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알 부사이드 왕가 - 아라비아의 해상왕국 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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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2회 작성일 16-02-06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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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걸프지역 아랍 왕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알 부사이드(Al Busaid) 왕가는 18세기 중반부터 오만을 통치해 왔다. 과거에는 ‘무스카트 오만 왕국’으로 불렸으나 1970년 현 국왕인 술탄 카부스(Sultan Qaboos)가 등극한 후에 ‘오만 술탄국’으로 개칭되었다.

19세기 중반 알 부사이드 왕가는 아라비아 반도 동남부, 아프리카 동부 해안 지대, 이란 남부 지역, 발루치스탄(파키스탄 남서부)을 아우르는 거대한 해상왕국을 건설하며 국가의 번영을 일구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오만에는 잔지바르 섬을 비롯한 동아프리카에서 이주한 흑인들이 오래전부터 정착하여 살아왔는데, 오늘날 그 후손들을 ‘잔지바르인’이라고 한다. 또한 오만은 다른 아랍 국가와 다르게 수니파나 시아파가 아닌 이바디파가 무슬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오만 인구 가운데 95%가 무슬림이며, 무슬림들 가운데 67%는 이슬람 종파 가운데 이바디파를 따르고 있다. 20세기 중반 알 부사이드 왕가의 술탄은 내륙의 이맘국(國)을 정복하여 국가 통일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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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까지 오만 술탄의 궁전으로 사용되었던 잔지바르의 유적지






알 부사이드 왕가의 특징과 현안



알 부사이드 왕가가 걸프 아랍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아랍 왕가 중 하나이긴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오만, 쿠웨이트 등 인근 아랍 왕정 국가와 마찬가지로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원칙이 정착되지 않았다. 이 같은 이유로 왕위를 둘러싼 가족 간의 권력 투쟁이 종종 발생하였다. 19세기 중반 오만은 아라비아 반도 동남부와 아프리카 동부 해안 지대를 아우르는 거대한 해상왕국을 건설했으나, 형제간의 왕위 다툼 끝에 무스카트 왕국과 잔지바르 왕국으로 분열하였다. 또한 현 국왕인 술탄 카부스는 1970년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부친인 사이드 빈 타이무르(재위 1932~1970)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1996년 11월 술탄 카부스가 제정한 국가 기본법령에는 오만의 국왕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자격 조건으로 19세기 말 오만의 통치자였던 투르키 빈 사이드의 직계 남성 후손이자 무슬림이고, 오만 국적을 지닌 부모의 합법적인 아들임을 내걸고 있다. 이 같은 원칙에도 불구하고 술탄 카부스 사후 오만은 차기 왕위 선정 과정에서 적지 않은 정치적 갈등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차기 후계자를 선정하기 위한 명확한 규정이나 시스템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현 국왕인 술탄 카부스는 첫 결혼에 실패한 이후 2014년 현재까지 독신으로 지내왔으며 후손도 없다. 더구나 그는 아직까지 공식적인 후계자도 지명하지 않은 상태다. 일설에 의하면 술탄 카부스는 유서에 2명의 후계자 후보를 선정해 놓고 있으며, 그 명단은 무스카트와 살랄라의 비밀장소 두 곳에 보관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규정대로라면 술탄 카부스의 유고 시 왕가문중위원회가 3일 이내에 후계자를 결정하도록 되어 있다. 만일 여기에서 후계자 선출에 실패할 경우에는 국방위원회가 국왕이 살아생전 비밀리에 기록한 2명의 후계자 후보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알 부사이드 왕조의 성립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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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오만 해상왕국(초록색)



오늘날 오만을 통치하고 있는 왕조는 알 부사이드조(朝)이며, 왕조의 개창자는 아흐마드 빈 사이드 알 부사이디(재위 1749~1783년)이다. 그는 17세기 초부터 오만을 통치하고 있었던 야아리바 왕조를 1749년에 무너뜨리고 강력한 해군 함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 흔히 ‘사이드 대왕’이라고 불리는 오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사이드 빈 술탄(재위 1806~1856년)은 아프리카 동부 해안 지대, 이란 남부 지역, 발루치스탄(파키스탄 남서부)을 아우르는 거대한 해상왕국을 건설하여 국가의 번영을 일구었다. 그가 재위했던 50여 년 동안 오만은 인도양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영토의 확장은 계속되어 1837년 사이드 빈 술탄은 케냐의 몸바사 지역을 정복했다. 1840년에는 오늘날 탄자니아에 위치한 잔지바르 섬을 아프리카 수도로 삼아 자신의 거처도 그곳의 스톤 타운으로 옮겼다. 19세기 초반 오만이 다스렸던 아프리카 동부 해안 지대는 길이가 무려 3,000km에 달했다. 사이드 빈 술탄은 잔지바르와 무스카트를 중심으로 희망봉으로부터 아프리카 동부 해안과 인도양으로 연결되는 무역 항로를 장악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그러나 1856년 사이드 빈 술탄의 사망과 함께 해상왕국 오만의 영광의 시기는 점차 그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사이드 빈 술탄은 방대한 오만의 영토를 자신의 두 아들에게 분할해 주고자 했다. 1833년 그는 셋째 아들인 수와이니 빈 사이드에게 무스카트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영토의 대리 통치를 맡겼고, 1854년에는 여섯 번째 아들인 마지드 빈 사이드에게는 잔지바르의 대리 통치를 맡겼다. 사이드 빈 술탄이 사망하자 두 아들은 극심하게 대립하였고, 그 결과 오만의 방대한 영토는 둘로 나누어졌다.

잔지바르의 분리 독립 이후 무스카트의 오만 왕국은 인도양 해상무역에서의 중심적 지위를 상실했고, 그 결과 19세기 후반부터 경제적 침체기를 겪었다. 게다가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에서 증기선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오만의 해상 활동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홍해 무역 루트의 중요성이 커지게 되자 오만의 해상무역권은 또 다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20세기 초반 무스카트의 알 부사이드 왕가는 내륙 산악 지역에 위치한 니즈와의 이맘(Imam)들로부터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오만은 다른 아랍 국가와 다르게 수니파나 시아파가 아닌 이바디파가 무슬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바디파는 자신들의 지도자를 이맘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이맘은 단순한 세속적 군주 이상의 권위를 지닌다. 오만에서 이바디파 교리가 정착된 것은 8세기 중반에 내륙 산악 지역에 위치한 니즈와를 수도로 하는 최초의 이맘국이 건설된 때부터였다.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니즈와는 오만의 종교적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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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국과 술탄국으로 양분되었던 오만은 사이드 빈 타이무르 대에 와서 재통합되었다. 1961년 런던에서 에드워드 히스 총리와 악수하는 모습.



역사적으로 오만에서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니즈와의 대모스크에서 이맘으로 선출되어야 하는 형식적인 절차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1913년 타이무르 빈 파이살(재위 1913~1932년)이 술탄에 등극한 후에 자신을 이맘으로 선출할 것을 요구했으나, 니즈와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를 거부하고 대신 살림 빈 라시드 알 카루시를 이맘으로 선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15년 이맘국과 술탄국은 전투를 치렀다. 결국 양측은 1920년 십(Sib)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이에 따라 이맘은 술탄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대신 술탄은 니즈와를 중심으로 한 내륙 지역에서 갖는 이맘의 권위를 인정하기로 공식 합의했다.

1932년 새롭게 술탄에 즉위한 사이드 빈 타이무르(재위 1932~1970년)는 다시 한 번 내륙 지역으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여러 부족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1955년 그는 영국 군대의 지원을 받아 이맘국으로 진격했고, 결국 이바디파의 본산 니즈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수년간 이바디파 이맘 추종자들은 내륙 산악 지역에서 항전했으나 1959년 사이드 빈 타이무르는 그들을 완전히 제압하였다. 이로써 이맘국과 술탄국으로 갈라졌던 오만은 재통합되었고, 알 부사이드조의 군주의 영향력은 오늘날 오만 영토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오만의 주요 군주





아들에 의해 폐위된 사이드 빈 타이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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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 빈 타이무르



사이드 빈 타이무르(Sa’id bin Taymur, 1932~1970년 재위)는 현 국왕인 술탄 카부스의 부친으로서 술탄국과 이맘국으로 분열된 오만을 통일하여 근대 오만 왕국의 초석을 마련했으나, 아들이 일으킨 궁정 쿠데타에 의해 폐위되는 불운을 맞았다.

1932년 무스카트에서 술탄에 즉위한 사이드 빈 타이무르는 1955년 영국의 지원으로 내륙의 이맘국과 전쟁을 시작하여 1959년 이들을 완전히 제압하고, 이맘국과 술탄국으로 갈라졌던 오만을 재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남부 지역인 도파르에서 시작된 반정부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그의 왕권은 점차 흔들리게 되었다. 1965년 도파르 지역민들은 예멘의 사회주의 정권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도파르해방전선(DLF)을 결성하고 외세 척결과 왕권 타도를 구호로 내세우며 혁명을 시도했다. 이후 도파르의 사회주의 반군은 아랍걸프점령지해방민중전선(PFLOAG)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구소련, 쿠바, 중국, 이라크로부터 이념적, 물질적 지원을 받았다.

영국은 오만이 남예멘과 같이 사회주의 정권으로 넘어갈 경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상실할 것을 우려하였다. 영국은 사이드 빈 타이무르가 사회주의 반군을 격퇴할 수 있도록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으며, 동시에 사회 및 경제 정책에 있어서 변화를 꾀할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사이드 빈 타이무르는 궁전에 은둔하며 쇄국정책을 펼쳤고, 그 결과 오만은 근대화 과정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영국은 사이드 빈 타이무르가 국가 통합을 이루는 데 역부족임을 깨닫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영국은 1971년까지 걸프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그 전에 오만의 정권 교체를 단행하고자 했다. 이에 영국은 사이드 빈 타이무르를 대체할 후임자로 당시 서른 살이었던 그의 아들 카부스 빈 사이드를 선택했다.

1970년 7월 23일 카부스 빈 사이드는 영국 정부의 묵시적인 승인 하에 궁정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군은 사이드 빈 타이무르의 왕궁에 잠입한 후 왕궁 수비대원과 소규모의 총격전을 벌였다. 결국 사이드 빈 타이무르는 아들에 의해 폐위된 후 영국의 런던으로 망명했다가 1972년 그곳에서 쓸쓸히 사망했다.



탁월한 외교 전략가 술탄 카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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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카부스



현재 오만을 통치하고 있는 술탄 카부스(Sultan Qaboos)의 본명은 카부스 빈 사이드(Qaboos bin Said)로 알 부사이드 왕조의 창건자 아흐마드 빈 사이드의 14대손이다. 그는 1970년 부친인 사이드 빈 타이무르를 쿠데타로 폐위시키고 술탄 자리에 올랐다. 술탄 카부스는 부친과 달리 개방과 개혁 정책으로 오만의 근대화를 실현시킨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술탄 카부스는 부친 사이드 빈 타이무르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도파르 출신의 왕비 마준 알 마샤니의 슬하에서 1940년 살랄라에서 출생했다. 남자 형제는 없고, 이복 누나를 포함한 3명의 누이들이 있다.

술탄 카부스는 살랄라에서 중학교 교육까지 마치고 인도를 거쳐 열여섯 살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영국의 샌드허스트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군에 입대하여 1년 동안 독일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제대 후 그는 세계 일주를 한 후 오만으로 귀국했다.

1964년 귀국한 술탄 카부스는 살랄라의 왕궁에서 가택연금에 가까운 생활을 했으며, 외부인과의 접촉도 차단되다시피 했다. 이 같은 조치는 은둔적이며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부친 사이드 빈 타이무르가 개방적이며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아들이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970년 7월 23일 술탄 카부스는 영국의 지원을 받아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부친을 폐위시키고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술탄 등극 직후 왕궁의 거처를 살랄라에서 현재의 수도인 무스카트로 옮겼고, 국명도 ‘무스카트‧오만 왕국’에서 ‘오만 술탄국’으로 개칭했다.

술탄 등극 후 카부스가 최우선적으로 해결한 과제는 사회주의 혁명가들에 의한 도파르 반란(1965~1975년)의 진압이었다. 그는 탁월한 전략가로서 채찍과 당근, 양면 정책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 그는 반군을 무력으로 압도하기 위해 군대를 강화했으며, 동시에 영국은 물론 친영 왕정 국가인 요르단과 이란 팔레비 정권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았다. 한편 그는 1973년 오일쇼크를 계기로 급증한 오일 머니로 도파르 지역에서 경제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 투항한 반군 가담자에게 사면을 허락하는 유화정책도 잊지 않았다. 이 같은 술탄 카부스의 정책은 큰 효과를 거두었고, 1975년 도파르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술탄 카부스는 외교정책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1979년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했을 때 거의 모든 아랍 국가는 이집트와 외교 단절을 선언했다. 하지만 오만은 아랍 국가 중 모로코와 함께 유일하게 이집트와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1993년 오만은 이스라엘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주위의 아랍 국가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또한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때로는 거리를 두는 양면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했다. 예들 들어, 1980년 오만은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 동안 미국과 영국이 오만을 첩보활동 기지로 이용할 수 있도록 미국과 군사협정을 체결한 반면, 1985년에는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도 했다. 1979년 이란 혁명이 일어나고 이란에 이슬람공화국이 수립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1981년 걸프 왕정 국가들을 규합하여 걸프협력기구(GCC)를 창설함으로써 집단안보 체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이때 오만은 걸프협력기구 회원국으로 참여했지만, 이란과도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그대로 유지했다. 이처럼 술탄 카부스는 다차원적인 중립외교를 통해 오만의 국제적 위상을 강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하지만 그에게 정치적 위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4년에는 이슬람 그룹이 주도한 반정부 소요 사태가 벌어졌고, 2004년에는 이바디 이맘 제도의 재도입을 위한 반정부 활동도 있었다. 특히 1995년 9월에는 술탄 카부스의 목숨을 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자동차 테러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고로부터 술탄 카부스는 생명을 건졌지만 동승했던 재무담당 국무장관인 카이스 빈 압둘 무나임 알 자와위는 사망했다.

2011년 2월에는 아랍의 봄 영향으로 수도 무스카트와 제2 도시인 소하르에서 임금 인상, 정치 개혁, 직업 창출, 경제문제 해결 등을 촉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술탄 카부스는 공무원 일자리 늘리기와 실업수당 지급, 의회 권한 강화 등의 개혁조치를 발표하고 내각 장관 가운데 1/3을 교체하는 등 발 빠른 대응으로 사태를 가까스로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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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오페라 하우스. 예술 애호가인 술탄 카부스에 의해 설립되어 2011년 개관했다. Andrew Moore/flickr



술탄 카부스는 서양 클래식 음악 애호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과거 영국 유학시절부터 클래식 음악을 즐겨왔고, 즉위하기 6년 전부터 부왕(父王)과의 갈등으로 연금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되면서 더욱 클래식 음악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 1985년에 ‘로열 오만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설립했다. 이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외국인 선생으로부터 서구 음악을 배운 현지 음악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알 부스탄 팔레스 호텔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개최하고 있다.

술탄 카부스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2011년 10월 12일에 개관한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도 엿보인다. 술탄 카부스 국왕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이집트 카이로와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이어 중동에서 세 번째로 설립된 오페라 전용 극장이다. 4년에 걸쳐 완공된 공연장은 손으로 일일이 이슬람 전통 문양을 새긴 오만산 대리석과 원목으로 지어졌다. 또한 이곳에는 국왕이 즐겨 연주하는 것으로 알려진 500톤짜리 파이프 오르간도 설치되어 있다. 총 1,100석을 갖춘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공연장 외에 강당, 정원, 문화 시장, 고급 식당, 뮤지컬 및 연극 공연장 등도 함께 갖추고 있다. 오만은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개관을 기념하여 미국, 이탈리아, 영국, 러시아, 일본, 레바논, 한국 등 7개국의 정상급 예술가들을 초청하여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한국의 경우는 유니버설 발레단이 초청되어 창작 발레인 ‘심청’을 공연하여 주목을 끌었다.

참고로 경제 전문지 <포브스> 의 발표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오만의 국왕 술탄 카부스의 개인 자산은 7억 달러로 세계 왕족 가운데 열한 번째로 부자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특히 그는 세계 최대 규모 중 하나로 꼽히는 호화판 요트인 ‘알 사이드’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6년 독일의 선박 제조사 루르센에 특별 주문하여 만든 이 요트는 길이가 무려 155m에 달한다. 2007년 건조가 완료되었으며, 당시 기준으로 이 요트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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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카부스의 호화판 개인 요트






오만 국가 소개




• 건국: 1749년

• 공식국명: 오만 술탄국(Sultanate of Oman)

• 국왕: 카부스 빈 사이드(Qaboos bin Said, 1970년 즉위)

• 왕세자: 미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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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 술탄국의 지도 ⓒ김정명



오만은 아라비아 반도의 남동부에 위치한 인구 약 4백만 명(2014년 기준)의 절대왕정 국가다. 국토는 309,501㎢로 남한 면적의 약 3배에 달한다. 오만은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 지대인 인근 아랍 국가들과 다르게 해안, 산악 지대, 협곡, 사막 등 다양한 자연환경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국민의 대다수는 아랍인이며 공용어는 아랍어다. 오만은 오랜 해상무역 국가로서 외국인들의 내왕이 잦았고, 1970년대 석유 붐 이후에는 외국인 노동자 유입이 증가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전체 인구 중 외국인이 약 17%를 차지하고 있다. 외국인 출신 지역은 인도, 파키스탄, 페르시아, 아프리카 등 다양하다.

오만은 알 부사이드 왕가가 국가의 주요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절대왕정 체제를 취하고 있다. 그 예로서 알 부사이드 왕가는 현재 오만 정부 부처 장관직 가운데 약 1/3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국왕인 술탄 카부스는 총리직을 겸하고 있다. 그는 과거에 국방장관, 재무장관, 외무장관, 중앙은행 총재직까지도 겸한 적이 있었으나 최근 건강이 악화되면서 사임한 상태이다.

오만의 의회는 하원에 해당하는 슈라 의회와 상원에 해당하는 국가평의회 등 양원제로 구성되어 있다. 슈라 의회 소속 의원은 4년마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국가평의회 소속 의원은 전원 국왕에 의해 임명되며 임기는 4년이다. 하지만 슈라 의회와 국가평의회는 모두 진정한 의미의 대의기구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슈라 의회 소속 의원은 각 선거구에서 주민 투표에 의해 2~3명의 후보가 선발된 후 국왕이 최종적으로 낙점하는 방식으로 선출하기 때문이다. 또한 슈라 의회는 정책 제안은 가능하나 독자적인 입법권이 없어 그 권한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 전원 국왕에 의해 선출되는 국가평의회 소속 의원 역시 입법권이 없는 국왕 자문기관으로서의 역할만 수행하고 있다.

오만은 지리적으로 인도, 유럽, 중동, 아프리카 시장 진출의 거점 여건을 갖추고 있으며, 1970년 현 국왕인 술탄 카부스의 집권 이래 독자적인 정치 및 경제 노선을 추구하면서 개방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오만의 경제는 에너지 자원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은 편이다. 현재 오만의 석유 매장량은 약 52억 배럴에 달하며, 석유‧가스 부문은 국내총생산의 약 49%, 재정수입의 88%, 수출의 68%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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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은 석유가스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관광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걸프 아랍 국가 중 가장 빼어난 자연환경과 기후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Marlon Cureg/flickr



오만은 석유‧가스 부문에 대한 지나친 경제적 의존도를 탈피하기 위해 산업 다각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관광산업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오만은 걸프 아랍 국가 가운데 관광산업 육성을 위한 최적의 자연환경과 기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만만(灣)과 아라비아 해에 걸쳐 1,700km에 달하는 해안선을 지닌 오만의 바다는 가시거리가 20~30m가 될 정도로 맑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양식물과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최근 오만의 해안 지대는 바다거북이, 고래, 철새들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또한 살랄라 지역은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한 달 동안 몬순 우기가 시작되어 안개와 비가 잦고 기온이 섭씨 23도 이하로 내려가기 때문에 여름철 40도 이상을 오르내리는 무더위를 피해 찾는 오만 최고의 여름 휴양지로 각광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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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명 |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를 졸업하고, 모로코의 무함마드 5세대학교(Muhammad V University)에서 이슬람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교수이며 중동전문 비즈니스 사이트인 메나르(www.menar.co.kr)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공저로 <현대 중동국가의 형성과 발전>, <쿠웨이트의 형성과 발전>, <카타르의 형성과 발전>, <오만의 형성과 발전>, <사우디아라비아의 형성과 발전>, <바레인의 형성과 발전>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아랍인의 역사>가 있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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