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알렉산더 네프스키 - 선전을 예술로 승화시킨 두 사람의 형식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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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6회 작성일 16-02-0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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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이른바 ‘몽타주 이론’의 창시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파업](1924), [전함 포템킨](1926), [10월](1928)과 같이 제목만 보아도 사회주의 관제 예술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소재들을 탁월한 예술적 감수성과 독창성, 과감한 실험 정신을 통해 최고의 영상미학으로 옮겨놓은 위대한 예술가였다. 에이젠슈타인의 초기 작품들은 모두 무성영화였는데, 이런 기술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높은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냈다. 때로는 지나친 지적 유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치밀한 이론과 기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의 영화들은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서 예술이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기량에 따라 얼마든지 높은 예술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모범적인 예에 속한다.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소련에 대한 침약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을 때였다. 독일의 침략 야욕에 맞설 국민적 단결이 절실했던 소련 당국은 에이젠슈타인에게 13세기 게르만의 침략을 막아낸 러시아 민족의 영웅 알렉산더 네프스키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Alexander Nevsky Op.78 - 1. 몽골 치하의 러시아음악 재생
2Alexander Nevsky Op.78 - 4. 일어나라, 러시아 민중이여음악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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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원제공 :
소니뮤직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에이젠슈타인에게 일종의 재기작(再起作)이라 할 수 있다. 소련 당국에 의해 형식주의자로 찍혀 8년 동안 영화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그동안 자기가 만든 작품에 대한 혹독한 자아비판을 한 후에 다시 메가폰을 잡을 수 있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에이젠슈타인의 첫 번째 발성영화였다. 그전까지 무성영화만 만들었던 그는 이제 영상에 소리를 입힐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영상과 소리의 결합으로 표현의 가능성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졌기 때문이다. 에이젠슈타인은 ‘소리’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래서 소리에 영상과 똑같은 중요성과 의미를 부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소리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보다 강력한 것, 영상의 의미를 돋보일 수 있는 보다 잘 갖추어진, 완결된 양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음악이었다. 영상과 음악이 동등한 중요성을 가지고 미학적으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개념의 음악영화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자신의 영상에 생명을 불어넣을 사람으로 에이젠슈타인은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를 지목했다. 당시 프로코프예프는 러시아 혁명 이후 서방세계로 망명했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지 몇 년 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에이젠슈타인과 마찬가지로 형식주의자로 찍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이름이 모두 ‘세르게이’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두 사람의 세르게이가 의기투합해서 함께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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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네프스키]는 에이젠슈타인이 만든 첫 발성영화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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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과 음악을 완벽하게 일치시키려는 에이젠슈타인과 프로코피예프의 의도는 주도면밀한 계획과 치밀한 계산을 통해 이루어졌다. 에이젠슈타인은 하루 촬영을 하고 나면, 이를 편집해 저녁때 프로코피예프에게 갖다 주었다. 그러면 프로코피예프는 스톱워치와 메트로놈을 사용해 마디 수를 계산하고, 영상에 꼭 들어맞는 음악을 작곡해 정오가 되면 그 곡의 피아노 악보를 에이젠슈타인에게 전달하곤 했다. 편집된 필름을 보며 즉석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서로가 원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때로는 두 사람의 생각이 다른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경우에는 에이젠슈타인이 양보를 했다. 프로코피예프가 음악을 그대로 밀고 나가고 싶어 하면, 그의 뜻에 따라 영상을 편집하곤 했다. 이런 에이젠슈타인의 태도는 영화를 만드는 내내 바뀌지 않았다. 그만큼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을 존중했으며, 영화에서 음악이 영상과 같은 중요성을 가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프로코피예프에게 영화는 ‘대단히 젊고 현대적인 예술’이었다. 새로운 상상력을 가능케 하는 매우 환상적이고 매력적인 매체였다. 그는 [알렉산더 네프스키]를 통해 이런 가능성을 충분히, 아낌없이 활용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화면에는 몽골의 침략으로 황폐해진 전쟁터의 광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황량한 벌판에는 전쟁에서 희생당한 전사들의 유골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한때 피 끓는 애국심으로 적군과 맞서 싸웠던 러시아 병사들이 이제는 퀭한 눈의 유골이 되어 황폐한 벌판의 칼바람을 맞고 있다. 이 광경을 배경으로 [몽골 치하의 러시아]가 흐른다. 현악기의 피 끓는 절규와 처절한 트레몰로, 오보에와 베이스 클라리넷, 파곳이 그리는 황량한 죽음의 현장 그리고 잉글리시 혼의 애처로운 비가가 인상적인 음악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플레스키에보 호수. 러시아 어부들이 고기를 잡고 있는 장면을 배경으로 [알렉산더 네프스키의 노래]가 흐른다.



그것은 네바 강 위에서였지. 위대한 강. 네바 강 위에서.
그곳에서 우리는 사악한 군대를 쳐부수었다네. 사악한 스웨덴 군대를. 오! 우리는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으며,
얼마나 많이 적을 베었던가!


이 노래는 알렉산더의 공적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높은 음역의 소프라노를 빼고, 알토, 테너 베이스만으로 묵직한 음향을 연출한 것이 특징이다. 처음에는 느리고 유장하게 흘러가다가 갑자기 템포가 빨라지면서 전투 장면을 연상시키는 격렬한 관현악과 합창이 뒤를 잇는다.

이어지는 장면은 독일 십자군의 침략으로 고통받는 프스코프의 모습이다. 독일군의 침략으로 초토화된 프스코프. 바닥에 여기저기 시체들이 누워있고, 한쪽에서는 포로로 잡힌 러시아 사람들에 대한 처형이 진행되고 있다. 이 처참한 장면을 배경으로 [프스코프의 십자군]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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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서 러시아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한 러시아의 국민적 영웅 알렉산더 네프스키. <출처: Wikipedia>



이 대목을 작곡할 때 프로코피예프는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13세기 독일 기사단이 직접 불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라틴어 성가를 사용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서관에 가서 당시 악보들을 살펴본 결과 이 생각이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가톨릭 성가의 선율이 너무나 단조로와서 독일 기사단의 잔혹함과 그 밑에서 신음하는 러시아 인민의 고통을 담기에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3세기 가톨릭 성가는 20세기 초반 러시아 관객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너무나 나약한 구시대의 노래였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는 역사적 진실 대신 영화적 진실을 택하기로 한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시대적 고증이 아니라 당대 관객들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그는 호전적인 독일 기사단을 금속성의 소리가 나는 거친 불협화음으로, 이를 방어하는 러시아 인은 풍부한 하모니와 낭랑한 멜로디를 자랑하는 민속음악 어법으로 묘사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시대보다 무려 7세기나 지난 20세기 초반, 당대의 감각으로 이 장면을 그린 것이다.

[프르코프의 십자군]은 아주 듣기 싫은 불협화음으로 시작한다. 한 음을 연주할 때마다 심벌즈가 가세해 더욱 불쾌한 소리를 낸다. 이 음악을 배경으로 화면에는 독일 십자군의 만행에 신음하는 러시아 민중들의 처참한 모습이 비친다. 그런 다음 느린 템포로 라틴어 성가 [희망하는 이방인이여]가 울려 퍼지는데, 같은 음을 일정한 박자로 반복하면서 점점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가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 대목은 멜로디와 리듬이 지극히 단순하다는 점에서 라틴어 성가와 비슷하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 멜로디의 단순성으로 인해 십자군의 잔혹함이 더욱 리얼하게 드러나는 효과를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음량의 갑작스러운 증폭을 통해서이다. 여기서 이 결연한 성가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십자군의 만행을 리얼하게 드러내는 효과적인 배경음악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외세의 침입에 결사 항전을 다짐하는 러시아 민중의 의지를 표상한 것이기도 하다. 중간에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주제 선율을 가진 전혀 새로운 멜로디가 나타나는데, 이는 십자군의 만행으로 고통받는 러시아 민중들의 아픔과 고통을 그린 것이다.

프스코프가 함락 당한 후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민중들을 규합하는 장면에서 [일어나라. 러시아 민중이여]가 힘차게 울려 퍼진다.



러시아 백성들아. 무기를 들고 일어서라. 러시아를 위해 일어나라. 산 자에게는 명예를, 죽은 자에게는 영광을. 러시아를 위해 일어나라.

음악은 금관악기들이 당김음으로 “부웅 부웅”하고 배경음을 깔아주는 동안 심벌즈, 종, 탐탐 등이 금속성의 화려한 소리의 향연을 펼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경쾌하고 씩씩한 행진곡풍의 노래가 이어진다. 노래는 단순한 러시아 민요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금속성 타악기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종, 탐탐, 심벌즈 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면서 노래의 리듬감을 강조한다. 이렇게 씩씩하게 나가다가 중간에 분위기가 바뀌어 서정적인 애국 찬가가 나온다. 그런 다음 다시 처음의 씩씩한 행진곡으로 돌아가는데, 특이한 것은 이 부분에서 글로켄슈필의 현란한 연주가 가세한다는 것이다. 우직하고 씩씩한 러시아 민요에 세련된 20세기의 옷을 입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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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네프스키와 독일 기사단의 전쟁은 ‘얼음 전쟁(Battle on the ice)’이라고 불린다. 그림은 16세기에 그려진 [얼음 전쟁]. <출처: Wikipedia>



1242년 4월 5일. 독일 기사단이 노브고로드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독일 기사단은 네프스키가 포진한 노브고로드 근방의 페이푸스 호수까지 쳐들어왔다. 철갑 옷을 갖춰 입은 중장비 기병대와 원시적인 무장의 보병 부대가 서로 맞붙은 것이다. 때는 4월이었다. 아무리 러시아라 해도 4월이면 얼어 있던 얼음이 약해지는 계절이다. 네프스키는 호수를 전쟁터로 선택했다. 기병이 위주인 독일 기사단에 비해 러시아는 보병이 중심인 농민 군대였다. 일단 얼음 위에서라면 기병의 기동이 제한되고, 무게가 무거운 철갑 기사들이 모이면 얼음은 깨지게 돼 있었다. 전투는 얼음이 녹기 시작한 4월의 넓은 호수 위에서 전개됐다. 치열한 전투 끝에 독일 기사단이 러시아군에게 밀리면서 호수 안쪽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때마침 따뜻해진 날씨로 약해진 얼음이 중무장한 독일 기마병의 무게에 눌려 깨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독일 기사단이 물에 빠져 익사했다. 날씨를 이용한 네프스키의 전략이 성공한 것이다.

얼음 위에서 러시아 군과 독일 기사단이 벌이는 전투는 영화 [알렉산더 네프스키]의 핵심 장면이다. 에이젠슈타인은 당시 영화판의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인원과 장비를 동원에 이 얼음 위의 전투 장면을 공들여 찍었다. 음악을 담당한 프로코피예프 역시 이 장면에 쓰일 음악을 심혈을 기울여 작곡했다. 음악적으로나 영상적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두 거장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난 명장면, 명음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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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전쟁 750주년 기념으로 발행된 러시아 우표. <출처: Wikipedia>



무난하고 평범한 선율과 구조를 가진 앞의 음악과 달리 이 장면의 음악은 매우 변화무쌍하다. 이것은 치열하고 처절하고 장쾌한 전쟁터 장면의 음화(音畵)이다. 여기서 현악기의 울림은 금속성의 날카로움을 지닌다. 약음기로 음색을 변형시킨 금관악기의 날카로운 비명, 글로켄슈필우드블록의 건조하고도 자극적인 울림, 탐탐, 심벌즈, 스네어 드럼, 북의 시원하고 장쾌한 음향이 한데 어우러져 아수라장이 된 전쟁터를 리얼하게 묘사한다. 악기들이 열정적으로 연주되는 동안 독일 기사단의 노래가 들린다. “십자가를 짊어진 군은 승리하고, 적은 멸망한다.”라는 내용이다. 이렇게 시종일관 격렬하게 진행되던 음악이 중간에 분위기를 바꾼다. 클라리넷과 바이올린이 씩씩하지만 무겁지 않은 선율을 연주하는데, 가끔씩 등장하는 목관악기 연주는 영화에서 군인들의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러시아 민속악기를 연주하는 장면과 겹쳐진다. 현악기와 관악기가 번갈아가며 폭풍우 같은 소리를 내는 가운데, 독일 기사단 장병들이 하나 둘씩 차례로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렇게 통쾌한 전사(戰死)의 세리모니가 모두 끝난 후, 전쟁터에 정적이 찾아온다. 현과 하프가 조용하게 음악을 끝낸다.

전쟁이 끝났다. 눈 덮인 들판 위에 전사자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누워있다. 순박한 러시아 처녀 올가가 전사들의 주검이 누워 있는 벌판에서 노래를 부른다. [죽은 자들의 벌판]이라는 로맨틱한 노래이다.



나는 눈 덮힌 벌판을 지나가고 있어요. 죽음의 들판을 날아가고 있어요. 영광스런 송골매를 찾고 있어요. 나의 신랑, 건장한 젊은 그들을. 러시아를 위해서 죽은 자라면 누구에게나 그의 감긴 눈에 입맞출 거예요. 그리고 살아남은 젊은 그들에게 진실된 아내, 사랑스런 배우자가 될 거예요.

영화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당시 나치의 침공을 앞두고 있던 러시아와 스탈린의 운명을 빗댄 선전 영화의 성격이 짙다. 그래서 스탈린의 호평을 받았으며, 이것으로 에이젠슈타인은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 영화를 통해 에이젠슈타인은 자신이 누구도 필적하지 못하는 영화의 거장, 시대를 앞서 가는 천재 예술가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이것은 음악을 담당했던 프로코피예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알렉산더 네프스키]를 통해 그는 그동안 자신을 향해 쏟아졌던 형식주의자라는 비판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어쨌든 알렉산더 네프스키의 이야기는 어느 누구도, 천하의 스탈린이라도 감히 트집 잡을 수 없는, 그야말로 너무나 애국적인 소재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두 사람에게 일종의 면죄부였다. 두 사람은 알렉산더 네프스키가 선물한 애국주의, 영웅주의의 행복하고 안전한 그늘 아래에서 형식주의자의 호사를 마음껏 누렸다. 그리하여 영화 전체가 거대한 칸타타라고 할 수 있는, 음악영화 역사상 최초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알렉산더 네프스키]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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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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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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