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한니발 원정 (1) - 1차 포에니 전쟁과 한니발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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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2회 작성일 16-02-0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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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의 이동 루트.





‘한니발 원정’ 개요


· 장정의 주인공들 : 한니발과 그를 따르는 카르타고인 및 에스파냐, 누미디아, 골 등의 용병들

· 장정 시기 : BC 218~BC 203

· 장정 경로 : 에스파냐-프랑스 남부-이탈리아-카르타고

· 장정 거리 : 약 4천Km

· 관련 링크 : 지식백과 결과보기

한니발 바르카스(Hannibal Barcas, BC 247~BC 183). 그 이름은 “불멸의 명장”이라는 찬사로, 또 한편으로는 “비운의 영웅”이라는 애사로 수천 년의 서양 역사에서 끊임없이 호명되고 있다. 그 스스로가 “나는 알렉산드로스와 피로스에 이은 역사상 세 번째의 명장이며, 자마에서 지지만 않았던들 당당히 첫 번째가 되었으리라”고 평가했듯, 그는 당대 최강의 로마군을 상대로 눈이 부시도록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런 초인적인 역량과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끝내 전쟁에서 지고, 멸망해가는 조국을 바라보며 쓸쓸히 숨을 거둬야 했기 때문이다.



한니발의 이미지가 역사에 그토록 강렬하게 새겨진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단지 가만히 앉아 있다가 전장에 나아가 적과 맞부딪쳐 싸운 게 아니라는 점,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 론 강이라는 천연의 장애물을 극복하며 에스파냐에서 이탈리아까지 남유럽의 절반을 행군하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장정 끝에 로마인들 앞에 날벼락처럼 나타났다는 전설에서 비롯된다. 그러기에 그와 그의 군대가 이뤄낸 장정은 아나바시스, 알렉산드로스 동방 원정에 뒤이은 고대 서양의 세 번째 대장정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하나의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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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말경 카르타고 중장보병(重裝步兵)의 모습. 카르타고는 시민군이 병력의 주축이 되었던 로마와 달리, 해군 일부를 제외하고는 상업으로 쌓은 부를 바탕으로 용병을 고용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출처: (cc) Aldo Ferruggia at en.wikipedia.org>



로마와 카르타고는 왜 싸웠는가. 기원전 4세기 중엽, 알렉산드로스가 거침없이 아시아를 정복해나가던 시절만 해도 두 나라가 나라의 존망을 걸고 격돌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였다. 로마는 삼니움 전쟁(BC 343 ∼ BC 341)과 라티움 전쟁(BC 340 ~ BC 338)을 치르며 이탈리아 중부를 장악해 나가던 육지의 강소국이었다. 반면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의 식민지로 출발했지만 완전히 독립된 제국으로 성장하여(알렉산드로스가 그들의 발상지인 티레를 포위 공격하는 동안, 카르타고인들은 “고향 사람들”의 구원 요청을 차갑게 묵살했다), 두 차례의 시칠리아 전쟁을 거쳐 시칠리아까지 장악한 거대한 해상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나라는 수백 년 동안 우호 관계를 이어왔다. 기원전 509년에 카르타고는 로마와 상호불가침과 우호 관계를 약속하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로마는 시칠리아를 카르타고령으로 인정하는 한편 카르타고 근해는 로마 배들이 “진입하지 않는다”, 시칠리아 주변의 바다는 “긴급 시에는 진입한다”라고 하면서 로마 근해를 포함한 서지중해 전역에서 카르타고의 선박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도록 하여, 자국이 카르타고보다 약소국임을 드러냈다. 기원전 348년에 이 우호 조약은 갱신되었으며, 다시 기원전 306년과 기원전 279년에 보완되었다. 특히 279년의 조약에서는 동방의 신흥 강자, 에피루스(Epirus: 그리스 북서부에 있는 지방)의 피로스(Phyrhos, BC 319 ~ BC 272)에 대한 공동 대응을 명시했으며, 이에 따라 피로스가 이탈리아에 상륙하여 로마를 공격했을 때 카르타고는 로마 편에 서서 싸움으로써 피로스를 물리치는 데 큰 몫을 했다.

그러나 피로스를 물리친 로마가 기원전 266년까지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를 완전히 장악, 시칠리아를 바로 코앞에 두면서 서부 지중해의 강자로 떠오르자, 하나의 산에 두 호랑이가 살 수 없는 형세가 되어갔다. 결국 기원전 264년, 시칠리아에 머물던 라틴 계열 용병대가 약탈을 벌이자 시라쿠사(siracusa: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 있는 도시국가)의 히에론 2세가 무력 진압을 시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용병대는 같은 라틴인이라는 이유로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으며 로마는 고민 끝에 요청을 받아들여 시라쿠사에 파병하였는데, 이는 기존에 로마가 카르타고와 맺었던 조약을 위반하는 일이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히에론도 구원 요청을 해왔기에 카르타고에서도 시칠리아에 파병,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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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병사들. 제국 시대에 트라야누스 황제 승전 기념비에 새겨진 부조의 모습이다. 로마의 주력군은 용병에 의존한 카르타고와 달리 시민군이었다.



그런데 카르타고는 로마보다 훨씬 일찍 수립되어 일찍 대국이 된 나라였지만, 군사 제도 면에서 로마와는 다른 점이 많았다. 군신(軍神) 마르스의 후예(로물루스)를 건국자로 받들던 로마는 그야말로 “전쟁의 나라”로, 민회에서 선출되는 집정관은 행정권과 군사 지휘권을 동시에 행사했으며 로마 시민은 누구나 유사시에는 무기를 들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반면 해신(海神)이자 상업의 신인 멜카르트를 중시하는 카르타고는 전쟁의 나라라기보다는 상업의 나라였으며, 행정은 원로원이 맡고 군사는 직업군인인 장군이 지휘하는 이원 체제인데다 해군의 일부를 제외하면 시민이 직접 병력의 주축이 되지 않았다. 대신 상업으로 쌓은 부를 이용해 지중해 세계에서 널리 용병을 고용했으며, 그것도 모자라면 지배 지역에 병력 차출을 요구했으나, 기본적으로 로마에 비해 지배 지역을 엄격히 통제하거나 제국의 일부로 동화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카르타고의 식민지들은 영토라기보다 상업 거점에 가까운 개념이었던 것이다. 이런 대조적인 면은 1차에서 3차에 이르는 포에니 전쟁의 추이에 중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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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은 코르부스를 이용해 적함의 기동을 차단하고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임으로써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전쟁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고는 하지만 사기나 지휘 체계의 정연함 면에서 로마군에 미치지 못하던 카르타고 육군이 시칠리아에서 로마군을 제압하지 못한 한편, 질적ㆍ양적으로 우수했던 카르타고 해군을 신출내기 로마 해군이 쉽게 무찌를 수도 없었다.

로마 쪽에서 새로운 발상을 함으로써 이런 묘한 교착 상태가 깨지기 시작했는데, 바로 해군을 육군처럼 운용하는 것이었다. 코르부스(corvus)라 불리는 적교(吊橋)를 군함에 설치, 카르타고 배에 접근하면 이를 내려서 적함의 기동을 차단한 다음, 로마 군단이 적함에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이도록 했던 것이다. 그 효과는 결정적이어서, 기원전 256년의 엔코무스 해전에서 카르타고 해군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1차 포에니 전쟁의 결과



로마는 여세를 몰아 레굴루스가 이끄는 군단을 카르타고의 본거지인 북아프리카에 상륙시켰다. 레굴루스는 카르타고 수비대를 가볍게 짓밟고 수도를 유린하기 직전까지 갔으나, 항복 조건을 논의하던 중에 스파르타에서 온 용병대의 기습을 받고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카르타고는 갖은 노력 끝에 해군을 재정비했으나 기원전 241년의 아에가테스 해전에서 다시 한번 대패했고, 강화를 요청한다. 마침 남프랑스의 골 족이 북이탈리아를 침입해온 참이어서 로마는 이를 받아들였다.

강화 조건은 시칠리아를 로마령으로 하고, 카르타고 배는 로마 근해에 접근할 수 없으며(이는 종전의 조약에서 주어졌던 조건을 뒤집은 것이었다. 단, 이제는 로마령이 된 시칠리아 등까지 거기에 해당되었으므로, 카르타고는 서지중해에서 사실상 꼼짝도 못하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3천 2백 탈렌트라는 거액의 보상금을 지불한다는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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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대한 설욕을 맹세하는 어린 한니발.



이렇게 굴욕적인 강화는 당연히 많은 카르타고인의 울분을 자아냈으며, 특히 전쟁으로 먹고사는 무인 계급에서 분노와 원한이 두드러졌다. 그런 사람 중 하나가 하밀카르 바르카스(Hamilcar Barcas, BC 270? ~ BC 228)였다. 대대로 장군을 역임한 가문의 후계자인 그는 총사령관으로 시칠리아에 파견되어 로마군을 몇 차례나 대패시켰지만, 조국의 패배와 굴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종전 후 1년 뒤에는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한 카르타고 용병대가 사르디니아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의 요청에 응한다는 명분으로 파병한 로마가 사르디니아까지 삼켜버리는 걸 보아야만 했다. 이러다 보니 카르타고의 상권은 축소되고, 지중해 연안국들이 너도 나도 카르타고보다 로마를 바라보게 됨으로써, 다시 전력을 보강해서 설욕할 전망도 불투명했다.

그러자 그는 새로운 땅으로 넘어가 스스로 복수전을 준비하기로 했다. 바로 카르타고가 세력을 뻗은 지 오래지 않았던 에스파냐였다. 기원전 237년에 에스파냐로 넘어가기 전에, 하밀카르는 자신의 아들을 신전으로 데려가 맹세를 시켰다고 한다. “일생 동안 로마의 적이 되어, 로마와 싸우겠나이다!” 아홉 살배기 소년은 엄숙하게 맹세를 했다. 그가 한니발이었다.




헤라클레스와 알렉산드로스의 꿈을 따라서



하밀카르는 이베리아 반도 남부 가장자리에 약간 존재했을 뿐이던 카르타고의 세력을 몇 년 만에 몇 십 배로 키워냈다. 그가 새로 건설한 항구는 ‘카르타고 노바(Cartago Nova, 새로운 카르타고)’라 불렸으며, 단시간 만에 지중해의 최대 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다. 에스파냐의 풍부한 은광과 인구는 제1차 포에니 전쟁으로 위축된 카르타고의 전력을 보강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가 군사 지휘권과 함께 행정권까지 행사하며 사실상 ‘에스파냐의 왕’처럼 군림하는 모습에 본국에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으며(그래서 역사가들은 이때의 에스파냐를 카르타고와는 독립적인 개체로 인정, 그의 이름을 딴 ‘바르카스 왕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를 눈치챈 로마는 하밀카르를 억제하기보다 회유하려 들어, 로마-카르타고-바르카스 사이의 미묘한 외교 관계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런 외교 관계가 매듭지어진 것은 기원전 228년에 하밀카르가 전사하고, 뒤를 이은 그의 매부, 하스드루발에 의해서였다. 하스드루발은 기원전 226년에 로마와 에브로 조약을 맺어 에스파냐의 북동부를 흐르는 에브로 강을 두 나라의 사실상 경계선으로 삼고, 다만 그 아래쪽에 있는 사군툼은 로마의 세력권으로 인정해 침범하지 않는다는 데 합의함으로써 양국의 관계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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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밀카르가 건설한 카르타고 노바. 지중해 연안의 최대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한 이곳은 오늘날 스페인의 카르타헤나(Cartagena)이며, 로마인들이 남긴 원형극장이 보인다. <출처: (cc) Alejandra Diego Eguren at en.wikipedia.org>



그동안 한니발은 10대의 나이로 전장에 나가 전투와 전술을 익히는 한편, 스파르타 출신의 가정교사 소실로스에게서 호메로스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알렉산드로스에 이르는 문학, 철학, 역사, 지리를 폭넓게 공부했다. 특히 알렉산드로스의 원정 이야기는 그의 피를 들끓게 했다. 에스파냐에서 소 떼를 몰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갔다고 하는 헤라클레스의 전설도 흥미진진했다. 그는 몇 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만큼 익혔는데, 이 모든 것은 그가 장차 알렉산드로스의 미처 가지 못한 길을 따라, 여러 나라에서 온 종족들이 뒤섞인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향해 진군해나가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마침내 기원전 221년, 하스드루발이 암살을 당하자 군대는 만장일치로 26세의 한니발을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했다.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Titus Livius, BC 59 ~ AD 17)의 기록대로 “먹고 입고 자는 것은 그 어떤 병사와도 차이가 없고, 맹렬하게 싸우고 통쾌하게 무찌르며, 가장 앞에서 돌격했다가 가장 뒤에서 퇴각하는 용기에는 그 어떤 병사도 따라갈 수가 없었던” 한니발에게 자연스럽게 모여진 존경과 신뢰의 결과였달까.

어린 시절의 맹세가 여전히 가슴에 사무쳤던 한니발은 집권하자마자 로마에 대한 공격을 준비해나갔다. 그리고 이듬해인 기원전 220년, 로마 사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군툼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에브로 조약을 정면으로 파기하는 이 행위에 대해 로마는 분통을 터뜨렸으나 골 족과의 전쟁 끝에 가까스로 진압한 북이탈리아가 아직 불안정했기 때문에 곧바로 원정군을 보내지는 않고, 카르타고 본국에 사절을 보내 “한니발의 행동을 중지시키고, 그를 카르타고로 소환하여 문책하라”고 요구했다. 사실상 독립국이던 바르카스에 그런 조치가 통할 리도 없었으나, 카르타고 원로원은 “에브로 조약은 하스드루발이 마음대로 맺은 것으로, 우리는 아무 책임이 없다”고 반박했다. 로마 사절은 성이 나서 회담장을 박차고 나갔으며, 이로써 전쟁은 실질적으로 시작되었다.

한니발이 시작하고, 한니발이 주도했으며, 마무리 역시 한니발이 담당했기에 리비우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을 “한니발 전쟁”이라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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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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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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