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프라하의 봄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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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7회 작성일 16-02-06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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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 가 보셨어요? 시간 있으면 꼭 가보세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랍니다.”

90년대 초반, 유럽을 여행하던 중 베를린의 지하철에서 만난 한 영국 청년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날 밤 나는 덜컹거리는 프라하 행 밤기차에 짐짝처럼 몸을 실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프라하는 정말 아름다웠다. 벼락부자 냄새가 나는 자본주의의 도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역사와 전통과 세월의 무게가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으로 구현되어 있었다. 숲과 나무 사이사이에 조용히 자태를 드러낸 아름다운 고성, 500년 세월의 무게를 안고 서 있는 카를 다리와 그 다리 양쪽에 늘어선 성자상(聖子像)들, 그리고 그 밑을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흐르는 강물. 이 모든 것이 미학적으로 완벽한 구도를 이루며 프라하라는 캔버스에 담겨 있었다.



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야나체크, [현악 4중주] 1번 [크로이처 소나타] 3악장음악 재생
2야나체크, [현악 4중주] 1번 [크로이처 소나타] 4악장음악 재생
3야나체크, [현악 4중주] 2번 [비밀편지] 3악장음악 재생
4야나체크, [현악 4중주] 2번 [비밀편지] 4악장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소니뮤직




내가 그곳을 찾았을 때는 한창 더운 여름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프라하의 봄을 생각했다. ‘프라하의 봄’. 그것은 기억 저 편에서부터 나를 지배해오던 하나의 상징적인 이미지이자 이상이었다. 그 기억은 멀리 유년 시절로 나를 데리고 간다.

아직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초등학생 때였다. 어느 날 신문에 대문짝 만한 활자로 인쇄되어 있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단어를 보았다. 하지만 당시 나는 이 낭만적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그저 이 단어가 나올 때마다 우리 고유의 음식과 발음이 비슷한 두부체크라는 이름이 함께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말이 뭔가 이 인물과 관련이 있는가 보다 하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것이 1968년 체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민주화 운동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강산이 몇 번 바뀐 후, 나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단어를 극장 간판에서 다시 보았다. 1980년대에 국내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소설을 먼저 읽었는데, 난해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사회주의 치하에서 겪어야 했던 지식인의 좌절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이해하겠는데, 그 방식이 낯설고 어려웠다. 그래서 영화가 나왔을 때 궁금했다. 이 복잡하고 어려운 소설을 어떻게 영화로 만들었을까. 막상 영화를 보니 소설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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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로 만든 [프라하의 봄] <제공: 네이버 영화> 영화 정보 보러가기


1960년대 체코의 프라하에서 외과 의사로 일하는 토마스는 일종의 성중독자다. 그에게는 사비나라는 애인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분방하게 다른 여성과 성을 즐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시골에 출장을 갔다가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테레사라는 순박한 처녀를 만난다. 테레사는 그 후 토마스를 찾아오고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다. 하지만 토마스는 결혼한 이후에도 다른 여자와의 성적 탐닉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프라하 거리에 소련군의 탱크가 밀려 들어온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소련의 압제에 대항해 시위를 벌이고, 테레사는 카메라를 들고 생생한 탄압의 현장을 렌즈에 담는다. 그리고는 그 필름을 외국인에게 넘긴다. 나라 밖으로 프라하에서 일어난 일을 알리기 위해서다. 그 일로 테레사는 경찰서에 잡혀 들어가는데, 그 안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 들어와 있다. 경찰은 사람들에게 거리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사진 속의 인물이 자기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강요한다.

이런 와중에 토마스의 또 다른 애인 사비나는 스위스의 제네바로 피난을 간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토마스와 테레사도 나중에 탈출 행렬에 동참한다.

제네바에 도착한 토마스와 테레사는 잡지사로 가서 프라하 민주 항쟁 사진을 보여주며 실어달라고 하지만 거절당한다. 이때 테레사는 잡지사로부터 패션 사진을 찍어보라는 말을 듣고 모욕감을 느낀다. 그 후 테레사와 토마스는 제네바에서 한동안 지내지만 토마스의 바람기에 상처를 받은 테레사는 혼자서 프라하로 돌아오고, 토마스도 테레사를 따라 귀국한다.

그 후 토마스는 병원 원장으로부터 예전에 그가 소련 관리를 비판하기 위해 썼던 글에 대한 철회서에 서명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하지만 토마스는 이를 거절하고, 이 때문에 그는 의사에서 병원 유리창을 닦는 단순노동자로 전락한다. 지식인으로서 무력감을 느낀 토마스는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테레사와 함께 시골로 들어간다. 두 사람은 시골에서 한동안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어느 날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타고 있던 트럭이 전복하는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제네바에 있던 사비나는 두 사람이 죽었다는 편지를 받고 슬퍼한다.

토마스가 두 명의 연인을 두었으면서도 또 다른 여성들과 성적 탐닉을 즐기는 인물로 나오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남녀 간의 애정이 아니다. 제목 그대로 거대한 정치 사회적 소용돌이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식인의 무력감,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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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성적 탐닉이 그려지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정치사회적 소용돌이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식인의 무력감에 대한 것이다. <제공: 네이버 영화>


이런 영화에는 어떤 음악이 어울릴까. 소설에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기 때문에 처음에는 베토벤의 음악을 쓰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원작자인 밀란 쿤데라가 말렸다. 그는 베토벤의 음악과는 다른 어떤 것. 무겁지 않고, 가벼우면서 단순한 음악을 원했다. 그래서 추천한 것이 체코 작곡가 야나체크의 음악이다.

야나체크는 20세기 가장 뛰어난 현대음악 작곡가로 꼽힌다. 쉰 살이 될 때까지 작곡가로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나기 전 10년 동안 놀라운 작품을 쏟아낸 대기만성형 인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의 첫 머리에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때문에 최근 몇 년 간 음반 시장에 때아닌 야나체크 열풍이 불기도 했다.

영화에는 전편에 걸쳐 야나체크의 음악이 나오는데, 그중에서 기본적인 음향적 배경을 만들어주는 것은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에서 On the overgrown path]라는 피아노 곡집이다. 1901년부터 1908년에 작곡한 이 작품은 음악으로 쓴 일종의 자서전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야나체크는 고향 후크발디의 풍경, 그곳에서 마음껏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노래했다. 영화에는 이 중 [날아가버린 잎새] [프리덱의 마돈나] [밤인사] [올빼미는 날아가지 않았어] 등이 나오는데, 모두가 한 편의 짧은 시 같이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가벼운 것, 무겁지 않고 단순한 음악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의도에 부합되는 곡이다.

영화의 정서적 근간을 이루는 또 다른 중요한 곡은 두 편의 현악 4중주이다. 이것은 이른바 추억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에서]와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곡이다. 야나체크는 두 편의 현악 4중주를 남겼는데, 제1번은 [크로이처] 제2번은 [비밀편지]이다. 다분히 표현주의적인 성격이 짙은 두 편의 현악 4중주는 프라하에서 시위를 벌이다 잡혀 온 사람들에게 경찰이 자백을 강요하는 장면, 토마스와 테레사가 위험을 피해 도피하는 장면, 테레사가 떠나고 토마스가 혼자 쓸쓸하게 호수를 바라보는 장면, 토마스가 병원장의 요구를 거절하는 장면 등에 나온다.

제1번 [크로이처]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에서 영감을 받아 1923년에 작곡한 것이다. 이 무렵 야나체크는 애인 카밀라 시테슬로바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에 등장하는 고통받고, 아파하며, 쓰러져가는 가련한 한 여인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라고 썼다.

소설의 내용은 아내의 불륜을 의심한 한 남자가 결국 아내를 죽인다는 것인데, 야나체크는 남편에 의해 짓밟히고 살해당한 아내의 고통을 대변하기 위해 이 곡을 썼다고 한다. 여기서 네 대의 현악기는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른 부부가 서로 소통의 한계를 절감하고 절망에 빠진 모습을 그리고 있다. 3악장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애잔한 선율, 그리고 갑작스럽게 그것을 방해하는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격렬한 저항, 이어지는 4악장에서 긴 서주 후에 질주하는 비올라, 이를 따라 파국으로 치닫는 세 악기, 변주가 진행되면서 모든 것을 녹여 버릴 듯 클라이맥스로 치닫다가 마지막에 드디어 편안한 안식에 도달한다.

야나체크는 소설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 빨간 줄을 쳐 놓았다.


“나는 그녀의 맞아서 멍든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나의 남편으로서의 권리와 나의 상처 받은 자존심에 대해 잊어버렸다. 처음으로 나는 그녀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비명 지르듯 질주하는 네 대의 현악기는 남편의 의심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의 모습과 함께, 그것을 보고 분노와 연민, 비탄과 후회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남편의 갈등도 함께 보여준다. 이런 현악기들의 비명이 영화 속에서 자백을 강요 당한 사람들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거리에서 찍은 사진을 가리키며 “이거 당신이잖아”하고 말하는 경찰과 결사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아니에요. 그건 제가 아니에요.”하고 말하는 사람. [크로이처]는 아내의 비명과 남편의 분노를 함께 담아 압제에 신음하는 프라하 사람들의 고통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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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시 야나체크와 그의 아내 <출처: Wikimdia Commons>


야나체크는 카밀라라는 여자와 평생 비밀스러운 사랑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27살 때 자신을 음악가의 길로 인도한 스승의 딸과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독일인이었던 그의 아내는 은근히 야나체크를 무시했으며, 정서적으로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독일 상류사회 출신과 가난한 체코인이라는 신분의 차이가 두 사람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모두 사망하면서 부부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나체크는 휴양지 루하코비체에서 우연히 카밀라라는 여자를 보게 되었다. 그는 그녀에게 한순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당시 야나체크의 나이는 63세, 카밀라는 25세였으며, 둘 다 배우자가 있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나체크는 비밀스러운 사랑을 계속했다. 죽을 때까지 10년 동안 오로지 카밀라에게만 집착했는데, 애정 공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1년 동안 무려 720여 통의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노년에 찾아온 사랑은 야나체크에게 영감의 샘이 되었다. 현악 4중주 제2번 [비밀편지]는 그가 카밀라에게 보낸 연애편지를 염두에 두고 작곡한 것이다. 하지만 연애편지라고 해서 달콤한 멜로디를 상상하면 오산이다. 야나체크는 속수무책으로 빠져든 황혼의 사랑을 격정적인 내면의 고백으로 표현했다.

밀란 쿤데라는 야나체크가 남긴 두 편의 현악 4중주를 “야나체크 음악의 절정” “표현주의 음악의 정수” “총체적 완벽성”이라는 말로 극찬했다. 쿤데라의 말에 의하면 야나체크는 본인이 표현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진정으로 표현주의라는 말에 적합한 유일한 작곡가라는 것이다.

[프라하의 봄]에 나오는 야나체크의 음악은 단순하고 가벼운 음악과 자기 존재를 정직하게 드러낸 표현주의적인 음악으로 구별된다.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에서]가 전자라면 두 곡의 현악4중주는 후자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나의 영화에 이렇게 서로 이질적인 표현법이 공존할 수 있을까. 바로 이 시점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제목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외피의 가벼움과 그 내면의 무거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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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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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onymusi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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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뮤직 트위터 (http://www.twitter.com/SonyClassicalKr)


발행2013.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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