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위대한 계시 - 중세시대의 한계를 극복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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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2회 작성일 16-02-0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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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계시]는 12세기에 살았던 독일의 수녀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이다. 1098년, 독일 라인 지방의 베르머스하임 귀족 가문의 막내딸로 태어난 그녀는 3살 때부터 특별한 ‘신의 계시’를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늘로부터 매우 밝은 빛이 내 침상에 쏟아져 내렸는데, 그 빛은 타지 않고 밝게 빛나는 불꽃같았다.”

힐데가르트는 자신이 본 환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처음에 그녀의 환상은 악마의 계략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교황청의 엄밀한 조사 끝에 진실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래서 힐데가르트는 교황청이 인정한 ‘신의 계시를 받은 최초의 수녀’가 되었다. 영화의 원제인 [비전(Vision)]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힐데가르트 폰 빙엔, Divine Love(Karitas Habundat) / 에밀리 반 에베라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유니버설 뮤직




1099년의 마지막 밤, 사람들은 이 밤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했다. 사제들은 내일 아침에는 다시 해가 뜨지 않을 것이니 죄를 회개하고 영생을 구하라고 설교했다. 신도들은 비장한 마음으로 지구 종말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다음 날, 어김없이 아침 해가 떠올랐다. 잠에서 깨어난 청년이 해가 떴다고 소리쳤다. 그렇게 떠오르는 태양처럼 그 무렵 신의 계시를 세상에 전해 줄 한 소녀가 태어났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다.

힐데가르트의 부모는 ‘환상’을 보는 딸의 능력에 주목했다. 그래서 딸을 신에게 바치기로 결심했다. 힐데가르트는 8살의 어린 나이에 베네딕트 수도원에 보내진다. 수녀원 원장 유타 폰 스폰하임은 힐데가르트처럼 어린 나이에 수녀원에 들어와 평생을 그곳에서 보낸 사람으로 자기처럼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나 수녀원에 들어온 힐데가르트를 어머니와 같은 사랑으로 따뜻하게 보살피고 가르친다. 당시 여자들은 수녀원에서만 읽고 쓰는 것을 배울 수 있었는데, 힐데가르트는 유타에게서 성서를 읽고 시편으로 기도하고 노래하는 법을 배운다.

힐데가르트는 지적 호기심이 왕성했다. 수녀로서 필요한 공부 외에 음악, 과학, 철학, 천문학, 약학, 시,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수녀원의 도서관에 있는 방대한 책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었다. 신앙과 믿음이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가치였던 것이다.

힐데가르트가 종신서원 수녀가 된 지 30년 후, 사랑하고 존경하던 원장 수녀가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힐데가르트가 이어받는다. 어느덧 수녀들의 우두머리가 된 힐데가르트는 그동안 터득한 이론과 경험을 토대로 수녀들에게 실생활에 유용한 기술과 이론을 가르친다. 영화에서는 그녀가 수녀들에게 각종 약초의 효능에 대해 가르치는 장면이 자세하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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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초의 효능을 다른 수녀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힐데가르트



그런데 그러던 중 젊은 수녀 중 한 명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일을 계기로 힐데가르트는 수녀들만 있는 수도원을 세워 독립해나가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 교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도공동체를 설립해 빙엔의 루퍼스 산 위에 수도원을 세우는데 성공한다.

이곳에서 힐데가르트는 수도공동체의 어머니로, 현명한 지도자로, 가난한 이들의 보호자로 많은 역할을 한다. 그러던 중 그녀는 아주 극적인 환상체험을 한다. 신의 계시를 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신은 그녀에게 “네가 보는 것을 글로 적고, 네가 듣는 것을 말하라!”라고 얘기한다. 놀라운 경험을 한 힐데가르트는 고심 끝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린다. 이 사실은 금세 논란의 중심이 되고, 힐데가르트는 이단으로 몰릴 위기에 빠진다. 하지만 나중에 교황청의 인정을 받아 ‘신의 계시를 본 최초의 수녀’라는 영예를 얻게 된다. 힐데가르트는 1179년,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오늘날 힐데가르트는 최초의 여성 식물학자, 최초의 여류 작가, 최초의 인권주의자, 최초의 여성 작곡가 등 여러 분야에서 ‘최초’를 기록한 위대한 여성으로 꼽힌다. 그녀는 뛰어난 예지력과 지칠 줄 모르는 지적 호기심으로 다양한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녀는 수녀이자 뛰어난 예술가, 작가, 카운슬러, 언어학자, 자연학자, 과학자, 철학자, 의사, 약초 학자, 시인, 인권운동가, 예언자, 작곡가였다. 일생 동안 『쉬비아스』, 『책임 있는 인간』, 『세계와 인간』 등의 책을 썼으며, 120편의 음악, 36점의 그림, 그리고 정치인과 성직자, 신자, 서민들에게 올바른 삶을 얘기한 300통에 가까운 편지를 남겼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전무하다시피 한 시대에 한 사람의 여성이 이처럼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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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비전을 기록하는 힐데가르트



음악사에서도 힐데가르트는 악보를 기록으로 남긴 최초의 작곡가로 꼽힌다. 힐데가르트는 “인간은 천상의 존재와 천사들과 함께 합창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며 “소리가 나는 악기”라고 믿었다.

베네딕트회 규율에 따라서 수도사들은 새벽 2시부터 시작해서 밤 9시까지 모두 여덟 번의 ‘성무일도’를 드렸다. 성무일도란 교회의 성직자와 수도사, 신도들이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련의 기도를 말한다. 힐데가르트가 수도원에서 수녀 수업을 받고 있을 당시, 여자 수도원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었다. 하나는 밖을 향해 나 있었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작은 성가대석을 향해 있었는데, 수녀들은 바로 이 창문 앞에 앉아 전례에 참석했다. 힐데가르트 역시 이 창문을 통해 말과 음악이 교차하는 성무일도를 들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힐데가르트는 음악성을 키웠다. 총명했던 그녀는 전문적인 음악 교육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악보를 읽고 쓸 줄 알았다. 힐데가르트가 전례시와 음악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나이 42살 때부터였다. 성무일도를 위해 작곡한 그녀의 음악은 주로 성자들의 일생을 그린 것이었다. 성 디지보트, 성 우르술라를 비롯해 성인으로 추대된 수녀들에 관한 음악이었는데, 나중에 이것을 모아 [하늘의 계시에 의한 교향곡]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77개의 음악이 담겨져 있었다.

영화에는 힐데가르트와 수녀들이 [Ordo Virtutum(성덕의 열)]이라는 곡을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오늘날 이 곡은 등장인물들이 역할을 나누어 부르는 최초의 음악극으로 꼽히고 있다. 어떻게 보면 오페라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데, 가사와 곡이 모두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중세 음악극으로 음악사적 가치도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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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데가르트가 만든 음악극을 노래하는 장면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음악의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먼저 17명의 미덕의 신들이 나온다. 이 역할은 17명의 여성 독창자가 맡는데, 신들의 여왕인 겸손을 비롯해 희망, 순결, 결백, 세상에 대한 경멸, 천상의 사랑, 수련, 공경, 자비, 승리, 신중, 인내, 신에 대한 지식, 동정, 신에 대한 두려움, 복종, 믿음의 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선지자와 대주교는 남성 합창이 맡고, 영혼들은 여성 합창이 맡는다. 여기에 악마가 나오는데, 악마는 노래하지 않고 소리치거나 으르렁대기만 한다. 악마에게 노래를 주지 않는 이유에 대해 힐데가르트의 설명은 이렇다. 악마는 신의 버림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조화의 상징인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악마 역할을 음치인 폴마르 수사가 맡았다.

먼저 악마가 소리친다.



“어찌 내게 이럴 수가 있나? 너는 나를 감싸고 따뜻하게 받아 주었었다. 헌데 이젠 참회란 미명 하에 나를 파괴하다니! 하지만 나는 너를 반드시 정복하고 말 것이다.”

그러자 참회하는 영혼 역을 맡은 소프라노가 노래한다.



“그대의 뜻이 사악한 걸 나는 다 보았다오. 잔인하고 잔혹한 속내를 이미 다 꿰뚫어 보았다오. 그래서 결심했다오. 당신에게 맞설 것을. 부디 절 도우소서. 겸손의 여왕이시여. 그 깨달음의 힘을 제게도 베푸소서.”

이 말을 듣고 여신들의 우두머리인 겸손의 여왕 역을 맡은 힐데가르트가 노래한다.



“오! 승리했구나. 드디어 악마를 이겨냈도다. 전사들을 이끌고 이리 오도록 하여라. 그 자를 묶어라. 영광된 영혼들아. 꼼짝 못하게 포복하도록 하여라.”

이 말에 영혼들이 겸손의 여왕을 찬미한다.



“오! 우리의 여왕님. 저는 여왕님의 것일지니 여왕님의 명령을 모두 받들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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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데가르트가 비전을 받아 필사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쉬바이즈(Liber Scivias)』 책의 일러스트 장면. <출처: Wikipedia>



영화에서 보다시피 힐데가르트의 음악은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고레고리오 성가처럼 단조로운 선율, 아주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어중간한 음, 좁은 음역, 단순한 리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다가 중간에 갑자기 하늘을 향해 솟은 성당의 뾰족탑처럼 도약하는 음을 보여주기도 하고, 드라마틱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단조로움을 미덕으로 삼고 있던 시대에 이런 파격적인 시도는 듣는 이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음악은 처음에는 단순하게 들리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매력을 느끼게 하는 곡이다. 가사와 음악에서 무언지 모를 신비와 생동감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이것이 기록으로 남겨졌다는 사실이다.

중세에도 다양한 음악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중세라는 시대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음악은 중세라는 암흑시대를 비추는 한 줄기 찬란한 빛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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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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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Wikipedia





발행201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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