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실학과 과학 - 서양과학의 전래와 조선시대 지식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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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58회 작성일 16-02-06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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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과학은 이전 과학과는 다른 양상이 펼쳐졌는데, 가장 큰 특징은 왕립 차원의 과학 연구에서 개인 차원의 과학 연구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통시대 과학을 대표하는 천문과 지리는 역법이나 지도 제작 등 왕조국가가 필요한 부분에만 한정하여 발달했고, 국가 체제나 권력 유지 차원의 과학 실용성보다는 목적성이 더 컸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서양의 과학 문물이 수입되면서 국가보다는 대중, 정치성보다는 실용성이 더 강조되었고, 이러한 측면이 조선 전기와는 다른 측면으로 과학문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한역서학서를 통한 서양과학문화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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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설을 제시한 그리스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





지동설을 주장한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의 초상화




과학사에서 17세기는 과학혁명의 시기라 부른다. 과학혁명의 시작은 천문학, 즉 지동설에서 출발했다. 태양, 달 그리고 여러 행성들이 지구 주위를 회전한다는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2세기)의 천동설에서 지구와 행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회전한다는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의 지동설로 변화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아이작 뉴턴(Issac Newton)과 튀코 브라헤(Tycho Brahe),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를 거치면서 과학적으로 검증되었다.

17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천문학의 발전은 비단 서구사회에만 변혁을 몰고 온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17세기 이후 서양천문학의 발달은 서구사회뿐 아니라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의 동양 포교 과정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무렵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서 중국에 소개된 서양의 과학과 기술 중에서도 단연 주목을 끌었던 것은 서양 천문학과 관측 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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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오 알레니가 저술한 천주강생출상경해(天主降生出像經解)에서 오병이어에 관한 부분. 글뿐만 아니라 삽화도 현지 사정에 맞게 그린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이 벌인 선교활동과 서양과학의 전파가 명말청초의 지식인들에게 쉽게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한역서학서의 저술 때문이었다. 한역서학서란 명말청초에 걸쳐서 유교적 한자문화권인 한족사회에서 천주교 포교에 종사하던 서양 성직자들이 중국 한족에게 천주교를 전교하는 한편, 서양문명을 전수하기 위하여 서양의 종교, 윤리와 지리, 천문, 역사, 과학, 기술관계의 서적을 한문으로 번역 또는 저술한 서책을 말한다.




서양천문학과의 만남



마테오 리치(중국명 이마두)가 1602년에 북경에서 제작한 세계지도 『곤여만국전도』를 필두로 17세기 초에 들어와 예수회 선교사들의 저작물들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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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의 『곤여전도』.(1674년 제작)





줄리오 알레니가 저술한 세계지리서 『직방외기』




당시 중국을 통해 조선에 들어 온 한역서학서를 살펴보면, 마테오 리치의 『혼개통헌도설』, 『곤여만국전도』, 『건곤체의』, 줄리오 알레니의 『서학범』, 『기하요법』, 『직방외기』, 『곤여도설』, 디아스(Emmanuel Junior Diaz)의 『천문략』, 우르시스의 『간평의설』, 『표도설』, 아담 샬의 『혼천의설』, 『주제군징』, 『신법역인』, 『서양역법신서』, 『적도남북양총성도』, 자코모 로의 『오위역지』, 『천주성교계몽』, 『일전역지』, 『천주경해』,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의 『의상지』, 『곤여전도』, 『곤여도설』, 『곤여외기』, 『적도남북성도』, 쾨글러의 『황도총성도』, 『의상고성』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 시기에는 주로 중국에 간 연행사를 통해 국가적 차원에서 서양 문물이 전래되었고, 이것이 다시 지식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에 들어와서였다.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와 같은 세계지도가 들어오면서 시작된 서구에 대한 이해는 조선 지식인들의 중국 연경으로의 사행이 빈번해지면서부터였다. 특히 1631년(인조 9) 음력 7월 부연사신 정두원이 포르투갈 출신의 신부 로드리게즈(Johanes Rodriguez)를 통해 당시 서양 신부들이 한문으로 저술한 천문, 지리, 역산 등에 관한 서적과 화포, 천리경(망원경), 자명종 등 새로운 기기들을 전해 받고 조선으로 가지고 들어와 지식인들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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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 원본》 삽화에 나오는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



당시 정두원이 가지고 온 한역서학서 및 서구문물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다. 이탈리아 출신의 신부 알레니의 『직방외기』와 같은 세계지리서를 비롯해 서광계롱고바르디의 공저로 서양 역법의 연혁을 설명한 『치력연기』, 마테오 리치의 천문서, 광학기 서적과 천문도 및 세계지도 등 최신의 한역서학서가 망라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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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뮤 벨로가 그린 천동설 모형도. 예수회 선교사들은 지동설이 아닌 가톨릭이 인정했던 천동설을 중국에 전파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된 서양천문학은 최신의 천문 지식이 아니었다. 서양의 천문학은 이미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로 교체된 상태였는데 선교사들은 가톨릭에서 인정하는 천동설, 즉 프톨레마이오스의 중세적 우주관을 중국에 전파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이 실려 있는 『천문략』과 『치력연기』 같은 한역서학서들은 연행사들에 의해서 조선으로도 전래되었다. 17세기 조선 지식인들은 비록 중세 우주관이긴 하나 서양의 우주관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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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트만 셰델의 『셰델의 세계사(Die Schedelsche Weltchronik)』의 일부. 중세시대에 쓰인 이 책을 통해 12중천설이 당시에 정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알려진 안정복의 『잡동산이』에는 당시 정두원과 함께 중국 연경으로 간 역관 이영후가 선교사로부터 얻은 『천문략』을 읽고 탄복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사실 선교사 디아스(중국명 양마낙, 1574∼1659)가 지었다는 『천문략』은 앞서 언급한 대로 서구 중세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바탕으로 한 12중천설을 소개하고 있는 천문학서였다. 이처럼 비록 『천문략』이 최신의 서양 우주론을 소개한 것은 아니었지만, 개천설이나 혼천설 등 중국 고대 천체관의 테두리에서 만족하던 조선 지식인층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이로 인해 우주구조론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음은 물론이다.




회전하는 지구와 무한한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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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글러의 별자리표를 직접 배워서 그린 별자리그림 신법 천문도병풍(보물 제848호) <출처: 문화재청 – 공공누리>



조선 후기에 등장한 지전설은 서양천문학의 수용이 표피에만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한역서학서 중에 지구의 자전을 설명한 것으로 자코모 로(중국명 나아곡)의 『오위역지』라는 서적이 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정설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 외 쾨글러(중국명 대진현)의 『역상고성후편』이 지전설에 기초한 타원궤도설을 바탕으로 태양과 달의 운동을 계산했으나 천체관은 여전히 천동설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의 지식인이 지전설을 주창한 것은 조선시대 천문학의 수준을 짐작케 해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서양천문학의 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17세기 천체관을 진일보시킨 지전설은 김석문이 처음 주장했던 이론이다. 연암 박지원은 김석문의 지전설을 ‘삼대환부공설’로 『열하일기』에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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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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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횡거



지구 자전을 우리나라 최초로 주장했던 김석문은 조선 후기 성리학자로 자는 병여이며 시헌력 도입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김육족손이다. 이 사실은 그의 천문학 연구가 우연한 일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가 최초로 지전설을 주장하게 된 것은 일찍이 주역에 관심을 가지고 소강절이나 장횡거 등 성리학의 우주론을 성립시킨 사상가들의 서적을 읽으면서부터였다. 그는 이들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삼라만상의 형성과 그 변화의 이치를 깨달았고, 또 제자백가와 천문학, 지리학까지 통달하면서 우주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삼대환부공설’이라는 김석문의 천체관은 『역학이십사도해』라는 그의 저작에 실려 있는데, 여기서 김석문은 자신의 지전론의 근원이 주돈이와 장횡거의 우주론 그리고 자코모 로의 『오위역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김석문은 지구를 중심으로 부동천인 태극천이 가장 외곽에 자리잡고 있으며, 태허(太虛)라고 불리는 천체 공간 사이에 경성천, 진성(토성), 세성, 형혹, 태백, 월륜이 366회전하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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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의 우주 모형



김석문이 말한 우주 모형은 『오위역지』에서 소개되고 있는 튀코 브라헤의 천체 모형과도 거의 흡사하지만, 지구가 1년에 366회전한다는 지전설의 독창적인 것이다. “회전하는 모든 사물의 움직임에는 반드시 기가 있으며 이 기가 항성이나 은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지 하늘의 운행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라는 장횡거의 논리를 자신의 지전론에 대입시키고 나아가 『오위역지』에 있는 튀코 브라헤의 천동설을 뒤집어 버렸다.

실로 탁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김석문의 지전설이지만, 한계점도 있다. 그의 자전설은 천문 관측을 통해 자연과학적 논리로 체계화한 것이 아니고 사변적인 성리학적 우주론의 미비점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일정한 시기를 주기로 인류의 역사와 문명 그리고 자연 현상까지도 흥망성쇠를 되풀이한다는 순환론적 역사철학을 주장하는 전근대적 역사철학도 우주관 속에 녹아들어 있다.




땅은 네모나지 않고 둥글다



새로운 우주관에는 지전설 외에도 지원설이 있었다. ‘지구가 둥글다’고 인식하는 지원설은 서구식 세계지도의 전래와 함께 들어왔다. 사각형의 방형의 형태로 인식하고 있었던 땅의 형태가 구형으로 확실하게 변화하게 된 것은 서양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의 영향이 가장 컸다. 그는 방형이라는 것은 실제 형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여 옮겨다니지 않는 성질을 말하는 것”이라 전제하고 “땅과 바다는 본래 원형으로 이 둘이 합해 일구(一球)를 이루며 일구는 천구의 한가운데 있다”고 주장하여 땅의 구형을 입증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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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년 조선에서 그린 마테오 리치의『곤여만국전도』 <출처: 실학박물관 제공>



이러한 지원설은 마테오 리치의 작성한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와 함께 그의 저작인 『건곤체의』<천지혼의설>에 실려 있는데, 이 책은 일찍이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소개된 한역서학서로서 천지혼의설과 지구 및 각 중천들 간의 거리 그리고 태양 및 지구, 달의 크기를 비교 측정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서양의 지원설을 받아들인 실학자 성호 이익은 우주의 중심에 둥근 지구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구 아래와 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말을 서양 사람들에 의하여 비로소 자세히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 성호는 중세적인 우주관과 지역관에서 탈피하는 상당히 진보적인 세계관을 지닌 사상가였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천문학자이며 유학자인 이재 황윤석(1729∼1791)도 일찍이 외암 이간의 <천지변설>에 나오는 천지도에 그려진 네모난 땅의 형태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하늘은 땅 밖의 큰 원이고 땅은 하늘 안의 작은 원이다. 원으로써 원을 감싸는 것은 이치와 형세가 서로 마땅한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또한 그는 “서양 역법에 이르기를 땅은 역시 둥글다고 했으니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한영숙과 신백겸의 천지설이 하늘이 둥글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았으나 땅도 둥글다는 사실에는 어두웠으니 땅을 육면의 형체로 그린 것은 분명 틀린 것이다. 이간이 천문도를 그리면서 육면체로 그렸는데, 이것은 네모의 귀퉁이만 조금 제거했던 것일 뿐이고 땅 역시 원형으로 그려야 됨을 알지 못한 것이다”라며 땅이 둥글다는 사실을 자신 있게 주장했다.

김석문에 이어서 지전설을 주장했던 담헌 홍대용은 자신의 우주관을 우주무한론으로까지 펼쳤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김원행의 제자이기도 한 홍대용은 북학파의 실학자로 유명한 박지원과도 깊은 친분이 있었다. 그가 과학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766년 초 북경을 방문하여 서양과학에 접하면서부터였다. 서양과학에 눈을 뜬 홍대용은 이후 기존의 천체관에 회의를 품으며, 그를 유명하게 만든 중요한 이론인 지전설과 우주무한론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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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의 우주관을 알 수 있는 『의산문답』. <실학박물관 제공>



실옹과 허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의산문답』에는 홍대용의 우주관이 그대로 녹아 있다. “지구는 회전하면서 하루에 일주한다. 땅 둘레는 9만 리이고 하루는 12시이다. 이 9만 리의 거리를 12시간에 달리기 때문에 그 움직임은 벼락보다 빠르고 포환보다 신속하다”라고 하여 김석문의 것과 유사한 내용의 지전설을 주장했다.

사실 홍대용의 우주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이와 같은 지전설이라기보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우주론’이다. “우주의 뭇 별들은 각각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끝없는 세계가 공계에 흩어져 있는데 오직 지구만이 중심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그의 무한우주론은 그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실로 대담하고도 독창적인 것이었다.

중국의 고대 우주관인 선야설에서 무한의 공간을 상정하기도 하고 장횡거의 우주관도 이와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었지만, 홍대용처럼 파격적인 주장은 아니었다. “지구로 칠정(七政)의 중심이라 한다면 옳은 말이지만, 이것이 바로 여러 성계의 중심이라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물에 앉아 하늘 보는 소견이다”라는 홍대용의 우주관은 탈지구중심론이라는, 실로 대담하기 이를 데 없는 인식론적 대전환을 제기했다는 측면과 함께 과학적으로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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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중심으로하는 사각형의 지상세계와 원 모양의 하늘을 함께 그린 천지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의 지전설과 지원설은 단순히 우주관만을 변화시킨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지원설은 세계의 중심이 어느 한 곳에만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우주관이었다. 따라서 지원설의 수용은 곧바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화이론적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했다. 예컨대 담헌 홍대용이 “이 지구 세계를 태허에 비교한다면 미세한 티끌만큼도 안 되며, 저 중국을 지구 세계와 비교한다면 수십 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여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했던 것도 이러한 천문관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17세기부터 시작된 서양식 천문서적과 지리서에서 촉발된 새로운 지식은 탈중화주의적 세계관의 형성과 함께 조선시대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서양 각국과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지식을 급속히 확장시켜주는데 적잖이 공헌했다.

참고문헌



정성희 |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정성희는 역사연구가로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역사’를 발굴해 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현재는 ‘21세기와 실학’이라는 주제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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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 본다.


발행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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