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그녀에게 - 카페 뮐러에서 마주르카 포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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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0회 작성일 16-02-0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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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천천히 올라가자 무대 위에 두 명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세상의 고뇌를 모두 짊어진 듯 비통한 표정을 한 채 한 사람은 무대 앞쪽에, 한 사람은 무대 뒤편에 서 있다. 정면으로 창문과 회전문이 보이고, 그 앞에 테이블과 의자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곧 음악이 시작된다. 느릿한 첼로 전주에 이어 흘러나오는 처연한 비가(悲歌). 이 비통한 음악에 맞추어 여자들이 춤을 춘다. 아니, 그것은 춤이라기보다 하나의 처절한 몸짓, 세상을 향한 절규 같은 것이다. 소프라노는 끊임없이 “나를 울게 해주오”라며 애원하고, 처연한 첼로 소리는 어느덧 아련한 오보 소리와 비탄의 앙상블을 이룬다. 앞의 여자가 눈을 감고 실성한 사람처럼 벽 쪽으로 달려간다. 그러자 여자가 다칠새라 한 남자가 빠른 동작으로 여자 앞에 놓여있는 의자들을 치워준다. 여자는 온몸으로 벽에 부딪친 다음 쓰러진다. 또 다른 여자 역시 느린 동작으로 눈을 감고 손을 허우적대다 마침내 바닥으로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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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Henry Purcell - Dido and Aeneas 중 When I am laid in earth음악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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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인간이 된 연인을 돌보는 두 남자의 이야기, 영화 [그녀에게]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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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는 이런 공연 장면으로 시작한다.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카페 뮐러]라는 작품이다. 무대 뒤편에 있는 마른 여자가 바로 피나 바우쉬인데, 피나 바우쉬는 무용에 연극의 개념을 도입한 ‘탄츠 테아터(Tanz Theater)’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독일 부퍼탈 극장의 탄츠테아터 예술 감독으로 있으면서 독특하고 혁신적인 안무를 창안했던 피나 바우쉬는 ‘사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보다는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가’에 더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춤은 의식의 내적인 흐름을 반영하는 하나의 몸짓이다. 그녀 작품 속의 사람들은 그냥 춤만 추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연기를 한다. 말이 아닌 몸으로. [카페 뮐러]의 주인공들 역시 몸으로 말을 한다. 세상은 여전히 암울하고 폭력적이며, 그 안에 사는 우리들은 외로움과 고통에 몸부림친다고.

이런 외로움과 고통이 객석에 전달된 것일까. 한 남자가 공연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이런 남자를 옆자리에 앉은 또 다른 남자가 흘깃 쳐다본다. [그녀에게]는 각기 식물인간이 된 연인들을 돌보는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두 남자의 이름은 베니그노와 마르코. 오랫동안 아픈 어머니를 보살피던 베니그노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우연히 창문을 통해 집 앞 발레 학원에 다니는 알리샤를 보게 된다. 이후 베니그노는 남몰래 마음속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키워간다. 그러던 어느 날, 알리샤가 교통사고를 당해 그만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간호사였던 베니그노는 식물인간이 된 알리샤를 4년 동안 사랑으로 보살핀다. 마치 의식이 있는 사람을 대하듯 옷을 입혀주고, 화장을 해주고, 책도 읽어주고, 자기가 본 공연 이야기도 해 준다. [카페 뮐러]를 보고 난 날도 마찬가지였다.



무대엔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고, 흰옷 입은 여자들이 나왔어요. 눈을 감고 막 돌아다니는데 부딪칠까봐 겁났어요. 근데 갑자기 남자가 나왔는데, 어찌나 슬퍼 보이던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남자 같았지요. 그가 가구를 치워 주더군요. 얼마나 감동적이던지. 내 옆에 40대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감정에 복받쳐 울더라고요. 이해할 수 있어요. 아름다웠으니까.

이렇게 눈물을 흘렸던 남자가 바로 마르코이다. 그는 여행 잡지 기자인데, 취재 차 만난 여자 투우사 리디아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어느 날 리디아가 투우 경기 도중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다. 마르코는 리디아를 병원에 입원시키는데, 바로 이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알리샤를 돌보고 있는 베니그노를 만난다. [카페 뮐러] 공연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이후 두 사람은 식물인간 상태인 애인들을 돌보며 우정을 쌓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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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만난 두 남자는 식물인간 상태인 애인들을 돌보며 우정을 쌓아간다.
<출처: 네이버 영화>



하지만 사랑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베니그노가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아무 대가 없이 그저 주기만 하는 사랑에 만족하고 있는 것에 반해, 마르코는 식물인간이 된 리디아와 진정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의사에게 리디아의 상태를 묻자 식물인간 상태가 몇 달, 몇 년, 심지어는 일생 동안 갈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절망한다. 결국 그는 리디아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 후 이 나라 저 나라를 여행하던 마르코는 어느 날 여행지의 신문에서 리디아가 죽었다는 기사를 본다. 놀란 마르코는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베니그노를 바꾸어 달라고 하지만 베니그노는 이미 병원을 떠난 뒤였다. 식물인간 상태인 알리샤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베니그노가 성폭행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마르코는 감옥으로 베니그노를 찾아가 위로의 말을 전한다.

그런데 그 후 마르코는 우연히 알리샤가 아이를 낳다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마르코는 베니그노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하지만 변호사가 이를 말린다. 마르코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 베니그노는 자기 집을 마르코에게 준다는 편지를 남기고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마르코는 예전에 베니그노와 나란히 앉아 [카페 뮐러]를 보았던 바로 그 극장을 찾는다. 이번에 공연되는 작품은 피나 바우쉬의 [마주르카 포고]. 바로 그 극장에서 마르코는 알리샤와 마주친다. 휴식 시간 때 그는 알리샤와 가벼운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다시 공연이 시작되었다. 무대 위에서는 관능적인 음악이 흐르고, 마르코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뒷자리에 앉은 알리샤를 바라본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마르코를 울린 [카페 뮐러]는 우울하고 어두운 작품이다. 무용수들의 표정과 몸짓도 그렇지만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 역시 그렇다. 여기서 소프라노가 처연하게 부르는 노래는 바로크 시대 영국 작곡가 헨리 퍼셀의 오페라 [요정여왕]에 나오는 비가(悲歌) [오! 나를 울게 해주오 Oh! Let me weep]이다. [요정 여왕]은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을 바탕으로 만든 것인데, [오! 나를 울게 해주오]는 티타니아가 요정의 왕 오베론의 사랑을 잃고 슬퍼하는 대목에서 부르는 것이다.

영화에는 안 나오지만 [카페 뮐러]에는 [나를 울게 해주오] 말고 또 다른 퍼셀의 비가가 나온다. 오페라 [디도와 아이네아스]에 나오는 디도의 비가 [내가 죽어 땅에 묻힐 때 When I am laid in earth]이다. [디도와 아이네아스]는 고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오페라이다. 디도는 트로이의 왕자 아이네아스를 사랑하지만 디도를 미워한 마녀들이 아이네아스의 야망을 부채질해 결국 그녀를 떠나게 만든다. 그러자 버림받은 디도는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내가 죽어 땅에 묻힐 때]는 그녀가 목숨을 끊기 직전에 부르는 것이다. 디도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외친다.



“나를 기억해 주세요. 나를 기억해 주세요. 아! 하지만 나의 이 운명만은 잊어주세요.”

[카페 뮐러]의 배경음악으로 퍼셀이 작곡한 두 개의 [비가]를 사용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카페 뮐러라는 공간을 우울과 외로움, 고통, 슬픔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자가 눈을 감고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 남자는 행여 그녀가 다칠세라 의자와 테이블을 치워준다. 식물인간이 된 애인을 돌보아야 하는 두 남자의 운명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여자는 고통스러워하고, 남자는 그 고통을 덜어주려고 하나 여전히 미래는 밤처럼 어둡고, 그림자처럼 암울하며, 겨울처럼 절망적이다. 공연을 보면서 흘린 마르코의 눈물은 이런 절망의 표현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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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에 삽입된 [카페 뮐러]의 비가는 영화 속 두 남자의 운명과 교차되며 절망을 표현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마르코는 말없이 누워있는 리디아를 보면서 그녀와 행복했던 한때를 회상한다. 한적한 교외의 한 저택에서 야외 음악회가 열리고 브라질의 음유시인 카에타노 벨로소가 이승의 사랑을 못 잊어 끝내 비둘기가 되어 환생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노래한다. 그것이 바로 [쿠쿠루쿠쿠 팔로마]이다. [쿠쿠루쿠쿠 팔로마]는 스페인의 작곡가 토마스 멘데즈 소사가 1956년 멕시코를 여행하다가 그곳 원주민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듣고 영감을 받아 만든 노래라고 한다. 한 여인을 사랑했던 남자가 저세상으로 가버린 후에도 그 사랑을 못 잊어 연인의 창가에 날아와 “쿠쿠 루 쿠쿠”하고 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수많은 긴긴 밤을
술로 지새었네.
잠도 못 이루고
눈물만 흘렸네


그 눈물에 담긴 고통
하늘을 울렸고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불렀네


아야야야야
노래도 불러보았고
아야야야야
웃음도 지어봤지만
아야야야야
그의 열정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네


어느 날
슬픈 비둘기 한 마리 날아와
쓸쓸한 그 빈 집에서 노래했다네
그 비둘기는 바로 그의 애달픈 영혼
비련의 여인을 사랑했던
그 아픈 영혼이라네


쿠쿠루쿠쿠 비둘기야
쿠쿠루쿠쿠 울지 말아라


돌맹이들을 절대로 비둘기야
사랑을 알지 못한단다.
쿠쿠루쿠쿠 비둘기야. 울지 말아라.


그때 마르코는 리디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전율이 느껴져.”

이제 리디아도 가고, 베니그노도 갔다. 마르코는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알모도바르는 살짝 희망을 얘기한다. 지극히 암시적인 방법으로. 이번에도 마르코는 극장에 와 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피나 바우쉬의 [마주르카 포고]. [카페 뮐러]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두 작품은 각각 밤과 낮, 빛과 그림자. 우울과 관능, 죽음과 생명. 겨울과 여름을 상징한다. [카페 뮐러]가 밤이라면, [마주르카 포고]는 낮이다. 영화는 비 오는 북유럽의 어둡고 우울한 카페에서 시작해 태양이 빛나는 남미의 열대우림에서 끝난다. 즉, 밤에서 시작해 낮으로 끝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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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는 리디아도, 베니그노도 없이 혼자 남게 되지만, 영화의 마지막은 절망이 아닌 희망을 향해 있다. <출처: 네이버 영화>



[마주르카 포고]는 ‘불타는 마주르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제목 그대로 남미의 찬란한 태양처럼 생명력이 흘러넘치는 작품이다. 바우쉬는 한 나라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그 나라의 풍광과 정서를 표현한 ‘세계 도시 시리즈’를 만들었는데, [마주르카 포고]의 배경은 포르투갈의 리스본이다.

피나 바우쉬의 열렬한 팬이었던 알모도바르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이 작품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이 작품이 주는 생명력과 낙관주의에 크게 감동받았다. 그 목가적 분위기와 고통에 찬 아름다움에 전율했다. 그래서 이 작품을 [그녀에게]의 결말로 사용했다.

무대에 거대한 열대우림이 펼쳐져 있다. 초록빛이 선명한 무대에서 여러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캐나다 출신 가수 KD 랭이 부르는 [Ain't it fuuny?]에 맞추어 춤을 춘다. 음악이 육감적이다. 여기서 남자들은 [카페 뮐러]처럼 그저 장애물을 치워주는 소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여자를 위로 솟구치게 하기도 하고, 바닥에 나란히 누운 상태로 손을 뻗쳐 여자의 몸을 떠받들기도 한다. 남자들의 도움을 받아 여자는 새처럼 하늘로 비상(飛上)한다. 그런 다음, 무대 왼편에서부터 한 쌍 씩 짝을 이룬 남녀들이 박자에 맞추어 엉덩이를 살짝 들썩이는 관능적인 춤을 추면서 등장한다. 이때 나오는 음악은 포르투갈 출신의 가수 바우가 작곡한 [라켈 Raquel]이다.

[마주르카 포고]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줄거리 없이 단편적인 에피소드들 나열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줄거리는 없지만 전달하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마주르카 포고]를 보고 있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될 것이고, 태양이 빛나는 한 우리의 사랑도 계속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메시지, 남미의 태양처럼 뜨거운 삶에의 열정이 솟아나는 것을 느낀다.

[카페 뮐러]에 나오는 퍼셀의 비가가 안으로 삭이는 슬픔, 비련의 내면화라면, [마주르카 포고]에 나오는 남미의 음악은 외향적 낙관주의, 긍정의 분출이다. 서정적인 파두와 댄스, 흥겨운 탱고와 삼바, 브라질 왈츠를 결합시켜 아름다운 남국의 풍광과 그 속에서 꽃 피는 사랑, 낭만, 기쁨, 희망, 생명, 삶에의 욕구 등을 표현한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관능적이고 육감적인 음악과 춤은 끊임없이 이런 메시지를 던진다. “욕망해도 괜찮아.”

[마주르카 포고]가 공연되는 동안, 마르코는 살짝 뒤를 돌아본다. 뒤에는 알리샤가 앉아 있다. 바로 그때 화면에 “마르코와 일리샤”라는 자막이 뜬다. 앞으로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그렇게 인생의 카페 뮐러에서 고뇌에 지친 마르코에게 알모도바르와 피나 바우쉬는 장밋빛 선물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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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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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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