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사베드라 라마스 - 라틴아메리카의 분쟁을 라틴아메리카 인의 손으로 해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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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8회 작성일 16-02-06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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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베드라 라마스








카를로스 사베드라 라마스(Carlos Saavedra Lamas, 1878-1959)는 노벨상을 받은 최초의 라틴아메리카 인이다. 아르헨티나 외무부 장관 시절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사이에서 벌어졌던 차코 전쟁(Chaco War)을 종식시킨 공을 인정받아 193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력 가문에서 태어났다. 상원의원 및 하원의원을 역임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를 지냈던 마리아노 사베드라(Mariano Saavedra)의 손자였다. 어머니 역시 우루과이의 유명 외교관이자 정치인이었던 안드레스 라마스(Andrés Lamas)의 딸이었다.




분쟁 해결의 주도권



사베드라 라마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고가의 셔츠를 입는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유복한 성장기를 보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1903년 법학박사를 취득하고 이후 파리에서 수학했다. 귀국한 이후에는 라플라타 대학(Universidad de La Plata)에서 법학 및 헌법사를 강의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으로 옮겨 헌법과 정치경제, 그리고 사회학을 강의했다. 대학 교수로서 노동법과 국제법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 그는 1906년 정계에 입문했다. 1908년 의원이 되어 재선을 했고 1915년 법무 및 교육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장관 시절 공공교육제도를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중등직업교육 및 기술교육을 위한 새로운 교육과정을 구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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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코 강화 조약. 왼쪽부터 우루과이, 파라과이, 볼리비아 대표와 사베드라 라마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관심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 사회학 과정을 만들었고, 아르헨티나 사회의 당면 과제였던 노동권 보호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된다. 노동법을 만들었으며 노동관련 부서를 노동부로 승격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1919년 국제노동기구(ILO)의 창설을 옹호했으며, 1928년에 개최된 제11차 ILO 회의에 아르헨티나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하여 이 회의의 대표자로 선출될 정도로 노동 분야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인정받았다.

1932년에는 아구스틴 후스토(Agustín P. Justo) 정권 아래에서 외무부 장관에 임명되어 6년간 일했다. 이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의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재가입과 차코 전쟁 종식 등 뛰어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아르헨티나는 국제연맹이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에 반대했다. 모든 국가들이 국제연맹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1920년 12월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1933년 의회에서 국제연맹 규약을 통과시켜, 다시 아르헨티나가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1936년 국제연맹 총회의장에 선출되어 국제외교 무대에서 자신의 평화구상을 펼치게 된다. 또한 아르헨티나는 1936년 스페인 내전 시기에 중립을 취한다. 영국의 불개입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만, 당시의 국제정세에 대한 그의 현실적 판단이 개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베드라 라마스의 뛰어난 외교적 역량은 국제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 국제연맹 및 ILO 등 국제기구에서의 뛰어난 활동 경험, 그리고 미국의 대외정책 등 세계질서에 대한 냉철한 이해에서 비롯됐다. 이런 외교적 역량을 통해 차코 전쟁을 종전으로 이끌면서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평화 정착에 기여했다. 또한 ‘불가침 및 조정에 의한 반전 조약’을 만들어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한 점도 그의 주요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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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코 전쟁의 원인이 된 차코 보레알 지역과 인접국들



그의 업적은 차코 전쟁이라는 라틴아메리카 대륙 내의 분쟁을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주도적인 역할을 통해 해결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의 국제질서 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국제연맹이나 미국이 아니라, 아르헨티나가 주도적으로 차코 전쟁을 해결한 것이다. 차코 전쟁의 종전을 위한 다양한 중재 시도는 외교적 주도권 다툼의 일환이기도 했다. 따라서 차코 전쟁의 해결은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한 사베드라 라마스의 외교 능력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미국 주도의 라틴아메리카 질서를 견제하면서 아르헨티나의 이해관계를 관철했다는 의미가 있다.

1938년 외무부 장관에서 은퇴한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으로 돌아가 1941년부터 2년간 총장직을 역임했고 이후 1946년까지 교수직을 봉직했다. 1959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차코 전쟁



사베드라 라마스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은 차코 전쟁(1932-1935)을 종전으로 이끈 업적 때문이었다. 차코 전쟁(1932~1935)은 그란 차코(Gran Chaco)의 북부 지역인 차코 보레알(Chaco Boreal)의 영토권을 놓고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사이에 벌어졌다. 20세기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격렬했던 전쟁중 하나로 1932년 9월 9일에 발발해 1935년 6월 12일까지 이어졌다. 남아메리카에서 최빈국에 속하는 볼리비아와 파라과이는 3년 동안의 전쟁에서 각각 25만의 병력과 12만의 병력을 동원했다. 이 전쟁에서 볼리비아는 전체 인구의 약 2%에 달하는 5만 6천~6만 5천의 사망자, 파라과이는 약 3.5%에 달하는 3만 6천명의 사망자를 냈고 수많은 부상자와 실종자를 양산했다.

차코 보레알 지역은 650,000km²에 달하는 방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까지 거주자가 거의 없이 방치된 땅이었다. 또한 두 나라가 스페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가가 될 때 국경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역은 양국 간 분란의 여지가 많았다. 서로 유리한 자료들과 측량자료에 근거해 자국의 영토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1879년부터 1907년 사이에 네 번의 영토경계 조약이 만들어졌지만, 국경에 대한 최종적인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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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축을 위해 벌목된 파라과이 접경의 그란차코 <출처: (cc) Peer V at Wikipedia>



볼리비아와 파라과이는 내륙 국가였기 때문에 파라과이 강을 통해 대서양에 진출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전략 지역이 차코 보레알이었다. 특히 1879년 태평양 전쟁을 통해서 칠레에 태평양 연안을 빼앗긴 볼리비아는 이 지역이 더욱더 중요했다. 파라과이 역시 삼국동맹 전쟁(1864~1870)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국토의 절반을 잃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볼리비아에 넘겨주기가 쉽지 않았다. 차코 전쟁의 또 다른 원인으로 이 지역을 둘러싼 외국계 원유회사들 사이의 갈등관계를 들 수 있다. 파라과이를 지원하던 로열 더치 쉘(Royal Dutch Shell)과 볼리비아를 지원하던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 사이의 원유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이 지역을 둘러싼 두 나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안데스 산악지역에서 원유가 발견되면서 차코 지역에 광대한 원유가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졌던 것이다. 또한 이미 볼리비아 동부 고원지대에서 원유를 채굴하고 있던 스탠더드 오일이 파라과이 강까지 원유를 운송하기 위해서는 볼리비아가 차코 보레알 지역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원유 매장량은 사실이 아니었고 파라과이 강에 항구를 확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차코 보레알 지역을 둘러싼 갈등은 주로 양국 사이의 심리적인 이유가 컸다. 파라과이에게는 이 지역을 넘겨주는 것이 국가에 대한 반역행위나 다름없었고, 볼리비아는 일련의 군사, 외교적 실패를 만회할 계기가 필요했다. 이러한 두 나라의 대립적인 입장으로 인해 중재를 통한 평화나 긴장 완화의 여지는 없었고, 결국 애국주의가 득세해 전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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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코 보레알 지역을 자국 영토로 표시한 두 나라 우표들



이렇게 시작된 차코 전쟁에서 적대행위를 중지한다는 합의는 1935년 6월 12일에 이뤄졌다. 이후 진행된 협상과정에서 파라과이는 적대행위 종결 시점에서 점령하고 있던 영토 중에 11만km²를 볼리비아에 양도했다. 1938년 7월 21일 ‘평화, 친선, 영토경계 조약’이 최종 체결되었다. 결국 두 나라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던 차코 보레알 지역의 1/4은 볼리비아가, 3/4은 파라과이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강 연안의 부시 항(Puerto Busch)을 통해 대서양 방향으로 진출할 통로를 얻었다. 이렇게 해서 남아메리카 중심부 지역에서 긴장과 전쟁을 야기했던 영토 분쟁은 해결이 된다.




전쟁의 종식과 반전 조약



차코 전쟁을 종식시켜 라틴아메리카에 평화를 정착하려 한 사베드라 라마스의 외교적 노력은 남아메리카뿐만 아니라 당시의 국제 질서 속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그는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일련의 외교적인 틀을 구상하고 현실화했다. 여기에는 국제적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평소의 입장이 잘 반영되었다. 이런 입장에 따라 사베드라 라마스는 1932년 워싱턴에서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양국에 대해 무력을 통한 국경 변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주도했다. 여기에 대륙 내 19개 국가들이 참여했다. 차코 전쟁을 끝내기 위한 그의 외교적 노력은 그가 구상한 ‘불가침 및 조정에 의한 반전 조약(Tratado Antibélico de No-Agresión y de Conciliación, 이른바 Treaty Saavedra Lamas)’에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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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베드라 라마스 조약의 표지



17개 조항으로 구성된 조약의 처음 두 조항은 사베드라 라마스가 미국의 외교정책을 이해하고 이를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28년 미 국무장관 프랭크 켈로그 (Frank Billings Kellogg)와 프랑스 외무부 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Aristide Briand)의 주도하에 체결된 켈로그-브리앙 조약(Kellogg-Briand Pact)에서 정한 바 있는 ‘모든 형태의 공격적인 전쟁을 거부한다’는 내용을 재확인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만주 침략과 관련해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L. 스팀슨(Henry L. Stimson)이 주장했던 폭력적인 수단을 통한 영토의 어떠한 변화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 또한 명시되어 있다.

이런 원칙 하에서 이 조약은 주변 국가들이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는 절차들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다른 협약을 명분으로 관련자들이 군사적 혹은 외교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배제하고 있다. 이것은 국제연맹 회원국들이 국제연맹 규약을 명분으로 취하는 제재조치를 막기 위한 것이다. 당시의 국제질서 속에서 국제연맹 회원국들과 비회원국들 사이의 외교적 균형을 적절하게 이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국제연맹 회원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비회원국 간의 협력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은 그의 뛰어난 외교적 수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33년 10월 6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이 조약에 대한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멕시코,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6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서명을 얻어낸다. 두 달 뒤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서 개최된 범미주회의(Pan-American Conference)에 참여한 모든 아메리카 대륙 국가들도 동의를 하게 된다. 1934년 그는 국제연맹에 이 조약을 제출했고 1935년 비준을 받았다. 아르헨티나 국제연맹 재가입의 성과와 함께 이렇게 사베드라 라마스의 평화 구상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게 되고, 1936년 국제연맹 총회 의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반전 조약이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 동안, 사베드라 라마스는 자신의 평화구상에 따라 교착상태에 빠진 차코 전쟁을 해결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경주했다. 1935년 국제연맹 회원국인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와 우루과이, 그리고 비회원국인 미국과 브라질이 참여한 평화회의(Conferencia de Paz)를 결성했던 것이다. 교전 당사국인 파라과이와 볼리비아가 반전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지만 두 나라 외무장관이 이 평화회의에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그의 주도적인 활동을 통해 1935년 6월 12일 적대 행위를 중지하자는 협정 초안에 서명이 이뤄졌다. 사베드라 라마스는 국제 정세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외교 역량을 통해 자신이 구상한 반전 조약이 갈등을 해결하는 데 유용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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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코 전쟁에 참전한 파라과이 부대






분쟁 조정의 이면



사베드라 라마스의 평화 중재는 선린정책을 앞세워 아메리카 대륙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미국의 범미주주의(Panamericanism)에 맞서 아르헨티나의 외교적 노력이 승리를 거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국제연맹이 차코 전쟁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 상황에서 미국의 역할에 국제사회의 기대가 커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주도했던 중립국 위원회(Comité de Neutrales)는 아르헨티나가 협력을 거부하면서 실패했다. 중립국 위원회가 1933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해산하면서, 사베드라 라마스의 주도로 구성된 ABCP 그룹(el grupo ABCP: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페루가 참여)이 협상의 주도권을 갖게 된다. 결국 ABCP 국가들과 미국, 우루과이가 참여한 6자 회의에서 차코 전쟁의 종전이 중재되었다. 이런 상황은 라틴아메리카의 주도권을 놓고 미국과 아르헨티나가 경쟁하고 있던 당시의 국제 정세를 잘 보여준다.

아르헨티나와 미국의 경쟁 관계는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한다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아르헨티나의 자원을 차지하려는 미국과 영국의 다툼이자 서반구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다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주도하에 범미주주의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미국의 의도에 맞서 남아메리카 지역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아르헨티나의 이해관계가 충돌한 것이다. 여기에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이해관계를 유지하려는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미국이 차코 전쟁의 해결을 주도하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 이처럼 지역 내의 주도권을 둘러싼 긴장 관계가 차코 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사베드라 라마스는 먼로주의 이후로 지속된 미국의 대외정책을 라틴아메리카에 개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했다. 선린외교 역시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가능하다. 그러나 선린외교 정책은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일정한 변화를 의미했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역내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만들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사베드라 라마스가 차코 전쟁을 해결하는 과정은 라틴아메리카 문제를 자신들의 손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차코 전쟁 해결보다 오히려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아르헨티나의 패권주의가 숨어 있을 수 있다. 또한 자신들과 밀접한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를 맺고 있던 파라과이를 보호하기 위한 아르헨티나의 입장이 평화 정착 과정에 투영되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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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평화상 메달. 사베드라 라마스가 수상한 메달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누군가가 금값만 받고 전당포에 넘겼다고 알려져 화제가 되었다. ⓒ ⓡ The Nobel Foundation







몇 가지 일화들



사베드라 라마스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세계 언론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1935년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된 카를 폰 오시에츠키(Carl von Ossietzky)가 나치의 반대로 1936년에야 수상하게 되는 드라마틱한 상황 때문이었다. 사베드라 라마스 역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 중인 ‘평화를 위한 미주 간 회의(Inter-American Conference for the Maintenance)’를 주재해야 했기 때문에 수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최근 들어 그가 받은 노벨상 메달이 경매에 나와 판매되면서, 그의 노벨상은 그의 공적과는 다른 이유로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그가 받은 노벨상 메달이 2014년 미국에서 미화 116만 달러에 팔렸는데, 1993년 누군가가 메달의 금값만 받고 전당포에 넘겼다고 한다. 그가 이뤄낸 성과와 노벨상의 가치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거래였던 셈이다. 1959년에 사베드라 라마스가 타계한 후에 벌어진 이 메달과 관련한 자세한 사연은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전직 대통령의 딸이었던 로사 사엔스 페냐(Rosa Sáenz Peña)와 결혼하여 외아들인 카를로스 로케(Carlos Roque Saavedra Saénz Peña)를 두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외아들은 저택에 사격장을 둘 정도로 무기 사용에 취미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73년 두 사람을 살해한 혐의로 감옥에 갔고 2011년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사베드라 라마스의 노벨상은 경매로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 버렸지만, 라틴아메리카 문제를 자신들의 손으로 해결한 그의 업적은 아르헨티나와 라틴아메리카 인들의 기억 속에서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참고문헌

  • Andrés Cisneros & Carlos Escudé, et. al., Historia de las Relaciones Exteriores Argentinas, Grupo Editor Latinoamericano, 1998.
  • Irwin Abrams, The Nobel Peace Prize and the Laureates : an Illustrated Biographical History, 1901-2001, Science History Publications, 2001.
  • Iván A. Castro, 100 Hispanics You Should Know, Libraries Unlimited,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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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훈 |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교수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하고 스페인 콤플루텐세 대학에서 칠레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라틴아메리카 문화이론 및 라티노와 관련된 연구를 주로 진행하고 있다. 역서로는 『혼종문화』(그린비, 2011), 『라틴아메리카역사 상, 하』(공역, 그린비, 2014), 저서로는 『세계의 과거사 청산』(공저, 푸른역사, 2005),『차이를 넘어 공존으로』(공저, 서울대출판부, 2007) 등이 있다.


후원

인문한국지원사업(HK : Humanities Korea), 교육부, 한국연구재단



이 원고는 HK(인문한국)지원사업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인문한국연구소협의회와 네이버가 공동기획했습니다.


출처
세계평화인물열전
평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작은’ 평화마저도 그를 위해 자신의 온 삶과 때로는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 삶을 들춰보고 의미를 반추하는 일은 미래의 평화를 도모하는 가장 믿을만한 출발점이다. <세계평화인물열전: 평화를 만든 사람들>은 이에 관한 이야기다. 인류 평화사를 앞장서 써내려간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치열하고 아름다우며, 때로는 논쟁적인 평화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한다


발행201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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