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적과의 동침 - 소름끼치는 학대의 배경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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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3회 작성일 16-02-06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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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아내가 참다못해 남편을 살해했다는 뉴스를 가끔 듣는다. 아내는 곧 구속되고, 재판 과정에서 살인이냐 정당방위냐를 가지고 치열한 법적 공방이 벌어진다. 아내의 입장을 변호하는 사람들은 아내가 남편의 무차별적인 폭행에 순간적으로 판단력이 흐려져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죽음의 공포까지 느끼는 절박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런 폭력 남편 중에 가족 이 외의 사람에게는 전혀 폭력성을 드러내지 않고, 아주 정상적이고 모범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죽은 남편의 가족과 친지, 직장 동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베를리오즈 - [환상교향곡]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
소니뮤직



[적과의 동침]에 나오는 로라의 남편 마틴도 그런 사람이다. 로라는 돈 많고, 얼굴도 잘 생긴 데다가 자기를 공주처럼 떠받드는 마틴에게 반해 결혼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매너 좋던 마틴이 실제로는 극도의 결벽증에다 심각한 의처증까지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녀의 결혼 생활은 엉망진창이 된다. 마틴은 로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지시한다. 선반에 있는 통조림 병에서부터 욕실에 걸린 수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늘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을 것을 요구한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무자비한 폭행이 뒤따른다. 결벽증뿐만 아니라 의처증도 심각한 수준이어서 아내가 다른 남자의 눈에 뜨였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트집을 잡아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그렇게 무자비하게 아내를 때린 후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예의 그 매너 좋은 미소를 지으며 꽃이나 값비싼 옷을 선물한다. 채찍과 당근을 적절하게 사용해 아내를 통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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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을 그린 영화 [적과의 동침] <출처: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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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 지속적으로 폭행을 당하는 여자에게는 남편과의 잠자리도 폭행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성적인 결합은 육체적인 의미를 넘어선 정서적 결합이다. 그런데 실컷 때려놓고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하면서 잠자리를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폭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당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치욕스러운 일이다.

로라는 이런 치욕을 이를 악물고 참는다. 그럴 때면 마틴은 꼭 음악을 틀어놓는다. 여기서 마틴이 선택한 곡은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종소리와 함께 울리는 튜바의 위압적인 소리를 배경으로 마틴의 무자비한 성적 학대가 시작되고, 그럴 때마다 로라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다.

남편의 지속적인 폭행으로 로라의 몸에는 멍이 가실 날이 없다. 그러다가 결국 로라는 남편으로부터의 탈출을 계획한다. 남편 몰래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드디어 기회가 왔다. 남편과 요트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난 것이다. 남편이 안 보는 사이 로라는 물에 뛰어들고, 로라가 수영을 못한다고 알고 있는 마틴은 바다를 향해 울부짖는다. 이렇게 마탄이 바다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안 로라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동안 남편 몰래 모아두었던 돈과 간단한 소지품을 챙긴 다음, 마틴과의 끔찍했던 결혼 생활을 상징하는 결혼반지를 변기에 버리고 집에서 도망친다. 하지만 마틴은 이런 것도 모른 채 로라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장례식까지 치른다.

탈출에 성공한 로라는 자기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낯선 곳에서 이름을 ‘사라’라고 바꾸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옆집에 사는 대학 강사 벤의 도움을 받는데, 그러다가 어느 듯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어느 날, 로라는 직접 만든 애플파이를 가지고 벤의 집을 찾는다. 벤은 두 사람만의 로맨틱한 저녁을 위해 클래식 음악을 틀겠다고 한다. 그가 로라에게 무슨 곡을 좋아하느냐고 하자 로라는 이렇게 대답한다.


“베를리오즈만 아니면 괜찮아요. 그의 [환상교향곡]은 정말 소름 끼쳐요.”

하지만 이제 로라는 소름 끼치는 [환상교향곡]의 악몽에서 벗어나 벤과의 새로운 삶을 준비한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잠시 뿐. 마틴이 로라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녀 앞에 위기가 닥친다. 마틴은 로라의 어머니가 있는 양로원으로 가서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눈먼 로라의 어머니에게 접근해 그녀가 대학에서 연극을 가르치는 남자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 날,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온 로라는 무심코 오디오를 누른다. 그런데 거기서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로라는 처음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하지만 선반 속의 통조림들이 마틴의 방식대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다. 마틴이 집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마틴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로라 앞에 나타난다. 마틴은 총으로 로라를 위협하고, 때마침 로라의 집을 찾아온 벤을 때려 의식을 잃게 만든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로라는 마틴의 급소를 공격해 총을 빼앗는다. 마틴은 로라가 절대로 자기를 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그녀에게 다가가지만 로라는 경찰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가 침입자를 죽였다고 말한 후 마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적과의 동침]에서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은 마틴의 무자비한 학대를 상징하는 음악이다. 베를리오즈가 [환상교향곡]을 작곡한 것은 1830년. 바로 이 해에 베를리오즈는 한 여인을 만났다. 파리에서 공연된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각각 오필리어와 줄리엣으로 분한 스미드슨이라는 여배우였다. 그는 이 비극의 여주인공에게 한눈에 반했다. 하지만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스미드슨은 장래가 불투명한 애송이 작곡가의 구애를 깨끗이 거절했다. 이때부터 예술가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나는 깊은 슬픔에 사로잡혔다. 잘 수도 없고, 일할 수도 없었던 나는 파리 근교를 목적 없이 배회하며 시간을 보냈다.”

베를리오즈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이렇게 고뇌와 격정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고 파리 근교를 이리저리 방황하던 그는 한 카페에서 그만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때 죽은 사람으로 오인될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다섯 시간만에 깨어났다.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그는 꿈을 꾸었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한 참으로 기이한 환상인데, 그것을 음악으로 옮긴 것이 [환상교향곡]이다.

1832년 출판한 이 작품의 악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사랑에 미치고 인생이 싫어진 젊은 예술가가 아편을 마신다. 독약의 양은 죽음에 이르기는 약해 깊은 잠과 꿈을 가져다줄 뿐이다. 그 속에 예술가의 사랑 이야기가 재현되어 환상적인 무서운 결말로 이끌어 간다.”

[환상교향곡]은 모두 5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악장에는 제목이 붙어 있다. 1악장 [꿈, 정열]은 젊은 음악가가 마음속에 그려오던 이상적인 여성을 발견하고 곧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2악장 [무도회]는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젊은이가 화려하고 떠들썩한 무도회장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발견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3악장 [전원의 풍경]은 젊은이가 방황하던 중 잠시 평화로운 전원에서 목동의 피리 소리를 들으며 영혼의 안식을 취하는 광경을 그렸다. 하지만 이 평화도 잠시. 악장 끝에 나오는 불길한 천둥소리는 젊은이의 앞날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임을 예고한다.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에서 젊은이는 자신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음독자살을 기도한다. 하지만 약의 양이 치사량에 이르지 못해 죽음 대신 무서운 환상을 동반한 깊은 잠에 빠져든다. 여기서 그는 애인을 죽이고 사형 선고를 받아 단두대로 끌려가 죽음을 맞는다. 이어지는 5악장 [마녀의 밤축제와 꿈]은 젊은이가 죽은 후의 세상을 그린 것이다.

[적과의 동침]에 나오는 음악은 [환상교향곡]의 5악장에 나오는 것이다. 젊은이가 죽은 후, 무서운 유령, 마술사, 마녀, 갖가지 요괴들이 젊은이를 매장하기 위해 모였다. 몸을 오싹하게 하는 야릇한 소리들이 들려온다. 곡은 현의 침울한 멜로디로 시작하는데, 여기에 플루트와 혼이 묘사하는 닭 울음소리가 교차되어 나타난다. 이어 팀파니와 큰 북의 괴상한 리듬과 트레몰로를 타고 연인의 주제가 떠오른다. 하지만 전과 같이 정숙한 모습이 아니라 천박한 창부의 모습이다. 연인이 이 악마적인 밤의 향연에 뛰어들자 마녀들이 환호한다. 이어 마녀의 론도가 시작된다. 마녀들의 춤이 절정에 이르렀다 수그러들면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오고 죽은 자를 위한 [진노의 날]이 파곳과 튜바에 의해 정중하게 연주된다. 하지만 마녀들이 이것을 비웃듯 앞에 나왔던 선율을 두 배로 빠르게 연주한다. 마녀의 론도 주제가 현악기로 다시 나타나지만 대세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곧 빠른 템포의 론도가 현악에서 시작되어 발전하면서 푸가를 이룬다. 여기서 현은 론도 주제를, 관은 [진노의 날]을 연주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덩어리가 되어 지옥의 축제를 연상시키는 클라이맥스로 곡을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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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5악장은 최후 심판의 날을 다루고 있다. 그림은 한스 멤링의 최후의 심판 <출처: Wikimedia Commons>


[적과의 동침]에 나오는 대목은 5악장 중에서도 교회 종소리 맞추어 튜바가 연주하는 이른바 ‘진노의 날’ 주제 부분이다. 여기서 ‘진노의 날’은 최후 심판의 날을 의미한다. 성경에 보면 이 날, 죽은 자와 산 자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나와 살아있는 동안 행했던 일들이 적혀 있는 기록에 따라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를 결정한다고 한다. 살아생전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에게는 기쁜 날이지만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에게는 두려운 날이 아닐 수 없다.

최후의 심판이 시작되면 하늘에서 천사들의 나팔소리가 들린다. 한 군데서가 아니라 여러 군데에서 들려온다. 클래식에서 ‘진노의 날’을 묘사할 때 주로 트럼펫, 트롬본 같은 금관악기들을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금관악기 소리는 화려하지만,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에게는 그 소리가 마치 사면초가(四面楚歌)처럼 들릴 수도 있다.

베를리오즈는 이 악장의 ‘진노의 날’에 트럼펫 같은 화려한 음색을 내는 악기 대신 금관악기 중에서 소리가 가장 낮고, 무거운 튜바를 사용했다. 장례식 종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튜바가 위압적인 소리로 ‘진노의 날’을 연주한다. 여기서 튜바는 몇 개의 단순한 음을 뚝뚝 끊어서 연주하는데, 거대하고 위압적인 음색과 음량 때문에 매우 폭력적으로 들린다

튜바는 생긴 모양부터가 권위적이다. 오케스트라의 제일 뒤편에서 육중한 몸매를 자랑한다. 크기도 그렇지만 소리도 압도적이다. 물론 연주 방식에 따라 한없이 부드럽게 들릴 때도 있다. 하지만 연주자가 온 힘을 다 해 한 음 한 음 불 때면 그 어떤 악기보다 폭발적인 소리가 난다. 아마 이런 점 때문에 영화에서 이 대목을 마틴을 상징하는 음악으로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튜바 소리는 강한 것이 옳은 것이라는 남성의 왜곡된 의식을 상징한다. 마틴은 아내와 잠자리를 할 때마다 이 음악을 틀어놓고 아내를 강제로 정복한다. 그에게 튜바 소리는 사디스트로서의 쾌감을 배가시키는 성(性) 기구이자 고문의 도구다. 로라는 베를리오즈의 음악으로 고문을 당했다. 튜바가 등장하기 전에 들리는 장례식 종소리는 로라에게 성적 학대의 전주곡과 같은 것이었다. 이제 곧 남편의 무지막지한 폭행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경고의 종소리. 그런 다음 튜바가 나온다. 멀리서 성큼 성큼 다가오는 거인의 발걸음처럼 그렇게 육중한 무게로 성큼 성큼 다가와 그녀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짓밟는다. 힘은 압도적이지만 그 방법은 ‘진노의 날’의 멜로디만큼이나 단순 무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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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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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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