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클래식 연인들 - 흑백영화를 닮은 브람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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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55회 작성일 16-02-0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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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금지된 사랑은 예술작품의 단골 메뉴였다. 이 세상에 그런 사랑이 없었다면 그 많은 예술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불륜이 판을 치는 요즘 세태를 보고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다고 개탄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금지된 사랑에 대한 욕구는 인류가 생긴 이래로 쭉 있어왔다. 다만 그 표현방식이 다를 뿐이다.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불륜의 사랑도 훌륭한 아티스트의 손을 거치면 예술이 된다. 루이 말 감독의 영화 [연인들]도 그런 것 중 하나이다. 이 영화는 1958년 작품인데, 처음 미국에서 개봉되었을 때 남녀 간의 불륜을 조장하는 영화라는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원색적인 불륜 영화를 많이 보아온 요즘 관객들에게 루이 말의 [연인들]은 차라리 ‘예술’에 가깝다. 특히 두 남녀가 달밤에 분위기에 도취되어 와인 잔을 부딪치는 장면은 로맨틱한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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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브람스, [현악 6중주 1번] 중 2악장/ 아마데우스 현악 사중주단, 세실 아로노비츠(비올라), 윌리엄 플리스(첼로)음악 재생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유니버설 뮤직 / 앨범 정보 보러가기






“사랑은 어느 한순간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연인들]에 나오는 대사이다. 이 말처럼 주인공 잔느에게 사랑은 어느 날 밤, 순식간에 찾아왔다. 그녀는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디종이라는 곳에서 신문사 사장인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남편은 일 때문에 늘 바쁘고, 홀로 남겨진 잔느는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수시로 친구가 사는 파리를 들락거린다.

그러던 어느 날 파리에서 디종으로 돌아오는 길을 달리던 잔느의 차가 멈춘다. 엔진이 고장 난 것이다. 그때 어떤 남자가 지나가다.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차를 세운다. 이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잔느의 집에 가게 되고, 잔느의 남편은 아내를 도와준 남자에게 하룻밤 묵어갈 것을 권한다.

달빛이 교교히 흐르는 밤, 잠이 오지 않는 잔느는 와인 잔을 들고 잠옷 바람으로 밖으로 나간다.

그런데 밖에 그 남자가 서 있다. 교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두 사람은 갈대밭이 있는 곳으로 간다. 갈대밭에서 달빛을 받으며 술잔을 부딪친다. 이때 남자가 시를 읊는다.



“달빛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은빛으로 그녀를 목욕시키네

그녀의 모습이 내 눈에서 빛나고

그녀의 미소가 천사처럼 빛나네.”


그러자 이번에는 여자가 말한다.


“아름다운 밤!”


남자도 응수한다.


“밤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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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의 두 연인



이쯤 되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법이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연인이 된다.
바로 이 순간 음악이 흘러나온다. 분위기를 쫙 깔아주는 브람스의 [현악 6중주 1번]의 2악장이다. 누군가 이 음악을 밤의 음악이라고 했던가. 마치 융단을 여러 겹 깔아놓은 듯 현악기의 두터운 화음이 어둠처럼 화면 가득 깔린다.

하룻밤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은 여자와 남자는 아침이 밝는 대로 함께 떠나기로 한다. 그들은 정말로 그렇게 한다. 새벽에 남편과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버젓이 차를 타고 떠난 것이다. 한참을 달리던 두 사람 위로 눈부신 태양이 떠오른다. 그러자 전날 밤, 분위기에 취해 사랑의 도피 행각을 결심했던 잔느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워진 것이다.

잔느는 다시 남편에게 돌아갈까? 아니다. 루이 말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느가 자신의 욕망을 따르도록 했다. 그는 자신의 주인공이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가는 것을 싫어했다. 그것이 보장된 길이 아닐지라도 주인공에게 관습을 뛰어넘는 자유와 용기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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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와 남자



영화의 마지막은 이런 멘트로 끝난다.



그들의 불확실한 여행은 시작되었다. 그것은 첫날밤의 행복을 다시 느끼기 위한 여행이었다. 아침과 함께 다가온 배반의 시간은 벌써부터 잔느에게 의심을 갖게 했고, 그래서 그녀는 두려웠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 멘트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영화는 잔느와 남자가 앞으로 행복한 미래를 보낼 것이라는 섣부른 예견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침과 함께 찾아온 배반의 시간’이라는 말로 두 사람의 불확실한 미래를 암시한다. 달빛이 흐르는 밤에는 분위기에 취해 사랑이 전부인 것 같이 생각되었지만, 아침이 되어 떠오른 태양은 잔느가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느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루이 말은 즉흥적인 사랑의 결과보다 현재의 감정에 충실한 그녀의 용기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미래의 일을 모르는 것. 그러니 후회도 없다.

[연인들]은 흑백 영화이다. 컬러 영화의 시대를 넘어 3D 영화의 시대로 가고 있는 요즘이지만 오래전에 만든 흑백영화를 보면 컬러 영화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묘한 매력을 느낄 때가 많다. ‘분위기’가 있다고나 할까. 여하튼 흑백영화가 컬러영화보다 예술적으로 훨씬 ‘있어’ 보인다. 흑백영화는 진솔하고 한적하다. 알록달록 다양하고 번잡한 세속의 색들이 흑과 백 두 가지로 변환되면서 메시지의 집중도가 높아지고, 정서적 분위기도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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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 영화 중 한 장면



음악 중에 흑백영화를 닮은 음악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문득 브람스가 떠오른다. [연인들]에도 브람스 음악이 나온다. 작가정신이 투철한 루이 말의 영화에 브람스 음악이 쓰였다는 것이 그저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브람스 음악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브람스 음악은 난삽하지 않고 과도한 감정을 표출하지도 않는다. 진솔하고 고독한 음색으로 무채색의 화면에 깊은 그늘을 드리운다.

이 영화에 나오는 브람스의 [현악 6중주 1번]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각각 두 대 씩 구성된 다소 독특한 편성을 가지고 있는 곡이다. 브람스는 모두 두 개의 현악 6중주를 남겼다. 이 중 1번을 들은 슈만은 “진지한 브람스의 얼굴이 이 곡에서는 거의 아폴로적인 명랑함을 띠고 있다. 힘차고 건강하며 방종에 가까울 정도의 낙천적인 풍모를 주고 있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곡의 1악장은 사랑하는 연인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즐겁게 속삭이는 듯하다.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다가 후반부로 가면 간혹 조금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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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와 남자



하지만 이어지는 2악장은 분위기가 다르다. 영화에 나오는 음악이 바로 2악장이다. 여기에는 ‘브람스의 눈물’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누가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참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음악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이 곡은 로맨틱하면서도 선이 굵다. 일종의 비가(悲歌)인데, 달콤하고 섬세한 여성적 비가가 아니라 선이 굵고 묵직한 남성적 비가이다. 만약 정말 브람스가 울었다면 이런 식으로 울었을 것이 분명하다.

2악장의 멜로디는 낭만적이지만 음향은 6중주라는 편성 때문인지 다소 무겁고 두텁게 들린다. 3중주나 4중주 실내악처럼 주선율이 날렵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저음역의 두터운 화음이 주선율을 마치 담요처럼 받치며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안정감과 두터움이 이 곡을 밤의 음악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남자와 함께 차를 타고 떠난 잔느는 중간에 어느 카페에 들른다. 떠날 때는 어스름한 새벽이었지만 어느새 환한 아침의 태양이 떠올랐다. 그 환한 현실 앞에 잔느는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어차피 인생이란 불확실한 미래를 담보로 한 무모한 결정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이때 다시 브람스의 [현악 6중주]가 흐른다. 달빛에 취해 사랑을 맹세했을 때는 밤이었지만 이제는 환한 대낮이다. 야릇한 밤의 음악은 어느새 결연한 낮의 음악으로 바뀌어있다. 음악의 초반부는 달콤하지만 뒤로 갈수록 격렬해진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도 후회 없는 선택을 한 잔느의 마음도 음악처럼 벅차게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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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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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발행2015.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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