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가을 소나타 - 엄마와 딸이 펼치는 화해의 이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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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604회 작성일 16-02-0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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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한적한 시골 마을.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호숫가의 외딴 집에 에바와 그녀의 남편 빅토르가 살고 있다. 에바는 작가이고, 남편은 마을 교회의 목사이다. 영화는 글을 쓰고 있는 에바의 모습을 배경으로 빅토르가 그녀와 처음 만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에바는 지금 편지를 쓰고 있다. 수신인은 그녀의 엄마인 샬롯이다. 샬롯은 유명한 피아니스트이다. 에바가 어렸을 때부터 전 세계로 연주 여행을 다녔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성공을 무엇보다 중요시했던 샬롯에게 가족은 늘 뒷전이었다. 이런 엄마를 에바는 늘 그리워했다. 어른이 되고, 남편을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린 후에도 에바는 어린 시절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결핍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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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쇼팽 [전주곡] 작품 28 제2번 / 마르타 아르헤리치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유니버설 뮤직 / 앨범 정보 보러가기




그러던 차에 엄마가 자기가 사는 곳 근처의 휴양지에서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샬롯은 오랜 세월 동안 연인으로 지냈던 레오나르도의 죽음으로 지금 정신적으로 몹시 힘든 상태이다. 그런 엄마에게 에바는 자기 집에 와서 며칠 쉬었다 가라는 편지를 쓴다. 그동안 연주회 일정에 쫓겨 바쁘게 살던 샬롯은 에바의 간곡한 요청에 딸의 집을 찾아온다. 무려 7년 만의 해후이다.

두 모녀는 서로를 반갑게 끌어안으며 애정을 표시한다. 하지만 에바는 엄마에게 왠지 모를 거리감을 느낀다. 엄마가 자기의 근황에 대해서는 의례적인 관심을 표한 후, 최근에 사별한 레오나르도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샬롯은 연인을 잃은 상실감과 피아니스트로서 겪는 애환과 고충을 쉴 새 없이 늘어놓고, 에바는 이런 엄마를 낯선 사람처럼 바라본다. 하지만 그녀는 섭섭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혹시 엄마가 불편해할까봐 여러 가지 면에서 세심하게 배려한다.

에바와 오랜만에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던 샬롯은 에바의 입에서 헬레나라는 말이 나오자 흠칫 놀란다. 헬레나는 에바의 동생으로 어려서부터 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요양소에 보냈는데, 에바가 그런 헬레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2년째 돌보고 있다는 것이다. 에바의 집에 헬레나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샬롯은 왜 편지에 그 얘기를 하지 않았냐고 따진다. 하지만 에바는 알고 있다. 만약 헬레나가 자기 집에 있다는 얘기를 편지에 썼으면 엄마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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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엄마 샬롯(잉그리드 버그만)과 그녀의 딸 에바(리브 울만)



헬레나는 병세가 심해져 지금은 침대에 누워 자기 힘으로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정상적인 의사소통도 되지 않는 상태다. 유난히 이기적이고 자기 성취욕이 강한 샬롯에게 이런 헬레나의 모습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삶의 그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애써 잊고 살고 있는데, 에바가 지금 자기 앞에 그 잊고 싶은 현실을 드러낸 것이다. 샬롯은 선뜻 내키지는 않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헬레나를 만난다. 샬롯과 헬레나는 반갑게 끌어안으며 서로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표시한다.

그날 밤, 샬롯은 누군가 자기를 짓누르는 악몽을 꾸는 바람에 잠에서 깬다.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에바가 있다. 두 사람은 한 밤중에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에바가 대담해진다.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늘 주눅 든 모습을 보여 주었던 에바가 그동안 엄마를 향해 품고 있었던 원망과 분노를 폭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녀는 샬롯이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과 경력을 위해 자기를 돌보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전 엄마가 시간 날 때 갖고 노는 인형이었죠. 제가 아프거나 말을 안 들으면 유모에게 줘 버렸어요. 엄만 문 닫고 일했고, 아무도 방해해선 안 되었죠. 자주 방문 밖에서 듣곤 했어요. 커피를 드실 때마다 엄마를 훔쳐보곤 했죠. 늘 다정했지만 마음은 딴 데 가 있었어요. 뭘 물어도 대답을 안 하셨구요.....전 죽기 살기로 엄마를 사랑했어요. 하지만 엄마를 믿을 수 없었어요. 눈빛과 말이 틀렸거든요. 제일 소름 끼치는 건 화날 때 웃는 거였어요. 아빠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했고, 제가 지겨우면서도 사랑하는 내 딸이라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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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동생 헬레나를 돌보는 언니 에바



이 말에 샬롯이 변명을 한다. 가정을 버렸다는 죄책감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다고. 샬롯은 예전에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지휘자의 충고를 받아들여 집으로 돌아왔던 때를 상기시킨다. 말하자면 자기도 가정을 위해 중요한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샬롯은 에바가 그때 행복했었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에바는 행복한 척했었다고 얘기한다. 엄마가 가정으로 돌아온 후 너무 끔찍했다고, 자기는 그때 겨우 14살이었는데, 엄마가 자기 울분을 모두 딸에게 쏟아 놓았다고 퍼붓는다. 그때부터 엄마가 원하는 것만 먹고, 원하는 옷만 입고, 원하는 책만 읽는 꼭두각시처럼 살았다고. 그러다가 18살 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임신을 했는데, 엄마가 결혼을 반대하면서 아이까지 유산하라고 했다고 하면서 그동안 참았던 울분을 한꺼번에 쏟아낸다.

충격적인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헬레나의 병세가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을 때, 엄마가 레오나르도를 집으로 데려왔는데 헬레나가 그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샬롯이 레오나르도를 집에서 내보냈고, 그 충격으로 헬레나의 팔과 다리가 마비되었으니 헬레나의 병세가 지금처럼 심해진 것도 역시 엄마 때문이라고 쏘아붙인다.

두 모녀의 애증 어린 대화는 에바의 이런 대사로 끝을 맺는다.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는 감정의 혼란으로 이루어진 최악의 결합이에요. 모든 것이 가능하고,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것이 정당화되지요. 엄마의 상처를 딸에게 물려주고, 엄마의 실망에 딸들이 보답해야 하고, 엄마의 불행은 딸의 불행이에요. 영원히 끊어질 수 없는 탯줄인 거죠. 엄마. 그렇죠? 딸의 불행이 엄마의 행복인가요? 내 슬픔이 엄마의 기쁨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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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에바의 말을 듣고 슬퍼하는 샬롯



애증과 회환으로 얼룩진 밤을 보내고 난 후, 샬롯은 서둘러 짐을 싸서 에바의 집을 나온다. 그리고 동료와 함께 기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떠난다. 엄마가 떠났다는 소리를 듣고 헬레나는 발작을 일으킨다. 샬롯이 떠나고 난 후, 에바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와 같은 포즈로 샬롯에게 편지를 쓴다. 자기가 너무 심했던 것 같다고 하는 사과의 편지이다. 파국으로 끝난 것 같은 모녀의 관계가 이 편지로 일말의 희망이 있는 관계로 발전한다. 영화는 그 가능성을 희미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 섣부른 절망도, 섣부른 희망도 금물이라는 듯이.

일을 사랑하는 엄마와 이런 엄마의 애정을 갈구했던 딸 사이의 애증을 보여주는 이 영화에는 이들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두 사람이 쇼팽의 전주곡 2번을 치는 장면이다. 에바는 오랜 전부터 자기 연주를 엄마가 들어주길 바랐다. 그래서 엄마 앞에서 쇼팽의 전주곡을 친다. 그런데 딸의 연주를 바라보는 샬롯의 표정이 묘하다. 연주가 끝나고 에바가 평을 해달라고 하자 샬롯은 의례적인 칭찬만 한다. 그 말에 에바는 실망한다. 좀 더 진심 어린 충고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기 연주는 평가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실망한 에바가 재차 평을 청하자 샬롯은 이렇게 얘기한다.



“쇼팽은 감성적이었지만 맥 빠진 건 아니었어. 느낌과 감성은 다르지. 네가 친 전주곡은 고통을 억제한 거야. 침착하고 분명하고 가혹해야 해. 첫 마디를 봐. 아프지만 표현을 안 해. 그다음에 약간의 기분 전환. 한 번에 증발하고는 다시 똑같은 고통. 더 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고통. 곡 전체가 완전한 절제야. 쇼팽의 자신감과 열정. 고뇌와 남성미가 서렸어. 맥 빠진 아줌마와는 다르지. 두 번째 전주곡은 듣기 싫게 쳐야 해. 환심을 사려 해서는 안 돼. 틀린 것처럼 쳐. 전쟁하듯 치다가 승리로 이끌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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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전주곡 2번을 같이 치는 에바와 샬롯



이 말에 에바는 절망한다. 어린 시절에도 그랬던 것처럼 자기는 여전히 엄마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에바는 엄마에게 짓눌려서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연주하는 쇼팽은 위축되어 있다. 교과서적이고 기계적이다. 반면 샬롯이 연주한 쇼팽은 침착하면서도 자신감에 차 있고, 절제되어 있다.

이 곡을 작곡한 쇼팽은 낭만주의 작곡가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존재다. 200여 곡에 이르는 작품 대부분이 피아노곡이기 때문이다. 음악사를 통틀어 쇼팽처럼 피아노라는 한 가지 악기에 집중한 작곡가도 없을 것이다. 그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피아노 본연의 아름다움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개척한 작곡가이다. 그의 피아노 멜로디는 아름답고 낭만적이고 화려하다. 그래서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영화에 나오는 전주곡 2번은 쇼팽의 피아노 곡 중에서도 매우 예외적인 곡에 속한다. 우선 이 곡은 쇼팽 답지가 않다. 곡 전체에 어두운 구름이 끼어 있는 듯 암울하다. 기교적으로 어렵지도 않고, 곡의 길이도 매우 짧지만 해석하기가 만만치 않다. 쇼팽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곡을 썼을까?

먼저 저음역의 E, G, A#, B의 네 음으로 이루어진 무거운 불협화음 반주가 왼손에 나타난다. 샬롯이 “아프지만 표현은 안 해”라고 하는 바로 그 부분이다. 여기에 맞추어 오른손에 멜로디가 나타나는데, 샬롯이 말하는 “약간의 기분 전환, 한 번에 증발”하는 부분이다. 이어서 왼손에 B D E# F#으로 이루어진 반주가 나타난다. 샬롯의 말대로 “다시 똑같은 고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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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에바



쇼팽의 전주곡 2번은 [가을 소나타]의 줄거리를 음악으로 축약해 놓은 듯하다. 어두운 음조로 마치 물결치듯 반복되는 왼손 반주 위에 오른손 멜로디가 실린다. 처음에는 낮은 음역으로, 그다음에는 이보다 5도 높은 음역으로. 하지만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그냥 신음하듯 중얼중얼 다시 반복되는데, 후반부에 가서 어두운 반주는 사라지고 오른손만 남아 점차 느리게 연주한다. 잠시 왼손에 물결치는 불협화음 반주가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지고 오른손에 탄식하는 멜로디만 남는다. 그런 다음 모든 것을 해결하듯 갑자기 A단조의 딸림화음이 나온다. 어두운 음조의 불협화음만 듣다가 갑자기 협화음을 들으니 어리둥절해진다. 이 갑작스런 협화음은 무엇을 의미하지?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곡은 약간의 중얼거림을 거쳐 마지막 펼침화음에 이른다. 펼침화음 A단조의 으뜸화음. 앞에 나왔던 모든 갈등과 부조화를 일시에 불식시키는 편안한 협화음, 마치 집에 돌아온 것 같은 안온함을 느끼게 하는 협화음이다. 영화에서는 그 희망을 희미하게 보여주었지만 음악은 확실하게 보여준다. 샬롯의 말처럼 “듣기 싫게, 전쟁하듯” 진행되다가 최후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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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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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발행201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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