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레소토 왕가 - 국민의 지지를 한 몸에 얻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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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66회 작성일 16-02-06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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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토인들의 나라’라는 뜻의 레소토는 모슈슈 1세 국왕에 의해 1822년에 처음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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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소토의 전통 가옥 및 레소토와 남아공의 경계 지역




지정학적 특징으로 인해 주변 강대 부족과 유럽 강대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던 소토인들은 모슈슈 1세 국왕의 통솔력과 지혜로움으로 인해 여러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그들만의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모슈슈 1세 국왕의 통솔력은 그의 뒤를 잇는 국왕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모슈슈 1세 국왕 때부터 시작된 왕가를 향한 국민들의 사랑은 내각의 우세와 정치적 불안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왕가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고 있다. 비록 정치적 실권은 미미하지만 근현대사에서 어려움을 극복해온 레소토의 국왕들은 소토인들의 정체성의 구심점으로서 상징적인 역할을 해 오고 있다.




소토인들의 나라, 레소토



레소토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로 정식 명칭은 레소토 왕국이다. 1822년 모슈슈 1세가 바소토 왕국을 세운 후 1868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면서 바수톨란드라고 명명되었다가 1966년 독립하면서 레소토로 명칭을 바꾸었다. 레소토는 소토어로 ‘소토족의 나라’라는 의미이다.

지도상에서 보더라도 작은 나라인 이 나라의 면적은 약 30,355㎢로 우리나라의 약 1/3 크기에 해당한다. 인구 수는 약 180만 명에 이르며, 복잡한 민족 구성을 가진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달리 국민의 99.7%가 소토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용어는 소토어와 영어이며, 정부 형태는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를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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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소토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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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소토의 위치



레소토는 입헌군주제 및 의원내각제 국가로 원수는 국왕, 행정 부의장은 총리이다. 총리는 7명 이상의 각료와 함께 내각을 조직한다. 의회는 양원제로, 상원(의석 33)은 추장 22명과 국왕이 임명하는 11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하원인 국민의회는 120명의 의원(5년마다 개선)으로 이루어진다. 의원 중에서 80명은 직선에 의하여, 40명은 비례대표제에 의하여 선출된다.

레소토는 평균 해발고도가 1,800m 이상의 산악 지대에 자리하고 있으며, 해발고도 1,000m 이상에 위치하고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 그러다 보니 연평균 기온 역시 섭씨 15도에서 높을 때에는 35도에 달하는데 이는 아프리카의 타 지역에 비해 서늘한 편이다. 고지대는 섭씨 영하 18도까지 떨어져서 사막 지역에도 눈이 내리며 산 정상은 1년 내내 눈으로 덮여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스위스’로도 알려져 있다.

국토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정치, 경제적으로 남아공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영국의 보호령이 되기 전에는 남아프리카(현 남아프리카공화국)가 합병하기 위해 수차례 시도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경제의 대부분은 레소토의 남성들이 남아공 근로자로 일하며 받은 급여를 고국에 송금하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약 1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남아공의 광산 및 공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레소토의 대외무역은 거의 대부분 남아공이 독점하고 있다. 이외에 농업 및 다이아몬드 수출과 유럽경제공동체(ECC) 회원국들과 미국의 국제단체 원조에 의존하고 있다.

레소토는 입헌군주국으로 군주는 국가원수를 맡고 있으나 정치 실권은 미약하며,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행정권 및 사법권을 행사하고 있다. 현 국왕인 레치에 3세는 1993년 의회와 내각의 해산을 선언하고 바수톨란드 의회당(BCP)의 지도자이자 수상인 모켈레의 면직을 시도했으나 국민들의 반대와 시위로 인해 취소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점차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혼란과 격동의 레소토 왕가



레소토 왕국의 기원은 모슈슈 1세가 왕국을 구축한 1822년에 시작되었다. 이 당시는 남부 아프리카의 강대 부족인 줄루족의 샤카가 그 일대 지역의 모든 부족들을 점령하며 흡수하려 했기 때문에 남부 아프리카가 여러 갈등과 전쟁으로 혼란스럽던 시기였다. 이에 더해 이미 남부 아프리카 지역에 들어와 있던 아프리카너(보어인들)1) 역시 바소토인들의 거주 지역을 침입하여 그들의 터전을 차지해버렸다.

이에 바소토족의 추장이었던 모슈슈 1세는 소토어를 말하는 사람들과 전쟁 피난민들을 모두 이끌고 바소토 왕국을 구축했다. 1830년대 왕국의 경계는 오늘날의 레소토와 남아프리카 자유주 지역의 1/3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다른 부족들과 보어인들로부터 위협을 피해 지대가 높고 험한 산악 지대에 왕국을 설립하였다



지혜와 외교력, 자애로움을 두루 갖춘 레소토의 아버지, 모슈슈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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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슈슈 1세



모슈슈 1세(Moshoeshoe Ⅰ, 1786~1870년)는 1786년 남부 아프리카의 하이펠트 고원 지역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는 위대한 추장이 되기를 염원했으나 유년기에는 참을성이 부족했고, 그가 내린 명령을 늦게 수행한다는 이유로 부하들을 죽이는 등 다혈질의 청년이었다. 그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 지혜로운 학자였던 모흘로미와 쿠에나 킨스맨의 조언을 충실히 따랐다.

모흘로미는 인간적인 성품을 갖출 것을 당부하였고, 다른 부족들을 통합시키기 위해 다른 혈통과 결혼하도록 조언했다. 또한 항상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였으며, 이런 방법이 실패했을 경우에만 무력을 사용하도록 했다. 평화적 통치에 대한 모흘로미의 충고와 모슈슈의 깨달음은 모슈슈가 더욱 성숙해지는 데 밑거름이 되었으며, 후에 모슈슈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모슈슈는 현명하고 편견이 없는 지도자로 성장해 나갔다. 1833년에는 후에 영국과 외교적 동맹을 맺는 데 가교 역할을 한 선교사들 및 식자(識者)들을 환영했다. 1852년경에는 기병을 잘 훈련시켜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또한 관료제를 만들어 선교학교에서 교육받은 아들들을 참모로 앉히려 했으나 아들들이 지방의 수장이 되기를 더 원했기 때문에 그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유럽의 강대국과 주변 강대 부족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용감히 맞서 국가를 일구었으며, 때에 따라서는 자존심을 굽히고 영국의 보호를 요청하여 궁극적으로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통합과 단결을 유지하였다. 그렇기에 일부 역사가들은 모슈슈 1세를 가리켜 레소토 독립의 시초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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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바 보슈 고원 꼭대기에 있는 모슈슈 1세의 무덤.



모슈슈 1세와 바소토 왕국은 1830년대 중반 남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이주해 오기 시작한 아프리카너들로부터 큰 위협을 받았다. 비록 모슈슈 1세가 아프리카너 농부들로부터 소를 목축하기 위한 용도로 목초지를 빌려 사용했지만, 보어인들은 그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그곳에 경쟁 국가인 오렌지강 자주영토(후에 오렌지 자유국으로 개명)를 세웠다. 이에 모슈슈 1세는 바소토 왕국의 이익을 위해 당시 영국인과 아프리카너들의 경쟁관계를 이용하는 외교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토지와 소에 대한 분쟁은 1858년과 1865년 바소토와 자유국 간에 두 차례의 전쟁을 야기했다. 두 번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아프리카너가 바소토 왕국의 비옥한 토지 대부분을 점령하게 되자 모슈슈는 왕국의 자주권을 거의 포기할 뻔했으나, 1868년 영국에 바소토 왕국의 보호권을 요청하는 데 성공했다.

바소토 왕국이 영국의 관리하에 놓이자 왕국의 이름을 바수톨란드로 바꾸었다. 이후 바수톨란드는 케이프 식민지에 의해 관리되다가 바소토인들이 1880~1881년 케이프 관리들에 저항한 대포 전쟁 이후 1884년에 다시 영국에게 그 지배권이 넘어갔다. 국민들은 그들의 반(反)식민지주의에 대한 입장을 진보연합과 평민의회와 같은 단체를 통해 피력했다. 또한 영국식민지인 남아프리카연방이 1910년 성립한 이후 바수톨란드를 병합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끝까지 거부하는 근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불운의 자유 민주주의 수호자, 모슈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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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슈슈 2세



레소토의 현대 정치 활동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 레소토를 통치해 오고 있는 2개의 정당의 설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당시 통치자는 모슈슈 2세(Moshoeshoe Ⅱ, 1938~1996년)로 그의 본명은 콘스탄틴 베렝 세이소이고, 19세기 바소토 왕국을 세운 모슈슈 1세의 후손이다.

그는 부친인 세이소 그리피스의 뒤를 이어 1960년 바수톨란드 최고 수장의 자리에 올랐다. 바수톨란드가 196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루자 독립 왕국의 초대 국왕인 모슈슈 2세가 되었다. 바수톨란드의 로마 대학과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앰플포스 칼리지 및 코퍼스크리스티 칼리지에서 유학 후 귀국했다.

독립 왕국 레소토의 초대 국왕인 모슈슈 2세는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조나단 총리가 모슈슈의 정치 개입을 우려해 1966년과 1970년 두 차례에 걸쳐 가택 연금을 시키는 바람에 네덜란드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모슈슈 2세의 부친인 세이소 그리피스 전 국왕을 비롯하여 그 이후의 왕들은 1952년에 설립된 은쭈 모켈레가 지휘하는 바수톨란드 의회당(BCP)을 지원했다. 바수톨란드 의회당은 전통 추장제와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 제도와 그것을 지지하는 정권을 반대하고, 아프리카 전 지역에 걸친 자유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반면, 모슈슈 1세의 증손자인 리부아 조나단 추장은 1957년에 설립된 바수톨란드 국민당을 이끌고 있는데, 추장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지원을 받으며 남아프리카 정부의 개입 및 지원을 호의적으로 수용했다.

이 두 정당은 쿠데타를 일으킬 만큼 경쟁관계를 넘어선 현대 정치의 갈등 요인이 되고 있다. 1970년 1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여당인 국민당이 열세를 면치 못하자 그 당시 총리였던 레아부아 조나단은 즉시 선거가 무효임을 선언했으며 헌법정지의 비상조치를 취했다. 또한 야당 지도자를 체포하고 국왕 모슈슈 2세를 추방했다.

망명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아프리카 자유를 위한 기구’를 설립했다. 이 기구는 독립과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모임으로서 모슈슈 2세는 아프리카 각국 지도자들 및 식자들을 초청하여 아프리카의 발전적 앞날에 대해 모색하였다. 비록 망명 중에 있는 처지이기는 했으나, 국왕이 몸소 보여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노력은 레소토 국민에게 커다란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1986년 1월, 육군 소장 레카냐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조나단 정부는 전복되었고, 모슈슈 2세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왕위에 복위하였다. 이후 레카냐는 군사평의회를 구성하여 레소토를 통치하였으며, 1990년 모슈슈 2세를 다시 퇴위시키고 모슈슈 2세의 아들인 레치에 3세를 국왕의 자리에 임명하였다. 모슈슈 2세는 영국에서 다시 망명생활을 하며 민주 선거를 실시하려고 애를 썼지만 실패하였다.

1991년에 엘리아스 라마에마 육군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장악하게 되고 모슈슈 2세는 1992년에 레소토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93년에 마침내 자유선거가 실시되고, 1995년에 레치에 3세와 남아공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 다시 국왕으로 복위했다. 그러나 1년 뒤인 57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불운을 맞았다.



박식함과 소박함을 갖춘 레치에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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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치에 3세



레치에 3세(Letsie Ⅲ, 1963년~현재)는 레소토의 현(現) 국왕으로, 본명은 데이비드 모하토 베렝 세이소이다. 영국 노스요크셔에 있는 명문 사립학교인 가톨릭 기숙학교 앰플포스 칼리지, 레소토 국립대학과 영국 브리스톨 대학 및 케임브리지 대학, 런던대학교 등에서 법학, 개발학, 농업 경제학 등의 학업을 마친 후 1989년에 레소토로 귀국했다.

군부의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레카냐 군사평의회 의장에 의해 강제 퇴위된 아버지 모슈슈 2세의 뒤를 이어 1990년에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강제 추방된 모슈슈 2세의 재즉위 기회를 노리던 중, 1994년에 레치에 3세는 총리를 비롯한 전 각료를 해임하고 의회를 해산시키기에 이른다. 이에 레소토 국민들은 왕궁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게 되는데 이를 진압하던 경찰과 군대가 발포한 총에 의해 일부 시민들이 희생되자, 그는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95년 퇴위하였다. 대신 그는 부당하게 퇴위된 그의 아버지 모슈슈 2세가 다시 국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도와 성공하지만, 1년 후인 1996년 1월 모슈슈 2세가 교통사고로 서거하면서 다시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쿠데타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레소토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총리의 우세한 영향력으로 인해 국왕의 정치적 권한은 지극히 미약하며 의례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레치에 3세는 국왕이 된 이후 전원생활을 즐기며 농작물을 직접 경작하는 소탈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또 다른 아프리카 군주들과 달리 한 명의 부인에게만 충성할 것을 맹세한 이후 지금까지 그 맹세를 지키고 있어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내각과 투쟁하며 국가와 국민의 안정에 기여한 왕가



레소토 왕가는 입헌군주국이나 다른 나라들과 달리 국왕의 정치적 권한이 지극히 미미한 편이다. 레소토(바소토 왕국)의 초대 국왕 모슈슈 1세는 레소토를 흡수하려는 아프리카너들 및 남아공을 비롯해 역시 소토족을 병합하려는 주변 흑인 부족들의 여러 위협들을 평화롭고 온건한 방식으로 물리치고 국가를 건립하였다. 또한 소토족 외에 그를 따르는 소수 민족들을 보호하는 데 힘써 레소토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1966년 바수톨란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레소토의 초대 국왕으로 모슈슈 2세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여야의 대립과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려는 총리의 야심, 군사정권의 개입과 그로 인해 연이어 발생하는 쿠데타로 인해 현대의 레소토는 불안정의 연속으로 국왕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 채 명목상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슈슈 2세는 국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이름뿐인 군주로 머물지 않으려고 애썼다.

뒤이어 즉위한 레치에 3세 현 국왕은 1994년 8월 총리를 비롯한 내각을 해임하고 의회를 해산시켰으며, 헌법 일부의 정지를 선언하였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아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95년에 퇴위하였다. 약 1년 후 모슈슈 2세의 서거로 레소토의 국왕으로 복위하였다.

레소토 정당들의 권력 투쟁 및 군사 쿠데타로 인해 불안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건국이념을 굳건히 세우고 국민을 보살피려는 마음을 몸소 보여 주었던 모슈슈 1세, 그리고 망명 중에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던 모슈슈 2세의 강한 의지, 정치적 권력보다는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레치에 3세의 실천과 노력으로 인해 레소토의 국왕들은 미약한 정치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레소토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다.



아프리카너(Afrikaner),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거주하는 백인 민족 집단이다. 주로 네덜란드인의 후손을 의미하지만, 크게 보았을 때 프랑스인, 독일인들의 후손도 포함한다. 프랑스 루이 16세의 박해를 피해 온 위그노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온 독일인들로서, 이들은 스스로를 유럽인이라기보다는 아프리카인으로 규정짓는다. 이들 모두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한다. 초반에는 네덜라드어로 ‘농부’를 뜻하는 ‘보어’(Boer)인으로 불리다가 점차 아프리카너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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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서영 | 한국외대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글쓴이 윤서영은 아프리카 문학 및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비교문학과에서 나이지리아 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하우사문학의 혼종성 연구>, <비교문학 관점에서 본 영향과 수용의 문제>, <문학저널 kwani?에 나타난 소수문학적 특징>, <가나 대중음악의 혼종성> 등이 있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5.11.20.



주석


1


아프리카너(Afrikaner),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거주하는 백인 민족 집단이다. 주로 네덜란드인의 후손을 의미하지만, 크게 보았을 때 프랑스인, 독일인들의 후손도 포함한다. 프랑스 루이 16세의 박해를 피해 온 위그노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온 독일인들로서, 이들은 스스로를 유럽인이라기보다는 아프리카인으로 규정짓는다. 이들 모두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한다. 초반에는 네덜라드어로 ‘농부’를 뜻하는 ‘보어’(Boer)인으로 불리다가 점차 아프리카너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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