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돈의 맛 - 추운 겨울을 헤매는 방랑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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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5회 작성일 16-02-0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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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돈이 돈 같지가 않다. 뉴스에서 하도 몇 백억, 몇 천억 하고 떠들어대니까 몇 억은 돈 같이 여겨지지도 않는다. 공과금 몇 천원 더 나온 것 갖고 벌벌 떨면서도 ‘억’ 단위가 되면 도대체가 감각이 무뎌진다. 몇 백억이든, 몇 천억이든 별 차이가 없다. 왜?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돈, 평생 그렇게 많은 돈을 만져본 적도, 또 앞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만져볼 일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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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돈다발 장면



돈의 맛은 어떤 것일까? 영화 [돈의 맛]에 나오는 윤 회장의 말처럼 너무나 황홀해서 한 번 맛 들이면 정말 끊기가 힘든 것일까?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눈으로 실컷 돈을 맛보게 해 준다. 윤 회장의 비서 주영작이 비밀번호를 누르자 묵직한 철문이 열린다. 그러자 거대한 금고가 나타난다. 그 안에 돈다발이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비서가 회장의 지시대로 가방에 돈을 담는다. 그때 회장이 한 마디 한다.



“몇 다발 챙겨서 넣어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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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9번 C단조] D.958 중 [2악장 Adagio] / 다니엘 바렌보임음악 재생
2슈베르트 [16개의 독일 무곡과 2개의 에코세즈] D.783 / 잉그리드 헤블러음악 재생
3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중 [휴식(Rast)] /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다니엘 바렌보임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유니버설 뮤직 / 앨범 정보 보러가기




윤 회장은 돈 때문에 아내 백금옥과 결혼했다. 백금옥의 아버지 즉, 윤 회장의 장인은 엄청난 부자인데, 윤 회장은 바로 이런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온 것이다. 그가 어느 날 딸에게 고백한 대로 그는 실컷 돈을 써보고 싶어서 사랑 없는 결혼을 했으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돈의 맛에 중독되어 쉽게 아내와 헤어지지 못한 채 살고 있다. 그는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을 마음껏 즐긴다.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도 고위 관료와 정치인을 돈으로 매수해 법의 심판을 용케 빠져나간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공허한지 끊임없이 바람을 피운다. 그래서 아내는 물론 자식들도 그를 지긋지긋해한다. 하지만 윤 회장은 돈으로 여자를 사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자기 자신과,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돈에 대해 모욕감을 느낀다. 그래서 자조적으로 비서인 주영작에게 돈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얘기해 준다.

돈을 마음껏 쓰면서 살지만 사실 윤 회장은 실권이 없는 바지 회장에 불과하다. 이 재벌가의 진짜 실세는 윤 회장의 아내 백금옥이다. 돈에 대해 모멸감을 갖고 있는 윤 회장과는 달리 그녀는 돈의 힘을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돈의 맛을 제대로 즐기고 살고 있는 것은 그녀이다. 하지만 이런 그녀에게도 안 되는 것이 있다. 바로 남편인 윤 회장의 바람기이다. 이런 남편을 통제하기 위해 남편의 방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

돈을 숭배하는 백금옥의 유전자는 아들 윤 철에게 그대로 상속되었다. 윤 철은 비리를 저지르기 위해 권력자에게 뒷돈 찔러주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비도덕적인 인물이다.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모습을 보고 비웃으면서도 정작 마이크 앞에서는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척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쓰레기통에서도 장미가 핀다고 하던가. 이 썩어빠진 집안에도 기적적으로 ‘인간다운’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윤 회장의 딸 윤나미이다. 이혼한 후 혼자 딸을 키우며 살고 있는 그녀는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방탕하고 음탕한 생활을 하는 아버지는 물론 돈으로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백금옥과 윤 철을 경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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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회장의 부인 백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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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회장의 딸 윤나미



주인공 주영작은 윤 회장의 전속 비서로 들어왔다. 그는 처음에 이 콩가루 집안사람들의 비상식적인 생각과 행동에 크게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이에 맞서서 싸우지는 않는다. 그저 괴로워하면서 그것을 지켜볼 뿐이다.

어느 날, 몰래카메라로 남편 방을 훔쳐보던 백금옥은 윤 회장과 필리핀 출신의 하녀인 에바가 불륜관계를 맺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러자 윤 회장은 아예 대놓고 에바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고백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떠나 에바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집을 떠나려는 윤 회장에게 딸 나미가 묻는다. 왜 엄마와 결혼했냐고. 그러자 그는 돈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왜 헤어지지 않았느냐고 하자 돈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이제 떠나는 이유는 모욕감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아내와 장인, 그리고 자신을 향한 모욕으로부터 이제 해방되고 싶다는 것이다. 윤 회장은 일생 동안 돈 때문에 팔려왔다는 자의식을 잊어본 적 없었다. 이 말을 듣고 이제까지 아버지를 경멸해 왔던 나미가 그를 다시 보게 된다.

하지만 백금옥은 이런 윤 회장을 그냥 두지 않는다. 에바와 함께 필리핀으로 떠나려는 윤 회장을 출국 금지시켜 버린다. 그리고 돈다발로 가득하던 금고의 돈을 모두 치운다. 빈털터리가 된 윤 회장은 그래도 자신을 사랑하는 에바와 함께 허름한 집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행복도 잠시. 에바가 윤 회장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백금옥은 결국 익사를 가장해 에바를 죽인다. 에바의 죽음에 충격을 받는 윤 회장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각계 인사들이 모인 윤 회장의 장례식에서 백금옥은 자기 남편이 멋진 남자였다고 추억한다. 하지만 아무도 없을 때 그녀는 윤 회장의 시신을 때리며 오열한다. 너 때문에 내 인생 망쳤다고. 내 인생 물어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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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윤 회장과 가정부 에바 사이의 관계를 알고 에바의 목을 조르는 백금옥



영화에서 윤 회장이 자살을 시도한 후 부르는 노래가 있다.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 중에 나오는 [휴식]이다. [겨울 나그네]는 춥고 배고픈 한 젊은 남자의 방황을 그린 노래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하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여인을 잃었다. 그녀의 집안에서 좋은 가문 출신의 남자와 딸을 결혼시키기로 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잃은 그는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날 끝도 없는 방랑의 길을 떠난다.

음악의 방랑 시인 프란츠 슈베르트. 그는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황량한 겨울 벌판을 맨발로 걸어가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평생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이런 방랑자 특유의 소외감과 상실감, 고뇌, 고독, 허무, 회한의 감정을 자신의 가곡 속에 담아냈다.

왜 슈베르트는 일생 동안 한 군데 뿌리내리지 못하고 줄곧 방황하며 살았을까? 그것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사람이었다. 아들이 학교에서 음악 이외의 과목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어린 아들을 가차 없이 집에서 내쫓았다. 그리고는 아내가 죽자 겨우 아들을 받아들였다. 슈베르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 그의 나이 열다섯 살 때니까 그의 아버지는 슈베르트가 겨우 십 대 초반일 때 그를 쫓아낸 셈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집으로 돌아온 슈베르트는 아버지로부터 간신히 음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그 후 슈베르트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보조교사로 일했다. 하지만 교사 노릇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간신히 3년을 버티다가 그만 휴직계를 내고 말았다. 슈베르트가 에스테르하지 공작의 집에서 음악 가정교사로 일하다가 다시 빈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교사 일을 다시 하라고 했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싫다고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또다시 그를 집에서 쫓아냈다. 그때가 그의 나이 열아홉 살 때였다. 그 후 슈베르트는 친구의 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에게 두 번이나 쫓겨나고 타향 땅을 방황해야 했던 슈베르트. 그의 가곡 전체를 관통하는 이른바 ‘방랑자 의식’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의 대표작 [겨울 나그네]는 이런 방랑자 의식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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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겨울 풍경], 1811년경, 캔버스에 유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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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이 작품을 [겨울 나그네]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 이 작품의 독일어 원제목인 ‘Winterreise’의 정확한 뜻은 ‘겨울 여행’이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여행이라기보다는 방황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살아갈 의욕을 잃은 나그네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겨울날을 배회한다. 작곡가 슈베르트 역시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황량한 겨울 벌판을 맨발로 걸어가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였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타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고,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타인의 기쁨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상대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저 그 옆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슈베르트는 인간의 원초적인 고독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그렇게 평생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그는 방랑자 특유의 소외감과 상실감, 고뇌, 고독, 허무, 회한의 감정을 자신의 가곡 속에 담아냈다. [겨울 나그네]는 허무주의적 낭만주의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음악들이 있지만 이처럼 철저하게 허무한 것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말의 희망도 주지 않는다. 그의 방랑자는 늘 쓸쓸한 어깨를 하고 탄식과 체념 속에서 이 세상을 주유한다.

영화에서 윤 회장이 부르는 [휴식]은 [겨울 나그네]의 열 번 째 곡이다. 추운 겨울, 이 마을 저 마을을 방랑하던 나그네가 휴식을 갖는다.



몸을 뉘여 쉬려하니 피로가 닥쳐 오네

방랑은 차라리 즐거워 거친 길일수록 좋다네

추워서 머뭇거릴 수도 없어

다리는 쉬자고 불평도 못하네

세찬 바람이 등을 밀어 주어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네

소박한 숯구이 움막에서 휴식처를 얻었네

허나 아픈 상처가 쑤셔 온 몸은 편치 못하네

내 가슴이여,

사납고 거친 폭풍에 시달려 아픔도 잊다가

휴식을 얻고서야 아픔을 알겠는가

네 내부에서 가시처럼 쑤시는 아픔을


그동안 방랑이 너무 힘들어 아픈 것도 몰랐는데, 이제 휴식을 취하니 꾀병처럼 아픔이 밀려온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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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마시는 윤 회장



윤 회장의 삶도 겨울 나그네와 같이 쓸쓸하고 추운 방랑자의 삶이었을까? 그러다가 문득 휴식(죽음)을 하려고 보니 상처가 아프다는 것을 느낀 것일까?

이유야 어쨌든 나는 그동안 음탕하고 방탕하게 살다가 늘그막에 진정한 사랑이니 모욕이니 운운하는 이 남자의 변신이 너무나 생경하게 느껴진다. 그동안 윤 회장은 얼마나 음탕하게 놀았던가. 얼마나 황홀하게 돈의 엑스터시에 빠져 있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모욕감을 느껴 이 세계를 떠난단다. 이 뜬금없는 개과천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게다가 그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부른다. 죽어가면서 [겨울 나그네]를 부르면 그 방탕했던 인생이 단번에 겨울 나그네의 원초적 고독으로 바뀌는 것일까. 이것은 그동안 육체와 정신이 괴리된 채 살아온 한 남자가 늘그막에 부리는 감정 유희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짐짓 진지함을 가장하고 슈베르트의 가곡을 부르며 죽어가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그의 [겨울 나그네]는 슈베르트에 대한 모독이자 이 세상 모든 고독과 방황에 대한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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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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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영화





발행201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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