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덴마크 글룩스부르그 왕가 - 천년 통일왕국 덴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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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47회 작성일 16-02-06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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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는 바이킹 시대 중반인 936년 통일 왕국을 형성한 이래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왕국이다. 현재의 글룩스부르그 왕가는 올덴보르그 왕가의 대가 끊김에 따라 1863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쇠너부르그-글룩스부르그 공국의 크리스티안 왕자를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로 옹립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 5명의 왕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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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있는 글룩스부르그 성. 북유럽의 중요한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다. <출처: (cc) Arne List at Wikipedia>



1849년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이래 의회민주주의 원칙을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국왕의 권한은 점진적으로 약화되어 현재 덴마크 국왕의 위상은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을 뿐이며 국회와 내각이 실질적으로 국가를 통치하고 있다. 그러나 덴마크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덴마크의 국왕은 국가 및 국민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덴마크의 글룩스부르그 왕가는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 대신 국민과의 소통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덴마크에서는 입헌군주제에 대한 80% 수준의 높은 지지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국왕은 국민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다.




덴마크의 정치체제



덴마크에서는 936년 통일 왕국을 수립한 후 선출제에 의해 국왕을 임명하였으나 1660년 절대군주제가 들어서면서 세습제로 전환되었다. 이후 1849년 헌법의 제정과 함께 절대군주제는 입헌군주제로 바뀌었다.

덴마크의 현행 헌법에는 국왕의 통치 권한이 포괄적으로 명시되어 있으나 이는 명목적인 헌법 조문일 뿐이며 실질적으로 왕은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다. 입법권은 전적으로 덴마크 국회의 권한으로, 확정된 법안에 대해서 왕은 형식적으로 서명을 하긴 하지만 아무런 법적 책임을 지지 않으며, 왕의 서명과 함께 각료의 서명이 있어야 법이 발효된다.

덴마크 정치의 중심인 국회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에 의해 선출되는 4년 임기 179명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선이 끝나고 나면 각 정당 간 합종연횡을 통해 어느 세력이 내각을 구성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현직 수상과 왕이 각 정당의 당수들을 만나 의견을 조율하고 차기 내각 및 수상을 결정하게 되지만 국왕은 형식적인 역할에 머문다. 국회는 내각을 불신임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해 내각은 국회를 해산시킬 수 있다.




덴마크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탄생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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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왕실 문장 <출처: (cc) Sodacan at Wikipedia>



덴마크의 올덴부르그 왕가는 1448년 크리스티안 1세를 시조로 시작되어 415년간 이어져 왔으며, 16대 왕 프레데릭 7세가 후사를 보지 못해 그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 당시 덴마크는 덴마크 본토와 함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을 통합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위 승계를 위해서는 덴마크의 왕위 승계 조건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의 승계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켜야만 했다.

유럽 각국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다양한 세력들이 덴마크 왕가의 왕위 승계 적자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쇠너부르그-글룩스부르그 공국(약칭 글룩스부르그 공국) 역시 덴마크의 왕위 계승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결국 올덴부르그 왕가를 이어 덴마크의 글룩스부르그 왕가를 열게 되었다.

글룩스부르그 공국은 1825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공작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빌헬름 공작은 덴마크 프레데릭 5세의 손녀인 헤세-카셀의 루이제 카롤리네 공주와 혼인하였다. 따라서 글룩스부르그 공국은 덴마크 정통 왕실의 종가는 아니지만 분가로서 덴마크에서 세습군주제를 시작한 프레데릭 3세와는 후손의 관계가 되었다.

덴마크의 왕위 계승 문제가 불거졌을 당시 빌헬름 공작과 루이제 카롤리네 공주 사이에는 3명의 공주와 7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그중 넷째 왕자 크리스티안이 1850년 이전에 이미 2남 2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덴마크의 왕위를 이을 강력한 후보로 부상하였다.

덴마크는 물론 유럽 전체의 관심사였던 덴마크의 왕위 계승 문제는 좀처럼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나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을 종결시킨 1852년 5월 8일의 런던 의정서와 이에 대한 후속 조치로 덴마크가 1853년 7월 31일 제정한 왕위계승법을 통해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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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왕실의 동절기 궁전 아말리엔보르그 성. 수도 코펜하겐에 위치해 있다. <출처: (cc) Rob Deutscher at Wikipedia>



런던 의정서에는 덴마크의 국왕은 덴마크의 영지였던 슐레스비히 공국과 독일의 영지였던 홀슈타인 및 라우엔부르그 공국을 통치할 수 없으며, 이 세 공국은 독립 공국이어야 함이 명시되었다. 이에 따라 덴마크의 왕위 승계 조건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의 승계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켜야 하는 어려움은 극복되었다.

1853년의 왕위계승법은 준살릭법을 적용하여 프레데릭 3세의 모계 후손에게도 왕위 계승권을 부여하며, 따라서 글룩스부르그 공국의 크리스티안을 프레데릭 7세를 이을 추정 승계자로 결정한다는 내용이었다.

크리스티안은 부친 빌헬름 공작의 갑작스런 서거로 13세 이후 코펜하겐에서 성장하였으며, 대를 이을 손자가 없었던 프레데릭 6세와 마리 왕비에게 ‘수양 손자’와 같은 존재였다. 크리스티안 왕자는 어려서부터 덴마크인으로 길러졌고 덴마크 관할 지역에서 성장하였으며, 독일의 민족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덴마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왕위 계승에 비교적 호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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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룩스부르그 왕가를 개창한 크리스티안 9세



비록 올덴부르그 왕가의 본가가 아닌 분가이긴 했지만 남성 상속자로서 크리스티안 왕자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을 승계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으며, 프레데릭 3세의 후손으로서 덴마크의 왕위를 물려받을 적격자였다. 1853년 우여곡절 끝에 크리스티안이 유럽 열강들의 승인 아래 프레데릭 7세에 의해 덴마크의 추정 왕위승계자로 결정되었다.

크리스티안이 그의 두 형을 제치고 추정 승계자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그의 결혼이었다. 크리스티안은 1842년 덴마크 크리스티안 8세의 조카인 헤세-카셀 가문의 루이제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두 형에 비해 덴마크 왕실과 더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

1863년 11월 15일 프레데릭 7세가 서거함에 따라 크리스티안은 왕명 크리스티안 9세로 덴마크 왕에 즉위하였으며, 이로써 선대 왕가였던 올덴부르그 왕가를 이어 덴마크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쇠너부르그-글룩스부르그 왕가가 탄생되었다.




덴마크의 왕가에서 유럽의 왕가로



덴마크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후손들은 직간접적으로 유럽의 왕가와 인연을 맺으면서 광범위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1863년 3월 30일 당시 왕세자 크리스티안의 둘째 아들이었던 빌헬름이 헬레네스(현재의 그리스)의 요르요스 1세 왕으로 즉위하면서 1973년 그리스 왕정이 붕괴될 때까지 그리스의 글룩스부르그 왕가를 형성하였다.

또한 프레데릭 8세의 둘째 왕자였던 칼이 1905년 11월 18일 노르웨이 왕 호쿤 7세로 즉위하면서 현재의 노르웨이 글룩스부르그 왕가로 이어지고 있다. 크리스티안 9세의 첫째 딸인 알렉산드라 공주는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의 왕비가 되었고, 둘째 딸인 더그마르 공주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와 혼인하여 제정 러시아의 황후가 되었다.

현재 재위하고 있는 유럽의 군주 중 덴마크의 마르그레트 2세 여왕,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벨기에의 필립 왕, 노르웨이의 하럴드 5세 왕, 스페인의 펠리페 6세 왕, 룩셈부르크의 앙리 대공 등이 크리스티안 9세의 직계 자손들로 덴마크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후손들이다.

또한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부군인 에든버러 공작 필립, 스페인 후안 카를로스 왕의 왕비였던 소피아 왕비, 그리고 그리스의 마지막 왕이었던 콘스탄티노스 2세와 안-마리 왕비 역시 덴마크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후손들이다.




의회민주주의를 받아들인 크리스티안 9세



글룩스부르그 왕가를 개창한 크리스티안 9세는 즉위 초기부터 어려운 정치적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의 집권 초기는 국가적 대재앙으로 시작되었다. 덴마크 국회는 소위 11월 헌법을 채택하였으나 선대 왕인 프레데릭 7세는 이에 서명할 시간도 없이 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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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 나선 덴마크 부대. 이 전쟁에서 덴마크는 프로이센에 참패한다.



11월 헌법은 덴마크가 슐레스비히를 통합 통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당시 세력 균형을 위해 현상 유지를 원했던 열강들의 합의와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크리스티안 9세는 본인의 뜻과는 달리 즉위 3일 만에 이 헌법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64년 2월 1일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11월 헌법’을 이유로 덴마크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덴마크는 참패하였으며, 동년 10월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라우덴부르그 공국 모두를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크리스티안 9세는 노골적으로 에스트룹이 이끄는 보수 계열의 우익당을 지지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집권 초기부터 시작된 헌법 투쟁의 기간 동안 우익당 지지층을 제외한 국민 대부분으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9세는 1901년 총선에서 하원의 다수 정당이 된 자유주의 계열의 자유개혁당 내각을 인정함으로써 덴마크 의회민주주의 확립의 초석을 놓았으며, 이후 국왕에 대한 국민적 신망은 괄목할 만큼 증진되었다.

국왕이 의회의 다수당 집권을 인정한 1901년의 이 사건을 ‘체제 전환’이라 하여 덴마크 정치사에서는 민주주의를 향한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후 크리스티안 9세는 1906년 서거하기까지 정도를 걷는 신중함으로 국민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으며, 1906년 42년간의 재위를 마치고 87세의 나이에 서거하였을 때 덴마크 국민 전체가 애도하였다.




통치보다 국민과의 유대를 택한 프레데릭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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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간섭하지 않는 자애로운 모습으로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 프레데릭 8세



덴마크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두 번째 왕인 프레데릭 8세는 1906년 63세가 되어서야 왕위에 올랐다. 그는 1869년 스웨덴의 루이제 공주와 혼인하여 5명의 왕자와 3명의 공주를 두었다. 프레데릭 8세의 첫째 왕자는 부친의 뒤를 이어 1912년 크리스티안 10세로 덴마크의 왕위에, 둘째 왕자 칼은 부친이 왕위에 오르기 1년 전인 1905년 호쿤 7세로 노르웨이의 왕위에 올랐다.

프레데릭 8세는 42년 넘게 왕세자의 신분으로 지내는 동안 초기에는 부왕 크리스티안 9세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9세는 프레데릭을 정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에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다. 왕세자 프레데릭은 유럽 열강들과의 충돌을 우려하여 1863년의 11월 헌법에 대한 서명을 망설이던 부왕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조하였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9세는 결국 서명하였고, 우려했던 대로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이 발발하였다.

강력한 왕권을 수호하고자 했던 부왕 크리스티안 9세가 1901년의 자유개혁당 내각을 인정하면서 의회민주주의에 굴복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프레데릭 8세는 즉위 후 현실을 받아들이며 국왕으로서의 통치보다는 국민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프레데릭 8세는 진보주의 계열의 자유개혁당 내각과 협력관계를 구축하였으며, 당시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열강들을 의식하여 특히 국방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프레데릭 8세는 즉위 후반부 부왕 크리스티안 9세와 마찬가지로 자애로운 모습을 보이며 정치에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 사이에서도 높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프레데릭 8세의 재위 기간은 6년에 불과했다. 즉위 초부터 건강 문제로 고통받던 프레데릭 8세는 1912년 휴양차 프랑스 니스에 갔다가 귀국하면서 잠깐 들른 독일 함부르크의 산책길에서 갑자기 서거하였다. 프레데릭 8세의 갑작스런 죽음은 본인에게는 당시 유럽 대륙에 드리워져 있던 대규모 전쟁의 먹구름에서 자유로워졌음을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프레데릭 8세의 통증과 함께 구체제의 통증 역시 덴마크 사회에서 종지부를 찍었음을 의미한다.




양차 세계대전 중 국민 통합의 구심점이 된 크리스티안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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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초기에는 의회와 충돌하였으나 점차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한 크리스티안 10세



부왕 프레데릭 8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1912년 즉위한 크리스티안 10세는 조부인 크리스티안 9세가 왕위에 있을 때인 1870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출생과 함께 왕위 계승이 결정된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첫 번째 왕이었다. 크리스티안은 188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전통에 따라 집중적으로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는 크리스티안 10세로 하여금 전형적이고 헌신적인 군인의 길을 걷게 만들었고 즉위 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왕세자 크리스티안은 1898년 메클렌부르그-슈베린 공국의 여공작 알렉산드리네와 결혼하였으며,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두 명의 왕자를 슬하에 두고 있었다. 크리스티안 10세는 1912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즉위하여 1947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극도의 혼란기에 덴마크의 왕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위 초기 크리스티안 10세는 이미 1901년에 시행된 의회민주주의의 원칙과 충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의회민주주의에 왕권이 굴복하는 양상이 되자, 왕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시대를 역행하는 왕권 회복의 시도는 수차례에 걸쳐 의회 지도자들과의 충돌로 이어졌다.

1920년 4월 슐레스비히 주민투표를 둘러싸고 왕권과 내각 간의 충돌이 일어났다. 당시의 자흘레 수상은 왕명에 항거하여 사임하였으며, 크리스티안 10세는 내각을 해체하고 보수 계열의 과도내각을 임명하였다. 이미 의회민주주의가 정착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크리스티안 10세의 이러한 행위는 극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급기야는 입헌군주제 자체를 위협하는 상황까지 연출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크리스티안 10세는 과도내각을 해체하고 의회와의 조율을 통해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임시내각을 구성하도록 하였다. ‘부활절 위기’라 불렸던 이 사건은 덴마크의 왕이 의회를 무시하고 내각의 구성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마지막 사건이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왕은 국가수반으로서의 상징적 존재로 고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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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생일을 맞은 크리스티안 10세. 나치 점령 중에 말을 타고 매일 거리를 순시하던 그의 모습은 덴마크 주권의 상징이 되었다.



덴마크는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참패하고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 할양했던 영토 중 북부 슐레스비히를 1920년 주민투표에 의해 회복할 수 있었다. 덴마크로서는 실로 오랜만의 영토 확장이었다. 이에 크리스티안 10세는 코펜하겐에서 북부 슐레스비히의 독일 국경까지 말을 타고 달리곤 하며 국민들에게 덴마크의 기상을 일깨워 주었다.

크리스티안 10세는 유럽 대륙에 대규모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워지던 1930년대 동안 전체주의 움직임에 대항하여 의회와 내각의 편에 서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양차 세계대전 기간 중,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점령당한 상태에서 크리스티안 10세가 덴마크 국민에게 보여 준 영웅적 행위와 그로 인한 국민 통합의 역할은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나치 점령기에 크리스티안 10세는 매일 경호원도 없이 꼿꼿한 자세로 말 위에 올라 코펜하겐 거리를 누비고 다니며 덴마크를 상징하는 왕의 당당함을 보여주었다. 승마왕으로 불렸던 크리스티안 10세는 암울했던 시기에 국민 통합의 상징이었다.

크리스티안 10세는 1942년 10월 일상적인 승마 순시 중 낙마하여 크게 다쳤으며, 이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47년 4월 20일 영면하였다. 영결식에서 누군가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덴마크의 레지스탕스들이 착용했던 완장을 그의 영구대 위에 올려놓았다.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 국민 속으로 파고든 프레데릭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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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국민들에게 모범적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 프레데릭 9세



부왕 크리스티안 10세를 이어 프레데릭 9세가 1947년 4월 20일 평화의 시기에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네 번째 왕위에 올랐다. 그의 재위 기간(1947~1972)은 덴마크 사회가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던 시기와 맞물려 결핍으로 요약되던 농경사회의 한계를 떨쳐냈으며, 빠른 속도로 풍요로운 복지사회로 발전해 나갔다.

프레데릭 9세는 왕세자 시절인 1935년 36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스웨덴의 구스타브 아돌프 왕세자의 딸이었던 잉그리드와 결혼하였다. 그는 영민한 잉그리드 왕비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정확한 판단으로 왕과 국민 간의 관계를 재정립해 나갔다. 그 방향은 종래의 고귀하고 멀게만 느껴지던 왕실에서 벗어나 일반 국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사회계층 간 괴리를 솔선수범하여 타파하는 상징적 기관으로서의 왕실로 변해가는 것이었다.

프레데릭 9세와 잉그리드 왕비, 그리고 세 공주로 구성된 왕실은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으며, 덴마크 국민들에게 현대사회에서의 모범적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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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군주 4대가 1903년에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의 어린 왕자가 프레데릭 9세.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크리스티안 9세, 크리스티안 10세, 프레데릭 8세.



프레데릭 9세의 행동 하나하나는 늘 기쁨과 간단, 솔직함으로 표현되었으며, 실제로 타고난 친화력과 부드러움으로 국왕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으면서도 모든 부류의 사람들과 일을 같이할 수 있는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의 이러한 인성은 상당 부분 규율 준수의 의무가 있으면서도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해군장교의 훈련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었다. 또한 음악을 좋아했던 프레데릭 9세는 능숙한 피아노 연주자이자 지휘자이기도 했다.

1972년,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전통 의식에 따라 왕궁 발코니에서 신년 메시지를 전한 후 프레데릭 9세는 독감 증세로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병상에 누운 지 2주일 만인 1월 14일 72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프레데릭 9세의 갑작스런 서거는 왕과 왕실 가족 전체를 가슴 깊이 사랑했던 덴마크 국민 모두에게 커다란 슬픔이며 손실이었다.




덴마크 역사상 두 번째 여왕 마르그레트 2세



프레데릭 9세를 이어 즉위한 마르그레트 2세는 1972년부터 현재까지 재위하고 있는 덴마크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다섯 번째 군주이며, 덴마크 역사상 두 번째 여왕이다. 부왕 프레데릭 9세는 잉그리드 왕비와의 사이에 공주만 셋을 두었다.

당시의 왕위계승법에 따르면 프레데릭 9세의 동생이었던 크누드 왕자가 왕위 계승 1순위였다. 그러나 덴마크 국회는 1953년 남성 계승자가 없을 경우 여성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왕위계승법을 개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1972년 프레데릭 9세의 서거 후 그의 첫 번째 공주 마르그레트가 마르그레트 2세로 덴마크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1958년 4월 16일 만 18세로 성년이 된 왕세녀 마르그레트는 국왕과 수상 및 내각 각료로 구성된 중추원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했으며, 국왕 프레데릭 9세의 부재시에는 회의를 주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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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개정된 왕위계승법에 따라 덴마크 역사상 두 번째 여왕이 된 마르그레트 2세 <출처: (cc) Johannes Jansson at Wikipedia>



왕세녀 마르그레트는 1967년 라보르드 드 몽페자 가문의 앙리 백작과 결혼하였으며, 앙리 백작은 결혼과 함께 덴마크의 헨릭 왕자로 명명되었다. 마르그레트 2세가 즉위한 이후에도 헨릭의 칭호는 헨릭 왕자였으나, 2002년 덴마크 왕실에서의 서열 논란을 계기로 2005년부터는 ‘여왕의 부군(Prinsgemal, Prince Consort)’이라는 공식 칭호를 받았다. 마르그레트 왕세녀와 헨릭 왕자 사이에는 1968년 현재의 왕세자 프레데릭이, 그리고 1969년에는 요아킴 왕자가 태어났다.

마르그레트 2세는 사립학교, 왕실에서의 개인 교습, 외국 유학 등을 거쳐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으며, 이후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 덴마크의 오르휘스 대학, 프랑스 소르본 대학, 그리고 런던 정경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녀는 덴마크어 이외에도 불어, 스웨덴어, 영어,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예술가로서의 활동도 활발하다. 1970년대 이후 실제로 유화, 수채화, 판화, 도서 삽화 등의 작품활동을 해 왔으며, 부군 헨릭 공과 함께 시몬느 드 보봐르의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를 덴마크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1941년 1월 1일 크리스티안 10세에 의해 처음 시작된 전통에 따라 마르그레트 2세 역시 매년 12월 31일에 덴마크 국민들에게 보내는 신년사를 발표한다. 매년 서로 다른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전하고 ‘신이여, 덴마크를 보호하소서’로 끝이 나는 이 신년사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데 덴마크에서 가장 시청률이 높은 전국적인 이벤트이며, 국민과 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채널이기도 하다.

마르그레트 2세는 신년사의 메시지를 통해 왕실이 국민들과 희로애락을 같이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중요한 사회 이슈에 대해 국민들에게 이정표를 제시하며 국가와 민족을 위한 단결을 요구하였다. 신년사에서 여왕이 무슨 화두를 던질지는 덴마크 모든 국민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으며, 심지어는 그해 신년사의 화두가 무엇일지에 대한 복권업자까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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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레트 2세와 부군 헨릭 공 <출처: (cc) Holger Motzkau at Wikipedia>






덴마크 국왕의 위상과 공식 임무



덴마크의 헌법은 1849년 제정되어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전환한 후 개정 절차를 거치지 않고 1866년, 1915년, 1920년, 1953년 등 네 번에 걸쳐 새로 쓰여졌으며, 현재 1953년의 헌법이 적용되고 있다.

1953년의 새로운 헌법은 프레데릭 9세의 소생 세 명이 모두 공주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정되었으며, 남성장자 원칙을 깨고 남성의 왕위 계승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여성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1953년 헌법에 의거 현재의 마르그레트 2세가 여왕으로 왕위를 승계할 수 있었다. 덴마크는 2009년 왕위계승법을 개정하여 남녀 불문하고 첫 번째 소생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덴마크의 헌법에는 국왕이 의회와 함께 입법권을 행사하며, 통치 권한 역시 왕에게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국왕은 수상 및 각료를 임명, 해임할 수 있으며 모든 법안은 왕의 서명을 거쳐 발효된다고 규정되어 있다. 물론 이는 명목적인 헌법조문일 뿐이며 실질적으로 왕은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덴마크의 왕은 국가의 수반으로서 외국의 국가원수를 접견하고 덴마크에 파견되는 각국 외교사절의 신임장을 접수하며, 각국에 파견되는 덴마크의 외교사절 역시 수상이 이를 결정하고 왕의 명에 의해 파견된다. 덴마크의 왕은 또한 군의 최고통수권자이기도 하다.




덴마크의 국왕 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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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에 발행된 마르그레트 2세의 즉위 기념 10크로네 권 주화. 안쪽으로 ‘신의 도움, 국민의 사랑, 덴마크의 힘’이라는 국왕 표어가 새겨져 있다.



덴마크를 비롯하여 스웨덴과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왕국의 국왕들은 왕위에 즉위하면서 개별 국왕 고유의 표어를 설정하는 것을 오랜 전통으로 하고 있다. 크리스티안 9세는 ‘신과 함께 명예와 정의를 위하여’, 프레데릭 8세는 ‘신은 나의 조력자’, 크리스티안 10세는 ‘나의 신, 나의 조국, 나의 명예’, 프레데릭 9세는 ‘신과 함께 덴마크를 위하여’를 고유의 국왕 표어로 채택하였다.

현재의 마르그레트 2세는 ‘신의 도움, 국민의 사랑, 덴마크의 힘’을 국왕 표어로 설정하였다. 덴마크 글룩스부르그 왕가의 국왕들은 국왕 표어를 통해 조국 덴마크와 덴마크 국민들에 대한 국왕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덴마크 왕실에 대한 대중적 평가



덴마크의 글룩스부르그 왕가가 출범한 초기에는 국왕과 국회 사이에 충돌도 있었고, 때로는 입헌군주제 폐지까지 거론되기도 하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국왕 및 왕실이 현실에 순응하여 존재하지만 통치하지 않는 국왕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 마르그레트 2세의 둘째 왕자인 요아킴이 이혼을 하고 재혼하였음에도 덴마크 정치권과 국민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덴마크 국민들의 국왕 및 입헌군주제에 대한 지지도는 대체적으로 80% 선을 유지하면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받는 왕실로 자리 잡고 있다.

1863년 덴마크 글룩스부르그 왕가가 시작된 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양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면서도 국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역경을 극복했으며, 그 극복 과정에서 당시의 국왕들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전후 재건과 덴마크 사회의 발전을 위해 국왕과 왕실이 국민 통합의 구심점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국민들의 삶 속에 스며들어 국민과 함께 호흡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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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레트 2세의 생일을 맞은 덴마크 왕가가 군중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출처: (cc) Bill Ebbesen at Wikipedia>



1940년 4월 16일에 태어난 마르그레트 2세는 2015년 4월 16일에 75세가 되었다. 마르그레트 2세의 75세 생일에는 덴마크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으며, 여왕이 거주하고 있는 아말리엔보르그 왕궁 앞에 수만의 인파가 운집하여 여왕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현재 덴마크의 국왕 및 입헌군주제에 대한 지지도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으며 때로는 90%를 넘는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고 국민과 소통하면서 입헌군주제 하에서 군주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자 했던 덴마크 왕가의 노력의 결과라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 자료



박노호 | 한국외국어대학교 스칸디나비아어과 교수, 국제지역대학원장
글쓴이 박노호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스웨덴어과를 졸업한 후 스웨덴 스톡홀름대학교 경제학과에서 공공경제학을 전공하고 1992년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조세연구원을 거쳐 1994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스칸디나비아어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입학처장, EU연구소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국제지역대학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연구업적으로는 <스칸디나비아 3국의 조세제도: 스웨덴을 중심으로>, <스웨덴 국회의 구조와 기능>, <EU 회원국 간 경제적 이해관계 상충의 원인 및 사례 분석>, <정권교체와 정책변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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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계의 왕가
현재 전 세계에는 29개의 국가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군주제가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존하는 왕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는 29개국 및 20세기에 왕정이 폐지된 그리스, 21세기에 군주제의 막을 내린 네팔 왕가를 살펴본다. (안도라는 독립적인 군주제 형태가 아니라서 시리즈에서 제외되었다.)


발행2016.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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