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모로코의 알라위트 왕가 - 북아프리카 유일의 입헌군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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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88회 작성일 16-02-06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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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지역에 위치한 모로코는 일당 통치를 하는 다른 북아프리카 국가들과 달리 입헌군주국으로서 국왕은 왕권을, 사법권은 정부와 상·하원으로 구성된 의회에 의해 행사된다. 모로코는 20세기 초반에 프랑스와 스페인의 지배를 받다가 1956년 독립했으며, 1958년에는 스페인에게 빼앗긴 지역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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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의 의회 건물



독립 후 알라위트 왕가의 전(前) 국왕인 하산 2세는 강력한 철권통치를 바탕으로 38년 간 국정을 운영하며 독립 이후 혼란스러운 사회를 안정시켰다. 이후 즉위한 무함마드 6세 국왕은 안정된 사회 분위기에서 소수민족의 문화 보호, 국민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 보장과 같은 민주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여러 정책들을 시행함으로써 국민들의 인기와 기대를 얻고 있다.

국왕 개개인의 정치적 성향은 다르지만, 1600년대부터 재위한 알라위트 왕가의 국왕들은 각각의 시대와 정세의 흐름에 맞게 통치를 펼치면서 모로코인들의 단결을 이끌어내며 현재까지 굳건한 왕가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모로코 국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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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의 공식 국명은 모로코 왕국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수도는 라바트이며 우리에게 영화로 잘 알려진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최대 경제도시이다. 약 710,850㎢의 면적에 대략 3,2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마그레브1) 지역의 일부로 튀니지, 알제리, 모리타니, 리비아 등과 문화, 역사, 언어가 유사하다.

모로코는 평균 해발고도가 800m인 산악국으로, 북서 아프리카의 아틀라스 산계가 저지대와 암석으로 이루어진 고원들 위로 솟아 있다. 암석 고원이 국토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모로코의 산들이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높다. 반면 비옥한 저지대 또한 자리하고 있으며 국토의 약 1/5을 차지하고 있는 이 지역에서 농경이 이루어진다.

모로코는 지진 활동이 심한 지대에 있어 지진이 자주 발생하기도 한다. 북부 지역과 중부 대부분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이며 남쪽으로 갈수록 반건조 기후와 사막 기후를 띠고 있다. 평균 기온은 해안 지대가 섭씨 17~23도, 내륙이 섭씨 10~27도 정도된다. 언어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식민지배 영향으로 베르베르어, 아랍어와 스페인어, 프랑스어가 공용어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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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의 지형. 모로코는 평균 해발고도가 800m인 산악국으로, 북서 아프리카의 아틀라스 산계가 솟아 있다.






모로코의 상징, 알라위트 왕가



다른 여러 북아프리카 국가와는 달리 모로코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베르베르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베르베르족은 한때는 모로코와 이집트 사이의 일대를 지배하기도 했으며, 8세기경에는 스페인을 지배하기도 했다. 8세기 초 한 무슬림 군대가 알제리 서부와 모로코를 정복했을 때 그 군대는 대부분 베르베르인이었다. 베르베르인의 영토에서 이슬람교가 우세했다는 것은 이슬람 지역에서 베르베르인이 우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789~790년에는 마호메트의 피난민 후손인 이드리스가 페스에서 왕국을 건설했는데, 이 왕국은 모로코 북부에서 이슬람교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어지는 5세기 동안 모로코가 위치한 북아프리카에는 몇 개의 왕조가 탄생했는데 그 첫 번째는 파티마 왕조이다. 이 왕조는 910년 베르베르인의 반란을 등에 업고 알카이라완에서 정권을 장악한 뒤 아글라브 왕국을 병합했고, 958~959년에 모로코의 많은 지역을 침범했다. 이후 정통 베르베르족의 운동이 살아났고 그 기운이 모로코와 알루시아까지 퍼졌다.

뒤이어 알모라비드 왕조가 등장하여 모로코의 마라케시를 수도로 정했으며, 이를 이어 알모하데가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알모하데의 통치는 철저하게 이슬람의 방식을 따랐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마그리브에서 발본색원되었다. 12세기 후반 수피 교단은 마그리브 전역에서 기반을 다진 후 이를 발판으로 민중적인 이슬람교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1212년 알모하데 제국은 스페인에서 그리스도교 군대에게 패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알모하데 정권이 추방시켰던 아랍 목축민에 대한 통제도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예전의 베르베르인 영토에서는 아랍화가 진전되기 시작하여 언어, 문화, 종교, 인종 등이 혼성되었다. 이미 북부 모로코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자나타족의 한 집단인 바누 마린은 1269년에 마라케시를 점령하고 도읍을 페스로 옮겼다. 이렇게 등장한 마린 왕조는 2세기 동안 모로코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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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위트 왕가를 개창한 알-라시드. 현재 모로코 영토 대부분을 통합하여 국가를 건설했다.



이후 메리니드, 사아드 등의 왕조를 뒤이어 1665년 알라위트 왕조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모로코를 통치해오고 있다. 이 왕조는 자신들이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알라위트 왕가를 개창한 초대 왕 알-라시드 왕은 현재의 모로코 영토 대부분을 통합하여 안정적인 국가를 탄생시켰다. 현재 국왕인 무함마드 6세 국왕을 포함하는 알라위트 왕가는 현재까지 모로코를 통치해오고 있다. 그중 압달라 왕은 왕위를 위협했던 형의 방해로 무려 여섯 번의 재위와 퇴위를 반복하기도 했다.2) 시디 모하메드(1757~1790년) 왕은 왕국으로서는 최초로 1787년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였으며,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을 장려하였다.

20세기 초반 모로코는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서 식민 지배를 받았다. 1912년 모로코의 술탄과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인해 모로코는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프랑스의 통치를 받았다. 수많은 프랑스 관료들이 모로코에 파견되었고, 그들은 모로코 전역에 유럽식 법치 제도를 확립시켰으며, 프랑스의 발전된 기술력을 도입하여 모로코에 도로를 건설하고 철도, 전기, 통신 등의 인프라를 구축해 나갔다. 오늘날 모로코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이나 관리 체제와 교육 제도 등이 프랑스와 닮아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독립과 근대국가 건설을 향한 알라위트 왕가의 열망



유럽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모로코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독립과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이 모로코 민족주의자들의 중심에는 무함마드 5세(재위 1957~1961년)가 있었다. 그는 물레이 유수프 술탄의 셋째 아들로, 프랑스 식민 당국은 다른 아들들에 비해 무함마드 5세가 자신들에게 더 협조적일 것이라 기대하여 그를 술탄으로 지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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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바트에 있는 무함마드 5세의 무덤 외관과 내부




무함마드 5세는 1930년에 제정된 베르베르 다히르 법을 폐기할 것을 프랑스 당국에 촉구함으로써 민족주의적 의도를 차츰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법은 모로코 내에 거주하는 두 민족인 베르베르 민족과 아랍 민족에 각기 다른 법률 체계를 적용함으로써 두 종족 모두에게 반발을 사고 있었다. 베르베르 다히르 법은 명분상 보호국인 모로코를 지원하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모로코를 분열시키고 민족주의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모로코의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주의 국가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무함마드 5세를 모로코의 상징으로 삼기 위해 그의 권력 계승을 기념하는 축제를 연례행사로 준비하기도 했다. 이 축제 중에 그는 연설을 통해 온건한 목소리와 내용이긴 하나 민족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을 보였다. 그에 대한 국민들의 인기와 지지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자 프랑스 당국은 이 축제일을 공식 휴일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후 10년 동안 무함마드 5세는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운동에 직접적으로 가담하는 대신 뒤에서 조용히 지원을 계속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무함마드는 연합국을 지지했고, 1943년에는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만나기도 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무함마드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격려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무함마드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는 반대로 1944년 1월 프랑스는 수많은 민족주의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1947년 무함마드 5세는 탕헤르 연설에서 프랑스의 행위를 비판하는 대신 모로코와 아랍 세계 간의 연대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모로코에 있는 프랑스 총독의 포고령에 대한 서명을 거부함으로써 그것을 법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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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가스카로 추방되었던 시절의 무함마드 5세(가운데)와 가족들.



이것이 효과적으로 작용하자 프랑스 정부는 1953년 8월에 그를 코르시카 섬과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추방시켰다. 그러나 무함마드 5세가 추방된 이후 모로코에는 테러 행위가 증가했고 반대로 그의 명성은 오히려 급상승했다. 그러자 프랑스 정부는 1955년 11월 무함마드의 귀환을 허용했다. 무함마드 5세는 1956년 3월 완전독립을 보장하는 협정을 프랑스와 체결한 뒤 온건한 통치로 권위를 얻었고, 1957년에는 왕의 칭호를 얻었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으나 5년 뒤인 1961년에 사망하였다.

무함마드 5세의 아들 하산 2세는 1960년 5월, 총리 대리로 임명되면서 모로코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넘겨받았다. 그는 모로코 정부의 온건적 성격을 띤 정책에 대해 평소 불만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 이유에서인지 38년의 집권기 동안 철권통치를 하였다. 그럼에도 독립 이후의 혼란스런 사회 분위기를 잠재우고 궁극적으로 통합시키려는 노력으로 인해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았다.

그의 업적 중 하나는 서부 사하라와의 합병을 성공시킨 것이다. 1975년에 하산 2세는 수십만 명의 지지자들을 동원해 당시 스페인령이었던 서부 사하라의 반환을 요구하는 평화행진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당시 그 지역을 통치하던 스페인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고, 이로 인해 모로코 국민들의 더 큰 지지를 얻게 되었다. 현재 모로코 정부는 서부 사하라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서부 사하라의 주민들 및 국제사회는 이 지역을 공식 모로코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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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2세. 철권통치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독립 후 국가를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9년 하산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무함마드 6세가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무함마드 6세는 과거와 같은 왕권통치를 지속하는 것은 최근의 세계적인 민주주의 추세와 거리가 멀다고 판단하고 단계적인 민주화 의지를 밝히고 이를 실행해 가고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공정화해위원회’를 신설하여 하산 2세가 자행했던 인권유린 문제에 대해 조사를 시작한 일이다. 또한 사법부를 독립시키고, 여성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등 이슬람 국가에서는 보기 드문 업적을 이루어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2010년 무함마드 6세의 부정부패 혐의가 있다는 전문이 공개되어 파문이 일기도 했다. 또한 여러 정치 개혁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주거 환경문제나 도시와 시골 간 발전 격차, 청년실업 문제, 46%에 달하는 문맹률 등이 난제로 남아 있지만 민주국가로의 이행을 향한 무함마드 6세의 노력으로 인해 비판보다는 그에 대한 대중적 지지도가 훨씬 높은 상황이다.




알라위트 왕가의 업적과 과실, 대중적 평가



알라위트 왕가는 1665년부터 현재까지 그 왕좌를 계승해오고 있다.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모로코를 점령하였다. 이에 1927년에 즉위한 무함마드 5세는 2차 세계대전 후 민족주의자들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이를 계기로 스페인에 의해 해외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1955년 11월 18일 무함마드 5세는 해외 망명지에서 일방적으로 모로코의 독립을 선언한 바 있으며, 1956년 3월 스페인과 프랑스의 동의를 얻어 마침내 독립을 이루어냈다. 1961년에 즉위한 하산 2세 국왕은 근대화 추진 정책을 펼쳤다.

1999년에 즉위한 무함마드 6세는 모로코와 EU 간 제휴협정을 맺고 2002년에는 선거법을 개정하여 총 325석 중 30석을 여성의원으로 선출하기도 했다. 무함마드 6세의 이러한 개방적인 성격은 그의 결혼에서도 볼 수 있는데, 모로코 왕가의 일반적인 결혼은 아랍과 베르베르 간의 화합과 평화를 위해 정략적으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왕비의 경우 베르베르 귀족 출신을 간택하던 것에 반해, 무함마드 6세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평민 출신 여성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 이유는 이제 정략결혼과 같은 단순한 방법으로는 왕가는 물론 국가를 존속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함마드 6세는 전통을 지키는 대신 혁신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국왕의 노력으로 인해 알라위트 왕가에 대한 국민의 인기는 아직 높은 편이다. 하지만 최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불고 있는 민주화 열풍에 따라 수백 년간 왕권을 지켜오고 있는 알라위트 왕가도 자유로울 수는 없어 보인다.




모로코의 주요 군주





하산 2세 중동 평화의 수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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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2세(재위 1929~1999년)는 현재 국왕인 무함마드 6세의 선친이다. 1961년 부친 무함마드 5세의 사망으로 왕위를 계승한 하산 2세는 민주적인 모로코 정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국민투표를 실시(1962년)하여 국회를 설립하기도 하였으나 그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억압하는 권위적인 정치를 실시하기도 하였다(1965~1970년). 그 과정에서 인권을 유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70년 그는 새 헌법을 만들어 제한적인 의회정치를 회복했고, 1971~1973년에 쿠데타 기도가 잇달아 일어나자 사회경제적 개혁을 실시했다.

뛰어난 정치 수완으로 독립 이후 모로코를 안정적으로 잘 유지시킨 하산 2세는 미국뿐만 아니라 서방측과도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는 데도 성공했다. 알제리와 스페인령 사하라(후에 서사하라가 됨)를 두고 분쟁이 발생하자 그는 서사하라가 모로코의 영토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한편 하산 2세는 다른 아랍 국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도 체결된 이스라엘-이집트 간의 평화협정을 중재하였으며(1977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팔레스타인 간 화해에도 적극 간여하는 등 중동의 평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함마드 6세 근대화를 추진하는 자유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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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6세(1963년~현재)는 현재 모로코의 국왕이다. 그는 왕립학교를 졸업한 뒤 1985년 무함마드5세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근대화주의자’로 알려진 무함마드 6세는 가난과 부패를 말소하고 일자리를 창출하여 경제를 개선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낙후된 모로코의 인권 문제를 개선시키는 조처로서 모로코의 대표적인 인권운동가인 아브라함 세르파티가 입국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변의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달리 여성에게 더 많은 권리를 부여하는 무디나와 제도를 만들어 2004년부터 시행하고 있으며, 정치적 평등만이 보장되던 여성의 권리를 시민적, 사회적 권리에 있어서도 남성과 동등하게 보장하였다. 더불어 하산 2세가 권위적인 정치를 실현하면서 펼쳤던 각종 인권유린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공정화해위원회를 신설하여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가해자를 밝히지 못하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는 사법부의 독립을 비롯해 고위공무원 임명 시 총리에게도 임명에 개입할 권한과 국회해산권을 부여하였다. 또한 소수 부족의 언어와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특히 베르베르어를 아랍어와 함께 공식어로 지정하였다. 고속도로와 전기, 수도 및 항만시설과 같은 인프라 건설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모로코의 선진화 기여에 힘쓰고 있다.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를 포함하는 아프리카 서북부 지역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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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서영 | 한국외대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글쓴이 윤서영은 아프리카 문학 및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비교문학과에서 나이지리아 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하우사문학의 혼종성 연구>, <비교문학 관점에서 본 영향과 수용의 문제>, <문학저널 kwani?에 나타난 소수문학적 특징>, <가나 대중음악의 혼종성> 등이 있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5.11.27.



주석


1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를 포함하는 아프리카 서북부 지역을 이르는 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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