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한니발 원정 (3) - 칸나에의 승리에서 자마의 패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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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5회 작성일 16-02-06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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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의 이동 루트.





‘한니발 원정’ 개요


· 장정의 주인공들 : 한니발과 그를 따르는 카르타고인 및 에스파냐, 누미디아, 골 등의 용병들

· 장정 시기 : BC 218~BC 203

· 장정 경로 : 에스파냐-프랑스 남부-이탈리아-카르타고

· 장정 거리 : 약 4천Km

· 관련 링크 : 지식백과 결과보기




무적의 한니발, 그 이유는?



한니발이 도달한 이탈리아 북부는 로마가 평정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골 족의 땅이다시피 했다. 그의 기대대로, 그곳의 골 족들은 손을 잡고 로마를 치자는 한니발의 제의에 흔쾌히 응했다(사실 막 출발하려던 스키피오의 발목을 뜻밖의 골 족 반란이 며칠 동안 붙잡고 있었으며, 덕분에 한니발 군이 론 강 도하 지점에서 최악의 위기를 만나지 않을 수 있었기도 했다). 마침내 골 족의 합류로 세를 불린 한니발 군과 로마군 사이의 첫 전투가 티키누스 강변에서 벌어졌다.

로마군을 이끈 것은 남프랑스에서 한니발과 숨바꼭질을 했던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였다. 한니발은 로마 기병대를 압도하는 기병대를 적절히 활용하여 스키피오 군을 격파했으며, 스키피오는 중상을 입은 채 간신히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이때 그의 생명을 구한 10대 소년이 바로 그의 아들이자, 훗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라고 불리게 될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니발은 계속해서 진격했고, 계속해서 이겼다. 트레비아 강변 전투에서 또 다른 집정관 셈프로니우스의 군대를 유인해 매복으로 궤멸시키고, 기원전 217년 초에는 트레시메네 호숫가에서 새로 집정관이 된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와 세르빌리우스의 군대를 몰아붙여 호수에 빠트려 죽이거나 창과 칼로 도륙해버렸다.

이때쯤 비로소,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상대하고 있는 적이 영웅 심리에 들뜬 애송이가 아니라 저 피로스를 뛰어넘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서 간을 보던 나머지 골 족들도 앞다투어 한니발의 진영에 합류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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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과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전투 장면을 새긴 부조. 한니발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아들에 의해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그 아들은 훗날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무찌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였다. <출처: (cc) BurgererSF at en.wikipedia.org>



천하의 로마군을 한니발은 어떻게 그렇게 일방적으로 휩쓸어버릴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한니발의 천재적인 전술, 누미디아 기병대를 비롯한 기병대 전력의 우위, 골 족의 협력으로 로마군보다 우위에 서게 된 현지 지형 정보, ‘알프스를 넘어오느라 지쳐빠진, 겨우 2, 3만의 오합지졸’이라고 본 로마군의 방심 등등.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병사들의 사기와 군기였다. 이제껏 용병 위주의 카르타고 군은 병사 개인의 전투력으로 보면 농기구를 집어던지고 무기를 잡은 로마 시민군보다 한결 우수한 전사였으나, 충성심이나 감투 정신은 로마군에 훨씬 못 미쳤다. 돈이나 받으면 끝인 그들이 ‘내 가족과 내 고향’을 지키겠다는 신념에 불타는 시민군만큼 악착같이 싸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금만 불리하다 싶으면 탈영하거나, 심지어 칼을 거꾸로 잡고 본국에 대적하기도 했다.

아버지인 하밀카르 이래 이런 문제점을 숙지했으며, 그것이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배한 주요 원인이라고 여겼던 한니발은 ‘어떻게 뛰어난 전사이면서 용감한 투사일 수 있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래서 스스로 병사들과 먹고 자면서 그런 모범적인 군인의 본보기를 보여주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사람의 인성을 바꾸기에 충분치 않을 터였다.

그러면 해답은 무엇인가? 한니발이 과연 거기까지 의도했던 것인지 확증은 없으나, 결과적으로, ‘장정’이었다. 에스파냐에서 피레네를 넘고 론을 건너고, 그리고 한겨울에 코끼리들을 끌고 알프스를 넘는 말도 안 되는 대장정. 그 과정에서 로마에 비하면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은 반 이상이나 줄어버렸지만, 살아남은 병사들은 지구상의 어떤 군대보다도 혹독하게 단련되었다. 그 장정을 통해 용병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 마음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사무치게 배웠으며, 서로 다른 언어와 종교를 가진 채로 오직 돈 때문에 함께했던 진영에서 가족 이상의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절망적인 순간이라도 침착하게 머리를 쓰면 살아날 구멍이 있다는 것도, 사람이 마음만 굳게 먹으면 넓은 강이고 앞이 안 보이는 눈보라고 이겨낼 수 있다는 것도 뼈에 새기듯 체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한니발이라는 사나이, 자신들의 상당수보다 젊으며 알프스 산중에서 눈 한쪽까지 잃어버린 사나이야말로 세상 끝까지 따라갈 가치가 있는 위대한 지도자라는 사실도.

여기에 한니발은 로마 역사가들이 한목소리로 비난한 또 하나의 성향, 즉 ‘잔인함’으로 군기를 엄정하게 잡았다. 그는 불합리한 명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잘못을 용서하는 법이 없고, 아군이나 적이나 극단적인 처벌로 마무리짓곤 했다. 물론 그가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이 없이 엄격하기만 했다면 거친 용병들의 신망을 받기는커녕 즉각적인 반란에 직면했을 것이다. 반대로 유능하고 유덕하지만 한편 인자한 덕장의 모습을 보였다면, 일단 알프스라는 극한상황을 벗어난 뒤까지 용병들의 개별 행동을 통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겸함으로써 믿을 수 없는 대장정에서 살아남고, 다시 로마군을 사정없이 깨트리는 무적의 전쟁 기계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아나바시스의 크세노폰과 동방 원정을 이끈 알렉산드로스도 탁월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크세노폰은 말로 병사들을 설득하다가 안 되면 사정없이 군기를 잡는 스타일이었고, 따라서 위기를 벗어난 한참 뒤까지 병사들의 인망을 얻지는 못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솔선수범의 미덕도 얼마간 보였으나 기본적으로 자신을 신이 내린 존재로 치장했으며, 왕으로서의 권위와 신적인 권위를 내세우며 반대 의견을 가진 부하들을 억누르다가, 안 되면 가혹한 처형으로 본보기를 보였다(클레이토스와 칼리스테네스의 예처럼).

그들에 비해 한니발은 “우리의 형제이자 아버지”로 자신을 이미지화함으로써 다국적 용병이라는 좀처럼 화합하기 힘든 부대원들을 단단하게 하나로 묶고, 일사불란하게 자신을 따르도록 만드는 데 한 수 위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가 승승장구하던 때는 물론이고, 이후 십여 년 동안 남부 이탈리아를 정처 없이 떠돌며 답답한 세월을 보내던 때조차도 단 한 차례의 반란이나 폭동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한니발은 승리를 이용할 줄 몰랐는가?



한니발의 전성시대는 기원전 216년의 칸나에 전투에서 정점에 달했다. ‘이중 포위 전술’의 교과서로 알려지게 된 이 전투의 결과 로마군은 약 이천 년 뒤 제1차 세계대전에서야 비로소 깨지게 될 기록적인 대살육(단 하루 동안 약 5만 명 전사)을 겪었고, 이후로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BC 235~ BC 184)가 나타날 때까지 기본적으로 파비우스의 전술에만 의존, 한니발을 직접 상대하지 않고 거점 방어에만 주력하는 소극적인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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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16년의 칸나에 전투. 한니발과 카르타고 군의 세력이 정점에 달했던 이 전투에서 5만여 명의 로마군이 전사했고, 집정관 파울루스도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영광의 뒤로, 정작 한니발은 한숨을 짓고 있었다. 그가 생각했던 전쟁 목표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전쟁사가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듯, 한니발은 로마를 초토화시키고 로마인을 절멸시키기 위해 알프스를 넘은 것은 아니었다(설사 그럴 마음이 있었더라도, 그의 병력으로는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에스파냐인들과 골 족을 회유하여 카르타고의 편으로 만들었듯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라틴 동맹’을 깨트리고, 로마 시가 지배하고 있는 속주와 식민지, 동맹시들이 자신에게 붙거나 최소한 로마에서 독립하는 상황을 목표로 삼았다. 또는, 덱스터 호요스, 조반니 브리치 등의 분석처럼, 로마에 큰 타격을 줌으로써 로마 쪽에서 강화를 요청하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앞서 에피로스의 피로스가 로마를 몇 차례 대패시켰을 때 실제로 로마 원로원은 그런 움직임을 보였으며, 또 다른 강대국(다름 아닌 카르타고)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로마가 피로스에게 항복하는 일이 실현되었을지도 몰랐다. 한니발은 칸나에에서 이긴 뒤 로마 원로원에 정중한 태도로 항복을 권유했는데, 따라서 그런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피로스 때에 비해 로마는 더 강해졌고, 이탈리아에 더 굳게 뿌리내린 상태였다. 따라서 한니발이 여기저기 들이치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점령지를 얻지도, 전력을 무섭게 강화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 항복까지 고려할 일은 아니었다. ‘라틴 동맹의 붕괴’ 역시 칸나에 전투 직후에 브루티움, 삼니움, 캄파니아 등 수십 년 전 삼니움 전쟁의 후유증이 아직 저변에 남아 있던 지역에서는 반란이 일어났으나 에트루리아, 움브리아, 펜트리, 아브루조 등에서는 침묵을 지켰다. 게다가 그런 반란들도 전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자 수그러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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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니움 인들. 중부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이들은 세 차례의 전쟁을 통해 로마에 복속되었으나 한니발 당시에는 로마에 완전히 동화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한니발은 누구보다 그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기를 기대했으나, 그 일부만이 일시적인 봉기를 하는 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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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 한니발 군이 원조가 필요했던 중요한 순간에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함으로써 한니발의 실낱 같은 희망도 사라졌다.



이제 믿을 것은 외부에서의 원조, 즉 카르타고 본국과 에스파냐에서의 병력과 물자 지원밖에 없었는데, 로마 해군은 전쟁 초기에 이미 카르타고 해군을 박살내며 제해권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걸친 하스드루발(한니발의 동생)의 원군 시도는 기원전 207년에 하스드루발이 메타우로스 강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함으로써 허사로 돌아갔다.

이에 한니발의 행보는 기원전 211년 이후 남부 이탈리아를 이리저리 떠도는 것으로 한정되어 버렸다. 한니발 휘하의 누미디아 기병대장이던 마르하발, 리비우스, 그리고 현대의 몽고메리 같은 사람은 “한니발은 승리를 이용할 줄 몰랐다. 칸나에에서 이긴 다음 곧바로 로마 시로 쳐들어갔어야 했다.”고 했지만,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공격 앞에 로마 시민들이 피신한다면, 그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를 불태운 크세르크세스가 절치부심한 그리스인들의 저항에 마주치게 되었던 일을 재현하게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그들이 농성하며 저항한다면, 그것도 어려운 문제였다. 공성전은 한니발의 장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그리 튼튼한 요새도 아니었던 사군툼을 함락시키는 데 8개월이나 잡아먹었던 그가 아닌가. 그가 로마 시에 매달려 있는 동안 이탈리아 각지에 산재해 있던 로마군이 달려와 그의 뒤통수를 친다면, 파멸할 수밖에 없었다.




장정의 끝, 그리고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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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피오. 그는 한니발의 방식을 본받아 한니발에게 이김으로써 2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공로로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출처: (cc) shakko at en.wikipedia.org>



그래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고, 라틴 동맹국들을, 카르타고를, 에스파냐를, 그리고 동맹을 맺기로 했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끝내 그의 고독을 깨트리며 그에게 다가온 사람은 그 어느 쪽도 아닌, 자신이 티키누스와 칸나에에서 살려보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였다. 그는 발이 묶여 있는 한니발을 직접 상대하기 전에 그의 본거지인 에스파냐를 들이쳤으며, 기원전 203년까지 그곳을 철저히 유린하고는 북아프리카에 상륙했다. 한니발과 카르타고의 든든한 전력 공급처이던 누미디아까지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스키피오의 공세 앞에 카르타고 원로원은 무릎을 꿇었고, 에스파냐 전역과 카르타고 함대 전부를 넘겨줄 뿐 아니라 한니발을 이탈리아에서 소환한다는 내용의 항복 문서를 바쳤다.

이 소식을 들은 한니발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그러나 사방의 길이 모두 막힌 그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기원전 203년이 기울어갈 무렵, 그는 그토록 고생하며 다다르고 악착같이 싸웠던 이탈리아를 떠나 뱃길로 카르타고에 이르렀다. 그의 장정은 끝난 것이다.

한니발은 왜 실패했을까? 그가 대장정을 감행하며 조련한 병력 외의 아군, 북아프리카와 에스파냐의 카르타고 군은 여전히 제1차 포에니 전쟁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한니발을 상대하면서(정확하게는 회피하면서) 이들과 싸울 수 있었던 로마가 한니발의 길을 모두 막아버릴 수 있었다는 것이 그 한 가지 요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참으로 씁쓸하게도, 평화보다는 전쟁을 욕망하는 인간의 마음에 있었다. 한니발은 로마를 궤멸시키는 대신 일찍이 로마와 에트루리아, 삼니움, 마그나 그레시아 등이 할거하던 시대로 이탈리아를 돌려놓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 땅을 카르타고가 점령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카르타고의 조정 아래 국가 간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카르타고적 지중해 질서’의 한 축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다수의 이탈리아 도시들이 로마에 항거해 일어나지 않았다. 어째서? 카르타고라면 그들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부담도 거의 주지 않는 자유와 평화를 보장할 텐데?

그것은 로마의 이탈리아 정복이 시작된 이래 거의 한 해도 빠짐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그러다보니 전쟁으로 이익을 보는 계층이 늘어났다는 사실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평민들은 싸움에 나가 재물과 노예와 지위를 얻을 수 있었고, 귀족들은 명예와 권위와 영유지를 더할 수 있었다. 심지어 평화 지향적인 상인들조차 안보상의 불안 요소가 잠재해 있는 카르타고적 질서보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뒷받침되는 로마적 질서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이 끊이지 않기를 바라는 목소리가 평화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목소리보다 컸던 것이다. 전쟁의 신 마르스의 힘이 상업의 신 멜카르트의 힘보다 강했던 것이다. 그것이 한니발이 실패한 이유였고, 크게 보아 카르타고가 로마에 패배한 이유였다.

36년 만에 카르타고로 돌아간 한니발은 이제 로마를 공격하는 싸움이 아니라 카르타고를 지키는 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누미디아 기병대를 비롯한 그의 정예 병력 다수가 그의 곁에 없었으며, 북아프리카에서 끌어모은 약 5만의 병력은 그를 무찌르려 다가오는 스키피오의 병력에 수적으로는 뒤지지 않았으나 사기와 군기에 있어서는 형편없었다.

기원전 202년, 북아프리카의 자마에서 한니발에 맞선 스키피오는 왕년에 한니발이 칸나에에서 펼쳐보인 전술을 그대로 본받아서 “스승”을 상대했다. 그러나 칸나에에서처럼 기병을 활용할 수 없었던 한니발은 코끼리 부대의 돌파력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으나, 코끼리의 습성을 숙지하고 있던 스키피오는 코끼리들을 놀래켜서 오히려 카르타고 진영으로 뒤돌아 짓밟고 다니게 만들었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한니발은 몇 차례나 승기를 잡을 뻔 했으나, 결국 간발의 차이로 승리는 스키피오의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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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마 전투. 사실상 한니발 최후의 이 싸움에서 그가 희망을 걸었던 코끼리 부대는 오히려 카르타고 군의 패배를 재촉했다.



이로써 제2차 포에니 전쟁도 로마의 승리로 끝나게 되며, 카르타고는 로마의 속국 수준으로 떨어지고, 한니발은 상인으로 변장하여 망명길에 나선다. 그는 몇 년 뒤에 카르타고로 돌아와 이번에는 정치인으로서 조국의 부흥에 앞장서려 했으나, 반대파들의 덫에 걸려 로마에게 쫓기는 몸이 된다. 이후 한니발은 다시는 조국을 보지 못한 채 동지중해 세계를 떠돌다가, 그를 써주던 지도자들을 위해 몇 차례 전장에 나가 보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고독한 망명자로서 하릴없는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기원전 181년(182년, 183년 등으로 여러 설이 있다), 이제 60대의 노인이 된 그가 은거하던 곳에 로마의 병사들이 몰려들고 있음을 보고, 그는 독약을 삼켰다.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마지막 말을 “오, 카르타고여, 나를 용서해 다오!”라고 기록했다. 반면 폴리비오스는 “이제 로마인들을 공포에서 해방시켜줄 때도 되었지”라고 했다. 어찌됐든, 카르타고의 희망도 로마의 불안도 모두 끝이 났다. 그로부터 약 30여 년 뒤, 로마는 속 빈 강정과 다름없던 카르타고를 공격하여 끝내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사람과 도시와 짐승들을, 심지어 그 땅까지도(소금을 대량으로 뿌려 몹쓸 땅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절멸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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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옛 카르타고의 땅에 남아 있는 폐허. <출처: (cc) Calips at en.wikipedia.org>



한니발이 자마에서 패배하고 슬픈 유랑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와 알프스를 함께 넘었던 용병 동지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역시 용병으로서 헬레니즘 세계의 어디쯤을 떠돌며 싸우고 있었을까? 최후까지 한니발의 병사로 싸우다가 죽어갔을까? 아니면 전쟁도 영웅도 다 신물이 나서, 은퇴해서는 지중해 어디쯤에서 옛 무용담이나 늘어놓으며 여생을 보냈을까?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한니발과 보낸 시간이야말로, 그들의 인생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시간이었음은 분명하고 또 분명하다. 그래서 어디서 어떤 삶을 살고 있든, 그들은 그 장정의 이야기를 하고 또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멸망한 나라의 패배한 장군이면서도, 어느 영웅 못지 않은 명성과 전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로마가 장악한 지중해 세계에서 이어져 갔으리라. 그리하여 그의 장정을 직접 보지 못했으며 심지어 그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던 로마의 역사가들도, 많은 윤색과 착오가 있을지언정, 그의 장정을 오늘날 전해지는 대로 드라마틱하고 극히 세세하게 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그 텍스트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구스타프 아돌프, 프리드리히 2세, 나폴레옹, 패튼, 버나드 몽고메리, 노먼 슈워츠코프에 이르는 명장들이 감명을 받고, 한니발을 본받아 전술과 리더십을 개발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오늘날 비즈니스와 정치계의 지도자들에게도 한니발을 연구하고 본받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으리라. 그렇게 보면, 그토록 처절했던 이탈리아로의 장정, 그리고 짧은 영광에 뒤이은 오랜 방황과 유랑의 장정도, 끝내 실패로 끝난 무의미한 장정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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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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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4.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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