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릴리 슈슈의 모든 것 - 열 세 살, 잿빛 세계와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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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87회 작성일 16-02-06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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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 유이치는 나약하고 내성적인 소년이다. 그래서 친구나 선배들에게 늘 괴롭힘을 당한다. 이런 그에게 유일한 탈출구가 있다면 그것은 릴리 슈슈의 음악이다. 그녀의 음악을 들을 때 그는 비로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의 음악을 통해 현실의 고통을 잊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한다. 그에게는 그녀만이 유일한 현실이고, 희망이다.



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드뷔시 [아라베스크] 제 1번 - Philippe Entremont음악 재생
2드뷔시 [아마 빛 머리의 소녀] – 폴 크로슬리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소니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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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 슌지 감독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제공: 네이버 영화> 영화 정보 보러가기



유이치는 릴리 슈슈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다.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현실세계에서는 늘 당하기만 하지만, 익명성이 철저히 보장된 이 온라인 공간에서만큼은 그도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낸다. 유이치는 여기서 ‘필리아’라는 ID를 사용하는데, 여러 사람과 릴리 슈슈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푸른 고양이’라는 ID를 사용하는 사람과 친해진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유이치는 호시노라는 친구를 만난다. 호시노는 입학식 때 신입생 전체를 대표해 선서를 한 모범생이다. 유이치와 호시노는 함께 검도부 활동을 하면서 친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호시노의 집에 놀러 간 유이치는 그의 방에 릴리 슈슈의 포스터가 걸려 있는 것을 본다. 그 때문에 호시노도 자기처럼 릴리 슈슈의 팬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호시노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 후 더 친해진 유이치와 호시노는 친구들과 함께 동네 불량배들에게서 돈을 가로채 그 돈을 가지고 멀리 오키나와로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오키나와에서 호화판으로 여름방학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모든 것이 달라진다.

1999년 이전 열 세 살의 나의 세상은 색에 비유하자면 장미빛.
그러나 1999년 여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빗나갔지만,
만일 지구가 멸망해 그래서 여름방학인 채로 인생이 끝나버렸다면.
그 편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1999년 9월 1일. 새 학기.
그 날을 경계로 세계는 잿빛이 되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호시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친구들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첫 번째 희생양은 같은 반 여학생인 츠다이다. 호시노와 그의 패거리는 그녀를 집단 성폭행한 후 이것을 촬영한 동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해 그녀에게 원조교제를 시킨다. 그리고 그녀가 남자로부터 받은 화대의 일부를 가로챈다. 유이치는 그녀에게 일을 지시하고 상납금을 대신 받아 호시노에게 갖다 바치는 역할을 한다. 물론 마음이 내켜서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호시노와 맞서 싸울 용기가 없다.

호시노의 다음 희생양은 쿠노이다. 예쁜 얼굴에 피아노도 잘 치는 쿠노는 이미 반 여자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신세이다. 쿠노를 짝사랑하는 유이치는 쿠노에 대한 따돌림이 점점 심해지지만 이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만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호시노는 유이치를 시켜 쿠노를 동네 외곽에 있는 폐허가 된 공장으로 데려오도록 한다. 호시노 일행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공장 안으로 들어간 쿠노를 집단으로 성폭행한다. 유이치는 밖에서 쿠노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울음을 터트린다. 그 후 며칠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던 쿠노는 머리를 완전히 삭발한 채 나타난다. 그런 일이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호시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츠다가 저신의 처지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집단 성폭행과 자살.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에 무척 힘든 경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이치는 이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잘 견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릴리 슈슈라는 해방구가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집착은 더욱 강해졌다. 유이치에게는 그녀의 음악이 마지막 보루와 같은 것이다. 이런 그가 릴리 슈슈의 라이브 공연을 놓칠 리 없다. 일찌감치 입장권을 사 둔 유이치는 공연장을 찾는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뜻밖에 호시노를 만난다. 호시노는 유이치의 표를 빼앗아 그가 보는 앞에서 구겨 버린다. 때문에 유이치는 공연장에 들어가기 못한다. 밖에서 공연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유이치는 호시노가 건네 준 파란 사과에 ‘푸른 고양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동안 온라인 상에서 서로의 아픔을 공유했던, 그 순수하고 다정다감한 푸른 고양이가 바로 호시노였던 것이다.

이 사실에 심한 충격을 받은 유이치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호시노를 기다린다. 드디어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공연장을 빠져나올 때, 유이치는 릴리가 나타났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혼잡한 틈을 타서 호시노에게 다가가 그를 칼로 찌른다.

영화는 유이치가 드넓은 초록빛 들판 한 가운데에 서서 릴리 슈슈의 음악을 듣는 장면으로 끝난다. 더없이 푸른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 그리고 화면을 가득 채운 들판의 초록빛에서 풋풋한 젊음의 생기가 느껴진다. 이곳은 유이치의 해방구. 릴리 슈슈의 음악처럼 가혹한 현실의 그림자가 미치지 않는 완벽한 평화와 해방이 보장되는 공간이다. 열 세 살 유이치의 잔인한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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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현실 속에서 릴리 슈슈의 음악은 유이치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제공: 네이버 영화>



어른이 되어 추억하는 청소년기는 대개 아름다운 법이다. 한때는 가없는 열망의 소용돌이였으나 이제는 기억조차도 아련한 그 시간들. 다시는 돌아갈 수 없기에 그 시절의 이유 없는 방황이나 반항은 물론 약간의 일탈조차도 모두 젊음의 특권인 ‘풋풋한 치기’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청소년들이 대면한 현실은 잔인하기 그지없다. 절도, 집단 괴롭힘, 성폭행, 협박, 갈취, 원조교제 등 성인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탈행위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그 가혹한 현실 속에서 아이들은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당한다. 깊게 상처 입고 울부짖고, 절규하고, 흐느끼다가 스러진다.

이렇게 현실은 잔혹하지만 영상과 음악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유이치와 그의 어머니가 들판을 걸어가는 장면, 츠다가 비행기를 날리는 장면과 그녀의 상여 행렬, 릴리 슈슈의 뮤직 비디오는 물론 심지어는 쿠노가 집단으로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에서 조차도 감독은 철저하게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이미지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음악도 이에 한 몫을 하는데, 드뷔시 Debussy의 음악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바로 ‘릴리 슈슈’라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드뷔시와 관련이 깊다. 젊은 시절부터 드뷔시는 여성편력이 화려했다. 유부녀인 성악가 블랑슈 부인과 염문을 뿌린 후 가브리엘 뒤퐁이라는 여인과 근 10년 간 동거했지만 정작 결혼은 그녀의 친구인 로잘리 텍시에와 했다. 그녀가 바로 ‘릴리’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결혼 후에 드뷔시는 제자의 어머니인 앰마 바르닥이라는 여성과 염문을 뿌렸다. 이 때문에 릴리가 자살을 시도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당시 이 사건은 소설에까지 나올 정도로 큰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며 그의 곁을 떠났다.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에릭 사티 한 사람 뿐이었다. 1905년, 드뷔시는 아내와 이혼하고 엠마 바르닥과 동거를 시작했다. 같은 해 둘 사이에 딸 클로드 엠마가 태어났다. 드뷔시는 이 딸을 ‘슈슈’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귀여워했다. 릴리 슈슈라는 이름은 드뷔시의 아내 릴리와, 그녀에게서 남편을 빼앗은 엠마 바르닥 사이에 난 딸 슈슈의 이름을 합친 것이다. 아내의 이름과 정부 사이에 난 딸의 이름. 감독이 의도적으로 이렇게 미묘한 조합의 이름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이 영화에서 릴리 슈슈라는 이름은 릴리 슈슈의 음악과 드뷔시의 음악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독일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음악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에게 대부분의 드뷔시 음악은 참 낯설게 느껴진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소나타처럼 귀에 쏙 들어오는 주제선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일정한 멜로디들이 발단, 전개, 클라이막스, 대단원의 구조 속에서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음악을 통해 무언가 드라마틱한 효과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드뷔시의 음악은 마치 알맹이가 빠진 것같이 싱거운 느낌을 줄 뿐이다. 그렇다면 드뷔시의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와 분위기, 그리고 느낌이다.

드뷔시는 음악사를 통틀어 유일한 인상주의 음악가로 꼽히는 작곡가이다.인상주의 화가들이 지난 세기의 먹구름을 몰아내고 캔버스 위에 빛이 지배하는 화려한 색의 향연을 펼쳤던 것처럼, 상징주의 시인들이 단어의 의미는 물론 그것의 울림과 형체까지도 시의 재료로 활용해 포착할 수 없는 시적 이미지를 구현했던 것처럼, 드뷔시는 그동안 음악을 지배해오던 모든 형식과 규율과 법칙을 벗어던지고 오로지 빛과 유연성이 전부인 세계, 그것이 주는 느낌과 분위기만이 유일한 형식이자 법칙인 세계를 창조해냈다.

드뷔시의 음악들은 애매모호하고 몽환적인 분위기, 포착하기 힘든 세계의 신비로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멜로디의 미묘한 흐름. 이 곡의 애매모호한 화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 중에서 특히 애매모호한 화성은 인상주의 그림의 애모모호한 윤곽선처럼 듣는 사람에게 포착하기 어려운 효과를 던져준다. 드뷔시의 음악이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미묘한 화성 때문만은 아니다. 모호한 박자와 분절법 역시 이에 한 몫을 한다. 우리는 학창시절 4분의 2박자는 강 약, 4분의 3박자는 강 약 약, 4분의 4박자는 강 약 중간 약, 8분의 6박자는 강 약 약 중간 약 약 이렇게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드뷔시의 곡에서는 이런 기본적인 강세의 법칙이 무시되고 있다. 명확한 마디의 분절점이 베일에 싸이고, 음악은 한 마디에서 다음 마디로 미끌어져 들어가는 유동적인 흐름을 갖는다. 덧없는 화성과 미묘한 음색. 베일에 싸인 것 같은 색조의 혼합과 감지할 수 없는 어렴풋한 빛. 그래서 드뷔시의 음악은 에로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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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는 유일한 인상주의 음악가로 몽환적이며 신비로운 분위기의 음악을 창조해 냈다.



영화의 전반부에 유이치가 릴리 슈슈의 ‘에로틱’이라는 포스터를 자전거에 싣고 갈 때, 드뷔시의 [달빛 Clair de lune]이 흘러나온다. 드뷔시의 음악 중에서 이 곡처럼 ‘에로틱’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곡도 없을 것이다. [달빛]은 드뷔시가 1890년에 작곡한 피아노 모음곡 [베르가마스크 Bergamasque]의 세 번째 곡에 해당된다. 베르가마스크는 이탈리아 베르가모 지방에서 유래한 춤곡의 일종인데, 드뷔시가 이탈리아의 베르가모 지방을 여행한 후 이곳에서 받은 인상을 음악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드뷔시의 [달빛]은 베토벤의 [월광 Moonlight] 처럼 조용하고 고즈넉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의 그것처럼 듣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지는 않는다. 듣고 있으면 오히려 이 밤에 무언가 비밀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 신비로운 음색 속에 감추어져 있는 달빛의 에로틱한 음모. 설야(雪夜)가 아니어도 먼 곳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은밀한 유혹. 그렇게 [달빛]은 에로틱하다.

영화에 나오는 또 다른 드뷔시의 음악은 [아마빛 머리의 소녀 La fille aux cheveux de lin]이다. [전주곡] 제1권의 여덟 번째 곡으로 르콩드 드 릴 Leconte de Lisle의 시에 나오는 소녀에게 헌정했다. 드뷔시는 이 곡의 악보에 “여름의 밝은 햇빛을 받으며 종달새와 함께 사랑을 노래하는 앵두같은 입술의 소녀에게 바친다.”라고 썼다. 소박한 음악에서도 이런 소녀의 모습이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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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치에게 받은 돈을 바닥에 내팽개치는 츠다 <제공: 네이버 영화>



하지만 영화에서는 전혀 의외의 장면에서 이 음악이 나온다. 호시노의 강압으로 원조교제를 하게 된 츠다는 남자에게 받은 돈을 호시노에게 갖다 바친다. 유이치가 중간에서 심부름을 하는데, 호시노는 자기가 받은 돈 중 일부를 떼어 다시 그녀에게 주라고 한다. 유이치가 츠다에게 돈을 돌려주자 그녀는 돈을 바닥에 팽개치고 가방으로 유이치를 마구 때린다. 그런 다음 땅바닥에 떨어진 돈을 짓밟는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일 것이다. 이 때 흘러나오는 [아마빛 머리의 소녀]의 소박한 선율이 츠다의 반항만큼이나 나약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츠다에 이어 호시노의 희생양이 된 쿠노는 릴리 슈슈와 드뷔시의 음악을 좋아한다. 피아노를 잘 치는 그녀가 즐겨 치는 곡 역시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제1번이다. 아라베스크란 하나의 악상을 화려한 장식을 가미해 전개해나가는 양식을 말한다. 말 그대로 아라베스크 무늬 같은 곡이다. 하프의 음색을 연상시키는 아르페지오가 꿈 속을 헤매듯 몽롱하게 하강한 후 아름답고 화려하게 펼쳐진다. 쿠노가 호시노 일당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에서 이 곡이 흘러나온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화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쿠노, 이런 그녀를 붙잡으려는 호시노 일행. 공장에 쌓아놓은 이불에서 나온 깃털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닌다. 쿠노는 비명을 지르고, 유이치는 밖에서 소리 내어 운다. 눈송이처럼 하얗게 날아다니는 수많은 깃털들,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도 깃털들의 난무는 독특한 영상미를 구사한다. 드뷔시의 [아라베스크]처럼. 그렇게 현실은 더없이 잔인하나 그것을 그리는 영상과 음악은 더없이 아름답다. 이 영화에서 아련한 아픔, 정서적 여운이 느껴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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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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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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