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룩셈부르크 대공작 가문 - 작은 국토에서 세계 1위의 경제 성공을 이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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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94회 작성일 16-02-06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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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독일, 벨기에 사이에 위치한 유럽의 내륙 국가 룩셈부르크는 대공작이 다스리는 대공국이다. 대공작(Grand Duke)은 흔히 대공이라 부르며 황제와 왕보다는 낮지만 공작보다는 높은 위치의 군주로서 귀족 직위 중에서 사실상 최고 위치다. 왕이 아닌 대공작이 입헌군주의 역할을 맡은 국가는 룩셈부르크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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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의 그랜드 두칼 궁전



1815년 탄생한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외교적으로 중립을 선언했지만 초기에는 네덜란드 국왕이 대공 직위를 겸하고 세계대전에 휘말리는 등 외세의 지배와 침공을 반복적으로 겪었다. 제4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현재의 대공 가문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점령을 허용하면서 군주제 폐지 요구에 부딪혔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덕분에 국민들의 애정을 되찾았다.

현재는 금융업과 서비스업을 발달시킨 덕분에 국민 소득(1인당 GDP)이 11만 6천 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프랑스어, 독일어, 룩셈부르크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만 대공작 가문은 프랑스어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룩셈부르크의 정치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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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룩셈부르크 대공작은 낫사우 가문이 맡고 있다. 이로 인해 가문의 문장에는 중세 룩셈부르크 왕가의 상징인 붉은 사자 2마리가 낫사우 가문의 상징인 황금 사자 2마리와 대각선으로 섞여 있다. <출처: (cc) Odejea at Wikimedia Commons>



룩셈부르크 대공은 세습군주이지만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한 헌법에 의해 권력이 제한되어 있다. 제3대 대공이자 네덜란드 국왕을 겸임한 빌럼 3세는 1868년 제정된 헌법을 통해 내각의 구성뿐만 아니라 의회 해산권까지 거머쥐기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에 예속된 경험 때문에 1919년에 국민들이 대공 가문의 책임을 물어 새로운 헌법을 만들게 되었다.

대공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권한이 제한된 입헌군주로서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간의 중재를 담당하는 상징적인 국가 원수다. 대공이 서거하거나 유고로 직무 수행이 불가능할 경우 대공자에게 권한이 이양되며 18세가 되기 전에는 섭정공을 둔다.

정부 형태는 내각책임제로서 수상이 행정부의 수장을 맡는다. 단원제 입법부인 국민의회는 4개 선거구에서 직접 선거를 통해 5년 임기로 선출되는 60명의 의원으로 유지된다. 국민의회에 자문을 제공하는 국사원은 대공에 의해 임명된 21명의 자문관으로 구성된다. 사법부는 대공을 수장으로 3개의 일반재판소, 2개의 지역재판소, 1개의 고등재판소로 구성되어 있다.




3개 국어의 이름을 가진 룩셈부르크 대공작



“국가와 국민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만민 앞에서 약속합니다.” 2000년 10월 7일 앙리 왕자가 룩셈부르크 대공에 올랐다. 1815년 출범한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제9대 대공이자 1890년부터 대공가를 이룬 낫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이 배출한 여섯 번째 근대 군주다.

1955년에 태어난 앙리 대공은 룩셈부르크어뿐만 아니라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영국 샌드허스트 왕립사관학교와 스위스 제네바 대학교를 졸업한 수재다. 훤칠한 외모 덕분에 언론의 조명을 받아 왔으며 전통과 현대를 성공적으로 연결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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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현대를 성공적으로 연결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앙리 대공 <출처: (cc) א (Aleph) at Wikimedia Commons>



앙리는 1950년대 왕실에서는 드문 이름이지만 아버지 장 대공이 이를 선택한 것은 여러 의도로 해석된다. 가장 설득력 있는 의견은 중세 룩셈부르크 왕가가 배출한 첫 번째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를 계승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1·2차 세계대전이라는 혼돈의 시기를 지나자마자 얻게 된 왕자에게 장차 원대한 꿈을 가지고 룩셈부르크의 위상을 강화시키라는 소망을 담은 셈이다.

앙리 대공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프랑스어 ‘앙리’로 표기하지만 영어로는 ‘헨리’이고 독일어로는 ‘하인리히’다. 룩셈부르크는 프랑스어, 독일어, 룩셈부르크어를 공용어로 인정하고 있어서 대공의 이름은 여러 언어로 표기가 가능하다. 제 1~3대 대공은 네덜란드 국왕이 겸임했으므로 영어 윌리엄, 프랑스어 기욤, 독일어 빌헬름이라 하지 않고 네덜란드어 ‘빌럼’이라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 왕가와 귀족층은 주로 프랑스어를 사용해 왔기 때문에 낫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제4대 아돌프 대공부터는 일반적으로 기욤 4세, 마리 아델라이드, 샤를로트, 장, 앙리 등 프랑스어 이름으로 표기한다.




오라녜-낫사우에서 낫사우-바일부르크로 바뀐 대공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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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지도. 국토 면적이 2,586㎢로 제주도의 2배 정도.



룩셈부르크의 역사는 크게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고대’로서 켈트족이 이주하고 로마제국이 지배했던 서기 963년 이전의 시기다. 둘째는 ‘봉건 시대’로서 독립국가 룩셈부르크가 탄생한 시기다.

지크프리트 백작이 인근 도시 트리어의 성 막시민 수도원으로부터 지금의 룩셈부르크 땅을 얻어내 성을 건설하고 룩셈부르크 왕가를 열었다.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여러 번 배출할 정도로 번성해 유럽 전체에 영향력을 각인시켰다.

셋째는 ‘외세 통치 시대’로 지기스문트 황제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서거하자 1443년 부르고뉴 공작 필립 3세가 계승권을 주장해 이때부터 부르고뉴(1443~1506년), 에스파냐(1506~1714년), 오스트리아(1715~1795년), 프랑스(1795~1814년)의 지배를 순차적으로 받았다. 넷째이자 현재인 ‘독립국가 시대’는 1814년에서야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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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왕가의 창시자인 지크프리트 백작



유럽은 1803년부터 1815년까지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며 혼돈의 시기를 보냈다. 프랑스 중심의 동맹국과 프랑스에 반대하는 연합국으로 나뉘어 12년 동안 이어진 전쟁으로 인해 최소 35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 이후의 혼란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등이 오스트리아의 주도 아래 1814년부터 10개월 동안 빈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는 프랑스가 강국이 되어 침공을 해 오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대혁명 이전의 영토로 환원시켰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1815년 새로 탄생한 네덜란드 연합왕국은 옛 네덜란드 공화국의 영토로 지금의 네덜란드로 발전하게 될 북부, 지금의 벨기에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령 남부를 통합해 만들어졌다. 왕위에는 오라녜-낫사우 가문의 빌럼 1세가 올랐으며, 독일 연방 소속의 국가로 승격된 룩셈부르크의 대공 직위도 겸했다. 현재의 룩셈부르크 대공국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1840년 큰아들 빌럼 2세가 왕위와 대공위를 물려받았고 1849년에는 그의 큰아들 빌럼 3세가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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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첫 번째 군주이자 룩셈부르크의 대공 직위를 겸했던 빌럼 1세 대공



3명의 아들이 후사를 잇지 못한 채 사망하자 1890년 빌럼 3세는 재혼으로 얻은 딸 빌헬미나에게 네덜란드의 왕위를 넘겨주었다. 원래 낫사우 가문은 6세기 초반 살리족 출신의 클로비스 1세가 편찬한 ‘살리카 법전’을 계승권의 기준으로 삼아 왔다. 여기에는 “어떠한 영토도 여성에게 상속되지 않으며 오직 남성 후손만이 계승권을 가진다.”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오라녜-낫사우 가문은 6세기 후반 힐페리히 1세 때 “계승권자의 아들이 모두 사망할 경우에는 딸에게 영토를 물려준다.”라고 수정한 조항을 근거로 여왕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해당 조항의 정통성에 문제를 삼으며 여왕의 즉위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대공위는 오라녜-낫사우 가문에서 가장 가까운 낫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이 넘겨받았고 73세의 낫사우 공작 아돌프가 1890년부터 군주로서 통치하게 되었다. 룩셈부르크 대공가의 시조이며 현 앙리 대공의 고조할아버지다.

낫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은 1255년에 시작되었다. 원류가 되는 낫사우 가문의 발르람 1세 백작은 1154년 독일 중서부의 라인 강 동편에 위치한 낫사우 성채를 중심으로 백작령을 출범시켰다. 아들 하인리히 2세가 직위를 물려받았으나 1247년 사망하자 큰아들 발르람 2세와 작은아들 오토 1세가 백작으로서 공동으로 다스리다 불화로 인해 1255년 분리를 선언했다. 발르람 2세는 독일 바일부르크를 중심으로 낫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을 세웠고, 오토 1세는 독일 딜렌부르크를 중심으로 낫사우-딜렌부르크 가문을 세웠다.

오토 1세의 낫사우-딜렌부르크 가문은 1544년 빌렘이 프랑스 동남부의 오랑주 공국을 차지하면서 오라녜-낫사우-딜렌부르크 가문이 된다. 오라녜는 오랑주의 네덜란드어 명칭이다. 이후 딜렌부르크 명칭을 떼어 내면서 오라녜-낫사우 가문으로 자리 잡았고 1815년 빌렘 1세가 네덜란드 국왕에 오르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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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세의 나이에 룩셈부르크의 군주가 된 아돌프 대공



발르람 2세의 낫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은 1806년 낫사우-우징엔 가문과 합병해 ‘낫사우 공작령’을 만들었다. 나폴레옹 1세가 라인 강 서편을 점령한 후 프로이센과의 직접적 무력 충돌을 줄이기 위해 라인 동맹(Confederation of Rhein)을 결성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각 소국들은 지배권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프랑스 속국 연합체의 역할을 했다.

1815년에는 빈 회의의 결정 덕분에 독일 연방에 가입할 수 있었고 1839년에는 아돌프가 공작에 즉위했다. 그러나 1890년 룩셈부르크 대공작으로 선출되면서 낫사우 공작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낫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시대



룩셈부르크의 대공 직위는 15년간의 아돌프 대공 통치 이후 1905년 큰아들 기욤 4세로 전해졌다. 참고로 룩셈부르크는 프랑스어, 독일어, 룩셈부르크어를 공용어로 인정하는 다언어 국가다. 지역민이 사용하는 언어는 독일어 방언 계열의 룩셈부르크어지만 엘리트와 귀족 계층은 대부분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1820년대에 프랑스어 이외에 룩셈부르크어를 병기하는 지역 신문이 생기기도 했지만 ‘저학력 일반인이 사용하는 언어’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아돌프부터 룩셈부르크 대공들의 명칭은 일반적으로 프랑스어로 불리고 기록되어 왔다.

빌럼 1세에서 3세까지 선대 대공의 명칭을 이어받은 기욤 4세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은 채 입헌군주로 통치했다. 원래 낫사우 가문은 개신교 세례를 받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공주 출신의 대공비 마리아 안나가 유럽의 왕조는 전통적으로 로마가톨릭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해 왔다고 지적한데다가 네덜란드 왕국과의 거리를 두기 위해 개종을 선언했다. 이후 룩셈부르크 대공가는 전통적으로 가톨릭을 신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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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아델라이드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점령을 용인했다가 하야 압력에 시달렸다.





슬하에 딸밖에 없던 기욤 4세는 아들에게만 영토를 물려주어야 하는 대공위 계승권 규약을 변경했다.




슬하에 6명의 딸밖에 없던 기욤 4세는 1907년 아들에게만 영토를 물려주어야 하는 대공위 계승권 규약을 변경했다. 낫사우-바일부르크 가문에는 더 이상 적법한 남성 후손이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큰딸 마리 아델라이드가 1912년 최초의 여대공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즉위한 지 2년 만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군이 룩셈부르크를 침공해 왔다. 정치적 위기를 맞은 마리 아델라이드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독일에 기대어 온 경제 구조의 붕괴를 막기 위해 결국 독일군의 점령을 용인했다.

이로 인해 1918년 전쟁이 끝난 후 국내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군주는 필요 없다는 항의가 잇따랐다. 마리 아델라이드는 결국 1919년 1월 여동생 샤를로트에게 여대공 직위를 넘겨주고 은퇴했다. 샤를로트는 1919년 9월 국민투표를 실시해 여대공의 신임을 물었고 77%가 넘는 찬성을 얻어내 입헌군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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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중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며 국민들의 지지를 회복한 샤를로트 여대공



이후 샤를로트는 룩셈부르크의 내실을 다지고 국민을 결속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그리고 무연고 타국의 귀족이 아닌 사촌 오빠이자 룩셈부르크의 대공자 펠릭스와 결혼해 국민의 호감을 얻어냈다. 1920년에는 국제연합(UN)의 전신인 국제연맹(LN)에 가입했고, 이듬해에는 벨기에와 경제동맹(BLEU)을 맺었다. 1929년 불어닥친 대공황도 큰 탈 없이 극복했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독일이 다시금 침략해 오자 샤를로트는 프랑스로 피신했다. 이후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을 거쳐 미국과 캐나다로까지 이주하며 망명 생활을 계속했다. 1943년에는 영국으로 돌아와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덕분에 룩셈부르크 국민들은 구심점을 찾을 수 있었고 샤를로트는 1945년 종전 후 고국으로 돌아올 당시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964년에는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일원으로 활약했던 큰아들 장에게 대공위를 물려주면서 다시금 남성 군주의 시대가 열렸다. 아들 장 대공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장교로 입대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여하는 등 룩셈부르크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전쟁 후에는 룩셈부르크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36년의 재위기간 동안 철강 산업의 발전을 유지하면서 금융업을 장려해 경제대국으로 변모시켰다.

1970년대에 또 다시 위기가 닥쳤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경제 붐이 꺼져 가던 1973년 석유 파동이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철강 값이 폭락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공장이 문을 닫았다. 다량의 철강 자원을 보유한 룩셈부르크도 타격을 입었지만 장 대공의 외교 수완과 행정부와의 협조로 외국 기업들을 지속적으로 유치해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철강 산업도 회복시킬 수 있었다. 현재 룩셈부르크 전체 무역량의 3분의 1 가량을 철강 산업이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 최대의 철강업체 아르셀로미탈(ArcelorMittal)도 룩셈부르크에 본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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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의 재위기간 동안 룩셈부르크를 경제대국으로 변모시킨 장 대공



장 대공은 즉위 전인 1953년 벨기에 왕 레오폴드 3세의 딸 조세핀 샤를로트와 결혼해 인근 국가와의 안정적 협력 체계를 구축했다. 2000년 10월에는 장녀 마리 아스트리드가 아닌 장남 앙리에게 대공위를 물려주어 룩셈부르크 대공가의 집권을 유지시켰다. 덕분에 대공가에 대한 룩셈부르크 국민들의 호감도는 높은 편이다.

현 앙리 대공은 군주로서의 책무를 무난하게 수행하고 있지만 몇 번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가장 큰 사건은 셋째 아들 루이 대공자가 결혼 전인 2006년 3월에 자식을 낳은 일이다. 졸지에 할아버지가 된 앙리 대공은 이 문제에 대해 함구령을 내려 지탄을 받았다. 루이는 그해 9월에 정식으로 결혼했지만 앙리는 루이와 그 아들에 대해 대공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박탈시켰다.

두 번째 사건은 안락사 허용 법안을 거부한 일이다. 2008년 룩셈부르크는 국민투표와 의회 표결을 거쳐 안락사 허용법을 만들었지만 앙리 대공은 서명을 거부해 결국 법안이 발효되지 못했다. 대공이 법안 서명을 거부한 것은 1912년 마리 아델라이드 여대공이 교육개혁 법안에 동의하지 않은 경우뿐이었다. 분개한 행정부는 대공이 서명하지 않아도 법안이 효력을 발휘하도록 헌법을 개정했다. 결국 입헌군주로서 룩셈부르크 대공의 역할은 이미 만들어진 법안을 공포하는 것으로 한층 더 제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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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산업은 룩셈부르크 전체 무역량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세계 최대의 철강업체 아르셀로미탈의 본사 건물.






룩셈부르크 대공작 가문의 업적



벨기에,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어 ‘베네룩스’로 불리는 룩셈부르크는 인구 50만 명에 국토가 제주도 면적의 두 배밖에 되지 않음에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목표로 삼은 대공가의 노력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발돋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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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의 구시가 야경 <출처: (cc) Benh LIEU SONG at Wikimedia Commons>



룩셈부르크 대공작 가문의 역사는 평탄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오라녜-낫사우 왕가에서 시작되었으나 이후 낫사우-바일부르크 가문으로 바뀌었다. 마리 아델라이드 여대공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외세에 나라를 내주어 하야 압력에 시달렸다. 샤를로트 여대공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찬가지로 피난길에 올랐으나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덕분에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위기의 순간에 국가와 함께하지 않는 군주는 국민들의 외면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배운 장 대공은 가문 명칭으로 부계가 아닌 모계를 선택해 역사적 명맥을 유지하는 길을 택했다.

이후 룩셈부르크 대공작 가문은 현대 유럽연합(EU)의 탄생 과정에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등 유럽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해 왔다. 유럽연합의 뿌리가 된 1986년 단일유럽의정서(SEA)도 룩셈부르크에서 서명되었고, 1992년 마흐스트리트 조약, 1997년 암스테르담 조약도 룩셈부르크의 노력 덕분에 성사될 수 있었다. 입헌군주로서 대공이 누리는 입지는 계속 줄어드는 상황이지만, 정치와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주역으로서 앞으로도 유럽 내에서의 주요 역할을 계속 수행할 전망이다.




이종오 | 프랑스 언어와 문화 전문가
글쓴이 이종오는 프랑스 고전수사학과 유럽 문화콘텐츠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프랑스 엑스-마르세이유 1대학 언어학과에서 수사법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문체론>, <소통문화의 지형과 지향>(공저), <문체론사전>(공저), <유럽의 말(馬) 문화>(공저) 등이 있다.


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6.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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