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알렉산드로스 동방 원정 (3) - 바빌론에서 끝난 길, 역사로 이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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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5회 작성일 16-02-06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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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동방 원정 경로. 가우가멜라 전투 이후 바빌론에 입성한 후, 페르세폴리스와 박트리아를 거쳐 인도에 이르렀다가 바빌론에 돌아오기까지를 표시했다.





‘알렉산드로스 동방 원정’ 개요


· 장정의 주인공들 :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드로스 대왕)와 그의 마케도니아, 그리스, 그리고 동방 민족 출신 부하들

· 장정 시기 : BC 334~BC 323

· 장정 경로 : 소아시아-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바빌로니아-이란 북부-소그디아-박트리아- 인도 서부-이란 남부-바빌로니아

· 장정 거리 : 약 2만 7천Km

· 관련 링크 : 지식백과 결과보기




정복지에 대한 정책의 변화



328년 겨울을 베수스가 마지막으로 숨어지내던 소그디아의 나우타카에서 보낸 알렉산드로스는 봄이 되자 다시 발길을 재촉해 시시미트레스라는 지도자가 다스리는 나라를 공략했다. 이제 베수스마저 붙잡아 잔인하게 처형한 뒤였으나, 왕은 또 다시 다음 나라로 진군하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것은 때로는 무리한 작전을 포함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총애했던 젊은 장군, 필리포스(이 이름은 마케도니아에서는 흔했던 듯하다)가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온종일 뛰고 달리다 끝내 쓰러져 과로사하고, 어릴 적부터의 친구였던 에리기우스도 죽었다. 대부분의 그리스인이 처음 겪는 중앙아시아 산지의 혹독한 날씨도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 요소였다. 호우와 함께 쏟아져 내린 비와 우박 세례에 산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다가, 끝내 2천 명의 병사들이 저체온으로 객사하는 참극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마침내 시시미트레스의 항복을 받은 알렉산드로스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처분을 했다. 그의 주권을 그대로 인정하고, 두 아들을 볼모로 딸려보내라고만 한 것이다. 거기에 “내게 충성하면 더 큰 영토를 주겠다”고도 약속했다. 얼마 뒤에 정복한 사카이에서도 원래의 지도자인 옥시아르테스의 지위를 인정하면서 아들들을 볼모로 삼는 한편, 딸인 록사네와는 결혼했다. 죽고, 배반하고, 의심스러워진 마케도니아 출신 장군들로 정복지의 총독 자리를 채우기에는 마침내 한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래서 항복한 현지 지도자에게서 인질을 얻거나 정략결혼을 하는 전통적인 책략(그리 믿을 만하지는 않았던 책략)으로 이후의 반란 가능성을 억제하고, 충성스러운 것 같으면 다른 정복지의 총독 자리까지 겸하게 하는, 보다 덜 확실한 정책으로 갈아탈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마케도니아 장군 출신 총독들도 별로 믿을 만하지 않음이 드러났다. 권력을 남용하여 현지인의 원성을 사거나 반란 음모에 가담하는 일이 잇달았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소그디아에서 세 사람의 총독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도록 지시하고는 발흐로 내려가 본격적으로 인도를 침공할 준비를 했다. 이때 알렉산드로스의 병력은 12만 명에 달했다는데, 여기에는 어느 정도 과장이 섞인 듯하고 상당수가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병사들로 채워져 있었던 듯하다. 군대에서 이민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다 보니 그들이 자연스럽게 왕에게 올리는 의례, 즉 엎드려 절하는 의례를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를 노예의 행동이라고 업신여기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출신 병사들은 기원전 327년 봄, 알렉산드로스가 군례는 통일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에게도 엎드려 절하도록 이르자 분통을 터뜨렸다. 그래도 클레이토스 같은 사람조차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생생했던 그들은 분을 삼키며 왕 앞에 엎드렸는데, 한 사람만이 고개를 뻣뻣이 들고 배례(拜禮)를 거부했다. 바로 칼리스테네스였다.

얼마 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 장군의 자제들을 모아 만든 측근 부대인 친위청년단의 헤르몰라오스, 소스트라토스 등의 암살 음모가 적발되었다. 그 배후에 칼리스테네스가 있다는 자백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이 알렉산드로스를 비난하며 칼리스테네스를 칭찬한 것으로 충분했다. 한때 총애해 마지않던, 동문이자 스승의 친척을 알렉산드로스는 잔인한 고문 끝에 죽여버렸다.




갠지스를 앞에 두고 회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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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도(현재의 파키스탄) 스와트 골짜기의 우트로르 산.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기원전 327년 겨울에 이곳을 넘었다. <출처: (cc) Isrumac at en.wikipedia.org>



인도 원정은 327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앞서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전리품 보따리를 풀어 병사들의 갑주와 마구(馬具)를 금과 은으로 장식하게 하고는, 남은 전리품은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태워버렸다. 헤르몰라오스 등이 재판을 받으며 “당신의 노새들은 황금을 바리바리 싣고 있는데, 병사들은 빈손이 아니냐”며 비난했던 점을 의식했던 듯하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장군들도 마지못해 왕을 따라 자신들의 전리품을 태웠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제 우리가 갈 땅은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될 금과 은이 넘쳐나는 땅이다! 거기서 얻을 전리품에 비하면 이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확실한 승리를 위해, 오늘은 몸을 가볍게 하자!”고 연설했다고 한다. 칼리스테네스의 죽음으로 흉흉해진 군심(軍心)이 이 에피소드로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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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다스페스 강 전투에서 포루스의 코끼리 부대와 맞붙어 싸우는 마케도니아의 중장보병들.



군대는 326년 봄에 인더스 강에 이를 때까지 여러 왕국을 무너뜨리며 진군했는데, 알렉산드로스는 끝까지 저항하는 도시는 본보기로 쑥밭을 만들고, 일찍 항복하면 지도자의 지위를 인정해 주는 패턴을 이어갔다. 적은 완강했으나 전쟁 경험이 별로 없는 소왕국들이었기에 격파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적보다 더한 강적은 바로 기후와 지형이었다. 가령 ‘헤라클레스(시바 신을 그렇게 이해한 듯싶다)도 정복하지 못했다는’ 높은 고원의 아오르노스에서는 알렉산드로스가 직접 목책용 나무를 베며 있는 힘껏 싸웠지만 끝내 힘으로는 함락시키지 못하고, 수비대가 철수한 덕분에 점령할 수 있었다.

배다리를 가설해서 인더스 강을 건넌 알렉산드로스 군을 기다리던 것은 그레이트솔트 산맥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산을 넘자, 이번에는 히다스페스 강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포루스(푸루)의 군대와 마주쳤다. 싸움은 알렉산드로스의 승리로 돌아갔으나 병사들은 그대로 탈진해버렸다. 그들은 이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연일 장대비를 맞으며(마침 우기였다), 생전 처음 보는 동물과 벌레들을 쫓으며, 과연 어디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적병보다 풍토병을 이기지 못해 잇달아 쓰러지는 병사들을 보며, 과연 왕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기후뿐 아니라 식량도 문제였다. 그들이 횡단하던 펀자브 지방은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였으나 기후변화로 사람이 살기 어려운 땅으로 변했으며, 19세기의 영국군도 고전을 면치 못했던 지역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발을 질질 끌며 구릉지를 넘고, 정글을 지나고, 세 개의 강(젤름 강, 체나브 강, 베아스 강)을 더 건넜다. 마침내 갠지스 강이 멀지 않은 곳까지 이르렀을 때, 갠지스 강 너머에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억센 원주민들이 있으며 그들의 진군을 대비해서 2천 대의 전차와 3천 마리의 코끼리가 강가에 늘어서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병사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당장 회군하셔야 한다고, 그들의 왕에게 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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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루스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알렉산드로스. 전투는 마케도니아 군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나 갠지스 강 너머의 원주민들이 2천 대의 전차와 3천 마리의 코끼리로 무장한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에 결국 회군을 결심한다.



“우리는 지금 노력과 고난의 길의 첫머리가 아니라, 막바지에 서 있다. 우리는 태양이 떠오르는 곳으로, 거대한 바다로 가고 있다. 우리가 겁을 먹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의 끝까지 정복한 다음, 그곳에서 승전가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렇게 병사들을 설득하고, 위협하고, 애원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는 사흘 만에 병사들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도 명분을 까먹을 수는 없어서, 신탁과 점술의 결과 한결같이 회군하라는 메시지가 나왔다고 선전하고는 열 두 개의 거대 제단을 만들어 주위의 원주민들에게 경이의 대상이 되게끔 했다. 기원전 326년 9월이었다.




바빌론에서 끝난 길, 역사로 이어지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가 야망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제까지 온 길을 되짚는 대신 인더스 강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인도양 부근까지 이르러 서쪽으로 이란 남부를 횡단하는 루트를 택했다. 당연히 적군, 기후, 굶주림과의 사투가 이어졌다.

기원전 325년 여름에는 이제까지의 고난을 능가하는 시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량이 완전히 떨어져서 말과 노새까지 잡아먹었으며, 그래서 운송 수단이 사라지자 인도에서 얻은 금은보화도, 병든 몸으로 울부짖는 동료도 모두 내버려둔 채 터덜터덜 맨몸으로 행군을 계속해야 했다. “우리는 절대로 인도에서 ‘퇴각’하는 것이 아니다. ‘회군’할 따름이다”는 게 고생을 사서 하는 알렉산드로스의 명분이었다. 그리고 이제 30대가 된 그는 20대 시절과 마찬가지로 전열의 맨 앞에서 달렸고, 맨 처음으로 적진에 뛰어들곤 했다. 그래서 부상을 당하기도 많이 당했으며, 꼼짝없이 죽을 뻔한 위기에 놓이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제발 좀 이러지 마시라. 왜 세계의 제왕답게 편안히 살지 못하시느냐.”는 측근들의 눈물 어린 간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세상이라는 극장에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연기를 하리라”

이 처절한 배우에게는 개인적인 슬픔도 잇달았다. 인도에서 애마 부케팔로스를 잃었고, 326년 겨울에는 박트리아에서 얻은 아내 록사네가 낳은 아이(알려진 대로는 그의 첫 아들이었다)도 잃었다. 324년 1월에는 그가 가장 믿었던 사람 중 하나였으며 어릴 때부터의 친구인 하르팔로스가 공금 유용 등의 비리가 적발될까 두려워 그리스로 도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반(反) 알렉산드로스 운동을 펴다가 살해당했다.

그리고 324년 가을에는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했던(그가 동성애자라는 소문도 여기서 나왔다) 헤파이스티온(Hephaestion)이 병사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하루 밤낮을 통곡하고 몸부림쳤으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구 자르더니 말과 노새의 꼬리까지 잘라버리게 했다. 그리고 헤파이스티온을 돌본 의사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도 모자라,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까지 부숴버렸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내가 왕이라서 사랑했으나, 그는 나이기에 사랑했다” 신이 되고자 했던 인간의 가장 인간적인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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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의 결혼을 묘사한 로마 시대 폼페이의 벽화. 바빌로니아에 돌아온 그는 다리우스의 딸인 스타티라와 결혼했으며, 이때 동료 마케도니아인 수백 명도 다른 페르시아 여인들과 합동 결혼했다. 스타티라는 알렉산드로스 사후에 록사네에게 살해되었다.





알렉산드로스(왼쪽)과 헤파이스티온(오른쪽).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이자 전우로 아끼던 그가 사망하자 알렉산드로는 고통에 몸부림쳤다고 전해진다.




그의 성격이나 행동도 서서히 변해갔다. 원정 초기에는 솔선수범과 인자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던 그였으나, 이제는 무지막지한 폭력과 살육으로 공포의 지배를 꾀했다. 324년에 페르시아에 도착했을 때 키루스 대왕의 자손이라 하여 스스로가 극진히 대접하게 했던 오르시네스를 ‘키루스의 묘를 도굴했다’는 어이없는 혐의를 씌워 처형하고, 자신이 파르메니오를 없애라고 보냈던 클레안드로스가 돌아와 복명하자 ‘품행이 단정치 못했다’며 그를 따르던 무리 600명과 함께 죽였으며, 또 다시 병사들의 소요가 일자 주동자들을 꽁꽁 묶어 강물에 던져버리는 식이었다.

그리고 유난히 길고 힘든 길을 마치고 나서는, 한동안 천천히 행군하며 질탕하게 먹고 마시며 노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극에 달한 병사들의 스트레스를 풀도록 했다. 이를 위해 술 많이 마시기 대회를 열었는데, 참가자 중 42명이나 과음으로 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스트레스 해소가 더 중요했는지 모른다. 원래는 매우 금욕적이었고 술도 많이 마시지 않았던 그가 이제는 마셨다 하면 몇 시간이고 폭음을 하고, 또 몇 시간을 죽은 듯이 쓰러져 자는 일을 반복했다. 현대 학자들은 그가 말년에 보인 이상 행동들이 알코올 중독 증상에 따른 것이라고도 보고 있다.

아무튼 기원전 323년 5월, 바빌론에 입성해 벌인 연회에서 또 잔뜩 퍼마신 술이 멈출 줄 모르던 그의 발걸음을 마침내 멈추게 했다(독살의 가능성도 다분하다). 알렉산드로스는 여러 날을 고열과 구토, 오한에 시달리던 끝에 33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고난의 연속인 행군 가운데 의심하기도 하고 저주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를 왕으로 섬기고 끝까지 따라왔던 병사들이 차례로 그의 침대를 돌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후계자를 누구로 삼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가 내뱉었다는 “kratisto(가장 탁월한 자)에게!”라는 말은 그의 사후 살아남은 막료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정권 다툼이 벌어지게 했다. 그래도 그의 시신은 언제까지고 썩지 않고 그윽한 향내를 풍겼으며(대량의 꿀로 방부 처리되었으리라는 현대의 추정이 있다), 거의 2년의 시간을 걸쳐 고향으로 운구되던 중에 이집트를 장악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손에 들어가 멤피스에 묻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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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을 묘사한 그림.



추정대로라면 알렉산드로스는 겨우 절반의 성공을 거둔 채, 젊은 나이에 그의 장정을 마쳤다. 그러나 그가 세계에 남긴 족적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스 출신의 군사 지휘자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대국을 지배한다”는 개념은 그의 막료들의 손으로, 단 보다 작은 규모인 안티오코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이라는 형태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와 페르시아의 사산조 페르시아 왕조도 그 체제를 모델로 대국을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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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의 석관에 새겨진 전쟁 부조. <출처: (cc) Patrickneil at en.wikipedia.org>



아시아의 알렉산드리아는 빠르게 없어졌으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오랫동안 남아 새로운 융합 문명의 빛을 발했으며, 그것을 사람들은 헬레니즘(Hellenism)이라고 불렀다. 합리적이고 사변적인 그리스 철학과 초월적이고 감성적인 오리엔트 종교의 결합은 오랫동안 유럽과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휘어잡았고, 인도와 멀리 극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끝내 세우지 못한 ‘세계 문명에 근거한 세계 제국’, 그것과 가장 가까운 형태는 로마 제국과 이슬람 제국에 의해 수 세기 만에 세계사의 실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제우스의 아들로 시작해서 디오니소스의 아들로 끝마친 한 사람의 집념, 그에게 휘둘려 먼 길을 떠났던 수 만 명의 긴 여정이 낳은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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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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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4.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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