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엘비라 마디간 - 달콤하고 로맨틱한 멜로디 속 사랑의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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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2회 작성일 16-02-06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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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함께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배경은 대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가나 흰 눈이 내리는 벌판, 낙엽 떨어진 오솔길, 들꽃이 만발한 초원, 갈대가 일렁이는 들판이다. 두 사람은 서로 팔짱을 끼고 사랑스러운 눈길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때로는 눈밭을 뒹굴거나 바닷가 모래밭을 달리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영화에서 이런 장면은 대개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어김없이 로맨틱한 음악이 깔린다. 보 비더버그의 [엘비라 마디간]도 그런 영화 중 하나이다. 들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풀밭. 풀밭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들. 그 나비를 따라가는 금발의 여인과 젊은 남자. 그리고 그 장면을 배경으로 흐르는 모차르트의 음악.

지금은 이런 장면을 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당시 나는 꿈 많은 사춘기 소녀였다. 언젠가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멋진 사랑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로맨틱한 배경음악이 깔리는 영화의 슬로우 모션 장면은 황홀 그 자체였다. 그동안 꿈꾸어오던 사랑의 환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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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 / 프리드리히 굴다(피아노),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클라우디오 아바도(지휘)음악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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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라 마디간]은 1889년 덴마크의 한 숲 속에서 스웨덴 육군 장교 식스틴과 덴마크의 줄 타는 소녀 엘비라 마디간이 동반 자살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전쟁을 본 적이 있나요. 식스틴? 당신은 군인이잖아요. 그런데도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전쟁은 군인의 일이죠. 그렇죠? 파리에서 서커스 텐트가 불탄 적이 있었어요. 누군가 수류탄을 던졌나 봐요. 저는 그때 겨우 두 살이었지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동물들이 모두 불에 타 죽었대요. 그 냄새가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해요. 전쟁은 환상의 행진이 아니에요. 식스틴. 불타버린 육신의 냄새 같은 것이지요.”

엘비라는 연인 식스틴에게 이렇게 말한다. 식스틴은 이미 결혼한 사람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결국 현실로부터 도망쳤다. 이들이 벌인 사랑의 도피 행각은 불타 버린 육신의 냄새와도 같은 전쟁으로부터의 도피이자 도덕과 인습의 두꺼운 장벽으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하다. 식스틴과 엘비라는 자신들을 옥죄던 두 개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아름다운 덴마크의 숲 속에서 완벽한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현실이라는 커다란 벽에 부딪친 것이다. 엘비라와 식스틴은 어떻게든 그것을 극복해 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이들이 처한 가혹한 현실은 두 사람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나무 열매를 따먹는 장면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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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에 지쳐 나무 열매를 따 먹는 엘비라



두 사람은 최후의 만찬을 준비한다. 마치 피크닉을 온 사람처럼 나무 아래에서 마지막 포도주와 빵을 함께 나눈다. 그런 다음 식스틴이 엘비라를 껴안고 머리에 총을 겨눈다. 하지만 차마 못하겠다며 총을 내려놓는다. 그러자 엘비라가 속삭인다. 해야 한다고.

모두 것을 내려놓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던가. 엘비라가 나비를 잡으려고 풀밭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녀가 풀밭을 뛰어다니다가 나비를 잡는 순간 식스틴이 그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총성이 울리자 나비를 잡으며 행복해하고 있는 엘비라의 모습이 정지 화면으로 잡힌다. 곧이어 들리는 또 한 방의 총성.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사랑은 완결된다. 그 정지 화면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우리들의 사랑은 이렇게 영원하답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서 사랑을 빼앗아갈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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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라와 식스틴



사랑을 위해 인습의 높은 벽을 넘고, 그러다가 결국은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리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 그 불륜의 사랑을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데에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큰 역할을 했다. 여기에 나오는 곡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의 제2악장인데, 두 사람이 풀밭에서 나비를 쫓는 장면을 비롯해 영상이 아름다운 장면이면 어김없이 이 음악이 등장해 영화 전체를 로맨틱 무드로 끌어가고 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은 1785년 모차르트가 스물다섯 살 때 빈에서 작곡해 그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초연되었다고 한다.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로부터 숭고하고 장엄하다는 평을 들었다고 하는데, 하지만 실제로 음악을 들어보면 ‘숭고하고 장엄하다’는 평은 이 곡의 분위기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 같다. 특히 [엘비라 마디간]의 주제음악으로 쓰였던 2악장 안단테는 더욱 그렇다.

먼저 약음기를 낀 현악기들이 유명한 주제 선율을 연주하면 이어서 피아노 독주가 이를 받는다. 선율의 반주는 셋잇단음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특별한 음형은 중간에 세 마디를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주제의 제시가 끝나고 나면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대화를 시작한다. 중간에 살짝 단조가 들어가기도 하지만 20번 2악장의 중간부와 같은 긴장감은 없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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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실제 인물인 엘비라 마디간(Elvira Madigan)과 식스틴 스파레(Sixten Sparre) 사진



처음 [엘비라 마디간]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음악이 주는 달콤한 로맨티시즘에 매료되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영화가 개봉된 후,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의 2악장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곡을 실은 음반이 불티나게 팔렸는데, 그중에는 제목을 아예 [엘비라 마디간]이라고 붙여 놓은 것도 있었다. 나도 영화를 본 후 음악이 좋아서 악보를 사다가 직접 피아노를 쳐보기도 했었다. 현악기의 피치카토 반주에 맞추어 등장하는 피아노의 멜로디가 두 연인이 느끼는 무한한 행복감을 그대로 음악으로 옮겨놓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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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라 마디간 실제 사진



영화에서 이 음악을 배경으로 식스틴이 이렇게 말한다.



“때때로 나 자신에게 행복한가 물어볼 때가 있어. 그러면서 혼자 되뇌이곤 하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가 하고 말이야. 사람들은 아마 우리가 하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언젠가는 그 사람들도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 그리고 그 변화를 과감하게 받아 들일 거야.”

영화 전편에 흐르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안단테의 로맨틱한 선율은 두 사람이 느끼는 이런 완벽한 행복감을 반영하고 있다. 그 멜로디 어디에도 어두운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이 곡을 굳이 색깔로 비유하자면 핑크빛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위험한 사랑의 어두운 그림자를 달콤한 로맨티시즘으로 감쪽같이 은폐한 당의정과 같다. 그래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에 대해 핑크빛 환상을 갖도록 한다. 물론 개중에는 이 음악에서 슬픔을 느낀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미로운 슬픔, 그 슬픔조차도 아름다움으로 즐기는 로맨틱한 슬픔일 뿐이다.

[피아노 협주곡 20번]의 웅장하고 실험적인 곡상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곧이어 작곡한 21번은 다소 실망스러운 면이 있다. 반쯤은 행진곡 같은 1악장이나 오페라 부파(희극 오페라)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3악장의 유희 정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로맨틱한 칸타빌레로 일관하는 2악장의 안단테에서 모차르트가 시대를 앞서가는 실험정신에서 일보 후퇴해 사교적인 대중음악으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런 생각이 후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24번을 통해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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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토싱에(Tåsinge) 섬에 있는 엘비라 마디간과 식스틴 스파레의 묘지



엘비라와 식스틴의 사랑처럼 21번의 2악장을 들으면서 느끼는 행복은 매우 찰나적이다. 그 달콤하고 로맨틱한 멜로디는 현실이 아닌 환상이다. 언젠가는 깨지고 말 환상. 한때는 아름다웠으나 이제는 아련한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진 핑크빛 환상.

이제 나는 더 이상 이 음악을 들으며 황홀해하지 않는다. 그러다 아주 가끔씩 지난날 가슴을 훑고 지나갔던 찬란한 희열의 순간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날 때, 코 끝을 스치는 바람에서 문득 봄을 느낄 때, 빗방울이 들이치는 유리창 너머로 축축하게 젖은 거리를 바라볼 때, 한때 이 곡을 들으며 사랑의 환상에 빠졌던 젊은 시절의 나를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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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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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Wikipedia





발행201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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