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이퀼리브리엄 - 베토벤 합창을 들으며 진정한 인간으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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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7회 작성일 16-02-06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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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

하늘의 천이 있다면,

밤과 낮과 그 사이 빛으로 수놓은

어둡고 밝고 푸른 천이 있다면,

내 그것을 그대 발 밑에 깔아 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은 오직 꿈뿐

그대 발 밑에 깔았으니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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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베토벤 [합창] 1악장 / 정명훈(지휘), 서울 시립 교향악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유니버설 뮤직 / 앨범 정보 보러가기




문학소녀를 자처하던 중학 시절, 내 가슴을 설레게 했던 예이츠(William Yeats, 1865-1939)의 시이다. 읽을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시.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읽고 감동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다. 하지만 [이퀼리브리엄]에 나오는 미래 세계 리브리아에서는 이렇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죄가 된다. 그것도 보통 죄가 아니라 사형에 처해지는 중대 범죄이다. [이퀼리브리엄]에서 패트리지는 예이츠의 시를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이유로 동료인 존 프레스턴에게 살해당한다.

조지 오웰의 『1984년』도 그렇고,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도 그렇고, 인간이 상상하는 미래 세계는 왜 모두 이렇게 살벌한 것일까?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행복하게 사는 장밋빛 미래는 우리 인류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미래 세계를 그린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인간은 거대한 조직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존재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 거대한 조직을 강력한 힘을 가진 단 한 사람의 독재자가 지배한다. 그는 최첨단의 기술과 무기를 이용해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한다. 이 세계에서 인간이 자의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심지어는 그동안 인간에게만 고유한 영역이라고 여겨져 왔던 감정마저도 철저하게 통제 당한다.

[이퀼리브리엄]의 시간적 배경은 제3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공간적 배경은 ‘감정 없는’ 인간을 지향하는 리브리아라는 나라이다. 이 나라의 지도자는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에 이어 제3차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전쟁과 같은 인류의 비극은 모두 인간이 감정을 가졌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그는 감정 없는 인간으로 구성된 나라 리브리아를 세운다. 이 나라 사람들은 매일 같이 감정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프로지움이라는 약물을 몸속에 주입한다. 그 덕분에 리브리아 사람들은 사랑, 증오, 분노와 같은 인간적인 감정으로부터 자유롭다. 증오와 분노로 인한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리브리아에는 표면적인 평화가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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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리브리아라는 나라(좌측 사진)에서는 프로지움(우측 사진)이라는 약물을 인간에게 주입하여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리브리아 사람들 모두가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프로지움 투약을 거부하고, 인간 본연의 감정을 느끼며 살기를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음악을 듣고, 미술작품을 감상하며, 낭만적인 시를 읽고, 애완동물들을 사랑한다. 모나리자 그림이나 베토벤의 교향곡 음반 등 인간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물건들을 계속 소장하며 감정을 말살하려는 정부에 대항해 싸운다. 리브리아 정부는 ‘감응자’라고 분류된 이들을 색출하고 처형하는 치안부대를 두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존 프레스턴은 바로 이 치안부대의 특수요원이다.

특수요원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로 꼽히는 존 프레스턴은 인간적인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의 아내가 감응자라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죽음에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을 적발해 그들을 죽이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장품들을 불태우는 특수요원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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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자를 찾아 제거하는 존 프레스턴역을 맡은 크리스찬 베일



그러던 어느 날, 존 프레스턴은 동료인 패트리지가 예이츠의 시집을 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실 이 시집은 패트리지가 감응자의 집에서 증거물로 압수한 것이다. 규정에 의하면 이 증거물은 상부에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패트리지는 이를 어기고 이것을 몰래 자신의 집으로 가져온다. 사실 그는 남몰래 프로지움 투약을 중단한 상태이다. 그 덕분에 감정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고, 자연히 시에도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은 오직 꿈뿐이니

그대 발 밑에 깔았으니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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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츠의 시를 읽고 감동을 느끼는 동료 패트리지



그로부터 얼마 후, 프레스턴은 실수로 배급받은 마지막 프로지움 약병을 깨트린다. 설상가상으로 때마침 프로지움 제조공장에 문제가 생겨 부득이하게 한동안 프로지움을 복용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 프레스턴의 마음에서 사라졌던 감정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한다. 본래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프로지움을 복용하지 않는 사람을 색출해 제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약을 잃어버린 후 그는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 했던 새로운 감정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하여 감응자라는 이유로 체포한 한 여자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기에 이른다. 그 감정을 놓치기 싫었던 것일까. 그는 자의로 프로지움의 복용을 중단한다.

약을 끊자 프레스턴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그전에 자신이 총질을 일삼던 바로 그 감응자들과 한 편이 된 것이다. 감응자들 편에 서서 프레스턴은 정부군과 싸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동안 인간 감정의 말살을 일삼았던 독재자를 처단하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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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지움 복용을 중단한 후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는 존 프레스턴



인간의 감정을 말살함으로써 인류의 평화를 유지한다? 리브리아 독재자의 이 기상천외한 망상은 결국 세상 모든 예술작품의 파괴라는 비극을 낳는다. 영화의 초반부에 감응자들의 은신처를 급습한 프레스턴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부하에게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나리자] 진품을 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게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걸작은 불속으로 사라졌다.

이러던 그가 프로지움 투약을 중단하고 난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어느 날, 감응자의 은신처를 돌아보던 그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음반을 발견한다. 그가 조심스럽게 음반을 턴테이블에 걸자 [합창교향곡] 1악장이 흘러나온다. 새봄의 강렬한 생명이 어둠과 혼돈의 세계를 비집고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모티브가 흘러나오자 프레스턴의 눈 가가 촉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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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을 불태우라는 지시를 내리는 존 프레스턴



영화에 나오는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합창]은 고전에서 낭만으로 넘어가는 표현력의 다이내믹한 변화의 정점에 서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눈에 뜨이는 변화는 새로운 악기가 도입되어 음색이 풍부해지고, 음량이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베토벤은 다섯 번째 교향곡인 [운명]에서 제1, 2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콘트라바스의 현악 5부, 그리고 플루트, 오보, 클라리넷, 바순, 혼, 트럼펫, 팀파니로 이루어진 기본 편성에 피콜로와 콘트라바순, 트롬본을 추가함으로써 보다 풍성한 음향의 다이내믹을 구현했다.

이런 확장성은 제9번 [합창]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금관악기의 수가 늘어나고, 팀파니 하나뿐이었던 타악기 파트에 트라이앵글, 심벌즈, 베이스 드럼이 추가되었다. 하지만 베토벤의 실험은 단지 악기의 수와 종류를 늘이는 것에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순수 기악곡으로 여겨져왔던 교향곡이라는 장르에 ‘사람의 목소리’를 도입함으로써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교향곡, 기법과 내용에 있어서 무제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낭만주의 교향곡으로 가는 문을 활짝 열어 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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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자의 은신처에서 발견한 베토벤 [합창] 교향곡 음반을 축음기로 들어보는 존 프레스턴



영화에 나오는 [합창교향곡]의 1악장은 다른 교향곡의 1악장과 마찬가지로 소나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나타 형식에는 서주가 붙기도 하고, 서주 없이 곧바로 주제로 시작하기도 하는데, 어떤 방식이든 교향곡의 첫머리답게 당당하게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곡의 서주는 다르다. 짧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서주의 모티브는 곧이어 제시될 제1주제에서 따온 것인데, 그 모티브가 주저하듯이 조심스럽게 4도 혹은 5도로 하강한다. 조성을 확실하게 결정지어주는 3도가 아니라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4도 또는 5도의 하강음들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나 의구심을 갖게 한다.

하지만 서주의 모티브가 조금씩 에너지를 모아 마침내 단호하고 당당한 제1주제로 결집되는 순간, 서주에서 느꼈던 불안과 의구심은 일시에 사라진다. 이 악장의 제1주제는 앞에 나온 짧은 서주의 핵폭발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에너지를 집중시킨 다음 악장 전체에 걸쳐서 강렬하고 장대하게 주제를 펼쳐나간다. 이어서 등장하는 제2주제는 제1주제와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목관악기들이 제1주제의 과도한 에너지의 포화에 지친 영혼을 부드러운 선율로 감싸준다.

영화에서는 인간의 감정을 대변하는 음악으로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의 1악장을 골랐다. 불안하게 출발한 모티브가 흩어진 에너지를 결집해 마침내 제1주제로 폭발하는 순간, 프레스턴의 가슴에 걷잡을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온다. 한때 냉혈한이었던 그가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비로소 진정한 인간으로 돌아온다.






  • 이퀼리브리엄(2002)
    평점


    8.78


    개요



    액션

    ,

    SF

    |


    미국

    |
    2003.10.02 개봉
    | 107
    |


    15세 관람가

    감독



    커트 위머

    출연



    크리스찬 베일

    ,

    에밀리 왓슨

    ,

    타이 디그스

    ,

    앤거스 맥파디언

    ,

    숀 빈

    ,

    숀 퍼트위

    ,

    매튜 하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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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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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Wikipedia





발행201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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