대는 이런 선택을 거부하고, 고향으로 가는 길을 뚫고 나가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그리스계인 팔리노스를 앞세워 찾아온 왕의 사절은 지나치게 고압적이었다. “순순히 갖고 있는 무기를 모아 바쳐라. 그리고 왕께 찾아가 엎드려 잘못을 빌어라! 그러면 아마 왕께서 너그러이 용서해주실 것이다.” 그의 말에 그리스인들은 빈정이 상했다. “키루스가 죽었지, 우리가 싸움에서 진 것은 아니잖은가?”, “우리는 용병일 뿐인데 왜 잘못을 빌어야 하는가?”, “무기만큼은 절대 내줄 수 없다. 우리 몸은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 등등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대세가 되었다. 장교들도 클레아르코스, 클레아노르, 그리고 크세노폰 등이 이런 식의 항복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냐? 전쟁이냐 항복이냐?”고 팔리노스가 묻자, 클레아르코스는 “우리가 여기 머물러 있는 한 휴전이고, 나아간다면 전쟁이다”고 모호한 대답을 했다. 하지만 이미 결론은 나 있었다. 그들은 항복하지 않을 참이었다. 자신들의 발로 걸어서, 자신들의 손으로 싸우며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페르시아 왕에게 항복하는 일이 특별히 수치스러운 일로, “민족 반역”같은 것으로 여겨질 일은 아니었다.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인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BC 528? ~ BC 462?)도 고향에서 추방되자 페르시아 왕에게 의탁해 그의 신하로 여생을 보내지 않았는가? 더욱이 그들은 용병이었다. 키루스의 명령을 따르거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신하가 되거나 근본적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무기를 내놓아라”는 말이 그들의 결심을 다져주었다. 세상에 믿을 것이라고는 손에 익은 칼과 창뿐, 신도 인간도 의지할 수 없는 혼란기에 무기를 남에게 넘긴다는 것은 목숨을 남의 손에 맡기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왕의 손가락 하나에 목이 떨어져나갈 수 있는 신세로 전락하느니, 무모해 보일지라도 고향으로 가는 길을 뚫고 나가리라! “아나바시스!” 그것이 그들의 선택이었다.




적과의 동행, 그리고 배신의 연회



퇴각을 선택한 이상, 최대한 지혜를 짜내야 했다. 이제까지 짚어온 경로를 되짚어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왕의 확실한 지배 하에 있는 도시들과, 배 없이는 건널 수 없는 강들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메소포타미아를 북상하여 고원지대로 진입, 산을 넘고 아르메니아를 통과해서 소아시아로 넘어간다는 퇴각로를 설정했다. 북쪽 땅은 페르시아의 영토이기는 해도 그 지배력이 확실하게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통과하기 어렵다는 뜻도 되었다. 제국의 힘으로도 완전히 복속시킬 수 없었던 땅. 그 땅을 길잡이도 없이 지나갈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놓는 그들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 듯했다. 키루스의 오른팔이었다가 쿠낙사 전투에서 도망친 아리아이오스가 상당한 병력을 거느리고 찾아와 그들과 합류했으며, 얼마 후에는 왕이 다시 사신을 보내 항복 요구를 철회하고 대신 휴전을 제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페르시아 서부를 다스리는 태수, 티사페르네스가 찾아와 그들을 좋은 말로 어루만졌다.

왕은 분명 승리했지만 전투는 그리스 용병들의 활약이 지배적이었다. 여기서 두 군대가 싸운다면 피차 큰 피해를 입게 될 일, 그리스인들이 퇴각하며 왕의 백성들을 해치지 않는 이상 왕도 그들을 해치지 않기로 하면 어떤가? 용병들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가장 절박한 문제인 식량에 대해서는 티사페르네스가 “마을마다 식량을 제공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고, 키루스가 죽은 뒤 총사령관을 맡게 된 클레아르코스는 “식량을 제공받는 한 마을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화답했다.

이렇게 해서 “적과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티사페르네스와 아리아이오스는 그리스군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그 뒤를 따랐다. 혹시라도 그리스군이 약속을 깨지 않을지 감시한다는 명목은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나 갈수록 불안이 커져갔다. 우리가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적당한 시점에서 왕의 군대와 합세해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늘어갔다. 클레아르코스는 이것이 지나친 의심이라 여겼지만, 용병들은 발걸음을 빨리하여 페르시아 군을 멀찌감치 떨어트려 놓았다. 그러자 당장 식량 문제가 생겼다. 티사페르네스의 지시에 따른 마을의 식량 제공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행을 시작한지 19일 만에, 클레아르코스는 티사페르네스에게 사람을 보내 담판을 지었다. “우리는 어차피 용병이다. 우리가 얼마나 전쟁터에서 쓸모 있는 자들인지 잘 알 것이다. 키루스에게 봉사했듯 당신에게 봉사하겠다”고 제의하고, 대신 여러 나라에서 온 동료들이 각자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땅까지 갈 때까지만 기다려주고, 그동안 공격하거나 식량을 끊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티사페르네스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최종 협상 체결과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잔치에 클레아르코스 이하 대장들을 초대했다. 그러나 그 잔치는 다름 아닌 “홍문의 연회”였다. 클레아르코스, 프로크세노스, 아기아스, 소크라테스(철학자 소크라테스와는 동명이인), 멤논 등 다섯 대장들은 사로잡혔고, 얼마 뒤 바빌론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목이 잘리고 말았다.




지옥의 행군, 마침내 “바다다! 바다다!”



다섯 대장이 붙잡히는 동안 밖에서 대기하던 수행 병사들은 무참하게 도륙당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인 니카르코스가 자신의 내장을 손으로 붙잡은 채 필사적으로 본진으로 도망쳐 온 덕분에 전체 군대는 기습을 면했다. 티사페르네스만이 아니라 키루스의 부하였던 아리아이오스도 자신들을 배반했음에 충격을 받은 그리스인들은 “두 번 다시 야만인 놈들을 믿지 말자!”는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처음 결심한 대로, 오직 자신들의 창과 칼만 믿고 힘든 길을 뚫고 나가기로 했다. 붙들린 다섯 대장 대신 새 대장들이 뽑혀 각각의 부대를 이끌었는데, 그 중에는 크세노폰도 있었다.

그 뒤 십여 일 동안은 끈질기게 따라붙는 티사페르네스의 부하들을 때로는 뿌리치고 때로는 돌아서서 맞서 싸우며 힘겨운 북진을 계속했다. 그렇게 마침내 페르시아 군도 따라오기 꺼려하는 산악 지대로 들어서자, 때는 이미 겨울이었다. 병사들 중에는 난생 처음 눈을 보는 사람도 있었고, 몇 날 며칠이고 험한 산길을 기어오르고, 바위 틈에서 새우잠을 자다가, 호전적인 산악 부족이 습격해오면 후다닥 일어나 칼을 휘둘러야 하는 식의 싸움을 해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14547423794308





오늘날의 쿠르드족 모자. 수천 년 전 그들의 조상은 그리스 용병들을 침략자로 보고 맞서 싸웠다. <출처: (cc) John Hill at http://en.wikipedia.org>



식량도 문제였다. 더 이상 환대를 기대할 수 없고, 뒤따르던 상인들의 식량도 바닥난 이상 방법은 약탈밖에 없었다. 생존을 위해 달려드는 그리스 병사들은 산악 부족들의 눈에는 침략자일 뿐이었다. 카르두코이족(쿠르드족의 조상으로 생각된다), 스키테노이족(스키타이족으로 추정된다) 등의 산악 부족들은 온 힘을 다해 그리스인들의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칼뤼베스족 마을에서는 여자와 아이까지 나서서 언덕을 기어오르는 그리스 병사들에게 돌을 굴리다가, 돌이 바닥나자 마을 사람 모두가 벼랑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는 처참한 일이 벌어졌다. 보다 못한 아이네이아스라는 병사가 그들을 말리기 위해 달려가 한 부족민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 부족민은 아이네이아스를 끌어안고 함께 벼랑에 떨어졌다. 잠시 후 그의 동료들은 바위 위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는 부족민과 아이네이아스를 내려다보며 비통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부족의 집단 자살이 반드시 이해 못할 행동은 아니었다. 어차피 용병인 그리스인들, 생존의 극한까지 몰려 있던 군인들은 서슴없이 잔인해졌다. 한 부족의 족장이 나무로 만든 탑에 들어가 항복을 거부하자, 용병들은 탑째로 불살라 버리기도 했다. 또한 가혹한 환경에서 자꾸만 줄어가는 비전투원들을 보충해 당장은 이런저런 시중을 들도록 하고, 나중에는 노예로 팔아먹어 무산된 급료를 대신하기 위해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붙잡아 끌고 가기도 했다. 나침반도 뭣도 없는 상황에서 제 길을 찾아가는 것도 큰일이었는데, 부족장이나 그 가족을 인질로 해서 길 안내를 시키거나, 적대적 입장에 있는 다른 부족을 무찔러주는 대가로 정보를 얻는 식으로 해결했다. 산악 지형에는 어울리지 않는 전통적 행군 방식도 개편하여, 보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행군과 전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들이 좀처럼 물리칠 수 없는 적은 바로 자연이었다. 어떤 고개에서는 눈이 자꾸자꾸 내려 2미터 가까이 쌓였다. 눈 속을 거의 헤엄치듯이 전진하던 병사들은 급기야 눈 위로 몸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못 가! 날 죽여줘!” 크세노폰을 비롯한 대장들은 그들을 달래다 못해 뺨을 치고 주먹으로 때리며 일으켜세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상에 시달렸고, 설맹증(雪盳症: 고산지대 등에서 눈에 반사된 자외선으로 인해 각막이 손상되는 질병)으로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도 많았다. 그 와중에 그리스군이 접전에 강하다는 걸 깨달은 산악 부족들은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와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그야말로 지옥의 길을 걷는 병사들, 그들에게 이끌려 울며불며 낯선 길을 가는 포로들, 그리고 지쳐빠질 때까지 짐을 싣고 가다가, 쓰러지면 그 자리에서 군량이 되어버리는 가축들의 행군, 또 행군.

그렇게 산악 지대와 아르메니아를 행군한 지 두 달여가 되는 기원전 400년 2월, 일행은 테케스라는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선두에서 갑자기 고함 소리가 터져나왔다. 크세노폰 등은 ‘무슨 일인가? 적의 습격?’ 이러면서 대열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러나 고함 소리는 마치 물결을 타듯 앞에서 뒤로 밀려왔으며, 그 뜻이 분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타랏타! 타랏타!(바다다! 바다다!)” 산꼭대기에 오른 병사들의 눈에 멀리 짙푸른 바다가 들어왔던 것이다. 그것은 흑해였다. 병사들의 고향 바다와는 한참 동떨어진 바다였으나 일단 바다에 닿은 이상 고향은 멀지 않을 터. “타랏타! 타랏타! 타랏타! 타랏타!” 함성은 그칠 줄 몰랐다.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웃고 울었다. 피와 땀과 눈물과 서리로 얼룩졌던 고난의 행군의 종착점이었다.




분열, 그리고 비잔티움에서의 이탈







14547423807817




멀리 보이는 흑해를 가리키며 “타랏타!”를 외치는 그리스 병사들.



거리로만 보자면, 아직도 그들의 여정은 반이나 남아 있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시절은 지나갔다. 이후 그들은 배를 타거나 해안가를 걸으며 전보다 훨씬 편하고 안전하게 행군했다. 그러자 극한상황에서는 표면화되지 않던 문제가 슬슬 고개를 들었다. 스파르타 계열과 아테네 계열 병사들의 다툼, 그리고 애초 원정의 목적이었던 돈 문제였다. 산악 지대를 지날 때만 해도 목숨 부지가 최우선이었지만, 여유가 생기고 나니 “헛고생으로 끝날 수는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저마다 고개를 든 것이다. 게다가 “적당한 곳에 우리끼리 새로 식민시를 세우자”는 주장과 “하루바삐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의견도 맞부딪쳤는데, 의견의 차이는 반대 의견을 낸 사람이 어디 출신이냐는 시비로 이어지면서 분열을 증폭시켰다.

테케스 산 정상에서 서로 얼싸안고 축하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한때 뛰어난 리더십으로 군 전체의 지휘를 맡기도 했던 크세노폰은 아테네 출신이라는 딱지 때문에 뒷공론의 대상이 되었으며, “대장들에 대한 인민재판” 자리에서 폭설 속에서 쓰러진 병사들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그들을 때렸다는 이유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또 한 번은 그가 급료를 착복했다고 오해한 전우들에게 돌로 맞아 죽을 뻔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군대는 셋으로 분열되어 각자 행동에 들어갔으나, 아직도 남아 있던 적들 때문에 부득이 다시 합쳤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점점 소아시아의 서쪽으로 나아감에 따라 그리스계 사람들과의 만남도 잦아졌는데, 그들은 동포라고 해서 특별히 더 친절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갈수록 깨닫게 되었다. 그러던 중 스파르타가 지배하던 비잔티움(오늘날의 이스탄불)의 총독 아낙시비오스가 페르시아의 사주를 받고 “비잔티움으로 와라. 그러면 일정한 급료를 챙겨줄 것이며,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든지 계속 내 밑에서 용병 일을 하든지 선택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연락해왔다. 군대는 이를 믿고 400년 10월에 비잔티움에 도착했으나, 아낙시비오스는 급료를 주겠다는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고는 “케르소네소스(오늘날의 갈리폴리)까지 행군해 가라. 그러면 그곳 책임자가 지불해줄 것이다.”고만 했다.

속았다며 분개한 상당수의 병사들(그들은 한때 비잔티움을 무력으로 장악하려고까지 했다)은 다시 아시아로 건너가서 그곳의 그리스 식민시로 가려 했으며, 주로 스파르타 계열의 병사들만 케르소네소스로 향했다. 그리고 이제 원정은 끝났다고 보고, 전우들에게 실망도 많이 한 크세노폰은 부대를 이탈해 개인적으로 아테네에 돌아가려고 했다.




끝나지 않는 장정







14547423818967





흑해 연안의 도시 시노페. 그리스계가 기원전 7세기경 세운 도시로, 기원전 400년에 그리스 용병대가 이곳을 통과하려 하자 긴장감이 고조된 가운데 전투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비잔티움에 머무르며 병과 부상을 치료하던 전우들이 아시아에 노예로 팔려버렸으며, 페르시아와 한통속이 된 스파르타 행정관들이 배를 타지 못하게 막는 바람에 아시아로 건너가려던 병사들의 발이 묶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하며 발이 묶인 전우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는 “당신들의 용맹함을 키루스 대신 사고 싶다”는 트라키아의 왕자, 세우테스의 제의를 받아들여 다시 그리스 북부와 소아시아에서 용병의 길을 이끌었다. 하지만 세우테스도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기는 마찬가지였으며, 약속한 것의 반도 안 되는 급료를 가까스로 받아낸 크세노폰은 그 전부를 동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빈털터리인 채로 아테네로 가는 길에 올랐다.

한편 그의 동료들은 다시 한 번 용병 제의를 받아들여 바다를 건너갔다. 이번에는 소아시아를 공략하려는 스파르타의 장군, 티브론이 새로운 물주였다. 이 시점에서 크세노폰은 [아나바시스]를 끝맺고 있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장정이 끝났을 뿐, 뿔뿔이 흩어진 동료들의 장정은 이곳저곳에서 계속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기원전 401년 3월 사르디스에서부터 기원전 400년 10월에 본대가 비잔티움에 닿을 때까지 1년 8개월이 걸렸고, 이후 부대가 갈라지고 399년 3월에 크세노폰이 페르가모스에서 부대를 떠날 때까지 계산하면 약 2년이 걸렸다. 그 사이 병력은 1만 4천에서 5천으로 줄었고, 전체 행군 거리는 약 6300킬로미터(비잔티움까지), 또는 7000킬로미터(페르가모스까지)였다.

아테네는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크세노폰을 반겨주지 않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악감정이 되살아나고 있던 사회 분위기상, 스파르타인이 다수인 용병대에 끼어 페르시아 왕자를 위해 일했다는 그가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가 몸을 사리지 않고, 친분이 있던 스파르타의 지도자 편을 들자 마침내 아테네인들은 그를 추방해버렸다. 그 뒤에 그가 어디서 어떻게 살다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유랑과 집필, 은둔의 연속이었을 것인데, 아마도 기원전 350년대 말 정도에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보인다). 제국의 발톱에서 도망쳐 나온 그가 민주주의의 손으로 버림받은 것이다.

그러나 제국 쪽에서도 삶은 안전하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난 공을 세운 사람이라도 최고 권력자의 눈 밖에 나면 순식간에 몰락할 수 있는 제국의 법칙에 희생된 사람은, 사실상 키루스 반란 평정의 최고 공로자였던 티사페르네스였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키루스)을 죽음으로 몰았다 하여 벼르던 파리사티스 왕후의 사주에 따라, 기원전 395년에 붙잡혀 죽었다. 이를 틈타, 티브론과 그를 따라간 아나바시스의 병사들은 페르시아 치하의 소아시아를 한껏 공략해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티브론 역시 본국에서의 정치 싸움에 희생되고, 기원전 391년에 가망 없는 싸움에 내몰렸다가 전사하고 만다.




역사에 남겨진 발자국







14547423826453





그리스의 술잔에 그려진 경장보병의 모습. 아나바시스 이후, 그 중요성이 점점 높이 평가되었다.



크세노폰은 쓸쓸히 죽어갔지만, “1만 명의 퇴각” 이야기는 그가 남긴 책을 통해 널리 알려지고, 감탄과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평야가 아닌 지형에서의 전투와 다양한 병과의 적들에 맞서는 전투에 그리스 용병들이 대응한 방식은 전술적으로 아주 요긴한 본보기가 되었다. 한편 죽을 고생을 했다지만 그리스 병사들이 대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까지 갔다가 전멸하지 않고 돌아나오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은 ‘민족적 자부심’과 함께 페르시아를 가볍게 보는 풍조를 가져왔다. 이런 요소들이 하나로 합쳐져,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원정을 기록한 역사가 아리아노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아나바시스]라고 책 제목을 붙였을 정도로 아나바시스가 마케도니아의 정복자에게 미친 영향은 컸다.

그리고 위기에 처하여 오직 자신의 용기와 의지만을 믿으며 낯선 땅과 낯선 종족을 총칼로 헤쳐나가는 바로 그 모티브는 오랫동안 서구인들의 행동 방식의 전형으로 남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물론이고, 예루살렘의 이교도들을 향해 검을 치켜들던 십자군들, 인디오들의 나라를 힘으로 빼앗으려던 스페인 정복자들,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서 인디언을 짐승처럼 쫓아내던 서부 ‘개척자들’ 모두 바로 그런 정신으로, 그렇게 무기를 휘둘렀던 것이다. 좋게 말하면 불굴의 의지와 개척 정신, 나쁘게 말하면 타자를 배려하지 않는 폭력 위주의 접근 방식은 기원전 5세기 말, 제국의 변방을 걷고 또 걸으며 오직 살아서 다시 한 번 바다를 보기를 염원했던, 가난하고 배고픈 용병대의 발걸음에서 시작되었다.





14547423827403

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저자의 책 보러가기
|
인물정보 더보기


발행2014.06.0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