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알렉산드로스 동방 원정 (2) - 멈출 줄 모르는 왕, 전 세계를 정복하려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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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85회 작성일 16-02-0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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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동방 원정 경로. 가우가멜라 전투 이후 바빌론에 입성한 후, 페르세폴리스와 박트리아를 거쳐 인도에 이르렀다가 바빌론에 돌아오기까지를 표시했다.





‘알렉산드로스 동방 원정’ 개요


· 장정의 주인공들 :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드로스 대왕)와 그의 마케도니아, 그리스, 그리고 동방 민족 출신 부하들

· 장정 시기 : BC 334~BC 323

· 장정 경로 : 소아시아-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바빌로니아-이란 북부-소그디아-박트리아- 인도 서부-이란 남부-바빌로니아

· 장정 거리 : 약 2만 7천Km

· 관련 링크 : 지식백과 결과보기




가우가멜라에서 페르세폴리스까지



가우가멜라 전투로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은 결정적으로 승리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메소포타미아 전체가 항복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에 당당히 입성하여 331년의 남은 두어 달을 온갖 사치스러운 연회와 함께 전쟁 성과를 정리하며 보냈다. 그는 절친한 친구 중 하나였던 하르팔루스를 바빌론 총독에 임명하는 등 여러 막료(幕僚)들에게 토지를 분봉했으며, 그리스 폴리스에는 “모든 전제정치가 무너졌다. 그리스는 최종적으로 해방되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스에서 따라온 병사들 중 노약자들, 그리고 이미 전쟁 목적이 완수되었다며 귀환을 원하는 사람들은 묵직한 포상금과 함께 귀환하도록 했다.

12월에는 제국의 수도 중 하나였던 수사(Susa)를 무혈점령했다. 그 사이에 다리우스는 바빌론과 수사는 물론 제국의 오랜 수도 페르세폴리스도 버린 채 이란 북서부의 엑바타나에 피신해 있었는데, 본래 그다지 정통성 있는 왕도 아니었던(왕족이지만 계승 순위가 꽤 멀었는데, 허수아비 왕을 앉히고 국정을 장악하려는 무리에 의해 옹립되었다) 그는 패전의 책임까지 추궁받으며 베수스라고 하는 왕족 출신 장군에게 양위하라는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다리우스가 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제 전쟁은 알렉산드로스 자신은 바빌론이나 수사에 편히 앉은 채로 다리우스의 항복을 받아내거나, 부하 장군을 보내 마무리를 짓는 것으로 충분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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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시의 습격을 받아 알렉산드로스가 고전했던 페르시아 관문. 페르세폴리스로 넘어가는 곳에 위치한 좁은 협곡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가 재기하기 전에 확실히 짓밟아야 한다며 기원전 330년이 밝자마자 다시 동쪽으로 출발했으며, 페르세폴리스로 넘어가는 길의 좁은 협곡인 “페르시아 관문”에서는 뜻밖의 기습을 받아 고전하기도 했다. 1월 30일, 그는 페르세폴리스에 입성했다. 바빌론과 수사에서도 막대한 보물을 얻었지만, 페르세폴리스에서 챙긴 금과 은은 무려 7천 마리의 나귀로 실어 나를 분량이었고, 마케도니아의 예산과 비교했을 때 수백 년 치에 해당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도시에서 5월까지 머물렀다. 그토록 오래 머문 까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는데, 그중 한 가지는 그가 앞서 이집트에서 파라오로 추대되었듯 페르시아의 가장 오랜 수도에서 페르시아 왕으로 추대되기를 바라고 주민들을 설득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페르시아인들의 민족 감정은 강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는 “끝까지 다리우스를 쫓아야 한다”고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아리아노스 등 모든 사가들이 술에 취한 통에 즉흥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적고 있는 페르세폴리스 방화 사건은, 힘으로는 저항하지 않지만 마음으로는 끝까지 저항했던 페르세폴리스 시민에 대한 징벌적 “본보기”였을지도 모른다(오늘날 고고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페르세폴리스는 계획적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신이 되려 했는가?



6월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페르세폴리스를 뒤로한 알렉산드로스는 11일 동안 하루 평균 60킬로미터 이상의 무서운 속도로 이란을 북상하며 다리우스를 추격했다. 대부분 건조 지대인데다 인가도 많지 않은 곳을 강행군하려니 병사들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마실 물이 떨어져서 알렉산드로스까지 갈증에 허덕이는 가운데, 누군가 애써 약간의 물을 구해 투구에 담아 바치자 “여러분과 함께 고생하려 한다”며 땅에다 쏟아버렸다는 이야기는 이때의 일이라고 플루타르코스는 전한다(그러나 아리아노스는 몇 년 뒤 인도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적고 있다).

힘든 여정에 줄줄이 낙오하여 이 행군의 마지막 목표지에 비틀거리며 함께 닿은 인원은 고작 60명뿐이었다는데, 사실이라면 만약 다리우스가 전열을 정비해 기다렸더라면 손쉽게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엑바타나에 닿은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가 이미 그곳을 떠나 박트리아로 피신했는데, 도중에 내분이 일어나 베수스가 다리우스를 해치고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둘러 쫓아가보니, 다리우스는 전차에 몸이 묶인 채 막 숨이 넘어가려는 찰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그의 최후를 위로하고 다리우스가 자신의 가족과 제국을 그에게 부탁했다는 이야기는 어디까지 진실일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로써 전쟁 목표는 완전히 달성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알렉산드로스 진영에서 오직 한 사람만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제 야만인들은 우리 마케도니아 군에 대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물러서면, 우리를 우습게 보고 역습해올 것이다! 떠나고 싶은 자들은 떠나라. 마케도니아를 세계 제1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나는 뜻있는 자들과 계속 가련다.” 쿠르티우스는 왜 다리우스의 시신을 보고서도 귀환할 생각을 하지 않느냐며 불만을 터뜨리는 병사들 앞에서 알렉산드로스가 이렇게 연설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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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의 사자 가죽을 머리에 쓴 알렉산드로스가 각인된 동전. 그는 전 세계를 정복함으로써 헤라클레스와 같은 신이 되기를 바랐던 것일까? <출처: (cc) PHGCOM at en.wikipedia.org>



그 내용을 볼 때 아마 연설을 들은 병사들은 마케도니아 출신자들만이었으며 그리스 폴리스에서 온 병사들에게는 다른 이야기를 했겠지만(베수스를 추적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던 듯한데, 워낙 설득력이 없었으므로 다수의 그리스인들이 알렉산드로스를 떠나 귀로에 올랐다), 결국 이제 전쟁 목표는 페르시아에 대한 범그리스적인 복수가 아니라 “마케도니아의 제1 국가화”로 바뀐 셈이었다. 그러나 쿠르티우스 등은 그것조차 그의 진짜 목표가 아니었다고 본다. 전 세계를 정복하는 사상 최초의 위업을 달성함으로써, 살아서는 신으로 추앙받고, 마케도니아인의 조상이라는 헤라클레스처럼 죽어서는 진짜 신이 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료와 부하들을 속이고 꼬드겨서 한 사람의 과대망상을 채우기 위한 길에서 목숨을 버리게끔 끌고 다녔다는 것이다.

사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야망이 알렉산드로스의 뇌리에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일찍부터 자신이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고, 이집트에서는 아문의 아들로 인정받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종교를 대하는 방식은 상당히 마키아벨리적이었다. 가령 그는 그리스에서 원정을 출발하기에 앞서 델포이에 신탁을 받으러 갔는데, 마침 무녀가 쉬는 날이었다. 그가 무녀의 집을 찾아가서 안 된다는 걸 억지로 끌고나오려 하자, 무녀는 “정말 못 당할 사람이군요!”라고 쏘아붙였다. 그러자 “델포이의 무녀가 알렉산드로스는 그 누구도 당하지 못하리라고 예언했다”고 선전했다고 한다. 또 이집트에 갔을 때는 그리스어에 서툰 신관이 알렉산드로스를 맞아들이며 “O Paidion(오, 나의 아들이여)”라고 할 것을 그만 “O paidios(오, 신의 아들이여)”라고 말실수를 했는데, 그것을 가지고 “알렉산드로스가 아문 신의 아들이라는 계시가 있었다”고 갖다붙였다는 것이다. 고르디우스 매듭의 일화만 보더라도, 알렉산드로스는 몽상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광신자라기보다는 종교의 힘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던 냉철한 계략가로 보인다.




멈출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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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오른쪽)을 가르치는 아리스토텔레스(왼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왕이 가져야 할 고도의 정치 기술과 비법을 알렉산드로스에게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그러면 왜 그는 줄기차게 장정을 계속했던 것일까? 우리는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정치학] 같은 일반인을 위한 정치 이론이 아니라, 제왕에게만 전수 가능한 고도의 정치 기술과 비법을 알렉산드로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그 내용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몰라도, 알렉산드로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자신의 제국이 가져야 할 모습을 진지하게 고민했을 가능성이 높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이 지방의 반란을 염려한 나머지 스스로 허약한 체제를 만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힘과 용기로 그 체제를 정복한 다음에는, 내외의 공격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으면서 영구한 번영을 구가할 수 있는 견고한 체제를 대신 세우려고 생각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렉산드로스가 인도 원정에 들어간 직후까지의 조치를 통해 대략 알 수 있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장군들을 정복지의 총독으로 분봉(分封: 땅을 나누어 제후를 봉함)했으며, 각지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신도시를 세우고, 스스로 페르시아식 옷을 입고 페르시아와 인도의 여인과 결혼하는 등 현지 문화의 존중을 넘어 문화의 융합을 추진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각 지역을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총독들이 지배하는 봉건제국이다. 그러나 총독들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그들이 정치적으로 중앙의 왕과 밀접하다는 사실 말고도, 현지인들이 제국에서 갈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음으로써 줄어들 것이다. 고유 문화를 지키고 싶은 사람은 지키고, 새로운 문물에 끌리는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상인들은 전 세계와 무역할 길이 열리니 기뻐하고, 농민들도 부유해진 상인들 덕에 나라에 바칠 세금 부담이 줄어든 데다 특산물을 내다 팔 길이 열리니 역시 기뻐한다. 이쯤 되면 지방 총독이 딴 마음을 품고 제국에 반역하려 해도, 주민들이 불응하기에 반역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웃 나라와 계속 분쟁을 겪는 상태라면 알렉산드리아의 기틀이 잡히기 어려우리라. 그래서 알렉산드로스는 가능한 한 모든 세계를 군사적으로 정복해놓고, 그렇게 깨끗이 지운 칠판 위에 자신의 그림을 그리려 했던 것이다.

웅대한 이상 때문이든 과대망상 때문이든, 알렉산드로스가 당시까지 알려진 전 세계를 정복하려 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를 기준으로 동쪽의 세계를 거의 정복했으나, 나머지 서쪽 절반까지 정복할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쿠르티우스는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에서 돌아오는 대로 지중해로 출정하기 위해 7백 척의 배를 만들어두도록 미리 지시했으며, 그 서방 원정대는 시리아를 출발해 지중해를 횡단,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다음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 불렸던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스페인에 상륙, 지금의 남프랑스를 지나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종단한 뒤 그리스로 돌아오려 했다고 한다. 백여 년 뒤에야 한니발이 시도한 장정, 그 이상을 해내려 했던 것이다.

한편 아리아노스와 플루타르코스는 좀 다른 계획안을 전한다. 그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아라비아를 지나 리비아(아프리카)를 정복하고는 아프리카를 한 바퀴 돌아서 지브롤터를 통해 지중해로 들어오려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아프리카 대륙이 그 북쪽 삼분의 일 정도까지만 알려져 있었기에 이런 구상을 했겠지만, 실제로 시도했다면 알렉산드로스는 바스코 다 가마보다 약 천팔백 년이나 앞서서 아프리카 일주를 하려 했던 셈이다(그리고 아마 그의 최후의 땅도 메소포타미아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정글 어디쯤이 되었으리라).




배신, 저항, 그리고 좌절



그의 나이가 아직 젊었음을 고려하면, 그리고 그토록 빨리 세계의 절반을 휩쓸었음을 생각하면 아주 가능성 없는 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곧 깨닫게 된다. 거대한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재료가 그에게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음을. 알렉산드로스가 다리우스를 따라잡은 시점에서 전쟁은 끝났다고 여긴 병사들, 그렇지는 않더라도 고되고 오랜 원정에 기진맥진해진 병사들은 젊은 왕의 독려에도 아랑곳없이 전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문제가 심각하다고 여긴 알렉산드로스는 3만 명의 원주민 소년을 뽑아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마케도니아식 군사훈련을 시키게 했다.

그러나 지도자에 대한 불만과 불신은 병사들 사이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을 행군하고 있던 기원전 330년 10월에 림누스라는 마케도니아의 장군이 알렉산드로스 암살 음모를 꾸미다 적발된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인지하고도 빨리 보고하지 않았다는 혐의가 파르메니오의 아들 필로타스에게 씌워졌으며, 왕은 필로타스를 처형했다. 그리고 엑바타나에 머무르게 했던 파르메니오에게 사람을 보내, 암살해버렸다.

원정 초기부터 페르시아의 사주를 받은 것이 아닌지 의심될 만큼 기묘한 행보를 거듭해온 파르메니오였으므로, 이는 언제고 벌어질 일이었다. 그러나 2년 뒤의 마라칸다(지금의 사마르칸드)에서는 알렉산드로스 스스로 테베의 파괴와 맞먹을 만큼 평생의 후회스러운 일이었다고 고백한 사건이 터진다. 바로 “검은 대장”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고, 알렉산드로스의 유모의 동생으로 어려서부터 알렉산드로스와 친했으며, 그라니코스 전투 때는 그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던 클레이토스를 살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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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토스를 살해하는 알렉산드로스. 수많은 전장을 그와 함께 누빈 전우이자 어린 시절의 친구인 클레이토스를 죽인 알렉산드로스는 죄책감과 절망에 사로잡혀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후회했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을 사가들은 조금씩 다르게 전하는데,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취중에 자신을 높이고 부왕 필리포스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것을 클레이토스가 참지 못하고 비난하여 왕의 화를 돋웠다고 하며, 쿠르티우스는 클레이토스가 ‘거친 야만인의 땅’인 소그디아 총독으로 임명된 것과 왕이 페르시아인들에게 잘 대해주고 있는 것에 불만을 터뜨렸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클레이토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던 것 같다. 파르메니오를 비롯한 필리포스 왕의 신하들은 점점 알렉산드로스로서는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원로 세력이 되고 있었다. 또한 가장 믿을 수 있고 유능한 장군을 정복지의 총독에 임명하고 페르시아인과의 융합을 추구한 것은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정책 중 핵심이었는데, 클레이토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속도 모르고 비난을 퍼부은 셈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분격하여 클레이토스를 찔러 죽인 알렉산드로스는 죄책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자살을 시도하고, 사흘 동안 두문불출하며 괴로워했다. 그때 그를 간신히 달랜 사람 중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자 조카였던 칼리스테네스(Callisthenes)도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마도 스승을 존경하는 뜻에서 그를 원정대에 넣었고, 또 이 대장정의 공식 역사가로 일하게 했다(쿠르티우스는 그가 남긴 기록을 토대로 책을 썼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칼리스테네스도 날이 갈수록 그에게 버거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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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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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4.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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