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서양화, 조선을 깨우다 - 실학자들이 수용한 서양화법과 조선 후기 화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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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5회 작성일 16-02-06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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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무렵, 처음 타본 기차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기차도 신기했지만 여행 중 나를 정말 놀라게 했던 것은, 난생 처음 청량음료를 마셨던 일이다. 목이 말라 무심코 한 모금 마셨다가 코를 찌르는 탄산가스에 얼마나 놀랐던지 그 충격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조선시대 문인들에게도 세 살 아이의 기차여행 같은 놀라운 체험이 있었다. 서양화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영·정조 연간(1724~1800)에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들의 기록이나 실학자들의 글에 의하면,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서양 미술을 처음 대했을 때의 반응은 충격 이상이었다. 그들을 놀라게 했던 서양화는 원근법과 명암법을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그림이었다. 살아 있는 듯 생생한 서양화의 표현법은 조선 후기 지식인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서양화에 반한 실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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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샬. 그와 소현세자의 만남은 조선과 서양 문물의 첫 만남을 의미한다.



이 땅에 서양화가 처음 전해진 것은 언제일까? 그것은 소현세자(1612~1645)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병자호란(1636) 직후 청나라에 연행되었던 소현세자가 8년 만에 귀국할 때, 서양인 신부 아담 샬(Adam Schall)에게서 천주교 교리책을 포함한 <천주상> 한 폭을 받아왔던 것이다.

이후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들이나 청의 기술 문명을 도입하려는 실학자들에 의해, 서양화가 본격적으로 조선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서양화법에 대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흥미로운 목소리를 들어보기로 하자.

서양 과학서를 읽고 선진 과학기술을 도입할 것을 주장했던 이익(1682~1764)은 <화상요돌(화상의 오목하고 돌출됨)>이라는 글에서, 서양화를 접하고 느낀 감동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요즘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들이 서양화를 사다가 대청에 걸어 놓는다. 처음에 한 눈을 감고 다른 한 눈으로 오랫동안 주시하면 건물 지붕의 모퉁이와 담이 모두 실제 형태대로 튀어 나온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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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을 기본으로 한 원근법은 선만으로 사물의 원근 관계를 알게 해준다.



이익이 본 ‘대청에 걸려 있는 서양화’는 원근법과 입체감이 잘 표현된 풍경화일 것으로 보인다. 원근법이란 사물이 뒤로 갈수록 좁아 보이는 현상을 그린 투시화법으로서,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화면에 담는 서양화의 공간표현법을 말한다. 이러한 투시화법은 전통회화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방식이다. 그 생생한 실재감으로 인해 이익에게는 서양화가 무척이나 신기하게 다가왔던 듯하다. 이어지는 글에서 그는 서양화를 좀 더 체계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서양 과학서적인 『기하원본』을 들춰보고 거기서 해답을 얻고자 하는 등 실학자다운 태도를 보여준다.

이익처럼 중국에 다녀오지 않은 실학자가 느낀 서양화에 대한 인상이 이 정도로 강렬했던 것을 생각하면, 연경의 천주당 벽화를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 느낀 경이로움은 충격 이상이었을 것이다. 1778년에 연경에 다녀온 이덕무(1741~1793)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천주당의] 북쪽 벽에는 철사 줄이 목에 매어 있는 큰 개의 그림이 있는데 언뜻 보니 물려고 덤비는 것 같아 무서웠다. 그 그림 밑에는 살아 있는 개 몇 마리가 그늘에 누웠는데 그림의 개와 살아 있는 개가 구분이 되지 않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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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견도, 작자미상. 서양화의 명압법을 충실히 구사하여 개의 근육과 입체감을 잘 살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덕무가 본 개 그림은 표현이 얼마나 사실적이었던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마저 느끼게 했던 모양이다. 천주당에서 본 개 그림이 살아 있는 개를 보는 듯했다는 이덕무의 글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맹견도>를 연상시킨다.

<맹견도>는 종이에 먹과 채색을 사용하여, 쇠사슬에 묶인 채 기둥 옆에 엎드려 있는 맹견을 그린 그림이다. 언제 누가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서양화법을 충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정면을 응시하며 엎드린 개의 자세는 사진처럼 정확하게 묘사되었고, 햇빛에 반사된 털은 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이 그림을 통해 볼 때, 이덕무가 연경에서 보았던 ‘살아있는 듯한 개 그림’은 머지않은 시기에 조선의 동물화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놀라워라! 서양화



서양화법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글은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다. 그는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70수를 축하하는 사신의 수행원으로 중국에 가게 되었다. 이때 성경, 연경, 열하 등지를 여행하고 『열하일기』를 남겼다. 그 가운데 「양화」라는 글에서 자신이 처음으로 접했던 서양화에서 받은 놀라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천주당 가운데 바람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 구름과 인물들은 보통 생각으로는 헤아려 낼 수 없었고, 또 보통의 언어, 문자로는 형용할 수도 없었다. 내 눈으로 이것을 보려고 하는데 번개처럼 번쩍이면서 먼저 내 눈을 뽑는 듯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내 가슴 속을 꿰뚫고 들여다보는 것이 싫었고, 또 내 귀로 무엇을 들으려고 하는데 굽어보고 쳐다보고 돌아보는 그들이 먼저 내 귀에 무엇을 속삭였다.…또 사람 머리, 사람 몸뚱이에서 새 날개가 돋아난 자도 있었으며 백 가지가 기괴망측하여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해 낼 수도 없었다. … 천장을 우러러보니 수없는 어린애들이 오색구름 속에서 뛰노는데,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살결을 만지면 따뜻할 것만 같고 팔목이며 종아리는 살이 포동포동 쪘다. 갑자기 구경하는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놀라 어쩔 바를 모르며 손을 벌리고서 떨어지면 받을 듯이 고개를 젖혔다.3)

박지원은 청나라의 선진 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고 했던 북학운동의 선구자답게 천주당 벽화에서 본 서양화에 대한 소감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내 눈을 뽑는 듯하다’거나 ‘그들이 먼저 내 귀에 무엇을 속삭였다’는 구절에서 보듯이, 그림 속 인물로부터 강렬한 인상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어린 아이들의 묘사가 얼마나 사실적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살결을 만지면 따뜻할 것만 같다’는 등의 감각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박지원은 서양화에 대한 놀라움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한편, 몸에 날개가 달린 천사들의 불합리한 모습에서는 불쾌감을 느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납득하기 어려운 서양 종교화의 인물 표현에서 한편으로 불쾌감을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한 혼란스러운 입장을 문학적으로 잘 표현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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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옵스큐라. 화가들이 실물과 똑같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발명된 도구이다.



서양화의 사실적인 표현에 놀라움을 느꼈던 박지원과 달리, 정조대와 순조대에 활약했던 정약용(1762~1836)은 회화 기법보다 과학적인 측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정약용은 「칠실관화설」에서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의 원리를 적용하여 실험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했다. ‘카메라 옵스큐라’란 물체를 실재와 똑같이 그릴 수 있게 해주는 광학기구로, 원리와 구조는 카메라와 비슷하다. 그는 이런 과학 기구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체험을 하고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집이 산과 호수 사이에 위치하니 그곳에 모래톱과 산봉우리의 아름다움이 좌우에 비치고, 대와 나무는 숲을 이루고 꽃과 바위는 층을 이루고, 누각과 울타리는 비스듬히 이어졌다. 이에 맑고 좋은 날을 택하여 밖으로부터 빛이 들어올 수 있는 모든 창문과 문을 굳게 닫아 방안을 칠흑처럼 어둡게 하고 [벽에] 구멍 하나만 남긴다. 안경알 하나를 취하여 그 구멍에 안정시킨 다음, 눈처럼 흰 종이판을 안경알과 몇 자 거리에 놓고 [그 종이에 비치는] 상을 받으면 모래톱과 산봉우리의 아름다움, 대와 나무숲, 꽃과 바위층, 누각과 담장의 이어짐이 모두 들어와 종이판 위에 떨어진다.…만일 지금 누가 초상화를 그리되 머리털 하나의 차이도 원치 않는다면 이 방법을 제외하고는 더 좋은 것은 없으리라.4)

이 글에서 정약용은 벽의 구멍을 통과한 광선이 렌즈를 거쳐 투사되는 현상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광학기구를 이용하여 직접 그림을 그려볼 정도로 서양화법에 크게 매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진문물에 대한 이 같은 정약용의 관심은 19세기 화단에 서양의 과학 지식이 반영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색’다른 조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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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 자화상. 서양화법 도입의 선구자답게 옷과 얼굴에 음영을 넣어 입체감을 살렸다.



18세기 이후 조선 후기 화단에 유입된 서양화는 여러 분야의 그림에 영향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산수화에 보이는 변화가 가장 주목할 만하다. 서양화법을 선두에서 받아들인 화가로는 김홍도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강세황(1713~1791)이 거론된다. 그는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로, 한국적 남종문인화풍5)을 정착시키는 데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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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동구도, 1757년 강세황, ≪송도기행첩≫. 바위의 입체감과 미묘함 색감이 돋보이는 이색적인 산수화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개성시가도, 1757년 강세황, ≪송도기행첩≫. 개성시가의 모습을 일점투시 원근법으로 그렸다. 기존의 산수화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세황은 45세 되던 해인 1757년 7월에 개성을 여행한 뒤 《송도기행첩》을 제작했다. 이 화첩 가운데 <영통동구도>와 <개성시가도>>는 동·서양화의 접목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서양화의 투시원근법과 채색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영통동구도>는 영통동 계곡의 명물인 거대한 바위에 초점을 맞추어, 가까운 바위는 크게 그리고 멀어지는 경물은 작게 그렸다. 산수화에 원근법을 적용한 것이다. 게다가 바위표면에는 서양화의 채색법을 사용하여 그림에서 독특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초록과 청록이 어우러진 미묘한 바위의 색감은 흡사 서양의 수채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특이하다. <영통동구도>에 이어, 개성 시내의 모습을 투시원근법으로 그린 <개성시가도> 또한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긴다. 이처럼 강세황은 새로운 미술조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기화함으로써 우리 미술사에서 의미 있는 자취를 남겼다.

원근법과 함께 서양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손꼽히는 것은 입체감이다. 서양화에서는 광선의 방향에 따라 생기는 명암 대비로 사물의 양감을 표현한다. 이처럼 빛과 그림자를 통해 입체감을 나타내는 서양화와 달리, 동양화에서는 변화하는 광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동양화가 서양화에 비해 평면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서양화법이 전래되면서 조선시대 그림에도 입체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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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초상(반신상), 작자미상. 서양화법의 영향으로 얼굴의 입체감이 두드러지며, 검은 반점까지 표현될 정도로 사실적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구도, 신광현. 물체에 비치는 광선의 방향이 일정하게 설정되어 입체감 표현이 두드러진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명암법에 의해 입체감이 느껴지도록 제작된 그림으로는 작자미상의 <신임 초상>이나 신광현(1813~?)의 <초구도> 등이 있다. 이 그림들은 이전 시대 작품과 달리, 광선의 방향이 일정하게 설정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인물의 한쪽 뺨을 어둡게 색칠함으로써 양감이 두드러지게 표현되고, 건물과 나무에 그림자 처리가 더해지면서 입체감이 나타난다. 앞에서 살펴본 <맹견도> 역시 광선에 따른 입체감 묘사가 탁월하여 대상이 생동감 있게 표현된 예라고 할 수 있다.




여백에 대한 새로운 인식, ‘하늘색’



동양화의 특징 가운데 서양화와 가장 크게 구별되는 요소는 바로 ‘여백’이다. 여백이란 그림이 그려지는 화면에서 그려진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빈 공간을 말한다.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지만, 그대로 하늘이 되기도 하고 안개나 공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서양화에서는 빈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빈 곳을 남길 경우, 미완성작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실학자 홍대용(1731~1783)은 북경의 천주당에서 하늘을 색칠한 서양화를 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누각과 인물은 모두 채색을 가했는데 누각은 중간이 비었으며 뾰족하고 움푹함이 서로 알맞았고 인물은 둥둥 떠서 움직이고 있었다. 더욱이 원근법에 조예가 있었는데 냇물과 골짜기의 나타나고 숨은 것이라든지 연기와 구름의 빛나고 흐린 것이라든지, 먼 하늘의 공계(空界)까지도 모두 정색(正色)을 사용하였다. 둘러보매 실경을 연상케 하여 실은 그림이란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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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동에서 바라본 인왕산도, 강희언. 하늘을 여백 없이 푸른색으로 색칠한 독특한 진경산수화이다. <개인 소장>



홍대용은 서양화의 원근법은 물론 채색법에도 구체적인 관심을 보였다. 특히 ‘먼 하늘의 공계까지 모두 정색(正色)을 사용했다’는 구절은 그의 예리한 관찰력을 보여준다. 조선의 산수화에서 하늘은 여백으로 비워둔 반면, 서양화에서 하늘은 색이 칠해진 하나의 구체적인 공간이다. 홍대용은 바로 이 같은 동·서양화의 차이를 포착했던 것이다. 홍대용이 주목했던 서양화의 ‘하늘색’ 표현은 조선후기 산수화에도 영향을 주어 마침내 하늘을 채색한 그림이 등장하게 된다. 강희언(1738~1784 이전)의 <도화동에서 바라본 인왕산도>가 그것이다.

강희언은 조선 후기에 활동한 중인화가로 서양화법의 수용에 있어 강세황만큼이나 적극적이었다. 그는 인왕산의 실제 경치를 그리면서 배경에 보이는 하늘 전체를 엷은 푸른색으로 채색했다. 이는 기존의 산수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여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는 특별한 시도이다. 강희언은 이외에도 서양화법적 실험을 통해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이러한 실험정신은 당시 화단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삶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표현의 차이를 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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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구도, 김두량, 서양화법의 영향으로 털의 묘사는 물론 겨드랑이를 긁는 개의 눈초리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천주교와 함께 유입된 서양화는 실학자들에 의해 대상의 ‘참다운 형상’을 묘사하는 데 적합한 화법으로 여겨져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서양화법에 매료되었던 실학자들의 태도를 보면,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이 발견된다.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과 같은 이용후생학파(북학파)는 주로 서양화의 회화적 표현에 관심이 많았다. 이에 반해 이익이나 정약용 같은 경세치용학파는 회화의 원리나 과학기구의 사용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의 학문적 지향이 다르듯, 서양화법에 대한 인식 또한 특정 방면으로 나타나는 것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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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초상, 서양화법과 근대 사진술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조선의 전통양식을 따른 채용신의 인물화. 요철, 명암 등이 표현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관심을 받으며 유입된 서양화법은 다양한 분야의 그림에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서양화법의 유행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 ‘정신’을 중요시한 동양화의 전통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눈에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옮겨 그리기보다 ‘마음’으로 해석하여 표현하고자 했다. 그 결과 동양의 화가들은 먹과 선을 위주로 하여 대상의 의미와 느낌을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반면 서양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화폭에 담기 위해, 원근법과 화려한 색을 사용하여 사실적인 표현을 추구했다. 동양화와 서양화에 나타나는 이 같은 차이는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동양인과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집중하는 서양인의 삶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 태도의 차이가 결과적으로 그만큼 다른 회화적 표현을 낳았던 듯하다.

참고문헌

  • 조선시대 서양화법의 수용에 관한 문헌으로는 『조선시대 그림 속의 서양화법』(이성미, 2008, 소와당)이 대표적이다. 본문 가운데 ‘서양화법에 대한 실학자들의 견해’를 다룬 부분은 이 책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近世使燕者 市西洋畵掛在堂上 始閉一眼以隻睛注視久 而殿角宮垣皆突起如眞形 (李瀷, 『星湖僿說』 第四卷, 「萬物門」, ‘畵像坳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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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墻 畵一大犬鐵索其頂 瞥看則可怖 其欲噬 其下有活犬數頭臥 于陰地渾不可辨 (李德懋, 『靑莊館全書』 「入燕記」下,(六月十四日 壬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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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主堂中 墻壁藻井之間 所畵雲氣人物 有非心智思慮所可測度 亦非言語文字所可形容 吾目將視之而有赫赫如電先奪吾目者 吾惡其將洞 吾之胸臆也 吾耳將廳之耳俯仰轉眄先屬吾耳者…有人首人身 而鳥翼飛者 百種怪奇不可方物…仰視藻井則 無數嬰兒跳蕩彩雲間 櫐櫐懸空而下 肌膚溫然手腕脛節肥若緣紋 驟令觀者莫不驚呼錯愕 仰首張手以承其隳也 (朴趾源, 『熱河日記』, 「洋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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室於湖山之間 有洲渚巖巒之麗 映帶左右 而竹樹花石叢疊焉 樓閣藩籬邐迆焉 於是選晴好之日 閉之室 牕欞牖戶之有可以納外明者 皆塞之 令室中如漆 唯留一窮 取靉靆一隻 安於窮 於是取紙版雪暟 者離靉靆數尺 而受之映 於是洲渚巖巒之麗 與夫竹樹花石之叢疊 樓閣藩籬邐迆者 皆來落版上…今有人欲謀寫眞 而求一髮之不差 捨此再無良法(丁若鏞, 『丁茶山全集』上, 「詩文集·說」(一集 十卷), (文獻編纂委員會編, 1960), p.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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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문인화풍


남종문인화란 학문이 높은 선비들이 공부하는 여가에 취미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화풍은 대체로 여백이 많고 수묵을 위주로 하되 연한 색을 곁들이기도 하여 담백한 것이 특징이다. 문인화가로는 조선후기에 활약한 심사정, 강세황, 이인상 등이 유명하고, 말기에 이르러 김정희파에 의해 크게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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樓閣人物 皆設眞彩 樓閣中虛凹凸相參 人物浮動如生 尤工於遠勢若川谷顧晦烟雲明滅 至於遠天空界皆施正色 環顧14547442146273.png然不覺其非眞也(洪大容, 『湛軒書』 外集, 「劉鮑問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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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 미술사학 박사
김 정숙은 옛 그림의 의미와 가치를 대중과 공유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최근에는 동·서양화의 비교를 통해 동양화의 특징과 원리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예술세계], [옛 그림 속 여백을 걷다] 등이 있다.


출처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 본다.


발행2015.11.24.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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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世使燕者 市西洋畵掛在堂上 始閉一眼以隻睛注視久 而殿角宮垣皆突起如眞形 (李瀷, 『星湖僿說』 第四卷, 「萬物門」, ‘畵像坳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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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墻 畵一大犬鐵索其頂 瞥看則可怖 其欲噬 其下有活犬數頭臥 于陰地渾不可辨 (李德懋, 『靑莊館全書』 「入燕記」下,(六月十四日 壬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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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主堂中 墻壁藻井之間 所畵雲氣人物 有非心智思慮所可測度 亦非言語文字所可形容 吾目將視之而有赫赫如電先奪吾目者 吾惡其將洞 吾之胸臆也 吾耳將廳之耳俯仰轉眄先屬吾耳者…有人首人身 而鳥翼飛者 百種怪奇不可方物…仰視藻井則 無數嬰兒跳蕩彩雲間 櫐櫐懸空而下 肌膚溫然手腕脛節肥若緣紋 驟令觀者莫不驚呼錯愕 仰首張手以承其隳也 (朴趾源, 『熱河日記』, 「洋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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室於湖山之間 有洲渚巖巒之麗 映帶左右 而竹樹花石叢疊焉 樓閣藩籬邐迆焉 於是選晴好之日 閉之室 牕欞牖戶之有可以納外明者 皆塞之 令室中如漆 唯留一窮 取靉靆一隻 安於窮 於是取紙版雪暟 者離靉靆數尺 而受之映 於是洲渚巖巒之麗 與夫竹樹花石之叢疊 樓閣藩籬邐迆者 皆來落版上…今有人欲謀寫眞 而求一髮之不差 捨此再無良法(丁若鏞, 『丁茶山全集』上, 「詩文集·說」(一集 十卷), (文獻編纂委員會編, 1960), p. 202.)

5남종문인화풍


남종문인화란 학문이 높은 선비들이 공부하는 여가에 취미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화풍은 대체로 여백이 많고 수묵을 위주로 하되 연한 색을 곁들이기도 하여 담백한 것이 특징이다. 문인화가로는 조선후기에 활약한 심사정, 강세황, 이인상 등이 유명하고, 말기에 이르러 김정희파에 의해 크게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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樓閣人物 皆設眞彩 樓閣中虛凹凸相參 人物浮動如生 尤工於遠勢若川谷顧晦烟雲明滅 至於遠天空界皆施正色 環顧14547442146273.png然不覺其非眞也(洪大容, 『湛軒書』 外集, 「劉鮑問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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