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알렌 감독의 [로마 위드 러브]는 네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네 가지 이야기 사이에 공통점은 전혀 없고, 등장인물들 역시 서로 교류하지 않는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가 로마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유명한 건축가 존은 로마로 휴가를 왔다가 우연히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온 유학생 잭을 만나게 된다. 길거리에서 유명 건축가 존을 알아본 잭은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고, 이로 인해서 존은 본의 아니게 잭의 일상에 뛰어들게 된다. 잭은 존에게 최근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에게는 애인이 있는데, 그녀로부터 친구가 로마를 방문할 예정이니 자기가 없는 동안 그녀와 함께 있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친구의 이름은 모니카이다. 애인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남자의 마음을 빼앗는 데에는 선수라고 한다. 잭의 애인은 자기 애인이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모니카에게 마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내심 걱정하면서도 모니카를 돌보아 달라는 부탁을 한다.

음악리스트

No.	아티스트 & 연주
1	레온카발로 [팔리아치] 중 [의상을 입어라(Vesti La Giubba)]/ 플라시도 도밍고, 밀라노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 조르주 프레트르(지휘)	음악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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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잭은 존에게 아무리 매력 있는 여성이 있어도 자기는 애인을 배반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니카와 만나는 동안 차츰 그녀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고 당혹스러워한다. 결국 그는 애인과의 믿음을 끝까지 지킬 것인지 아니면 모니카를 선택할 것인지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이런 고민은 모니카가 자기가 원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며 갑자기 로마를 떠나는 바람에 싱겁게 끝난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레오폴도이다. 레오폴도는 외모나 직업, 생활 수준, 가족 등 어디를 보아도 특별할 것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로마 시민이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깨어보니 유명인사가 되어 있다. 영화에는 그가 왜 유명인사가 되었는지, 그 과정과 이유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여하튼 그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그의 집과 직장 앞에 수많은 파파라치들이 모여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의 일상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모두 뉴스거리가 된다. 기자들은 그가 속옷은 무엇을 입었는지, 아침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묻는다. 토마토케첩이 묻은 레오폴도의 양복과 올이 나간 레오폴도 아내의 스타킹이 새로운 패션 아이콘으로 부상하기도 한다.

처음에 레오폴도는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관심을 부담스러워한다. 매일 아침 집 앞을 지키고 있는 기자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그러다가 어느덧 유명인의 삶에 익숙해지게 된다. 그는 그 유명세를 은근히 즐긴다. 그러나 이런 행복도 잠시. 어느 날 대중의 관심이 다른 사람에게로 쏠리고, 레오폴도는 졸지에 찬 밥 신세가 된다. 어떻게 보면 예전의 상태로 돌아온 것이지만 그는 이런 갑작스러운 무관심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거리로 나가 관심을 끌어보려고 하지만 소용이 없다. 모든 것이 백일몽으로 끝난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눈 떠보니 스타가 되어 피곤한 삶을 살아야했던 레오폴도(로베르토 베니니)

세 번째 등장인물은 이제 갓 결혼한 신혼부부 밀리와 안토니오이다. 지방 출신인 두 사람은 꿈과 낭만의 도시 로마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려고 한다. 그래서 로마에 올라와 한 호텔 방에 짐을 푼다. 안토니오의 친척들이 이 호텔로 찾아오기로 되어 있다. 밀리는 남편의 친척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미용실에서 머리를 만지려고 하는데, 미용실을 찾아가는 도중에 로마의 지리를 잘 몰라 그만 길을 잃고 만다. 게다가 들고 있던 휴대폰마저 하수구에 빠지면서 남편과의 연락도 두절된다.

밀리는 당황해서 거리를 헤매다가 우연히 평소에 흠모하던 유명 영화배우가 촬영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밀리는 유명 배우를 만났다는 사실에 흥분하면서 그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물론 그의 손에 이끌려 그가 묵고 있는 호텔방까지 들어간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배우는 밀리에게 동침을 요구한다. 다른 남자 같으면 이런 제안을 한 방에 거절했겠지만 흠모하던 영화배우인지라 밀리는 고민한다. 남편과의 정조를 지키느냐, 아니면 연모하던 영화배우와 달콤한 시간을 보내느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기로에 선 것은 밀리만이 아니다. 남편 안토니오 역시 갑자기 방으로 들이닥친 안나라는 콜걸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안나는 방을 잘못 찾아 들어온 것인데, 바로 그때 안토니오의 친척들이 들이닥치면서 일이 꼬이게 된다. 호텔방에 콜걸을 불러들였다는 것을 친척들이 아는 것이 두려웠던 안토니오는 엉겁결에 안나를 자기 아내라고 소개한다. 결국 안토니오는 안나에게 남자로서 필요한 기술을 한 수 배우고, 밀리는 때마침 배우의 호텔방으로 뛰어든 강도와 달콤한 시간을 보낸다.

갓 결혼한 ‘안토니오’와 갑자기 나타난 콜걸 ‘안나’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감독 우디 앨런이 직접 출연한다. 여기서 그는 은퇴한 오페라 감독 게리 역을 맡았다. 게리의 딸 헤일리는 여행 중 만난 이탈리아 남자 미켈란젤로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이다. 그래서 게리 부부는 딸의 약혼자를 만나기 위해 로마에 온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부모와 인사를 나누는데, 미켈란젤로의 아버지 지안 카를로는 평생을 장의사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데 게리는 장의사로 일하는 사돈 카를로에게 엄청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카를로가 샤워를 하면서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는 것을 들었는데,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록 오페라 감독에서 은퇴를 했지만 여전히 현역이라고 생각하는 게리는 사돈의 노래를 듣는 순간 그를 오페라 가수로 데뷔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카를로를 설득해 오디션을 보게 한다. 하지만 샤워를 하면서 그렇게 노래를 잘하던 그가 막상 오디션에서는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그는 목욕탕에서만 실력을 발휘하는 ‘샤워실의 가수’였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게리가 아니다. 그동안 오페라 연출자로 온갖 기발한, 때로는 괴상망측한 시도를 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그는 이번에도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무대 위에 샤워실을 설치해 놓고 카를로로 하여금 그 안에 들어가 샤워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도록 하는 것이다.

카를로는 목욕 타월로 주요 부위만 가린 채 무대에 입장한다. 관객들에게 인사를 한 다음 미리 설치된 샤워 부스로 들어가 샤워를 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이런 상황은 오페라 공연이라고 다르지 않다. 영화에는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광대(팔리아치)]의 공연 장면이 나오는데, 카니오 역으로 출연한 카를로는 샤워를 하며 그 유명한 [의상을 입어라]를 불러 박수갈채를 받는다. 여기서 카를로로 출연한 사람은 배우가 아니라 파비오 아르밀리아토(Fabio Armiliato)라는 이탈리아 성악가이다. 그가 직접 연기를 하고 노래를 불렀다.

목욕탕에서만 노래를 잘 부르는 ‘카를로’는 무대 위에서도 샤워실 안에서 노래를 부른다.

영화에 나오는 레온카발로의 [광대]는 2막 짜리 짧은 오페라로 광대인 카니오와 그의 아내 네다 그리고 그녀의 정부 실비오 사이에 일어난 치정 사건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 카니오는 유랑극단의 우두머리인 광대이다. 그에게는 네다라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수군거린다. 그 말을 듣은 카니오는 자기는 연극에서는 바보 같은 남편 역할을 하지만 실제로 다른 남자가 네다에게 접근하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공언한다.

카니오의 의심대로 네다는 마을 주민 실비오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 이번 공연이 끝나면 실비오와 함께 도망칠 예정이다. 카니오는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고 있지만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서 네다에게 연인의 이름을 대라고 다그치지만 네다는 끝내 이름을 대지 않는다. 그러자 카니오는 칼로 네다를 위협한다. 그러다가 공연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광대의 애환을 그린 [의상을 입어라]를 부른다.

드디어 연극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네다와 카니오가 출연한 연극의 내용이 실제 그들이 처한 상황과 비슷하다. 네다가 맡은 컬럼비나 역은 남편을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역이다. 연극이 한참 진행되는 동안 카니오는 극 중 상황과 실제의 상황을 혼동한다. 그래서 컬럼비나가 정부 아르레치노에게 “나는 항상 당신의 것이예요.”라고 말하는 순간 이성을 잃고 만다.

‘팔리아치’의 카니오 역으로는 유명한 엔리코 카루소. <출처: Wikipedia>

카니오는 무대에 등장해서 자제심을 잃고 네다에게 애인의 이름을 말하라고 윽박지른다. 관객들은 카니오의 실감나는 연기에 감명을 받고 환호를 보낸다. 이때 카니오는 이미 이성을 완전히 잃은 상태다. 네다가 연인의 이름이 극중 인물인 아르레치노라고 하지만 분노한 카니오는 실제 연인의 이름을 대라고 다그친다. 그러자 네다는 자신은 절대로 그 이름을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외친다. 그때야 관객들은 이것이 연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분노한 카니오는 결국 칼로 네다를 찌른다. 그녀가 죽으면서 “도와줘요, 실비오”라고 외치자 그제야 실비오가 정부라는 것을 알고 실비오도 칼로 찔러 죽인다. 이렇게 두 사람을 죽인 카니오는 객석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희극은 끝났다.”

영화에서 카를로가 부르는 [의상을 입어라]는 광대의 애환을 노래한 것이다. 현실에서 아무리 슬픈 일을 겪어도 우스꽝스러운 의상을 입고, 관객을 웃겨야 하는 것이 광대의 운명이다. 카니오는 속으로 울면서도 겉으로는 웃어야 하는 광대의 운명을 처절하게 노래한다.

이제 공연이 시작된다.

의상을 입어라.

그리고 얼굴에 분칠을 해라.

관객은 돈 내고 왔으니 웃고 싶어 한다.

알레키노가 콜롬비나를 네게서 빼앗아 가더라도 웃어라,

광대여! 그러면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보낸다.

아픔과 눈물을 우스갯소리로 옮기고

흐느낌과 슬픔을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바꾸어라.

아! 웃어라! 광대여! 그대의 깨어진 사랑을!

네 가슴을 쓰라리게 하는

그 슬픔을 웃어라!

이렇게 오페라는 비극적이지만 영화에서 이 노래가 불려지는 상황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장면은 보는 이에게 진정한 희극을 맛보게 한다. [광대]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니오는 아내 네다와 그 정부 실비오를 칼로 찔러 죽인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어떻게 할까. 카를로는 샤워실 안에 있고, 그가 죽여야 할 연인들은 샤워실 밖에 있다. 이럴 땐 할 수 없다. 죽을 사람들이 알아서 칼을 맞는 수밖에. 그래서 네다 역과 실비오 역의 가수가 자진해서 샤워실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자 카를로가 샤워실 밖으로 손을 뻗어 차례로 이들을 칼로 찌른다. 바닥에 쓰러진 연인들을 보고 카를로가 비장하게 소리친다. “희극은 끝났다.” 그렇게 ‘진짜’ 희극이 끝났다.

글

진회숙 |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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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Wikipedia